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일단… 들어가서 앉으세요.”
두 사람을 한방에 가두고 문을 닫은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빠르게 문자를 쳐 넣었다.
[팀장님빨리와보셔야할것같ㅇ요긴급.!!,!]
* * *
“왜 싫다는 건데요?”
“…….”
나인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애쉬에게 막무가내로 끌려가 매칭 검사까지 한 것은 그렇다고 친다. 가이드 등록도 하기로 약속한 거니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하지만….
“페어 계약 얘기는 미리 안 하셨잖아요.”
“미리 말했으면 도망갔을 것 아니에요.”
“그야…….”
“맞죠?”
“…….”
부정할 수 없었다. 도망까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말했으면 하루도 안 되어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가이드 등록도 제게는 일주일을 고민해야 했을 정도로 벅찬 고민거리였는데, 그와의 페어 계약 얘기까지 나왔더라면 말 다 한 셈이었다.
애쉬는 나인의 손을 꼭 붙잡고 그를 살살 꼬드겼다.
“어차피 당신이 가이드가 되면 어디서든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건데 뭐가 문제예요? 불특정 다수와 마주하는 것보다는 전속 계약해서 저만 상대하는 쪽이 나인에게도 훨씬 편할 건데.”
“불특정 다수….”
나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에스퍼들과 몸을 섞는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페어 가이드한테는 에스퍼 수익에서 일정 비율 보너스 나오는 거 몰랐죠? 당신 내 연 소득이 얼마인지는 알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괜히 솔깃했다.
‘맞다, 저 사람 돈 많댔지.’
나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금전적 배경이 탐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은 늘 돈이 궁한 입장이었으니까.
“나인. 당신, 돈 급하죠?”
“…….”
내가 겉으로 티를 많이 냈던가? 그걸 저 사람이 어떻게 알지. 눈살을 찌푸린 나인은 짧은 고민 끝에, 이내 마음을 굳게 다잡고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저었다.
“돈은 필요하지만 몸은 안 팔아요.”
나인의 진지한 고민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애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이없다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맙소사, 나인. 이거 몸 파는 일 아닌데….”
“그쪽이랑 친구는 해 줄 수 있는데 자 줄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똑부러진 말에 말문이 막힌 애쉬는 잠시 침묵하다 피식 웃었다.
왜 웃지. 내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렸나? 나인이 혼란스러움을 느끼기 직전, 애쉬가 물었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까지 해 봤어요?”
“……안 해요?”
나인은 어쩐지 조금 민망해졌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한 줄기 희망을 품은 나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당신이 날 덮치면 어울려 줄 생각이야 있지만….”
“미쳤군요.”
누가 누구를 덮쳐. 나인은 저보다 한 뼘 이상 큰 데다 덩치까지 제법 있는 남자를 덮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나인은 질색하며 단번에 표정을 굳혔다. 애쉬는 자신을 피해 자리를 옮기는 나인을 졸졸 따라가며 한탄했다.
“나인, 농담이었어요.”
아직 그럴 맘 없다고요. 정말이에요. 나인은 그 말을 무시하며 일자리로 발걸음을 향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나인이 꽁무니에 애쉬까지 달고 오니 누구도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나인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쉬는 하루 종일 나인에게 자신과 계약하기 싫은 이유를 열 개만 대 보라고 막무가내였다. 열 개까지는 아니지만 뚜렷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페어 계약은 에스퍼와 가이드를 서로에게 귀속시키는 행위였다. 쉽게 말하자면 전속 계약과 비슷하다. 페어 계약을 맺은 가이드는 가이드로서의 의무 일부를 면제받으며, 에스퍼 역시 의무 매칭 검사라든지 공공 가이드실의 호출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페어 계약의 핵심은…….’
의무 가이딩.
이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서로를 서로에게 귀속시키는 만큼 꾸준한 가이딩과 관리를 통해 에스퍼가 폭주하지 않도록 일상에서부터 조절하라는 것이었다. 말이 가이딩이지, 나인이 느끼기에는 음란 행위였다.
‘그런 걸 어떻게 제정신으로 하란 소리야?’
