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21)화 (21/63)

#21

‘아. 통성명을 하자는 거구나!’

나인은 제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멍하게 보고 있다 뒤늦게 맞잡았다.

“나, 나인이에요.”

허둥거리며 손을 내밀자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나인의 손을 꽉 쥐어 왔다. 반가움의 표시치고는 뼈가 으스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순간 나인은 깜짝 놀라 입을 작게 벌려 신음했다.

“나인….”

그가 입 안에서 제 이름을 중얼거렸다. 딱히 그의 발음이 특별한 것도 아닌데 왜인지 애쉬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은 유독 특별한 느낌을 자아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기가 튀는 듯 찌릿한 느낌이 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 손은 안 놔주는 거지.’

나인은 조금 당황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을 의식한 애쉬가 손을 놓아주기 전까지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애쉬는 그대로 한참 동안, 아주 뚫어져라 나인을 바라보았다. 어색함에 나인의 시선만 허공을 배회하며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그동안 내 걱정 많이 했다면서요? 매일 전화했다고 들었어요.”

“……!”

나인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 송합니다.”

“응? 뭐가 미안해요?”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요. 깨어나신 걸 알았더라면 제가 갔을 텐데….”

아. 애쉬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픽 웃었다.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그건 됐고…. 당신, 왜 여기서 일해요?”

“네?”

애쉬는 손가락으로 나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하는 곳의 끝에는 은색 명찰이 달려 있었다.

“당신, 각성자 아닌가요?”

아, 그 얘기. 나인은 그제야 애쉬의 말뜻을 깨달았다. 은색 명찰은 각성자가 아닌 직원들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자가 어디서 자신의 형질 검사 결과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당신이 센터에 남은 걸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에이, 아니에요.”

나인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해도 애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검사는 해 봤나요? 나도 느끼는 걸 남들이라고 못 알아챌 리가 없는데.”

“해 봤습니다. 해 봤는데…… 석연치가 않아서요.”

“음?”

“그게, 남들은 저더러 폐급이라고까지 하거든요.”

나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애쉬는 농담에 웃기는커녕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곧장 되물었다.

“누가요?”

“…….”

“누가 그래요. 당신이 폐급이라고.”

남자의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는 있는데…… 왜 불쾌한 기색이 묻어나지? 잠시 생각하며 그와 시선을 맞추던 나인은, 애쉬의 눈이 전혀 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냥 분위기 풀 겸 농담 좀 해 본 건데…. 나인은 조금 당황했다.

“나인.”

“넵.”

긴장감 탓에 지나치게 빠릿하게 대답한 나인을 보고, 남자는 그제야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이 칭찬 아닌 건 알죠?”

“……당연히 알죠. 욕이잖아요.”

“알고 있네요. 그런데도….”

“듣는 제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괜찮습니다. 농담으로 한 말인 걸 아니까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끊기 위해 대충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인은 폐급이란 말에 그리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뭐.”

“……”

애쉬는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해 보였지만 더 이상 말을 덧붙일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인은 제 한마디에서 불거진 이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감동했다. 남자는 이렇게 사소한 단어선택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 줄 정도로 세심한 사람인 것이다.

“나인, 당신은 상냥하네요. 필요 이상으로.”

제가 해야 할 말이 거꾸로 돌아왔다.

“그딴 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변호할 필요는 없을텐데….”

애쉬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차차 처리하고.”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키가 훤칠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아니, 애초부터 애쉬가 병동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일어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더 움찔하며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으니까.

“이거 받아요.”

탁. 그는 주머니를 뒤져 나온 카드를 나인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에스퍼 등록증이었다. 나인은 시선을 내려 등록증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앞면에 A등급 에스퍼, 애쉬라고 쓰인 등록증의 뒷면은 결제가 되도록 금속 칩이 심어져 있고 바코드까지 찍혀 있었다.

“이건 왜…?”

“식사 뺏은 게 미안해서요.”

