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20)화 (20/63)

#20

‘쟤 왜 저래?’

늘 무슨 말을 하든 미동 없이 무표정하던 애쉬는 오늘따라 너무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낯선 모습으로 돌변한 것은 공간미아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나 지금 어때?”

“……?”

갑자기 머리는 왜 정리하는거지?

“옷 갈아입고 가야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애쉬는 화병에 든 꽃들 중 가장 크고 싱싱해 보이는 것을 빼 들었다. 코 아래 가져다 대고 꽃향기를 깊이 들이마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다니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몇 초 되지 않아 다시 다니엘의 눈앞에 나타난 애쉬가 민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발.”

그는 침대 아래 넣어 두었던 본인의 신발에 발을 꿰어 넣고는 다시 이능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그가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다니엘은 구겨진 침대 시트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뭐가 그리 급하다고.”

전혀 멀지 않은 거리다. 조금만 걸어가면 될 거, 드러누웠다 깬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능 남용을 하고 난리야? 저러다 또 폭주 증상으로 고생하려고…. 다니엘은 황당한 어조로 투덜거리며 빈 침대 위에 놓인 차트를 집어 들었다.

내버려두자. 애쉬를 이해하려 드는 것은 애당초 포기한 지 오래였다.

* * *

나인은 진료 대기자 명단을 한 차례 점검했다. 저녁때인 데다 오늘 오후 종료된 훈련 일정이 여럿 겹쳐 그런지 아까 전보다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그는 소피아가 놓고 간 샌드위치를 힐긋거리며 간식을 먹어도 좋을 타이밍을 호시탐탐 재고 있었다.

정신계 에스퍼인 소피아는 이곳 6층에서 정신 건강으로 고민하는 각성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문제로 병동을 찾는 사람들은 머리 위에 안개가 띠처럼 빙 둘러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증상을 옮기기도 하는데 다행히 소피아는 환자들의 상태에 별 영향은 받지 않는 듯했다. 천직이었다.

그녀와는 심부름을 하다 마주쳐서 친해졌고, 소피아는 가끔 나인을 위해 본인 몫으로 산 간식거리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녀의 입맛이 까다로운 덕에 나인은 소피아가 준 거라면 가리지도 않고 입에 넣고부터 봤다.

‘좀 덜 바빠지면 먹어야지.’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책상 아래서 발을 까딱거렸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인뿐만 아니라 소파에 앉아 진료 차례를 기다리던 에스퍼도, 다른 접수처 직원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입구의 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나인도 아는 사람이었다.

“……?”

검은 후드를 머리까지 푹 눌러쓰고 있음에도 입체적인 이목구비는 숨길 수가 없었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괜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막 병동에 들어서려던 환자도 애쉬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절뚝이는 다리를 무척 빠르게 움직여 뒤돌아 뛰어간다. 기적이다. 기적이 따로 없었다.

‘왜들 저래?’

나인은 소란스러운 광경에 당황해 눈만 끔뻑였다. 한편, 남자는 두리번대다 나인을 발견하자마자 방향을 틀어 그에게로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란을 몰고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인은 순간 말문이 막혀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버벅거렸다.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애쉬 쪽이었다.

“안녕.”

약간 쉰 듯 반쯤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인은 놀란 눈만 끔뻑였다. 그에게서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애쉬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이며 말했다.

“음, 안 들리나? 사람이 인사를 하잖아….”

“아, 안녕하세요.”

나인은 깜짝 놀라 얼떨결에 대답했다. 집요한 시선으로 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아, 그랬지…. 우리 처음 보는 건가요?”

애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나인의 가슴에 달린 은색 명찰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어 말했다.

“그게 이름?”

“네?”

“이름이 나인이냐고 물었어요.”

남자가 눈을 접어 부드럽게 웃는다. 입꼬리가 그린 듯이 올라갔다. 반쯤 넋이 나가있던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그렇게 부르면 돼요?”

“…….”

“나인?”

“예?”

사실 나인은 방금 전까지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이 사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나인은 아연실색했다. 남자의 온몸이 새까맣다. 다른 사람은 못 볼지도 모르는 죽음의 기운이 남자의 곁에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었다. 일주일 만에 의식을 차린 지금도 그렇게 멀쩡한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검은 안개는 나인에게 환자가 다친 부분을 알려 주는 단서기도 했지만, 저렇게 짙은 건 죽음의 기운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조만간 돌연사할지도 모른다. 검은 안개가 남자를 물고 늘어지듯 아주 전신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인은 맹세코, 이런 광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렇게 짙고 진득한 검은색이라니…. 애쉬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 사실을 남자에게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문 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꽃 보냈던데.”

“아, 네….”

그를 둘러싼 검은 안개에 적응하고 나니 이제야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 하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인과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애쉬가 말했다.

“고마워요.”

“…….”

웃음 하나에 분위기가 확 전환되는 듯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던 때에는 마냥 사나운 이미지라고만 생각했는데 눈을 접어 웃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한결 나긋해진 것이다. 확실히 사진보다는 눈앞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실물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어째서지?’

나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애쉬에 대한 소문은 온통 엉망인 것들뿐이었다. 어쩐지 그와 어울려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설마 갑자기 나랑 얽힐 일이 있겠어?’

그냥 스쳐 지나갈 사이에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남자의 쪽에서 자신과 친해지려고 할 리 없다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에 대한 악평들과 별개로 나인은 애쉬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다. 나인도 제대로 된 눈이 달린 사람이었기에 예쁘고 잘생긴 걸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한때 나인의 룸메이트는 나인을 양아치 수집가라고 불렀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날티 나는 인상의 친구들만 주변에 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외모와 성격이 불일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인간에게 유해한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 덕에 나인은 늘 본의 아니게 사건의 중심에서 발견되고는 했다.

“아, 아뇨. 저야말로 감사하죠.”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나인은 뒤늦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그에게 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직접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애쉬는 그런 나인을 관찰하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 나인은 그런 그의 눈과 시선을 똑바로 맞추는 게 퍽 어려웠다.

“나야말로 늦게 찾아내서 미안해요. 힘들었죠?”

사과할 일도 아닐 텐데 사과는 그쪽에서 돌아왔다. 그런가. 내가 힘들었던가? 사실 나인은 그 당시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착한데? 왜 그런 소문이 났지?’

생긴 것과 다르게 눈앞의 남자는 상당히 다정한 성격인 것 같았다. 나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인의 시선은 남자의 얼굴에 머무르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와 그의 팔뚝에 머물렀다. 팔뚝을 타고 뱀처럼 스르륵 내려온 검은 안개가 그의 손등 위로 엷게 퍼진다. 저렇게 선명한 검은 안개는 처음 본다. 그런데도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걸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안타깝기는 한데….’

자신이 뭔가 해 줄 것은 없었기 때문에 괜히 나서지는 않았다.

꼬르륵. 그때 선명한 천둥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나인은 그 소리가 남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가 들린 순간 애쉬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민망할까 봐 모른 체를 해 줄까 싶었지만….

“……저기, 에스퍼님.”

“음?”

“배고프시면 이거라도 드실래요?”

나인은 소피아에게 받은 샌드위치를 들고 내밀었다. 자신보다는 지금 당장 배가 고픈 사람이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애쉬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애쉬예요.”

“네?”

“애쉬라고요. 내 이름.”

“…….”

“에스퍼님이나 저기요 같은 게 아니란 소리예요.”

애쉬는 부러진 팔로 샌드위치를 바꿔 들고는 옷에 제 손을 슬쩍 닦아 내밀었다. 유독 진득한 시선이 그림자처럼 나인에게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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