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5. 가이드의 본분
각성자 페어를 위한 레지던스는 충분히 넓었다. 제법 넓은 침실이 하나에, 거실에는 작게나마 소파와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었고 주방 공간에는 무려 조그만 냉장고까지 비치되어 있다. 아, 시원해. 냉동실 문을 연 나인은 괜히 빈칸에 제 머리를 쏙 집어넣어보며 감탄했다. 아기자기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구성이었다.
나인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무척 두리번거렸다. 기숙사치고 상당히 훌륭한 시설에 감탄하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나인과 반대로, 애쉬는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나인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공간에 대한 흥미라고는 전혀 없었다.
“나인.”
“네?”
“짐이 그게 다예요?”
애쉬가 눈짓으로 아래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나인이 바닥에 내려놓은 짐 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혼자 가뿐히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가방에는 나인의 모든 짐이 들어가 있었다. 가방을 열어 봐도 크게 눈에 띌 것도 없었다. 센터에서 지원해 준 옷 서너 벌과 수첩뿐이다.
짐 정리를 도와주겠다던 옆방 사람도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의 단출한 짐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말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늘 준비를 하는 거군요.’
‘엥? 제가요?’
사실 전혀 아니었지만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사람들에게 짐이 그게 다냐는 말만 다섯 번을 들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인의 짐은 남들 생각만큼 적지 않았다. 그는 다 꺼내 둔다면 거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마법 스크롤이나 마법 약을 포함한 마도구였다.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쓰던 도구들을 하나도 풀지 않고 체체를 만나러 가다 사고에 휘말렸기 때문에, 그의 공간 확장 주머니에는 아카데미에서 쓰던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쓰기에는 부적합한 물건들이다.
“넵. 이게 다예요.”
설명하기 귀찮다. 애쉬에게 굳이 많은 것을 전부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보란 듯 가방을 열어 옷 몇 벌을 꺼내는 것만으로 가방을 비우자 애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불쌍해 보이는 모양이다.
“나인, 좀 와 봐요.”
그가 손을 까딱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제가 강아집니까? 왜 자꾸 와 보라고….”
툴툴거리면서도 나인은 몸을 돌려 애쉬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섰다. 어느정도 가까이 다가왔다 싶을 거리가 되자, 애쉬가 손을 내밀어 나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아도 한 번 균형을 잃은 몸이 기울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인은 어정쩡한 자세로 소파 등받이를 짚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뭐하자는 거야, 또.
“나 피곤한데 좀 안아 줄래요?”
“……예?”
“가이딩 해달라는 소리예요. 오늘 힘을 너무 자주 써서.”
별거 아닌 말을 묘하게 들리게 하는 것도 제법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중얼거렸다.
“저 좋아하는 티 좀 그만 내세요.”
“싫어요. 티를 내야 나인이 날 신경 써 주잖아요.”
“난 당신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아뇨, 됐어요. 그렇다 칩시다.”
말을 말자. 애초에 이 남자는 말이 통할 족속이 아니다. 나인이 자포자기해 입을 꾹 닫자 애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잘 해요. 혹시 몰라요? 나중에 당신도 날 좋아하게 될지도.”
“……제가 왜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기꺼이 어장 관리 당해 줄 테니까 좀 해 봐요.”
“…….”
이제 뭐라 할 기력도 없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제 말싸움은 그만하자. 나인은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겨대는 대신에 말을 돌렸다.
“그쪽 짐은 안 옮겨 와요?”
“아. 옮겨 온다고 하면 도와줄 건가요?”
“아뇨.”
나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애쉬는 “아, 너무해. 나는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하고 투덜대며 나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인은 소파를 짚은 쪽의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버텼다.
“씻을 거니까 좀 놔주시죠.”
“혼자 씻을 수 있어요?”
“…….”
남자의 눈가 근육이 움찔대는 걸 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 놀리려고 시동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이 변태 새끼가…….’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어질 말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나인은 금방이라도 주먹으로 남자의 정수리를 내리찍을 것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애쉬를 응시했다.
“알았어요.”
노려보기는. 그가 툴툴거렸다. 그러나 그건 전혀 알아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이딩 안 해 줄 거예요?”
“할 줄 몰라요.”
“나인은 가만히만 있으면 돼요.”
애쉬는 나인의 허리를 잡아 돌리더니 그대로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좀 안을게요.”
이미 끌어안고 나서야 통보하는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등 뒤가 온통 뜨끈한 이불로 둘러싸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 그냥 얌전히 있었다.
