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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37)화 (37/63)

#37

그냥 얼굴이 좀 반반해서, 정도의 이유를 이야기할 줄 알았던 입술에서 제법 묵직하게 들리는 말이 튀어나오자 나인은 또다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 것이 돼 줘요.”

그는 프러포즈라도 하는 양 페어 계약서를 내밀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은근슬쩍 손을 잡아오는 것은 덤이었다. 행복하게 웃는 그와 반비례하게 나인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을 뿐이다.

‘진짜 뭔데. 뭘 평생 나만 기다리면서 살았다고 그래. 정말 그 놈들 말대로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첫눈에 반한다니…. 나인은 영 떨떠름한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그런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손은 왜 잡아요? 사심 채우는 겁니까?”

“…….”

나인의 진지한 물음에 애쉬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진지하게 물은 건데 갑자기 소리까지 내어 웃자 나인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가이딩에 의미 부여를 하면 끝도 없긴 하죠.”

“……이건 또 단순 가이딩이라고요? 뭐가 달라요?”

“가이딩이에요.”

애쉬는 기다란 눈매를 접어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나인이 그 말을 믿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꺼림칙한 눈빛으로 애쉬를 힐끔대며 물었다.

“정말 사심 없어요?”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이러면 나 조금 기대할지도 모르는데.”

정색을 하며 대답한 나인에도 애쉬의 낯짝은 그저 번쩍거리기만 했다. 다소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그는 전혀 상처받은 기색이 없었다. 그러니 나인은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자꾸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만 자 보자고 하는 식으로 가볍게 얘기했다면 오히려 밀어내는 게 쉬웠을 것이다.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테지. 그런데 지금은 남자의 감정이 어떤지 파악하기가 좀 어려워서, 가이딩과 스킨십, 그리고 감정의 경계가 너무나도 모호해서….

“쓸모없는 생각 그만해요.”

그가 나인의 미간을 톡 두드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가득했던 머릿속은 그의 손가락 하나에 모조리 백지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인의 모든 신경이 애쉬를 향했다.

나인은 부담이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애쉬는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웃었다. 집요한 남자의 눈빛은 잠시도 나인을 비껴가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럼 지금 미리 거절해 두면 되나요?”

“또 차려고? 싫어요. 대답은 안 들을 건데요.”

“대답을 왜 안 들어요….”

나인은 탄식했다. 한 번 차이든 두 번 차이든 똑같은 거 아닌가. 나인은 깔끔한 관계가 좋았다. 애매하게 보류하는 것 따위는 제 사전에 없는 개념이었다. 애쉬는 자신이 신경 쓰여 미치겠다는 얼굴의 나인을 보고 어깨까지 파르르 떨며 웃음을 참았다.

“앞으로 나인은 내 얼굴 볼 때마다 내가 한 고백 생각을 하겠죠. 지금처럼요. 그럼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인을 독차지하는 거예요.”

“…….”

“아,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꼴려요.”

어떻게 저런 말을. 나인은 하려던 말을 삼키며 생각했다. 설마 이 새끼 변탠가, 하고. 떨떠름한 나인의 표정에 애쉬는 변명하듯 말했다.

“물론, 이 계약의 기반은 존중과 믿음이에요. 내 마음과 별개로 봐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서명해요.”

미안하지만 엄청나게 부담이 된다.

“나, 짝사랑은 처음이라 좀 더 곱씹어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나인, 나 또 차지 마요. 울 겁니다.”

“……아, 네.”

“쭉 읽어보면 알겠지만 페어 계약은 모든 것이 상호 합의로 이루어져요. 나인이 싫다는 건 절대 안 할 거예요. 기분 좋은 것만 할 거니까 마음 놔도 돼요.”

“죄송한데 그 말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어떻게 들리길래요.”

“변태 같습니다.”

이번에는 애쉬가 소리까지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변태 같다는 말에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아. 실망했어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서?”

“그런 얘기가 아니라면 안심을 해야죠. 안심했습니다.”

“왜요, 애인이 변태라면 개꿀이라던데.”

“에스퍼님은 제 애인도 아니고요, 그딴 말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선행 학습을 좀 했죠. 어디서 주워들었어요.”

그는 그저 해맑았다. 이미 한번 거절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인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혹시 자존심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걸까?

나인은 미치겠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티가 나는데 그간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며 계속 생각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애쉬, 당신은 가이드인 저에게 흥미가 있는 겁니다.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요.”

