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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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입니다)

 “이렇게 꽉 조였으면 말을 했어야지. 아팠겠군.”

 “아뇨, 별로..”

 “자국이 제법 오래 남겠는데.”

 “자국 핑계로 내 손목 쓰다듬는 거 아니고요?”

 권수한의 손길에 일순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곧바로 문지르던 손길을 뗐다. 내 어깨에 올려놨던 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다.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해요. 나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날 좋아해요, 그럼?”

 “.......”

 “말 못하면서.”

 난 서운함 반 장난 반으로 삐진 척 말을 이었다.

 “어댑터 능력으로 내가 당신을 안 좋아하게 만들면 안 돼요?”

 “이라. 정신 지배는 그렇게 가볍게 말할 주제가 아니야.”

 “알아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장난인데.”

 “어디 가서 장난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어떤 어댑터를 만나더라도 무조건 조심하고, 경계하고, 피해 다녀야 해. 절대 둘만 있으면 안 된다.”

 권수한은 무슨 어댑터들이 잠재적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연약하고 가녀린 동생이고 말이다.

 “넌 어댑터를 좀 두려워할 필요가 있어. 소울 오러 유저는 어댑터와 반드시 거리를 둬야 해.”

 “..혹시 그래서 날 거절한 거예요? 소울러와 어댑터라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주 잠깐이었고 그는 냉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대답해. 앞으로 어떤 어댑터를 마주치든 경계부터 하겠다고.”

 어댑터의 무서운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 마음을 거절한 거라면..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하지만 진실은, 그냥 내가 사랑을 받기엔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서겠지.

 “생각해볼게요.”

 난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 권수한은 잠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곧 잔소리는 그만두기로 했는지, 아니면 내가 또 곤란한 질문을 던질까봐 걱정됐던 건지 앞서 걸었다. 검사실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모습은 여전히 자상하고 다정한데, 그 태도가 동정심으로 비롯되었다는 점은 날 슬프게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도 우리는 연구원들에게 둘러 싸여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느라 한 시간 뒤에야 센터를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권수한이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오는 동안 나는 센터 내 광장에서 기다렸다.

 붉게 물든 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은은한 바람 속에 노을의 향기가 퍼졌다. 머리칼이 살랑거렸고, 구름 틈 사이로 붉은 햇빛이 쏟아지며 내 볼을 간지럽혔다.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노을을 구경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문득 나는 권수한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수한의 차는 곧 주차장을 빠져나와 내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권수한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서 타라고 눈짓했다.

 “권수한 씨.”

 “...왜.”

 그는 문을 잡은 채로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진작 했어야 했던 말을 전했다.

 “고마워요.”

 “.......”

 “다 권수한 씨 덕분이에요. 정말로.. 고마워요.”

 “아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는 것뿐이야.”

 권수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발갛게 노을이 이는 하늘의 역광을 받으며 미소 짓는 모습은 너무나 근사해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너는 앞으로 계속 행복해하면 돼. 늘 그렇게 웃을 수 있도록 내가 뒤에서 도와줄 테니까.”

 ...내 심장은 3초 만에 다시 살아났다. 왜 하필 ‘뒤에서’야? 옆에서 도와주면 안 되냐고.

 나는 한숨을 쉬며 권수한의 차에 올라탔다.

 범인이 감옥에 들어간 날, 나는 아빠랑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하고 거하게 체해버리고 말았다. 아빠가 손가락을 따줬지만 계속 체기가 있었다. 그래도 집에 있는 민이, 엄마랑 영상 통화도 하면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아빠는 넌지시 호텔에서 자고 가면 어떻겠느냐 했는데, 그때 진짜 귀신 같이 권수한이 호텔방문을 두드리며 나타났다.

 “시간이 늦었어. 가자. 아버님, 이라도 피곤할 테니 저녁은 제 집에서 먹이겠습니다.”

 “아니.. 그, 저녁은 나랑 같이 먹을까 하는데.”

