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참, 미안하다는 말을 빼먹었네요. 원래는 이렇게 급하게 설득할 마음은 없었는데….”
“설득?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설득이라니요.”
“그래요. 협박해서 정말 미안하다고요.”
알긴 아네. 그가 제 입으로 협박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하니 우습게도 나인은 아까 전보다 훨씬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
“당신은 계속 달아나려고만 하지, 나는 그런 당신이 가지고 싶어 미치겠지. 아, 그 때는 내가 나인을 짝사랑중이란 걸 몰랐잖아요. 붙잡아둘 방법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나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 사람 이전엔 한 명도 없었으니까. 남자가 초조해하는 게 오히려 우스울 정도였다. 나인은 황당하단 듯 대답했다.
“저 가이딩할 줄 모른다니까요. 가이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다들 저한테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고….”
“나인, 가이드 맞아요.”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분명 애쉬는 나인이 각성자 검사를 받은 것을 알기 전부터 그가 각성자일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애쉬가 제게서 무언가를 느꼈다는 근거도 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애쉬만 알아차렸지? 그 부분이 납득 가지 않았다.
“게이트에서의 기억은 하나도 안 나요? 잠깐 눈 떴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을 뒤졌다.
“잘 안 나는데요.”
“그때 자의는 아니었지만 나인이 제게 가이딩을 해 줬어요. …기억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응? 그 순간 나인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술이 눈에 들어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머릿속에 단편적인 장면이 스쳐 갔다. 아주 흐리고 몽롱한. 마치 꿈처럼 비몽사몽하던 기억 속에 입술을 파고들던 온기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표정을 굳혔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가이드는 체액에도 가이딩이 녹아 있거든요.”
“이 변태 새끼가…….”
“오해예요. 난 물 먹여 준 거라고요.”
그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쨌든 자신이 눈앞의 남자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입술을 맞댄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혹시 첫 키스였다면 책임질게요.”
“……괜찮습니다. 다행히 첫 키스는 아니라서요.”
애쉬는 나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충격받을 만한 일은 아닌데 왜 저러나 싶었다. 혈기 왕성한 십 대를 거친 스무 살이 여태 첫 키스를 간직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고자가 아니고서야 입맞춤 한 번 정도야….
물론 입맞춤 이상으로 진도를 뺀 적은 없는 건전한 이성 교제였다. 그래도 첫 입맞춤을 남자에게 바치지 않아도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충격에 빠진 애쉬의 모습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무겁든 가볍든 그건 나인에게 아무 상관도 없었다. 중요한 건 이 대화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고 있다가는 주도권까지 완전히 놓쳐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쪽한테 내가 여러 의미로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요. 사실 저도 집에 돌아가려면 당신 도움이 필요한 것도 맞고요. 여러모로 엿 같은 상황이죠.”
“……잘 이해하고 있네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애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웃음기 어린 눈은 그저 다정하게 보였지만 이제 나인은 저 웃음 뒤에 언제든지 꿍꿍이를 꾸밀 수 있는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심했다가는 저 얼굴에 속아 등골까지 빼 먹힐 수도 있었다. 남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인은 다시 한번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제가 그렇게나 필요한 존재라면 나중에 제가 돌아갈 때가 되면… 절 놓아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거잖아요?”
“당신이 지금 간과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난 당신을 주워 오기 전에도 멀쩡히 잘 살았어요. 기대와 달리 나인이 없다고 내가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거든요.”
과연 그럴까. 남자가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나인은 그림자 같은 안개를 슬쩍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말했잖아요, 나인. 하기 싫다면 가이딩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게 만약 거짓말이라면요?”
“당신이 날 믿기 나름이죠.”
믿음…. 나인은 그 말을 입 안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믿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타인을 향한 작은 의심이 사람을 구원한다. 뭐든 함부로 믿는 것은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가장 쉬운 지름길이었다. 타인의 속마음은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법이 없었으니까.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그래서 나인은 최소한의 보증이 필요했다.
‘보증….’
당장 생각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남자의 목숨. 그는 애쉬의 등 뒤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검은 안개를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 몸은 지금 만신창이입니다. 내일 당장 죽어도 아무도 절 의심하지 못할걸요.”