애쉬는 조금 애매한 표정으로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것도 맞기는 해요. 난 나인의 가이딩에도 관심이 있으니까.”

“그, 그렇죠? 그럼 이제부터 제가 진짜 가이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되는 겁니까? 그럼 떨어져 나가 주실 건가요?”

“아니요, 나인.”

애쉬는 헛된 희망을 품은 나인을 보란 듯이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요. 나는 당신이 가이드가 아니라도 별로….”

“…….”

“상관이 없는데요.”

애쉬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인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슥 훑어 내렸다. 눈빛이 진득했다. 나인은 순간 소름이 끼쳐 팔의 털까지 수직으로 바짝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럴 만한 말을 이어 했다.

“사실 난 게이트에서 나인을 주웠을 때부터 당신과 자고 싶었어요. 그런 기분이 든 게 처음이라 여태 내가 나인을 좋아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가 이야기하는 ‘자고 싶다’의 의미는 단순히 잠을 자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인은 애쉬를 똑바로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그래서 돈으로 저를 사시겠다 이겁니까?”

“누가 그래요? 사람 얘긴 끝까지 들어요.”

애쉬의 손이 죽상을 한 나인의 뺨을 붙들었다. 그에 의해 억지로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나인이 눈을 끔뻑였다.

“강요같이 들린다는 건 인정하는데…. 어느정도 강요가 개입한 것도 맞고요. 하지만 나인이 생각하는 건 틀렸어요. 난 당신을 무엇으로든 살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요.”

“돈 주신다면서요.”

“줘야죠. 하지만 그건 가이드로서의 당신 능력을 사는 거예요.”

“능력… 이요?”

웃기는 소리였다. 내가 그딴 사탕발림에 넘어갈 줄 알고? 그렇게 말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 지나?

나인은 순간 홀릴 뻔해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제정신을 차렸다. 애쉬는 제 손안에 들어온 나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미소 지었다.

“몸만 목적이었으면 이렇게 길게 끌 필요도 없었을걸요.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하고, 안고 싶으면 손을 뻗고 애초에 처음 봤을 때 당신 의사랑 관계없이 바로 나 내키는대로 했겠죠.”

말했죠, 난 게이트에서부터 꼴렸다니까요. 그의 말에는 비웃음이 약간 섞여 있는 듯했다. 그보다 다른 단어에 충격을 받은 나인은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였다.

“꼴렸…….”

“그러니까, 그렇게 저급하게 굴 생각 없다고요.”

애쉬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다정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 나인의 어깨를 살짝 그러쥔 채 눈을 똑바로 맞추고 말했다.

“가이딩이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그건 진심이에요. 당장 닿는 게 싫으면 거리를 둘 테니 피하지만 말아요. 난 정말 옆에만 있어도 좋으니까. 지금은요.”

“…….”

“지레 겁먹지 말란 소리였어요. 나 얌전히 굴게요.”

겁? 아니, 겁을 먹기는! 조금 당황한 거지 겁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인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옆에만 있어도 좋다니, 그건 또 뭔 개소리….’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소설 속 남주인공이 멋있는 척하며 읊는 대사처럼 들렸다. 그리고 나인은 운명 운운하는 연애 소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상대방의 조건을 보지 않고 그저 감정에만 충실해 정해진 비극으로 스스로를 끌고 가는 주인공들의 행태가 나인의 눈에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일뿐이었다.

애쉬도 그렇다. 자신을 알면 얼마나 알았다고 감정 운운하며 곁에 있어달란 소리를 하는 것인지, 제가 뭐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집착적인 행태를 보이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능력을 산다’ 며 달래는 말에 조금 솔깃하고 있는 제 모습이었다. 가이드로서의 제 모습이 실존하는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이번만큼은 팔랑귀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나인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해요.”

“내가 그렇게 좋아요?”

그 말에 애쉬의 입매가 꿈틀 움직였다. 안면 근육까지 다 동원해 웃음을 참으려던 그는 그만 참지 못하고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참 킬킬대며 웃던 애쉬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쳐 내며 대답했다.

“그런가 봐요. ……이런 대답을 원한 거 맞죠?”

“아, 아니. 암만 봐도 이건 저보단 당신이 더 손해인 것 같아서요…. 불확실한 감정 하나 때문에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인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뇨. 우리 둘 중 누구도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 계약은 내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 능력을 사는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이득이에요. 나인, 당신도 곧 알게 되겠죠.”

“그러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세요.”

나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능력을 사준다는 말은 고맙지만, 가이딩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자신이 과연 가이드가 맞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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