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29)화 (29/63)

#29

애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인이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그건 요즘 서점에서 제일 잘나가는 소설이라며 바깥에 나갔다 온 에스퍼에게서 선물받은 책이었다. 그가 고개를 홱 들어 자신을 바라봤다. 눈빛이 묘하게 빛난다. 나인은 애쉬가 입을 열기 전에 미리 대답했다.

“그냥 가져요.”

어차피 다 읽은 책이었고 안 주고 싶다고 해서 제 마음대로 될 일도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순간 이미 소유권은 넘어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애쉬는 피식 웃으며 책을 챙겼다.

“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주니까 받아 줄게요.”

반쯤 풀린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애쉬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꺼내 나인의 눈앞에 사탕 한 주먹을 떨어뜨렸다. 책에 대한 대가이자 나인은 그리 원치 않는 물물 교환이었다. 단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나인에게는 처치 곤란인 쓰레기로 보일 뿐이다.

“아, 해 봐요.”

아? 나인은 얼떨결에 입을 벌렸다. 그는 직접 껍질을 깐 막대 사탕을 나인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인위적인 과일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됐어요. 안 먹습니다.”

나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로 사탕을 밀어 내 뱉자 애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오렌지 맛인데.”

“…….”

“이거 좋아하지 않았었나요?”

확신 어린 어조에 나인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그가 자신에 대해 무척 잘 아는 양 구는 게 묘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적당히 관심만 기울였다면 모를 수가 없는 정보였다. 지하 카페에서 오렌지를 착즙한 주스를 종종 마시기는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판단하는 것 같았다. 나인에게 가장 자주 뜯어먹힌 체드만 하더라도 ‘넌 왜 맨날 그것만 마시냐.’ 하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주스는 몰라도 사탕은 별로 안 좋아해요.”

“왜죠?”

“빨리 먹을 수가 없잖아요. 이빨 썩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미간을 좁힌 애쉬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빛이 묘하다. 사탕 하나 안 먹는다고 이렇게 쳐다보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나인은 그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까지 피하고 말았다.

“아깝게…. 그럼 내가 먹죠.”

애쉬는 나인이 다른 데 시선이 팔린 때를 틈타 그가 뱉은 사탕을 냉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뭐가 잘못된 건지 그때는 지적할 틈조차 없었다.

“…….”

애쉬가 떠난 뒤 나인은 그가 또 제 책상에 남기고 간 흔적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에 뭘 저렇게 가득 넣고 다니는지, 그가 올 때마다 책상 위에 관심도 없는 주전부리가 가득 쌓이곤 했다. 하나같이 설탕 덩어리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래도 문제가 있었다. 웬 간식이냐는 말에 애쉬에게서 받았다는 말을 덧붙이자마자 누구도 가지고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나….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나인도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싫다는 사람에게 떠넘길 정도로 곤란한 물건들도 아니었고, 뭐. 그저 서랍 속에 간식만 계속 쌓여 갈 뿐이었다.

* * *

병동은 붐비는 시기가 따로 있었다. 훈련 직후 부상자가 지나치게 많이 발생하거나 센터 내에 독한 감기가 유행할 때가 그러했다. 환자가 지나치게 많이 몰려 진료 대기자가 많을 때에는 경미한 외상을 입은 에스퍼들은 병동 로비에서 응급 처치만 하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처음에 말단 중의 말단인 나인은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환자가 많을 때에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로비도 무척 분주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다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 했다.

“저.”

“…….”

“응급 처치 정도라면 저도 조금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나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그머니 나섰다. 다들 나인에게는 의료적 지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나인이 본인의 수많은 자격증들과, 무려 6년간 치료 마법을 전공했다는 것을 어필하며 열정까지 보였다. 실제로 병원에서 몇 달간 실습을 나가 잡일을 도맡아 했다는 말에 설득력이 생긴 게 가장 컸다.

의료진들은 물론 처음에는 떨떠름해했다. 하지만 바쁜 김에 속는 셈 치고 가벼운 상처 드레싱을 시켜 보니 손길이 능숙하기까지 했다. 아픈 곳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가감 없는 처치는 완벽하다. 다소 독특한 치료 방법을 쓸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그러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에게 치료받은 에스퍼들은 나인에 대해 좋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병동이 많이 바쁠 때 경미한 상처를 치료하는 것 정도는 나인의 몫이 되었다.

“이상하게 나인 씨가 치료해 주고 나면 금방 낫는 것 같더라고요.”

“…….”