솔직히 말해 나인의 입장에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이러한 부분에서 나인과 이곳 사람들이 느끼는 바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동성 간은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본 사람 간에도 아무 스스럼없는 스킨십이 오가는 것에 나인은 적잖은 문화 충격을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게 제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거부감부터 드는 것이다.
“저 가이딩 같은 건 할 줄도 몰라요.”
“배우면 되죠.”
“다른 가이드도 많잖아요.”
“걔들은 싫어요. 난 나인이 좋은데 왜 대안을 찾아야 해요?”
하나하나 꼬박꼬박 대꾸하는 꼴에 나인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저는 이런 거 하기 싫으니까요.”
나인은 단언했다. 싫다는 말에 애쉬의 은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애쉬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이다 노선을 바꿨다.
“음…. 돈 많이 줘도요?”
“돈이야 천천히 벌면 됩니다. 급하지 않으니까요.”
“벌어서 뭐 하게요. 건물이라도 살 건가요?”
건물까지야…. 그렇게 많이 벌 필요까지는 없었다. 필요한 재료만 찾으면 거기서 끝이니까. 문제는 그 재료가 뭔지, 돈을 얼마나 써야 찾을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을 못 잡겠다는 것이다.
마법 약재 상점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긴 왜 마법 약 사업이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거야…. 병원 약제실에도 원재료보다는 완성품밖에 없는 것 같고.’
“나인.”
볼멘소리를 하던 애쉬가 은밀한 목소리로 나인을 불렀다. 또 뭐야. 나인은 곁눈질로 그를 흘깃대며 대답했다.
“왜요, 또?”
“당신이 어디까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상상해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오해요?”
“페어 가이드라고 해서 모두가 가이딩의 가장 마지막 단계까지 하는 건 아니에요.”
가장 마지막 단계. 나인은 그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한 마디로. 안 자도 된다고요, 나랑. 절대 강요 안 해요.”
애쉬는 나인이 망설이는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인은 손을 꿈지럭거리며 눈을 굴렸다.
‘그런가. 성관계를 제외하고는 할 만한 것 같기도 한데….’
나인이 꺼리는 부분은 성적 접촉 부분이었다. 낯선 이든, 아는 사람이든. 호감을 기반으로 한 접촉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스킨십이라니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다시 한번 진지하게 어떨지 생각해 보았지만 생각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너무 가까워지지 말자.’
자신은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인은, 애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아주 비중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사라질 존재라면 되도록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안 해요.”
“왜요?”
솔직하게는, 당신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서요. 하지만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나인은 진짜 이유를 말하기보다 거절하는 뜻만 확실히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싫어요. 싫은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으래도…….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전속 계약은 제가 일방적으로 속는 기분이 들어서 하기 싫습니다. 그 부분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요.”
“그게 문제였어요? 별것도 아니네요. 내가 자세히 알려 줄게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인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서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 지금 확실하게 거절하는 겁니다. 사실 할 마음 전혀 없어요.”
“전혀?”
“그러니까 당신도 쓸데없이 힘 빼지 마시고 그냥 그러려니 해 주세요.”
애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나인에게는 내가 필요할 텐데요?”
“네. 다른 사람 찾아볼게요.”
애쉬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없을 텐데.”
“그건… 찾아봐야 알죠.”
“와.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무작정 부딪쳐 보는 타입이었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성격이 도전적이네요.”
“비꼬지 마세요.”
나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저 같은 거 말고 더 좋은 가이드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애쉬는 그 말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픽 웃었다.
“혹시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요? 그럼 그렇다고 말로 해 줬어야죠.”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나인을 응시했다. 눈빛에 마음이 절로 약해지려 했다. 제법 애처롭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여기서 잘라 내지 않으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인은 그를 좋은 말로 달래기보다 확실하게 거절하는 편을 택했다.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말 한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여기로도 찾아오지 마세요. 시간 낭비니까요.”
“나인?”
“그간 감사했습니다.”
마무리 매듭을 짓는 말이었다. 나인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내내 생글생글 웃거나 장난처럼 투덜대기만 했던 애쉬는, 왜인지 얼굴이 하얘져 나인의 손목을 덥석 쥐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