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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한이 부모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황량한 거실에 혼자 남았다. 아.. 뭐지? 그가 나가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두통약을 먹어야겠다. 아까 진호 형이 사 왔었는데.
“형.”
“어, 어?”
서재방 문이 열렸다. 민이가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난 잊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웃으며 일어났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지? 좀 쉬어.. 아니.. 과일 좀 깎아줄까?”
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내 집도 아니고 과일도 깎을 줄 모르지만..
“형이나 깎아 먹어.”
무조건 거절할 민이를 알기 때문에.
예전에는 통통하고 작고 귀여웠는데 지금은 너무 커졌다. 민이가 초급 다닐 때쯤부터 집을 나왔기 때문에 가끔씩 볼 때마다 달라져 있는 모습에 항상 놀란다. 누가 봐도 모셔너라고 알아볼 것이다.
민이는 성큼성큼 다가와 아까 아빠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많이 닮은 부자(父子)다.
“엄마 울릴 거면 그냥 아이돌 관두지.”
“...미안. 내 잘못이라 할 말이 없네.”
“씨발, 그게 왜 형 잘못이야? 내가 형의 이런 점을 싫어하는 거야.”
그래도 욕은 안 했었는데 열다섯 살, 질풍노도의 시기라서 그런지 이제 막 욕을 한다. 그 착하고 귀여웠던 민이가 말이다. 대놓고 싫어한다는 얘기도 안 했었는데... 심장이 따끔따끔했다.
나는 다시 “미안.”이라고 중얼거리듯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지금 멤버들이 옆에 있었으면 이 광경을 흥미롭게 봤을 것이다. 멤버들은 동생에게 특히 더 소심해지는 나를 항상 신기해했다. 유진이 형도 나이 차이 나는 손윗형제가 약하게 구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재밌어 했던 게 기억난다.
동생과 대화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할 얘기도 없고. 계속 신경 쓰고 있어야 해서 머리도 아프다. 아마 민이도 이 상황이 어색하고 피곤할 텐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을 뿐 자리를 피하지는 않아서 나도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말을 붙여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오러 볼 스포츠에 관심은 이제 끊었어?”
“지금 나도 엄마 걱정시킨다고 뭐라 하는 거야?”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오러 스포츠 할 거야. 형이 아이돌 하고 싶은 것처럼 나는 오러볼이 하고 싶어.”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다..
의기소침해지는 내게 이번엔 민이가 말을 걸었다.
“계약 해지설 있던데 그룹 해체해?”
“모르겠어.. 멤버들이랑 상의를 해봐야지.”
“해체돼도 형이라면 불러주는 곳 많을 테니까 골라서 가겠네.”
민이의 태도가 삐딱했다. 민이는 항상 소울 유저인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모셔너인 게 부러운데.
“그렇지 않을 거야. 아무데도 날 안 부를 걸..”
“지금 장난해? 이미 눈독 들이고 접근하는 곳도 많을 텐데.”
민이는 코웃음을 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나에게 줬다.
“아까 형이랑 엄마아빠랑 얘기할 때 이 글 올라왔어.”
장문의 글이랑 사진이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첫 문장을 읽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자기는 전량회수 제품인 줄 모르고서 줬다던데. 골수팬이라고 앨범이랑 브로마이드 이것저것 찍어서 첨부했고.”
민이는 가볍게 얘기하고서 내게 글을 읽을 시간을 줬다.
사과주스를 줬던 어린 팬은, ‘사과’가 소울 유저에게 좋은 음식이라서 꼭 이라 오빠가 먹어야 한다고 한 것이며, 독성분이 검출된 제품이라는 걸 이번 뉴스 보고 처음 알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제품을 구입했던 곳은 공연장 근처 편의점이었는데, 점주가 전량 회수 조치하지 않았음을 시인했으며, 경찰에 신고했다고 했다. 마음대로 글을 올려 논란을 일으킨 오빠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팬은.. 내가 커버인 앨범들과 브로마이드 같은 것들을 첨부하면서 너무나 사랑하는 팬이라고 얘기했다.
이라 오빠를 힘들게 해서 너무너무 죄송하고, 무섭게 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라고.
댓글들에서는 열심히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팬을 욕하는 댓글도 많았다. 난 글을 읽으면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려버렸다.
“혀.. 아씨, 왜 울고 그래. 씨.. 울지 마.”
민이가 당황해하며 나를 달랬다. 어쩔 줄 몰라서 근처에 있는 아무거나 집어서 눈물을 닦으라고 줬는데, 아까 테이블을 닦았던 행주였다. 난 행주인 걸 알면서도 눈가를 닦았다.