 “외식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지금도 얼굴색을 보니 체한 것 같군요.”

 “크흠.. 내가 손가락도 따줬어요.”

 그러자 권수한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재빠르게 나한테 다가와 양손을 들어 살폈다. 손가락 다섯 개에 아주 작은 흔적을 발견한 그는 아빠를 차갑게 노려봤다.

 “왜 애 체하게 만들어서 손가락에 이런 상처를 냅니까?”

 “체할 줄은 몰랐지.. 이라도 잘 먹었고.”

 “오늘 같은 날이면 당연히 체합니다.”

 “거 참, 아무튼 애도 체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재우면 좋겠는데.”

 “이라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루도 안 거스르고 매일 말입니다.”

 권수한의 박력은 진짜 얼음장 같은 차가운 박력이라서 아빠가 쩔쩔맸다. 나는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권수한의 팔에 매달렸다.

 “가요, 형. 안 그래도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러자 권수한의 빙하기 같은 표정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쳐지나갔는데, 내 직감이 말해줬다.

 방금 그 감정은 안도감이라고.

 집에 온 뒤에 씻고 바로 침실에 들어가자 권수한이 따라왔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건강식이 아니라도 되니까. 네 저녁 먹이겠다고 아버님과 약속했다.”

 난 지금 뭘 먹어도 체할 것 같았다. 고개를 젓자 권수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불편한 거면 나가 있을 테니까 제발 밥 좀 먹어. 밥을 먹어야 약도 먹지.”

 “약 안 먹을래요. 권수한 씨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아까 아빠랑 먹은 게 소화 안 돼서 그래요.”

 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며 대꾸했다. 권수한은 말없이 날 쳐다보았다.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모로 누웠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반항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속이 안 좋은데.. 혼내려나? 혼내려는 걸까. 눈을 질끈 감았다.

 “.......”

 권수한은 이불을 끌어다 가슴께까지 덮어주었다. 상냥한 행동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지끈거렸다. 이러니 내가 착각을 안 하냐고..

 난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눈을 깜박이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냉정한 얼굴에 떠오른 걱정이 날 만족케 한다. 날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라야. 더 이상 범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

 “생각 안 해요.. 잊고 있었는데.”

 권수한은 내게 손을 뻗었다. 아, 피해야 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이마를 부드럽게 감쌌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네가 거짓말하면 알 수 있다고..

 권수한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의 손에 어린동물처럼 얼굴을 비볐다.

 수갑을 차고 비틀거리며 걷는 그 사람의 뒷모습은 무척 왜소했다.

 그 뒤쪽에서는 우리 부모님보다 좀 더 나이가 드신 그녀의 부모님이 오열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남동생은 새빨개져 퉁퉁 부은 눈가였는데, 나를 발견하고서는 매섭게 노려보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러 유저 보호법에 의해 범인은 10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모범수 생활을 이어갈 경우 최대 3년까지 단축될 수 있다고 했다. 교도소를 나온 그녀는 내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녀가 들어가 있는 3년 동안도 나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밤길을 걸으면 범인의 가족이 나타나 염산을 뿌리며 보복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다른 그녀가 팬들 사이에 섞여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를 내밀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마 나는 평생 이런 두려움 속에 살게 되겠지. 평생 모르는 사람이 준 음식은 먹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더라도, 그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 하더라도. 난 아마 평생을 시달리게 될 텐데. 그럼 징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은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는다 해도 내게 새겨진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데.

  “이라야.”

 권수한은 내 복잡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나무라는 투로 이름을 불렀다.

 “이제 네 앞길만 생각해. 이미 끝난 일을 계속 떠올리지 마.”

 “알았어요. 노력 해볼게요.”

 “계속 속이 안 좋으면 소화제라도 줄까?”

 “아뇨. 그냥 이렇게 쓰다듬어주세요.”

 그가 금방이라도 손을 떼고 일어날 것 같아서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옆으로 굴려 그의 손바닥에 이마를 더 가까이 갖다 붙였다.

