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45)화 (45/63)

#45

“안녕하십니까.”

“으악!”

등 뒤, 그것도 아주 가까운 데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인이 화들짝 놀랐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회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군데군데 새치가 섞여 있어 거의 은백발에 가깝게 보였다.

낯선 사람이었다. 여기서 애쉬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내 가이드.”

방 안에 들어 있던 애쉬가 대신 대답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니 손님 대접 잘하고, 나인은 필요한 건 뭐든 말해요. ……그럼 잘 자요, 나인.”

전후 말의 온도 차는 아주 확연했다. 나인이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등이 훅 떠밀리더니, 이내 면전에 대고 문이 쾅 닫혔다. 애쉬의 태도를 황당히 여길 겨를도 없이, 중년의 남자가 호기심 어린 태도를 애써 숨긴 채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저택 관리인 어거스트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가이드시라고요? 센터에서 나오신 겁니까?”

분명 방금 전에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던 것 같은데 그새 속마음을 숨기고 평온하게 물어 오는 것을 보니 직업 정신이 투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처음 보지만 나인에게는 무척 익숙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인은 황궁의 시종들을 그의 얼굴 위로 겹쳐 보며 대답했다.

“나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센터에서 알게된 거 맞습니다.”

“가이드님이셨군요.”

어거스트는 고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실까요, 하며 나인을 복도 쪽으로 걷도록 이끌었다.

“별관에 새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별관? 나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애쉬가 옆방을 쓰라던데요.”

“……?”

어거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네. 분명 옆방이라고….”

어거스트는 조금 벙쪄 입을 살짝 벌린 채 잠시 굳어 있었다. 그 반응에 나인은 잠시 불안해졌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가 잘못 들었나? 나인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어 고민했다.

“물어보고 올까요?”

“아, 아뇨.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런데 그 방은….”

어거스트는 뒷말을 흐리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멍하니 굳었다.

“…….”

그는 묘한 시선으로 나인을 물끄러미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손을 내밀어 나인을 안내했다. 나인은 어거스트의 느린 보폭에 맞춰 걸으며 어두운 복도를 시선만으로 훑어보았다. 천장이 무척 높고, 물건 하나 없이 텅 빈 복도에서는 제 발소리마저 메아리처럼 크게 울렸다. 괜히 숨을 죽이게 된다.

철컥. 어거스트가 애쉬의 침실 옆 방문을 열쇠로 따서 열어젖히자 오래 관리되지 않은 문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밀폐되어 있던 장소 특유의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어거스트는 감탄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 방에 드디어 주인이 생기는군요.”

“콜록!”

퀴퀴한 공기에 기침을 하는 나인을 뒤로하고 태연하게 방에 들어선 어거스트는 커튼을 쳐 낸 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휘익, 하고 찬 바람이 들어오자 가구에 쌓인 먼지가 붕 떠서 휘날렸다. 어거스트는 먼지 쌓인 방을 둘러보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방과 이 근처는 잘 건드리지 않아서 많이 누추합니다. 평소에는 모두 잠가 두거든요.”

어거스트는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인 침대의 시트를 빼내어 손에 들고는 나인에게 눈짓했다.

“짐은 아무 데나 두시고, 이불을 교체하고 환기를 하는 동안 아래층에서 차라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방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준비하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는 소리였다.

애쉬는 방에 틀어박힌 뒤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새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나인은 어느덧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밀크티를 들었다.

“다른 사람은 없나요?”

“예. 관리인은 저밖에 없습니다.”

미친 소리였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을 한 사람이 다 관리한다고?

얼핏 봐도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은 건축 양식부터가 센터의 것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저택 내의 가구들 역시 철제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죄다 어두운 톤의 원목으로 만들어져 통일성이 있고 고풍스러웠다. 신경 쓴 구석이 많이 보이는 고저택이라고 생각했다.

“주인님께서 손님을 데리고 오신 것은 처음입니다.”

“그런가요?”

“예. 특히 그 방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주인님이 직접 손보고 꾸민 공간이라서요.”

어쩐지 다른 방들과 분위기가 좀 다르다 했다. 다른 곳들은 전체적으로 묵직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인데 비해 나인이 받은 방은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상당히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던 것이다. 얼핏 봤을 땐 자신이 쓸 방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위한 방 같았다.