“어, 형. 그거, 행ㅈ.. 형, 여기. 이걸로 닦아. 아씨.. 왜 이렇게 울어? 나이 먹어서. 여기, 휴지로 닦아. 그거 주고.. 아씨..”
행주임을 알아 챈 민이는 엄청 난처해하며 티슈를 주고 행주를 다시 받으려고 쩔쩔맸다. 하지만 난 행주에 얼굴을 묻고서 훌쩍거렸다.
내 팬이 너무 불쌍했다.
「오빠들 진짜 좋아해요.. 오늘 반 친구들이랑 학교 숙제 때메 우연히 왔는데 우연히 오빠들 와서 넘 좋아요.. 이거.. 오빠들 볼 줄 몰라서 급하게 사왔어요.. 변변찮은 거라 죄송해요..」
정말 귀여운 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과는 이라 오빠한테 좋은 거란 말이에요」
사과가 소울 푸드라는 걸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나 선의였는데, 실제로 독성이 검출된 제품이라는 걸 알고 놀랐을 것이다. 친오빠한테 사과주스를 버리려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지금도.. 이렇게 탓하는 댓글이 많이 달리는데, 나이도 어린 여자아이였는데, 상처받고 있지는 않을까?
이 팬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좋은 방법도 떠올랐다.
내게는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있었다.
“이제 그쳤어?”
“응, 알려줘서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난 인터넷 안 하니까 몰랐을 거야.”
“아니.. 뭐..”
내가 얼굴을 들자 민이가 곧바로 행주를 가져갔다. 손끝으로 행주를 잡고 주방에 버리고 돌아왔다. 나는 내 핸드폰으로 7개월 전 로그인 기록이 끝인 SNS 계정에 들어갔다.
“뭐하게? 글 올리게?”
“응.”
로그인하자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메시지들 때문에 폰이 계속 진동했다. 글도 못 쓸 정도로 계속 메시지가 들어왔다. 내가 우왕좌왕하자 민이가 한심한 듯 말했다.
“알람을 끄면 되잖아.”
끌 줄 모르는데.
“줘 봐.”
민이가 폰을 가져가서 알람을 해제하고 내게 다시 줬다.
“뭐라고 쓸 건데?”
“.......”
민이는 가볍게 물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무겁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뭐라고 써야할까.
마음 먹고 들어오긴 했지만 권수한과 상의한 후에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제이한테라도 먼저 물어보고..
나라면 분명히 말실수해버릴 것이다. 불에 기름 붓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감정적으로 섣불리 글을 쓴다면.
“뭘 고민해?”
“아니, 함부로 글 올려도 되나 싶어서.”
“왜 함부로야? 이거 형 일이잖아. 본인 일인데 왜 함부로래? 왜 이렇게 소심해졌어?”
그러게. 나 언제부터 이렇게 의존적이게 된 거지?
이건 내 일이다. 지금도 많은 부분을 권수한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SNS에 글 하나 올리는 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다. 나는 성인이고, 이 사단은 나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끝내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옆에서 민이가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나도 덩달아 한숨을 쉬며 화면을 껐다.
부모님과 민이는 근처 호텔에서 묵었다. 부모님은 나도 함께 자기를 은근히 바라셨지만 난 권수한의 침대가 너무 편해서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거절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권수한이 내 어깨를 감싸면서,
“오러 치유를 해야 해서 당분간 제 집에서 재우겠습니다. 치유를 받다보면 잠들고는 하더군요.”
말해준 덕분에 더 머무를 수 있게 됐다.
난 넓은 욕조에서 보글보글 거품을 줬다 폈다 장난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권수한은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날 보고는 보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이리오라고 손짓했다. 달려가 소파에 푹 몸을 기대고 앉았다.
“뛰지 마. 넘어진다.”
“안 넘어져요.”
“머리도 제대로 말려야지.”
권수한은 드라이기를 꺼내 부우웅 내 머리를 말려줬다. 난 점점 소파가 아니라 권수한 쪽으로 몸을 기댔다. 뭔가 노곤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말린 후에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넘겼다.
“‘라더기네 집’에서 글 보고 있었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라더기네 집이요?”
“네 유명한 팬페이지. 몰라?”
뭔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자 태블릿 PC 화면을 켜서 보여줬다. 난 얼굴만 쏙 내밀어서 화면을 봤다.
거의 대부분 ‘ㅠㅠㅠㅠㅠㅠㅠㅠㅠ’였다. 거의 다 울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권수한이 아무거나 하나를 터치했다. 화면 가득히 글자가 빼곡했는데, 너무 이라가 좋고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난 자세를 고쳐 앉고 태블릿 PC를 양손에 쥐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글을 읽어봤다.
권수한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페이지를 쓱쓱 넘겨 어떤 긴 제목 글을 터치했다.