그는 방금 전 나인에게 받은 샌드위치를 슬쩍 들어보였다.

“받은 걸 다시 돌려주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보답은 하고 싶네요. 오늘 일 끝나면 그걸로 아무거나 사 먹어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나인은 숨을 집어삼켰다. 에스퍼들의 카드를 갈취해 식권을 사는 것은 나인의 소소한 취미였지만, 초면인 에스퍼의 카드까지 냉큼 받을 정도로 그가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남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걸 왜 주지?

나인은 그저 의아했다.

“가격은 상관없으니 이왕이면 이런 간식류 말고 제대로 된 식사로 챙겨 먹어요.”

“아, 아뇨!”

나인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건 어차피 끼니 때울 식사도 아니었고 그러실 필요는….”

“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조는 단호했다. 나인은 등록증을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럼.”

분위기를 보니 슬슬 자리를 뜰 모양이다. 그를 이대로 허무하게 돌려보내도 되는 건가 싶었던 나인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

“에스퍼님. 그럼 혹시…… 저도 곧 퇴근하는데 식사 같이하실래요?”

나름 용기 내어 한 제안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애쉬는 어쩐지 입만 달싹이며 대답을 미루다, 손으로 후드를 코까지 푹 눌러쓴 채로 중얼거렸다.

“나중에요.”

“…….”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에 나인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역시 주제넘었나?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민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덧붙이는데 이건 같이 식사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

“제가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안 씻어서 그래요….”

“……아.”

“꼴이 영 엉망이죠?”

애쉬가 시선을 피하며 쑥스러워했다.

엉망인가? 별로. 잘 모르겠는데…. 나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피곤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민망해할 정도로 꾀죄죄한 꼴은 아니다.

“오늘은 정말 잠깐 얼굴 비치러 온 거라 바로 돌아가서 쉬려고 해요. 나,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거든요. 당신이 보는 앞에서 그런 꼴 보이는 건 별로 내키지 않으니까….”

“……”

“우리, 저녁은 다음에 같이 먹을까요?”

상체를 살짝 기울여 카운터에 기댄 그는, 나인에게 시선을 맞추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딘가 묘하게 들리는 말이 의아하면서도 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당연히 그래야죠.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하기야 저런 몸 상태로 피곤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남자에게는 충분한 휴식과 치료가 필요했다.

“등록증은 나중에 돌려줘요.”

“나중 언제요?”

나인은 카드를 손에 꼭 쥔 채 애쉬를 쳐다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는 한결 가라앉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어디 안 갈 거잖아요?”

“……네?”

그는 확실한 대답을 구하듯 다시 한 번 나인에게 물었다.

“여기 있을 거죠?”

“네, 뭐….”

“그럼 됐어요.”

그가 명쾌하게 말했다. 나인은 그의 입매가 시원하게 찢어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봤다. 잘 웃다가도 순간적으로 공기를 싸하게 얼어붙게 만들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방긋방긋 잘도 웃는다. 분위기 전환이 삽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흥미로웠다.

“내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우리, 가까운 시일 내로 다시 만나야겠네요.”

“그… 렇죠…?”

“나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일하는 거고요.”

“…….”

“그럼 내가 여길 오면 언제든지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거죠….”

대답을 구하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그거 되게 좋네요.”

배부른 짐승처럼 만족스럽고 느른한 표정이었다. 뭐가 좋다는 거야…. 나인은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일단 공감해 주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앞으로도 꽤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애쉬가 반쯤 풀린 눈을 살짝 접어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미리 잘 부탁해요.”

“저, 저야말로….”

짧은 악수였다. 남자의 손가락이 나인의 손바닥을 은근하게 훑으며 떨어져 나갔다.

뒤늦게 남자의 ‘자주 보게 될 것’ 이라는 말이 의문점으로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 무슨 뜻이었냐고 묻기에는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뭐, 별거 아니겠지. 의문을 무심히 넘긴 나인이 애쉬를 바깥까지 배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생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가볼게요. 그럼 잘 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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