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기사가 뭔데요?”
“아. 그… 저희 쪽에는 충성 서약이라는 게 있어요. 기사 작위를 받은 뒤에 딱 한 명에게만 바칠 수 있는 서약인데.”
“한 명에게만요? 나인이 그걸 받는 쪽인가요?”
“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절 지켜 줄 사람을 고용하는 만큼 일종의 계약으로 서로를 묶어두는 겁니다. 생명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허술하게 굴면 안 되니까요.”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했어야죠.”
애쉬는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이 구슬을 단번에 입 안에 넣고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한 번 크게 오르내리고, 동시에 애쉬가 나인의 손을 잡아끌어 제 입가로 가져갔다.
“확실히 삼켰는지 확인해 봐요.”
“…….”
그가 입을 살짝 벌려 주었다. 입 안이 꽃잎처럼 새빨갛다.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손을 내어 줬던 나인은 순간 당황해 손을 잡아 뺐다. 애쉬는 금방이라도 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제 입 안을 훑게 해 주려는 듯 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애쉬에게서 유해하다는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그럼 난 이제 당신 거예요?”
“…….”
나인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가 눈을 접어 실실 웃었다.
“당신 거니까 이젠 아껴 주겠네요.”
매번 느끼는 건데, 이 남자는 말을 좀 이상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누가 누구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잘해 주셔야 아끼죠.”
“잘해 줄게요. 지금보다 훨씬 더요.”
“…….”
미안하지만 거절하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본격적으로 잘해 주겠다면 자신은 또 얼마나 귀찮음에 시달려야 할까?
“이젠 내가 나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 거잖아요.”
“저한테 누명 씌웠잖아요. 그게 잘해 주는 거예요?”
“그건… 당신이 먼저 도망치려고 했잖아요.”
“그래도 보통은 그런 이유로 사람을 경비대에 찌르진 않아요.”
여기서 별 경험을 다 해 본다. 유치장에 갇힌 친구들을 꺼내 주는 일은 종종 했지만 자신이 직접 그 안에 들어가 볼 줄이야…….
“미안하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봐줘요.”
그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약한 소리를 했다. 나인은 됐다고 고개를 두어 번 저으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억지로 사과를 받아 내서 무엇 하겠는가.
“가이딩은 할게요. 성관계까지만 가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에스퍼는 가이딩 없이 살 수 없다. 더군다나 애쉬는 만성 가이딩 부족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가 싫다면 굳이 할 필요 없다고 말해 준 것은 당장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사탕발림일지도 모르지만, 나인은 그것을 나름의 배려라고도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던 거겠지, 뭐.’
가이드는 체액에도 가이딩이 녹아 있다고 하니 여차하면 피를 좀 뽑아 주면 될지도 몰랐다.
“싫다더니.”
“그래도 어쩌겠어요. 할 건 해야죠.”
“난 책임감 있는 나인이 정말 좋아요.”
그가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평소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달큰한 미소였다.
“하나만 확실히 해 둬요. 저희 여전히 친구인 거죠?”
나인은 선 넘지 말란 말을 돌려 했다. 그가 제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앞으로의 우리 관계는 딱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애쉬는 입술을 씰룩이더니 손을 들어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전히 친구는 시켜 주는 거네요. 절교까지는 각오했는데.”
“원하시면 그렇게 하고요.”
애쉬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입을 놀려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신체 접촉이라고 정의된 행위를 하기 전에는 꼭 저한테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
이번에는 아무리 애쉬라도 말문이 막혔다. 나인의 말을 머릿속에서 곱씹던 애쉬가 허,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손잡는 거 빼고 하나하나 나인에게 물어보라고요?”
“네? 손잡는 것도요.”
“…….”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걸. 애쉬의 얼굴 위로 생각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진심이에요?”
제발 아니라고 해달라는 말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인도 여기까지 터치할 생각은 없었다. 지켜준다면 고맙기야 하겠지만 여태 하는 짓을 보면 애쉬가 그 부탁을 끝까지 철저하게 지킬 일은 요원해 보였기 때문이다.
“강요 아니에요. 어차피 그쪽은 제 의지를 과하게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못할 거고…. 계약의 본질은 존중이라면서요. 그럼 이 정도는 저도 그냥 믿을게요.”
