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 사람들 내가 죄다 집에 돌려보내 줬다는 건 알아요?”
“네? 진짜요?!”
생각도 못한 말이라 나인은 언성을 낮출 생각도 못 하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뒤늦게야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좀 솔깃한가요?”
“……!”
나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었다. 센터 측에서는 귀환에 대해 확실한 답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기다리란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기만 했다.
나인은 다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저도 돌아갈 수 있습니까?”
“뭐, 운이 따라준다면요.”
이런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이렇게 간단하게 단언할 수 있는 문제였단 말인가. 나인은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물었다.
“어, 어떻게요? 제가 듣기론 그 게이트가 아무나 원한다고 열리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진정해요. 그리고 그 전에 질문은 내가 먼저 하지 않았던가요?”
……질문? 무슨 질문을 했었지?
돌아갈 수 있단 말에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그 전 대화가 기억나지 않았다. 애쉬는 그런 나인에게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해요. 그 정도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말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나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필까지 했으니… 이젠 털어놓을 마음이 좀 생기나요?”
그의 말은 어쩐지 조금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나인은 되도 않는 불길한 예감은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말한 이야기기도 하고 남자의 말대로 그 정도는 말해도 별 상관없는 정보기도 했다. 이런 정보는 왜 묻는가 했는데 목적지를 판단하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나인은 조심스레 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차원은 세계의 중심 트라시드를 기준으로 총 네 개의 대륙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각 대륙마다 영역을 지키는 용이 하나씩 있는 차원이에요. 혹시 그런 곳을 알고 계시나요?”
“용이라고요?”
애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차. 나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점이 하나 있다면, 여긴 용과 같이 상서롭고 위대한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 용이 자신이 아는 용이 맞냐며 비웃기만 했다.
처음에야 좀 상심했지만 없다는데 자신이 뭘 어떻게 하겠는가. 나인은 마저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아는 그 용이 맞아요. 다른 말로는 초월자라고도 하죠.”
“…….”
“그리고 저는 그중에서도 동 대륙 라노시안에 위치한 블란체 제국 출신입니다. 현시대에 유일하게 깨어 있는 용께서 동 대륙에 있는 내 나라를 수호하고 있어요.”
또 용 얘기가 나오자 애쉬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용……. 하고 그 단어를 입 안에서 중얼거려 보는 걸 보니 뻔했다.
“……있다 치고요.”
“용은 정말 있어요. 저랑 친하다고요.”
변명해 봤지만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애쉬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친해서 좋겠네요. 그런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제 막 생각난 건데…. 당신, 언어는 어떻게 된 거죠? 거기서도 이곳과 같은 언어를 사용할 리는 없을 텐데요.”
“…….”
나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애쉬는 말을 마저 이었다.
“그간 공간미아와 말이 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특히 원래 차원으로 그것들을 돌려보낼 때에는 단둘이어야 하는데… 진짜 미쳐 버리겠더라고요. 집에 보내 주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온종일 빽빽대고, 화내고, 울고. 왜들 그러는 거죠? ……아, 무슨 말인진 몰라도 욕은 알아듣겠던데.”
나, 다른 세계의 욕 열 가지를 알아요. 애쉬가 즐거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걸 뭐, 축하해 줄 수도 없고….’
할 말이 없어진 나인은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에게 그것도 용의 권능이라고 말해 봐야 또 비웃을 게 뻔했다.
경험상 나인이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와! 과연 그랬군요.’ 하고 바로 납득하는 사람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용이 있다는 말도, 마법이 존재한단 말도 거짓말 아니냐며 은근히 의심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인은 책상 아래로 반지를 낀 손을 만지작대며 애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간략하게만 말했다.
“오래된 마법이에요.”
“그런 게 진짜 있어요?”
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럴 줄 알았지. 예상에서 조금도 비껴 나가지 않는 게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다. 이 남자 역시 용도 마법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보여줄 수 있나요?”