오늘 하루는 참 길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 피곤해서 그런가, 의외로 애쉬의 가슴이 안락의자처럼 안정적이고 편하게 느껴졌다. 같은 자세로 가만히 기대어 있으니 슬슬 졸렸다. 절로 하품이 터져 나왔다. 나인의 눈이 반쯤 감겼을 무렵, 애쉬가 물었다.
“졸지 마요, 나인. 나 심심해요….”
“아.”
나인은 자신이 꾸벅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며 숨을 집어삼키자 등 뒤에서 몸을 떨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는 얘기 좀 해 줄래요?”
“…….”
그 잠깐을 가만히 못 있는 걸 보면 집중력이 3세 아동 수준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나인은 언짢은 어조로 대답했다.
“어차피 또 재미없다고 하실 거잖아요. 반응이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해요.”
“그건 당신 이야기가 아니었잖아요.”
“그야…….”
애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동기들의 이야기나 자신이 봤던 연극 줄거리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다 해 주고 나면 애쉬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게 뭐가 재밌다고요.” 라는 대답을 돌려주곤 했다.
“난 나인의 얘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다른 얘기엔 관심 없어요.”
“하지만 별로 재미없으실 텐데요? 특별한 일도 거의 없고 너무 평범해서.”
“어떻게 평범했는데요?”
“……그냥 별다를 것 없는데요? 그야 당신은 게이트에도 들어가 보고, 괴물도 봤고….”
…죽을 뻔하기도 했고. 나인은 남자를 따라다니는 안개를 힐긋대며 뒷말은 내뱉지 않고 입안으로 삼켰다.
“아무튼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별의별 경험을 다 해 보셨잖아요. 그에 비해 저는 그냥 평범하게 아카데미 다니면서 공부한 게 전부니까.”
“공부는 잘했어요?”
“그냥 보통 정도는요.”
“그런 데선 뭘 배워요?”
“……여러 가지요.”
대충 여러 가지로 얼버무리자, 애쉬는 더 자세히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맞추고는 느리게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가만있자, 뭘 배웠었더라…. 나인은 허공을 보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마법진을 구현하는 법이나 마법 약 제조법…? 생물학이나 약초 관련된 것도 배웠고……. 그냥 마법약 제조랑 관련된 과목은 가리지 않고 전부 들었던 것 같아요. 약제부에 가고 싶어서요. 어쩔 땐 신청한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개인 과외 수업이 된 적도 있다니까요.”
“……개인 과외.”
“저는 마나 다루는 법을 몰라서 못 들은 과목도 많아요. 치료 마법 종류가 그나마 유일하게 비마법사도 접근이 쉬운 계통의 학문이거든요. 그런데 애쉬, 제가 이런 얘기 하면 알아 들으실 수 있으세요?”
“사실 잘은 모르겠어요.”
어찌 보면 이해 못하는 게 당연했다. 여긴 마법이란 개념이 없는 세계였으니까. 그 대신 이 세계의 학교에서는 다른 학문들을 가르칠 것이다.
“여기 학교에서는 뭘 배우나요?”
나인이 물었다.
“몰라요. 나는 학교 다녀 본 적이 없어서.”
“…….”
“너무 어렸을 때 각성했거든요.”
담백한 대답에 나인의 말문이 막혔다. 뭔가 못 할 말을 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럼 혹시 오늘 봤던 그 어린애들도 이르게 각성한 아이들인가요? 여기서 자라는 거예요?”
“그 애들은 사정이 좀 다르죠. 거주지가 이 근처라 초기 교육만 여기서 받고 집으로 다시 돌려보낼 거예요. 게이트 공략에 도움 될 만한 이능이 아니면 굳이 거둬 키울 이유도 없거든요.”
애쉬는 나인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이어 말했다.
“난 센터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능력과 가장 비슷한 이능을 갖고 있었거든요.”
“원하던 능력이요?”
“솔직히 첫 훈련에서부터 나한테 어디까지 기대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겠던데요.”
그는 눈을 한 바퀴 굴려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내 첫 훈련은 갓 발생한 방출형 게이트 앞에서 이루어졌어요. 나더러 처음 보는 괴물들이 기어 나오고 지나가던 행인 팔이 동강 난 와중에 게이트의 구조를 파악하라고 하더라고요.”
말을 하다가도 황당한지 그가 코웃음을 쳤다. 애쉬는 팔을 들어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창문이 있던 위치에 갑자기 레지던스 복도가 비쳐 보였다. 나인은 숨죽인 채로 그 광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또각거리는 사람의 발소리가 공간을 침범했다. 애쉬가 다시 팔을 내리자 그 자리는 다시 평범한 창문으로 돌아왔다.
“봤죠.”
“…신기해요!”
오늘 들어 거의 처음으로 나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단순히 위치만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공간 자체를 겹쳐지게 한다는 게 생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