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남들이 멋대로 텔레포테이션이니 뭐니 하는데 공간 전이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하죠. 갓 발생한 게이트에 나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에스퍼는 없을걸요.”
나인은 그 말에 납득했다. 첫 번째 이유는 타당하게 들렸던 것이다. 애쉬는 나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둘째는 위험 수당. 원래 게이트에 들어가는 요원들에게 센터에서 지급하는 건데 통로형 게이트는 대상이 아니라 적용이 안 돼요.”
“위험……해서요?”
“네. 생명 보험에도 통로형 게이트는 예외로 두기도 하고…. 사실 저 빼고는 죄다 그 안에서 실종되거나 죽었으니 당연한 소리죠. 그래서 위험 수당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수당도 전혀 안 나와요.”
나인은 그의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는 이미 한 번,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걸고 나인을 구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걸로는 돈도 못 버는데 도대체 그 게이트를 왜 드나드는 걸까. 봉사 활동이나 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마지막은 그냥 구색 맞추기라고 해 둘까요. 원래 동화에서도 보면 소원은 꼭 세 개씩 빌잖아요.”
헛소리였다. 웬 동화? 나인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붙였다.
‘세 번째는 내 목숨을 구해 준 값으로 치자.’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름 이유를 부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인은 숨을 크게 내쉬며 애쉬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한테 세 가지씩이나 바라시는 게 있으신가요? 제가 지금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충분히 들어줄 수 있어요.”
애쉬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첫째로, 일단 가이드 등록부터 해요.”
“……?”
나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갖 이유를 들어 가며 그 일만큼은 피해 왔던 나인에게는 날벼락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만일 인사 팀 사람들이 애쉬의 말을 들었더라면 기뻐서 펄쩍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인이 가이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줄줄 늘어놓을 것이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가이드라니요…. 모르시나 본데 저는….”
“폐급이라고?”
“……잘 아시네요.”
나인은 조곤조곤하게 제 처지에 대해 설명했다.
“죄송한데 저는 가이드고 뭐고 그런 것도 아니고요, 맞는다고 해도 별로 흥미 없어요. 아마 결과가 잘못 나온 걸 겁니다.”
검사 결과에서는 ‘멀티’라고 했지만 에스퍼 쪽이든 가이드 쪽이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인이 곤란한 기색을 내비쳐도 애쉬는 미동조차 없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제가 가이드 등록은 왜 해야 합니까?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서?”
설마 이 남자도 인사 팀의 사주를 받았나 싶어 나인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애쉬는 짧게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기록을 남겨두는 게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기록이고 뭐고, 나인의 마음은 부정적인 쪽으로 점차 기울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더러 가이드 행세를 하라니….
“차라리 돈으로 드리면 안 돼요?”
나인의 중얼거림에 애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돈 많아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
나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맞다. 돈이 많기는커녕 자신은 빈털터리 신세나 다름없었으니까. 그의 처지를 모르지 않을 애쉬도 조용히 웃었다.
“있는 동안 밥값은 해야죠.”
“이미 하고 있잖아요.”
“진짜 일다운 일 말이에요. 이런 거 말고.”
나인은 잠시 침묵하다 이건 말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끼어들었다.
“에스퍼님, 죄송한데 남이 하는 일을 깎아내리는 건 보기 좋지 않습니다.”
“깎아내리지 않았어요. 당신이 이것 말고도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한 건데요.”
“…….”
솔직히 말해 그가 제 일에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먼저 든 건 사실이다. 나인은 자신이 좀 더 직관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당신도 센터 일에 그렇게 열정적이지는 않다던데요. 남 일까지 신경 쓸 입장이 아니지 않나요?”
빈정거림이 조금 섞인 말에 애쉬가 가볍게 키득거렸다. 공기가 희미하게 울리는 것같이 산뜻한 웃음이었다. 그는 나인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아, 들켜버렸네. 나인은 왜 이렇게 어디서 주워들은 게 많아요?”
“가만히 있어도 귀에 들리거든요.”
“다 오해예요.”
