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결심이 서면 말해요.”
애쉬가 말했다. 그는 이미 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계략에 놀아난 기분이다. 나인은 제 눈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애쉬를 보고 입을 열었다.
“욕해도 됩니까?”
“해 봐요.”
“거지같은 새끼.”
“……그게 전부예요?”
안타깝게도 남자에게 별 타격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인은 더 약이 올랐다. 그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쌍욕을 퍼부어 줄까 싶었지만 자신만 더 피곤해질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닫았다.
“어차피 당신이 집어 처넣은 걸 테니 꺼내 줄 수도 있죠?”
“얼마든지요.”
“부정도 안 합니까?”
“나 거짓말은 못 하거든요.”
어차피 들킨 김에 막 나가자는 건지, 애쉬는 제 멱살을 쥔 나인의 손 위에 본인의 손을 덥석 얹어 두며 생글거렸다. 나인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밤길 조심해요, 애쉬. 뒤에서 갑자기 누가 벽돌 들고 뒤통수 치면 그거 나니까.”
나인의 살벌한 경고에 애쉬는 “무서워라.” 하고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더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때가 오는 법이다. 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했다.
* * *
나인의 눈앞에 서류 몇 장과 펜이 놓였다. 그는 상담실의 4인용 테이블에 애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두 분 매칭률이 8%라고요?”
두 사람의 사이에 앉은 자문 변호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결코 높지 않은 수치였다. 보통, 에스퍼들은 가이드와의 매칭률이 50%를 넘겨야 그럭저럭 만족한다고 알려져있다. 그리고 페어 계약을 맺을 정도로 궁합이 잘 맞는 수치는 80% 이상이었다.
매칭률 50% 미만의 경우 가이드와 에스퍼 양쪽 모두가 과정에서 극심한 불쾌감을, 심하면 통증까지 느낀다.
‘그런데 고작 8%에. 미친놈….’
변호사는 성급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신이 나간 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애쉬를 흘겨보았다.
“아니, 검사일이 일주일 전인데 어째서 여태 아무 말이 안 돌았던 겁니까?”
애쉬는 그가 있는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나인을 바라보던 자세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는 오후의 햇살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나인.”
“뭐요.”
“방금 들었죠? 내가 당신 부담될까 봐 매칭 검사 결과 안 새어 나가도록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아무도 몰랐대요.”
“신경 쓴 게 아니라 협박이겠죠.”
“음,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고요.”
“…….”
“아무튼 내가 노력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요.”
그가 실실 웃었다. 왜 이런 놈인 걸 전에는 몰랐지? 그간 나인의 안에서 애쉬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달라진 듯했다. 나인은 그를 보며 답도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변호사는 애쉬의 눈치를 보며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쉬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키득거리고, 가이드라는 남자는 심드렁한 얼굴이다. 두 사람이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소곤거렸다.
애쉬는 여러모로 유명한 에스퍼였다.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때부터 온갖 사고를 몰고 다녔다. 어렸을 적의 그는 지금보다 훨씬 답도 없는 사고뭉치였다. 실내 훈련장이 위치한 건물의 스프링클러를 일제히 터지게 해 온 사방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했고 야외 훈련장의 나무들을 죄다 뽑아 놓는 심술을 부린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애쉬는 사회성까지 없어 허구한 날 다른 에스퍼들과 시비가 붙어 싸웠다. 물론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상대편들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늘 단독 행동만 하는 애쉬를 썩 좋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등급은 높은데 지금까지도 팀을 구성하지 않고 겉도는 꼴이 못마땅했다. 자고로 에스퍼라면 번듯한 팀을 구성해 맡은 일에 소임을 다하는 게 마땅한데 말이다.
애쉬가 가이딩에 거부 반응이 크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센터에서 가이딩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에스퍼는 없는 법이라며 억지로 그에게 가이드를 붙여 놓으면, 누군가 한눈을 판 사이 가이드를 기절시키고 도망가 머나먼 휴양지에서 목격담이 떴다.
십 년이 넘게 기피하던 매칭 검사를 어쩌다 자발적으로 받았는지는 몰라도 매칭률 8%의 끝은 무조건 파국이다. 아직 놈이 철이 덜 든 모양이었다.
‘저 가이드는 어쩌다 저런 놈과 눈이 맞았을까?’
설마 끼리끼리?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변호사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힐끔 바라봤다.
페어 계약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아주 다양했다. 부모와 자식, 친한 친구, 형제자매, 단순 비즈니스 파트너. 그리고 이 업계에서 가장 흔한 경우는 연인 관계였다.
