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저걸 타고 집에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던 나인은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
‘맞다! 왜 아까는 이 생각을 가장 먼저 못 했지?’
그는 허둥거리며 주머니에서 귀환 스크롤을 꺼냈다. 도착 좌표가 아카데미 정문 앞으로 잡혀 있는 고급 이동 스크롤이었다. 비록 심한 울렁거림과 미약한 두통을 동반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가끔 사용하곤 했던 마도구였다.
“제발. 제발 작동해라…!”
나인은 듣는 대상 없는 소원을 중얼거리며 손에 힘을 주어 스크롤을 북 찢었다.
그러나 수많은 마법 수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마도구는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길게 찢긴 종이 쪼가리가 된 것이다.
“…….”
하기야 일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쉽게 풀릴 리가 없다. 나인은 혀를 차며 쓸모없어진 스크롤을 구겨 창가 쪽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게 뭐야.
정말이지 울고 싶었지만 한번 울면 멈출 자신이 없었다. 한번 눈물이 터졌다가는 밤새 질질 짜게 될지도 몰라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힘을 준 턱이 호두처럼 우둘투둘해졌다.
그는 비좁은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째. 여기서는 나와 같은 사람을 공간미아라는 이름으로 정의한다.’
정의가 가능한 단어가 있다는 건 자신 이전에도 같은 처지였던 자들이 존재했단 뜻이다. 실제로도 그러하다고 했고.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무사히 집에 돌아간 사람도 있지 않을까?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둘째. 수호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간 것 같으며 귀환 스크롤도 작동되지 않는다.’
귀환 스크롤 사용 불가. 그 말은 곧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다. 스크롤이 불량이라 아예 발동조차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거리상의 문제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불량일 가능성보다는 좌표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 효력이 없는 게 아닌가 싶기는 했다. 나인은 손톱을 까득 씹었다.
‘셋째. 그렇다면 다른 마도구들도 여기서는 효과가 없을까?’
다행히 아직 아카데미에서의 짐을 모두 풀지 않고 길을 나선 상태라 나인이 현재 공간 확장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는 마도구의 수는 적지 않았다. 실험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작은 방에서 대형 마법이 담겨 있는 마도구를 마음대로 발동시켰다가는 방 꼴이 온통 쑥대밭이 될 것이다. 장소가 알맞지 않다.
‘일단 오늘은 좀 쉴까.’
졸려. 나인은 늘어지게 누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안전하다. 그러니 일단 좀 쉬어 체력부터 회복하고 조금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 *
-제목: 오늘 러스티 스퀘어에 사람 많던데 무슨 일 있는지 아시는분?
궁금해여
[댓글]
-구급차도 몇 대 서있던데 사고났나
-아까 차타고 가면서 보니까 사람 쓰러져 있는 것 같던데
⤷ㄷㄷ
-님들아 재난문자 좀 보세요... 9시부터 문자 와있었음;
⤷아 재난문자 꺼두지 말라고ㅋㅋㅋ 그거 위기 불감증임. 그러다 진짜 큰일 났을 때 어쩌려고 그럼??
⤷별것도 아닌 걸로 자꾸 알림뜨게 하니까 그렇죠ㅠㅠ
⤷⤷아닙니다.. 당장 주변에 배치된 각성자들만 없어도 진짜 큰 재난으로 번지는거 순식간입니다....;;;
⤷⤷근데 게이트도 이제는 일상 아닌가요? 십 년 전에야 재난이었겠지만 지금은 재난이라기보단;; 이젠 인명사고도 거의 없고ㅠㅠ 솔직히 그렇게 위험한건지도 모르겠어요…
-뭐야 ㄹㅇ 별 거 아니네ㅋㅋㅋ
-오늘 애쉬 왔다고 그러던데 보신분
⤷ㅁㅊ 학교째고 보러갈걸
⤷아 회사 바로 앞인데 번번이 놓치네 사장 씨발롬아 뒤져
⤷⤷왜캐화낫어
⤷⤷그럼 회산데 화 안나게 생겼냐? 사장 썅놈새끼 앵간히 빽빽대네 저러니까 머리가 다 도망가지 아오 ㅆㅂ.,, 님들은 회사같은거 다니지 마세요 체질이란게 바뀝니다. 사직서쓰러감 ㅂㅇ
[각성자 관리 센터]
금일 08시 56분부로 11지구 지역에 통로형 게이트 폐쇄 경보 발령. 출동한 요원들이 현장을 수습 중입니다. 도로에서 낯선 물질을 발견하시더라도 부디 접촉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게이트 물질 접촉 시 신고 전화는 7711
* * *
나인은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생각했는데 벌써 창밖에 새로운 해가 밝아 있었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무겁기만 했다.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모르는 자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나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이 덜 깬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어머. 벌써 일어나셨네요?”