과연 오해일까? 가만히 있어도 애쉬가 꼴통이란 소리는 아주 종종 들린다. 소문이 과장된 건 사실일지라도 업무적인 면에서 애쉬가 다소 불성실하다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귀가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센터 안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부풀려진 소문이든 명백한 사실이든… 나인은 딱히 상관없었다.
나인은 제 목숨을 구해 준 애쉬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이런 것까지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었기에 방어적인 태세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일단 조건부터 들어 보고요. 하나는 가이드 등록. 다른 두 개는 뭔데요?”
“다른 하나도 당신이 가이드가 된 후에 얘기할 수 있어요. 마지막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느꼈다. 그러나 그는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 위를 덮었다.
“도망치지 말아요.”
“…….”
뜬금없는 소리에 나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단 한 번도 도망치려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도망을 간다 해 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그런데 나한테 이런 말을 왜 해?’
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가 생판 초면인 제게 이런 말을 하는 의도도, 맥락도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죠? 그냥 내 눈 닿는 곳에 있으면 돼요. 어렵지 않을텐데.”
“…….”
정말 그게 다인가? 그의 말대로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앞선 요구에 비해 뭔가 뜬금없어서 흔쾌히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고민에 잠긴 나인의 모습에 애쉬는 한 발 물러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줄까요?”
“…얼마나요?”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일주일은 생각보다 후한 시간이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애쉬는 나인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말이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검증하고 손익 계산해 볼 시간. 당신에겐 필요하잖아요? 일주일이면 고민할 시간 충분할 거예요.”
확실히 그렇다. 지금 애쉬가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대로 일주일은 계산을 하고 재 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간일 것 같았다. 혼자 사색하기에도 그렇거니와, 다른 에스퍼들에게도 자신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애쉬뿐인지 물어보고 다닐 수도 있다.
“나인.”
“……좋아요. 일주일 동안 신중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아볼 것도 좀 제대로 알아보고.
“그동안은 필사적으로 내 생각만 해야 해요?”
애쉬의 말꼬리가 애교스럽게 올라갔다. 잘생긴 남자가 턱까지 괸 채로 고개를 기울이자 대놓고 작업을 거는 것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 착각일 것이다. 애쉬가 제게 찝쩍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 떨떠름한 나인의 반응에 그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디 긍정적인 대답이길 바라요, 나인.”
“생각해 보고요…….”
“그래요. 내 생각.”
애쉬는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금화를 다섯 개나 꺼내어 놓고 돌아갔다. 나인은 금화를 보고 다소 당황했다.
비록 애쉬가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그는 무려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얼굴도 꽤나 취향이었으니까 애쉬가 이런 걸 주지 않아도 그와 친구 정도는 해 줄 수가 있었다. 친구는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해 주려 했지만 애쉬가 사라지는 게 더 빨랐다.
“…….”
그래도 일단 받았으니 돌려주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 정도는 돈도 아니다 이건가? 부자인가 봐….’
부자 친구는 아주 좋은 것이다. 친해지길 잘한 것 같다. 앞으로 애쉬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나인은 흩어진 금화를 주섬주섬 쓸어 와 탑처럼 가지런히 쌓아 두었다. 황금색 동전이 유독 번쩍거렸다. 에스퍼들 벌이가 좋은 것은 아는데, 그래도 금화라니….
‘여긴 금이 흔한가.’
이 세계에서 종이로 된 지폐 말고 금화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본다. 근데 유독 황금색이고 너무 번쩍거리는데. 이거 정말 진짠…….
“…….”
벗겨지잖아. 만지작대다 보니 껍질이 내용물과 분리되어 달콤한 냄새까지 났다. 금박에 싸인 동그란 동전 모양의 초콜릿이 다섯 개였다. 배신감이 엄청났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 만년필이 사라졌다는 건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알았다. 한참 주변을 살피고 서류 사이사이를 들춰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애쉬가 가져간 것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탐난다는 듯 만지작대더라니!
“아끼는 건데.”
나인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먹으면 홀라당 사라지는 간식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큰 걸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