“그 이후로 저도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래 방치되어 있어 청소 상태가 영 불량하지요?”

그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인이야 별 상관없었다. 감옥처럼 비좁던 방이 넓어지다 못해 광활한 정원까지 딸린 저택이 되었으니까. 체드가 자주 하던 말을 빌리자면 개이득인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대화 주제는 애쉬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그는 나인에게 애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적당히 부드럽고 향기로운 밀크티가 입맛에 맞았기에 나인도 지루한 기색 없이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어거스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인은 어리둥절했다. 나인이 아는 애쉬와 다른 사람을 설명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주인님은 많이…… 예민하시거든요.”

어거스트가 말을 순화하고 또 순화해 그의 주인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애쉬는 가이드 기피증이 있었다. 십 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그에게는 이상할 만치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가 없었고 그로 인해 사경을 넘나들 만한 일도 종종 있었다. 결국 애쉬는 아예 매칭 검사 자체를 기피하고 가이드란 가이드는 죄다 경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평소에 저는 별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인기척을 거슬려하시거든요.”

어거스트의 말에 따르자면 애쉬는 불면증도 무척 심했다. 만성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는 그는 감각도 예민하기 그지없어, 잠을 잘 시간에는 건물 내에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는 동물이 바깥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마저도 견디지 못했다.

때문에 어거스트는 그가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만 본관에 와 건물을 관리하고 애쉬가 돌아올 때에 맞추어 별관으로 다시 옮겨 가는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나인은 경악했다. 이 넓은 집에서 그럼 거의 혼자 지낸단 말이야? 기피할 게 따로 있지…. 이만한 곳을 혼자 관리하는 어거스트의 생각도 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게도 저택에는 집배원조차 들이지 않았고 손님을 데리고 온 적도 없으며 새가 머물 곳조차 없도록 정원은 나무 하나 없이 그저 황량했다.

훌륭한 옛 장인들의 손길이 닿은 가구가 들어찬 방들은 지금껏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다. 다른 조건 하나 따지지 않고 주위가 고요한 저택만을 고집해 통째로 사들였다는 것치고는 나인이 보기에도 상당히 가치 있어 보이는 가구들이 많았다.

센터 내의 에스퍼들이 애쉬를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하고 많았지만 그 가운데에는 너무 예민하게 굴기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가만히 있었는데 숨소리가 거슬린다고 한 대 맞았다는 에스퍼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흡연자가 애쉬와 게이트에 함께 들어가게 되면 냄새가 난다며 하도 처맞아, 나올 때쯤에는 아무리 골초라도 강제 금연을 하게 된다는 소리도 있었다.

좀 이상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물론 나인은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태도와 남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다른 것은 알고 있었다. 제게는 되도 않는 내숭을 떨면서도 딱히 그것을 최선을 다해 감추려 하지도 않는 게 특이하다 생각됐다.

아무튼 나인은 애쉬에게서 예민하거나 난폭한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성격은 좀 나쁜 것 같지만. 그래서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애쉬가 다른 이와 영혼이 바뀐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나인이 아는 그는 만사태평한 남자였다. 주변 평가나 상황에 대한 눈치는 조금도 보지 않고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다볼 수조차 없는 괴짜. 하지만 왜인지 그는 나인에게만큼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약하게 굴었다.

본능적으로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약하다.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이드가 들끓는 이능 세포를 억누르고 평온을 가져다주는 존재기 때문이었다.

‘그럼 애쉬도 그런 걸까?’

그가 자신을 특별하게 대하는 이유가 정말 에스퍼로서의 본능 때문일까. 가이딩이 마음에 들어서.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마음이 가는 건가.

다른 사람들에게 듣는 평가와 그가 나인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상반되어 있었다. 나인이 그에게서 조금이나마 다정함을 느꼈다고 말하면 그를 정신병 환자로 몰아갈 사람이 센터에는 수두룩했다.

애쉬를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인은 벌써 그의 처음을 수 개나 꿰찼다. 나인은 그가 다정한 태도로 대하는 처음이자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무려 애쉬의 첫 가이드기도 했다. 착각할 만한 여지는 이미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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