 “열은 안 나는군. 체하기만 했나.”

 “.......”

 “점점 따뜻해지는데?”

 난 내 볼 주위부터 화끈거림이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보면 권수한은 내 마음을 거절해놓고 스킨십은 너무 자유롭게 하고 있다. 완전 나쁜 남자야. 그래서 좋다.

 “배도 쓰다듬어주세요.”

 “...그건 안 돼.”

 “왜요... 쓰다듬어주세여..”

 애교를 부렸지만 묵언으로 거절당했다. 권수한은 다른 쪽 손으로 내 가슴을 덮고 있는 이불 위를 아기 대하듯이 토닥였다. 꼭 재우려는 것처럼.

 “기분 좋아요..”

 “.......”

 “동정심을 이용해서 미안해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권수한의 손길이 잠깐 멈췄다. 그는 방금 이해 못할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황당한 표정이었다.

 “동정심이라니..?”

 “날 동정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거잖아요.”

 나는 얼어붙은 얼굴을 보며 눈을 갸름하게 떴다.

 “아니에요? 그럼 혹시 날 좋아해요? 좋아해서 잘 대해주는 거예요?”

 “...물론 너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런 감정은 아니고.”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거두어가지는 않았다.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감이 왔다. 이 감은 지난번부터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직감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시도해 봤다.

 “미안해요. 나 같은 걸 좋아할 리가 없는데.”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네 자신을 비하하지 말라고..”

 이것 봐. 정확히 먹혀들기에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으..

 너무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흔들렸다. 권수한은 그 와중에도 얼른 내 허리를 단단하게 잡으며 부축했다. 난 손을 다시 거두지 못하도록 그의 팔에 등을 기댔다.

 “괜찮아?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권수한 씨, 있잖아요.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도 괜찮아요?”

 나는 권수한의 품 안에서 프로 아이돌로서의 연구물 중 가장 귀여워 보일만한 각도로 얼굴을 기울이며 올려다봤다.

 “다른 사람이 머리 쓰다듬어주고, 이렇게 부축도 해주고, 품에 안아주고, 막 입 맞추고, 같이 자고, 그 사람 집에 들어가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그 사람 품에 안겨서 귀엽게 굴어도 괜찮겠어요?”

 내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하나하나 얘기할수록 권수한의 눈썹이 씰룩이면서 몹시 불만어린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표정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감정과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내가 어떻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 너는 네가 진정으로 누굴 좋아하는 지나 신경 써.”

 너무 배려 있고 따뜻하고 내 생각만 해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 내 고백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내 감이 틀린 걸까?

 “난 당신을 좋아하는데요. 진정으로..”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 어댑터에게 갖는 호감일 뿐이야.”

 “권수한 씨가 아무리 어댑터라도..”

 나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보다 내 감정을 잘 알까요?”

 그러자 권수한은 입을 다물었다. 여유를 잃은 얼굴에 내가 더 놀랐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정곡을 찌른 거죠?

 그렇죠? 맞죠? 지금 당신은 정곡이 찔렸죠?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혹시 다른 대답이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입을 열지 못했다. 금세 냉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결국 회피를 선택했다.

 “피곤한데 내가 너무 오래 들어와 있었군. 그만 자. 아니면 뭐 먹고 잘래?”

 “아저씨, 너무 티 나게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

 권수한은 내 불만은 아랑곳 않고 날 조심스럽게 눕혔다. 내가 시선 공격을 하는 동안 이불을 다시 가슴께로 올려주고, 내 양손은 윗배 위에 나란히 포개놓았다. 옆에 내팽개친 핸드폰도 고이 들어서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잘 자, 이라야.”

 권수한은 내 눈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혼자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나갔다.

 불 꺼진 방 안에서 나는 눈만 멀뚱멀뚱 뜬 채 한참을 깨있었다.

 뭐냐고.. 잠이 오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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