어쩌면 시비조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애쉬는 픽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갑자기 왜 대화 주제가 내 암살 예고로 바뀐 거죠?”
“굳이 내가 죽이려고 손쓰지 않아도 이대로라면 그쪽은 일 년도 못 버틴다고요.”
이번에도 애쉬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악담 고마워요. 덕분에 오래 살겠네요.”
악담이나 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나인도 나름 비장의 카드를 꺼내어 든 것이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뭐를요?”
“저건 당신의 건강 상태가 가장 건전한 상태로 돌아간다면 사라질 거예요.”
“……?”
애쉬는 나인의 시선을 따라가 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보이는 건 없었다.
“말해도 그쪽은 어차피 모를 겁니다. 저게 보이는 건 나뿐이니까….”
애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한테 귀신이라도 씌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
나인은 잠시 망설였다. 예측은 되지만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인의 눈에만 보이는 검은 안개는 사람 몸에 있어 어떠한 이상을 나타내는 현상이었지만… 나인이 안개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왜 보이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당신 건강 상태가 보다 나아질 수 있게 연구를 해 보겠단 거죠.”
“연구?”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미로움이 묻어났다.
“내 몸을 가지고 연구를 하겠다고요? 뭘 어쩔 생각인지 물어봐도 돼요?”
“…….”
좀 대책 없게 들릴지 몰라도 아직 나인은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그냥, 이 상황에서 저당 잡을 게 남자의 목숨밖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아, 아무튼 제가 개입해서 차차 연구해 보면 지금보다야 상황은 나아지겠죠.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나인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자랑은 아니지만”으로 운을 떼며 어필을 시작했다.
“이래 봬도 전 약초학 자격증이나 마법 약 배합 자격증도 따 뒀고 병원에서의 실무 경험도 충분해요. 지난 여름 방학에는 퓰로닌 병의 전염 특성과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고요. 이렇게 말하면 자랑 같겠지만 사실 어느 병원의 약제부를 지원해도 제 능력에 부족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재능은 꽤나 직관적이라 약이 병에 듣는 차도를 오래 지켜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결과물이 나온다는 장점이 있어요. 타고난 연구자라고 할 수 있죠.”
“음……, 네.”
“그러니까 당신이 당장 죽지는 않을 정도로는 만들어 드리고 갈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고요.”
비장한 얼굴로 선언하는 나인을 보며 애쉬는 소리 없이 살짝 웃었다. 무슨 소리인진 하나도 못 알아들었음에도….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네, 뭐…. 그래요. 실험 대상이 되는거야 난 익숙하죠. 몸은 대 줄 테니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그 말 역시 조금 변태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 말을 꺼냈다간 남자가 또 자신을 놀려 댈 게 뻔했으니까.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이 이어지죠? 내게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데.”
“대신 이걸 입에 넣고 삼켜요.”
나인은 주머니에서 펜던트를 꺼내어, 그 안에 보관해 뒀던 작은 구슬을 내밀었다. 각도에 따라 오색 빛깔로 찬란하게 빛나는 구슬은 누가 보기에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이건?”
“마도구예요.”
나인의 한마디에 애쉬는 “아하. 마법 소년이었죠, 당신.” 하고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인은 그의 말을 정정해 줄 힘이 없어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걸 삼키고 나면 당신은 제게 종속되어 평생 제 의지에 강력하게 반하는 일은 절대 하실 수 없게 될 거예요.”
“종속……. 날 세뇌시키겠다?”
그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나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를 해치지 못할 뿐 자유 의지는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여전히 거짓말도 할 수 있고 생각도 자유롭죠. 하지만 단 하나, 저를 고의적으로 해치려는 의도로 하는 모든 행위만이 제한됩니다. ……솔직히 이런 건 세뇌라고도 못 하죠. 누가 세뇌를 이렇게 정직하게 말하고 시키겠어요?”
나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애쉬는 여전히 놀란 표정을 고수하며 대답했다.
“와, 나인… 대체 누구 인생을 족치려고 이런 무시무시한 걸 가지고 다녀요?”
“그런 거 아니에요. 언젠가 제 기사가 생기면 주려고 했을 뿐이거든요.”
충성 서약을 하고 나면 으레 밟는 절차였다. 주군에게 앙심을 품은 기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