“그건 곤란해요. 제가 마법사인 건 아니라서요….”
“지금도 의사소통은 되고 있잖아요. 그 비결이 마법이라면서요?”
“네, 뭐…. 비슷합니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하다. 나인이 귀찮은 기색을 숨기고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픽, 옆에서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들린 것을 느낀 나인은 고개를 들었다. 애쉬가 슬며시 웃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너무 귀찮게 굴죠?”
“…….”
그가 한마디만으로 나인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 좀 귀찮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가 느낄 정도였다면 자신이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게 맞았다. 나인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티팩트예요.”
“아티팩트요?”
“쉽게 말하면 마도구 같은 거죠. 그런 건 마법사가 아니라도 쓸 수 있는 거거든요. 마법이 각인되어 있으니까…. 아, 잠시만요. 이것도 비슷한 건데.”
나인은 제 자리를 주섬주섬 뒤져 만년필을 찾아 내밀었다. 자동 수기 만년필은 마법사가 마력을 불어 넣는 방식이 아닌, 이미 반영구적인 마법이 각인된 인공 마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비마법사인 나인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였다.
“잘 보세요.”
나인이 수직으로 세운 만년필로 종이 위에 아무 글자나 써넣고 그대로 손을 놓자, 만년필이 나인이 쓴 글씨를 줄에 맞추어 반듯하게 반복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이는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되었다. 애쉬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처음 보는 글자인데 뭐라고 쓴 거예요?”
“제 이름이요.”
나인 엘로윈.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애쉬는 글자의 획을 시선으로 따라가며 지켜보다 글자를 덧그리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름은 누가 지어 줬어요? 스스로?”
그게 왜 궁금한가 싶으면서도 나인은 성실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제 작명자는 용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슨 뜻이죠?”
“뜻? ……뜻까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소멸한 별의 이름이래요.”
“별.”
“제가 그 별이 지는 날에 태어났다나 봐요.”
명이 다해 소멸한 것은 다시 태어난다. 영혼은 돌고 돌았다. 체체는 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나인은 소행성의 영혼을 이름으로 계승한 셈이었다.
“좋은 이름이네요.”
애쉬가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살다 살다 이름이 좋다고 칭찬을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그거 잠깐 봐도 되나요? 신기해서.”
“그러세요.”
나인은 작동을 멈춘 만년필을 애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애쉬는 손 위에서 만년필을 몇 번 굴려 보더니 제대로 고쳐 쥐고 종이 위에 선을 그어 보았다.
“내 이름은 어렸을 때 어떤 꼬마와 동네 순경이 지어 줬어요.”
그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너무 귀찮게 굴죠?’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나인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눈동자 색이 꼭 타다 남은 재와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죠.”
“재… 말인가요?”
“어때요?”
애쉬는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듯 눈을 똑바로 뜨며 얼굴을 살짝 기울여 주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보이는데.
“참고로 그 사람이 키우는 개 이름은 알렉산더 존스턴 3세였어요.”
“알렉산더 뭐요?”
“존스턴이요. …알렉산더가 이름, 존스턴이 그 사람 성이었고 당시에 개 나이가 세 살이었거든요. 그래서 3세라는데 정말 웃기지도 않죠.”
“…….”
살다 살다 강아지 이름에 당황해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나인. 왜 그런 표정이에요?”
“아, 좀 특이해서….”
“특이하긴 해요. 다른 사람들은 개 이름과 내 이름이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성의 없다고 욕했거든요.”
“…….”
“그래도 저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가만히 있었어요. ‘애쉬’는 날 위한 이름이었으니까요. 결국 이름은 쓰는 사람 마음에만 들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애쉬가 고개를 들어 나인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지?
나인은 남의 이름에 별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 순경이 지었다던 개 이름과 비교하니 좀 너무하다 싶기는 했지만, 애쉬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가 무채색을 닮은 남자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그래서 딱히 성의 없는 이름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