가벼운 드레싱을 마친 에스퍼의 상처에 재생 밴드를 붙이려던 나인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 동요했냐는 듯 차분하게 치료를 마무리까지 진행했다. 행동과 행동 사이에 잠깐의 틈은 존재했으나 에스퍼가 이상하게 여길 정도는 아니었다.

“전에 팔뚝을 쓸렸을 때도 그랬어요. 자고 일어나서 씻으려고 밴드를 떼는데 상처가 하나도 없던 것 있죠?”

“회복력이 대단하시네요.”

“처음부터 다치지도 않은 것처럼요.”

“우와.”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상당히 성의 없는 반응인데도 본인 생각에 몰두한 에스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나불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처가 하루도 안 지나 흔적도 안 남기고 낫지는… 아, 그렇지! 저 회의록 봤는데 당신 마법사라고 했다면서요.”

혹시 난독증인가? 그런 적 없다. 나인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니라고 했어요. 제대로 읽어 보세요.”

“이것도 혹시 진짜 마법 쓰는 것 아니에요? 엇! 그럼 이건 마법 약입니까?”

“…….”

에스퍼는 시중에서도 흔히 파는 연고를 집어 들고는 마저 나불거렸다.

“이런 건 마녀가 만드는 건가요? 빗자루 타고 나는 것도 정말 가능합니까? 정말 검은 고양이를 사역마로 부리는가요? 하얀 고양이는 어째서 안 되는 겁니까? 그리고 저주는 실재하는 겁니까? 보름달이 뜬 밤에는 정말 마기가 강해지나요?”

뭐라는 거야.

“다 됐어요. 일어나 보세요.”

나인이 말을 무시하며 그를 일으켰다. 에스퍼가 자리에서 일어나 걷어붙였던 바지 소매를 다시 접어 내렸다. 야외 훈련 도중 넘어져 양쪽 무릎이 다 깨진 케이스였다. 그는 바지 아래 상처 부위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다고 감탄했다.

“벌써 다 나은 것 같은데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대단한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죠.”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나인을 보고 씩 웃었다. 그의 손가락에 들린 연고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이거 마법 약이죠?”

“…그렇게 마음에 들면 가져가세요.”

“아, 뭔데요. 이거 아닌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나한테도 알려달란 말이에요.”

“…….”

나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에스퍼를 멍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곁에서 대화를 엿듣던 사람들이 나인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상한 놈에게 잘못 걸린 피해자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혹시 마법 약 팔 생각 있으면 연락 줘요!”

“네.”

“오. 진짜? 제 연락처 드릴까요?”

“아니요. 좀 가세요.”

나인은 바닥에 펼쳐 둔 응급 상자를 정리하며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서 급히 에스퍼를 돌려보냈다.

내내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환자가 “고생 많아요.” 하고 나인을 격려했다. 나인은 그에게 어색하게 마주 웃어 주며 등 뒤로 감춰 두었던 반투명한 용액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들킬 뻔했네. 하여간 마법 약 좋은 건 알아 가지고.’

사실 저 에스퍼의 말은 반 정도는 맞고 반은 틀렸다. 연고는 아니고 처음에 상처를 소독한 액체가 나인이 만든 특제 마법 약이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야.’

나인은 한숨을 내쉬며 수첩에 적힌 조합 레시피 위에 줄을 그어 지워 버렸다.

원래 그가 만들고자 했던 건 마력 반응 용액이었다. 마력과 반응하면 빛을 내며 마력 회로를 가시화해 주는 마법 약 말이다.

‘몰래 에스퍼의 몸 곳곳에 마력 반응 용액을 뿌리고 마력 회로를 관찰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만드는 족족 실패했다. 여기서는 아카데미에서처럼 필요한 재료를 편하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재료를 다 조합해 섞는다고 해서 마법 약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 분야를 전공한 마법사가 마법 약을 제조하며 직접 마력을 불어 넣어야 효력이 나타난다. 하지만 나인이 처한 상황에서는 마력 운용 자체가 안 되어 그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물론 대처법은 있지만.’

간단하다. 이미 마법사에 의해 제조된 마법 약을 사용하면 된다.

한번 마력이 들어간 마법 약은 다른 재료나 약과 섞어도 본연의 성질을 잃지 않는다. 나인의 경우 치료 마법을 전공하고 있었기에 꽤 많은 양의 상처 회복 약을 가지고 있었다. 다친 곳에 들이부으면 순식간에 새살이 차오르고 단순히 마시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내상 치유가 가능했다.

마법 약을 원액 상태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걸 가지고 있다는 걸 굳이 떠벌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세계 기준으로 정상적이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남들의 눈에 띄기 싫었다.

안 그래도 존재만으로 두드러지는 마당에, 나인은 이 이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