전자들의 경우는 매칭률이 높아서 보다 효율적인 생활을 위해 계약을 맺는 거라면 후자인 연인 관계의 경우 매칭률은 턱도 없는데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러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깟 숫자 따위가 무슨 상관이에요!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 달링을 100만큼 사랑한다고요.’
‘꺅, 달링!’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변호사는 너희 같은 놈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지 아느냐며 따지고 들고 싶었다. 이렇게 난리를 피우고는 너네가 얼마나 가는지 보자.
변호사는 그런 놈들을 굳이 뜯어말리는 소모적인 일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천년의 사랑을 주장하며 염병을 떠는 것들은 일 년도 못 가 헤어졌으니까. 그리고 계약을 해지할 때에도 허공에 돈을 휘날리며 정말 개같이 요란하게 싸워 댔다.
‘하여간 어린것들이란….’
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고작 8%의 매칭률로 이 자리에 나오는 뻔뻔한 놈들은 살면서 처음 봤다. 굳이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이들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 변호사는 웬만해서는 계약 진행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말린다고 말을 들어 처먹을 놈이면 제 발로 여기까지 기어 왔을까…. 늘 그랬듯 그냥 포기하는 게 편했다.
“두 분 다 계약서 천천히 읽어 보시고 수정하거나 추가할 사항이 있는지 체크해 주시면 됩니다.”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서명란에 본인의 이름을 휘갈겨 넣은 뒤 딴청을 피우는 애쉬와 달리 나인은 글자 한 자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읽어 내리고 있었다.
애쉬와 달리 가이드 쪽은 말이 좀 통하는 종족 같아 보였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 그에게는 있어 보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혹시…. 변호사가 애쉬의 눈을 피해 작은 쪽지를 몰래 내밀었다.
「본 계약에 타인의 강요가 개입한 적이 있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실수인 것처럼 펜을 바닥에 떨어뜨려주세요.」
“…….”
나인은 눈을 굴려 변호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에 동요조차 없이 사무적인 표정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요라…. 어느 정도 있기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말하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여기서 머무를 뿐이다. 약점을 잡힌 쪽은 애쉬가 아닌 나인이었다.
“아까 계약서를 수정할 수도 있다고 하셨었죠?”
나인이 물었다. 그 말에 변호사가 고개를 홱 돌려 애쉬의 눈치를 본다.
이것 봐라. 그새 두 사람이 저 몰래 어떤 사인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눈치 챈 애쉬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뭐 하나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요. 나인, 뭔데 그래요?”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애쉬가 소문만큼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인은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인은 애쉬가 조금 만만했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기 싸움을 했다. 오랜 침묵에 어색해하는 것은 자문 변호사뿐이었다.
“그, 두 분 다 동의하시면… 예. 수정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가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나인은 종이에 인쇄된 글자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접촉 가이딩 조항 말인데요. 이 부분도 수정이 가능한가요?”
“예? 예. 어떤 식으로….”
“전부 삭제하는 쪽으로요.”
“……예?”
나인의 말에 변호사는 물론이고 애쉬마저 ‘방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눈을 끔뻑였다.
“나인?”
“왜요.”
애쉬는 언제 동요했냐는 듯 금세 표정 관리에 들어가 나긋한 어조로 물었다.
“내 말 제대로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동시에 변호사가 앉아 있던 의자가 그대로 밀려났다. 자, 잠깐! 변호사가 소리쳤다. 애쉬는 그를 의자째로 문 너머로 밀어 버리고는 문을 잠갔다. 공간을 통제하는 그의 이능은 편리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이 모든 행위들이 가능했다.
“이게 무슨. 열어, 열어 주십시오….”
졸지에 짐짝처럼 내쫓긴 변호사가 당황해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인과 둘만 남게 된 자리에서 본론을 꺼냈다.
“나인, 계약서에는 있지만 굳이 하지 않는 것과, 아예 해당 조항을 통으로 삭제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아는데요?”
“특히 접촉 가이딩 부분을 제외한다고 하면 이 계약 자체가 무의미해져요.”
“오, 좋은데요?”
나인이 유치하게 되받아치자 그가 고의로 그랬음을 깨달은 애쉬가 멈칫했다. 그는 계약서를 내려놓은 뒤 나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요. 그런 식으로 항의하지 말고.”
“글쎄요. 항의할 시간을 주셨어야죠.”
경찰서에서 나와서 여기까지 끌려오는 데에도 자의는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았기에 이야기를 나누어 볼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라도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