애쉬는 그 말에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 듯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믿는다고 하면 무슨 말을 못 하겠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한참 입술을 움찔거리다 조그맣게 물었다.
“……일일이?”
“일일이.”
“…….”
애쉬는 한 대 맞은 듯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소꿉장난 좋지…… 좋아요…. 색다른 경험이네요. 아주 어렸을 때에도 못 해 본 건데.”
애쉬는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토 달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직접 두 장의 계약서에 나인이 말한 것을 한 줄씩 추가하고는 나인에게 보여 주었다.
꼼꼼하게 확인한 나인이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정리된 걸로 알게요.”
애쉬는 상황을 정리하며 잠겼던 문을 열었다. 입방아를 찧느라 진이 다 빠지긴 했지만 나인도 나름 만족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더니 속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가 끝나는 것만 기다린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는 답도 없다는 눈으로 애쉬를 힐끔거렸다.
‘하여간 각성자 놈들 사랑싸움에 등 터지는 건 나 같은 선량한 사람이라니까.’
변호사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물었다.
“얘기는 잘 끝나셨나요.”
“이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애쉬가 종이를 팔랑거리며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변호사가 그 말이 맞냐는 듯 나인을 돌아보았다. 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변호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의 에스퍼와 달리 초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또 자신이 없는 곳에서 놈에게 협박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변호사는 계약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인을 붙잡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빠르게 속삭였다.
“제 명함이에요. 만약 애쉬한테 맞거나 협박당하는 거면 언제든 날 찾아와요. 유선상으로는 법무 팀의 칼라일에게 연결해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강제로 체결한 계약을 무효화하는 건 저한테는 일도 아니에요. 여차하면 그냥 고소해 버리죠? 관련 경험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법적 분쟁 만들고 싶을 때 꼭 연락드릴게요.”
“나인, 다 들려요…….”
그런 말 하면 남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요? 애쉬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나인에게는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끝까지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변호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인은 칼라일의 명함을 소중히 챙겨 두었다. 애쉬는 틈만 나면 나인의 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렸고, 결국 이능까지 사용해 명함을 몰래 훔쳐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애쉬와 나인의 페어 계약 소식이 알려지며 센터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나는 것은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 * *
-제목: 애쉬 가이드 생겼다는데?
동생이 그쪽에서 일하는데 애쉬한테 가이드생겼대!
[댓글]
-노잼
-ㅂㅅ누가 속냐
-아ㅋ 어그로 이렇게 끄는 거 아닌데ㅋㅋ
-요새 어그로들 빠져가지고 글에 속이고자 하는 독기와 패기가 없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
-지금 매칭 기간도 아님 등신아 다음에 다시와ㅗ
⤷진짜야ㅠㅠ 동생이 전산등록 됐다고 곧 기사도 뜰거랬음 ㅠㅠ..
⤷뜨면 말해 할짓도 없나ㅋㅋ 개버러지아메바새끼ㅋㅋ
⤷어 씨발 떴어 떴으니까 죽기 전에 보러가든가~ 욕한마디 없이는 옹알이도 못하는 본투비 인간말종 빡대가리 아구창에 걸레를 쳐문 씹새끼야 욕은 너만 할수 있는게 아니란다 내일 세워질 니 묘비명에도 이름대신 잘나신 ip주소나 존나 새겨지길 간절히 기원함 응 니 평생업적 악플러
⤷⤷ㄷㄷ.. 미안해;;;
⤷⤷ㅋㅋㅋㅋㅋㅅㅂ 뼈도 못추렸네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제목: 그래서 그 가이드는 누군데
ㅇㅇ
[댓글]
-사실 나임
⤷엿
-쟤임
⤷니들 심심하냐ㅋㅋㅋ
-왜 아무도 모름???
⤷ㄹㅇ 한시간 넘도록 이름도 안 뜨는건 좀 심한데
⤷다들 놀라느라 바쁜듯....
⤷다른 에스퍼들은 팀가이드→페어가이드 과정 거치거나 자주 접점 있는 가이드라도 있어서 충분히 추론 가능했는데 애쉬는 짐작가는 사람도 없으니까...?
-이 정도면 기사부터 띄우고 지금부터 가이드 찾는 중인거 아님? ㅋㅋㅋㅋㅋ
⤷R=VD
-사람이 맞긴 한거냐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