“…….”
목소리에 나인은 뒤늦게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예고도 없이 방에 쳐들어온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욕실에 밀어 넣었다. 그들의 손에 밀려 얼떨결에 욕실에 들어온 나인은 또다시 당황했다.
욕실은 미리 물을 받아 둔 욕조 대신에 유리로 된 협소한 공간만 준비되어 있었다. 황당하게도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불청객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손님방은 코딱지만 하고 욕조조차 없는 욕실을 준비해 주는 걸 보니 이 저택의 주인이 생각보다 넉넉한 형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이만한 게 어디인가?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어.’
몸을 누일 만한 곳이 준비된 데다 씻을 수 있다는 것조차 지금으로서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어제 보다 잠들었던 책에서 봤던 내용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도기로 된 항아리는 용변을 처리하는 용도의 기구였다. 이 속의 물은 마시는 게 아니다.
…그 얘기까지 써 둔 걸 보니 누군가가 이미 시도해 봤다는 소리였다. 나인은 한참 변기 속을 들여다보다 속이 조금 안 좋아져 시선을 돌렸다.
수도꼭지라 불리는 은색 막대를 위로 젖히면 이곳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옷을 벗지도 않고 유리 부스 안에서 온도 조절 장치를 만지작대다 보니 갑자기 천장에 달린 샤워기 헤드에서 물이 쏟아졌다.
“으악!”
“괜찮으신가요?”
물 온도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더니 문밖에서 도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해결할 수 있었기에 나인은 피부에 달라붙은 옷을 벗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런 마법은 아직 보급화되지 않은 건지, 수동으로 작동하는 수온 조절 장치는 정말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중간이랄 게 없었다. 조금이라도 일정 선을 넘어가면 익어 버릴 것처럼 뜨거운 물이 쏟아졌고, 놀라서 장치의 손잡이를 반대쪽으로 돌리면 얼음물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소한 것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괜히 서러웠다. 나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샤워기와 의미 없는 기 싸움을 시작했다.
차갑고 뜨거운 물에 번갈아 담금질되며 나인은 자신이 만약 검이었더라면 무척 단단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부가 발갛게 익은 나인이 겨우겨우 잠옷처럼 생긴 낯선 옷을 꿰어 입고 나오자 한 남자가 나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이 공간미아입니까?”
“…….”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안내를 맡은 통역 에스퍼 케드릭입니다.”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그 손을 내려다보던 나인이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아 악수를 했다.
“나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예?”
“그게 제 이름이에요. 나인 엘로윈. 그리고 통역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말이…… 통하는군요.”
벙찐 케드릭은 나인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곳에 서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분이 공간미아가 맞습니까?”
“음, 네…. 배정된 방은 여기가 맞는데.”
여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곤란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간미아가 어째서 통역할 필요도 없이 유창하게 언어 구사를 하고 있는가…. 두 사람은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용의 권능을 빌렸습니다.”
나인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예?”
“아.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용언이에요. 용은 고대 마법의 근원이자 초월자라고도 불리는 존재거든요.”
“……?”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얼굴을 보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이 사람들 뭐지. 어린애도 알 만한 기본적인 상식을 어째서 모르고 있는 거야? 나인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소리가 아닌 뜻의 형태로 전달되기에 용언은 모든 언어를 관통하죠. 초월자의 권능 아래서는 무슨 언어든 제대로 된 체계만 존재한다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
저게 무슨 소리야. 케드릭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청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저 말 알아듣겠습니까? 그는 나인의 뒤에 서 있는 여자와 무언의 시선을 교환했다. 여자 역시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엥, 저도 몰라요.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것도 잠시, 나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며 물었다.
“용언이라고. ……이게 이해가 안 가요?”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쉬운 말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지은 표정이었다. 나인은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 학부생들을 대하던 교수님들 심정이 이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