‘나 라더기인데 지금까지 뭐한 거지 회의감 드는 거 이해해’라는 제목이었다.
그 제목을 보고 나는 살짝 겁이 났지만, 권수한이 보여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다 읽고 난 뒤에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눈물이라는 건 울어도 울어도 끝없이 샘솟는구나. 권수한이 손가락으로 내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 아예 울면서 권수한의 품에 안겼다. 넓은 품에 얼굴을 묻자 권수한은 잠깐 놀랐다가 곧 침착하게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데.
너무 고마워요.
그렇게 말을 전하고 싶었다. 너무 고맙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좀 진정한 후에는 홈페이지의 모든 글을 다 읽어볼 생각으로 탐독했다. 솔직히 너무 많아서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댓글이 많이 달린 건 대부분 다 읽었다. 권수한도 옆에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읽었다. 재미있는 사진이나 글들도 얼마나 많던지. ‘이라 겜존못부심 있는 라더기들 들어와봐 ㅋㅋㅋ’라는 글에는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게임 중 실수한 순간들을 모아놓은 영상이 있었다. 10분짜리였는데 나는 다 안 보려고 했지만 권수한이 빼앗아 가서 끝까지 다 봤다. 권수한은 입을 막고 웃고 있었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대부분의 글들을 본 다음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보았다.
엔돌핀 공식 팬카페에 들어갔다.
여전히 ‘to 고유진’ 게시판 옆에는 new 표시가 떠 있었다. 난 다른 게시판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to 이라’
수많은 글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거슬러, 거슬러 올라갔다. 글이 너무 많아서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기가 한참 걸렸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팬들은.. 나는 읽지도 않을 편지글을 이렇게 열심히 써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을 정도로..
“이라, 그만 울어라. 이러다 탈수 증상 오겠군.”
“...너무, 불쌍하잖아요. 너무..”
이게 뭐냐고.
이렇게 옛날부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는 몰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를 향한 좋아한다는 편지가 가끔씩 올라온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싫어하는 글을 읽을까봐 겁이 나서 아예 들어오지 않았고, 인터넷을 안 한다는 걸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그 사이에도 이렇게 열심히...
“이런.. 너무 우는데.”
내가 펑펑 울자 걱정이 됐던 건지 혀를 차며 오러를 흘려보내줬다. 난 권수한의 품에 아까처럼 파고들었다. 너무 서러웠다. 사과주스를 준 팬도 불쌍하고, 편지를 써주는 팬들도 너무 불쌍하고, 하나도 읽지 못한 나도 너무 불쌍했다.
이런 곳들을 알았다면 내 8개월은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런 글들을 읽었더라면.
권수한이 나를 힘주어 껴안았다. 나도 그의 품에서 맘 놓고 울었다.
나는 팬들과 나의 어긋난 시간이 서러워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좀 알려줬더라면... 원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탓인 걸 안다. 내가 외면하고 회피한 탓이다.
팬들은 제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참을 울고 서러움이 지나가자 심장이 뛰었다. 가슴 속에서 거센 파도가 일었다. 나는 이제 일어나야 한다. 이제는, 이제는 내가 그들을 위해서.
나는 권수한을 올려다보았다. 미간에 잔뜩 주름이 져 있는 권수한은 내 퉁퉁 부었을 눈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나는 그에게 거의 껴 안겨 있었다.
“드디어 울음을 그쳤군. 실컷 울라고 하고 싶지만, 너무 우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아.”
권수한은 ‘내 건강에도.’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편한 자세로 고쳐 앉고, 그의 상의로 씩씩하게 마저 눈물을 닦았다.
나는 지금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내 생각 읽었어요?”
“예전에도 말했지만,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 전해져 와.”
권수한은 좁혔던 미간을 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얼핏 보면 서늘하고 감정 없는 얼굴이지만, 나를 향한 시선에 따뜻한 온기가 있음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충분한 답이 되었다.
나는 권수한의 허락이 아니라 동의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주위에서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는 믿음직한 어른의 동의를.
나는 내 SNS 계정에 들어가서 글쓰기 칸을 터치했다.
@LEERA_ENDORPHIN
[안녕하세요 이라입니다. 오랜만이에요. 팬분들께서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씁니다. 그동안 팬분들의 사랑을 믿지 않은 제게 오히려 미안하다 하시는 분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게 선물을 주실 때 진심으로 수줍어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요. 너무 오래 제자리를 떠나있어서 죄송해요. 사과주스를 주신 팬분께서도 의심했던 걸 용서해주세요. 팬분도 저도 운이 조금 없었어요. 이제는 우리 모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괜찮아요. 여러분 덕분이에요 앞으로 자주 소식 전할게요.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