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런 주인님께서 바로 인접한 방까지 허락하시다니. 거슬리실 텐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네요.”
나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의 옆방에 머무는 것은 사양인데.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른 방을 달라고 하고 싶었다.
아카데미 동기가 바뀐 기숙사 방 때문에 한 학기 성적을 다 망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나인은 조만간 자신이 그 꼴이 나지 않을까 조금 걱정되었다.
기숙사에서 동기의 옆방을 쓰던 사람은 무척 예민하고 깔끔을 떠는 성격이었다. 아침이 되면 방문 틈새로 ‘옆방인데요. 너무 시끄럽습니다. 쿵쿵대는 소리가 인간의 것이 아닌데 죄송하지만 코끼리를 키우시는지 여쭙습니다.’라는 쪽지가 끼워 넣어져 있었다.
기숙사 사감을 통해 불만 제기를 한 것도 수십 번이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성적은 떨어지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빠진다며 우는소리를 하던 동기는 결국 다음 학기에 옆방을 쓰던 사람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
결말이 왜 그렇게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너무 예민한 사람을 만나면 사람의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드디어 주인님께도 가이드가 생기다니 안심입니다. 실은 다 늙은 저보다 주인님이 훨씬 일찍 돌아가시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노집사의 진심 어린 걱정은 나인으로 하여금 작은 가책을 느끼게 만들었다.
애쉬와 나인의 페어 계약은 그저 순수하게 가이딩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서로 동등하게 주고받는 대가가 있었으며 계약은 나인이 원래 살던 차원으로 돌아가는 순간 만료되어 끝이 난다.
나인은 애쉬에게 가이드로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십 년이 넘게 맞는 가이드를 찾지 못한 애쉬. 나인은 그런 그에게 처음 생긴 가이드였다.
‘아직 실감나진 않지만.’
그런데 만일 자신이 돌아가고 나면 애쉬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예. 뭡니까?”
어거스트가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인은 기본적으로 윗사람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을 기만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전 공간미아입니다. 애쉬가 절 구해 줬어요.”
어차피 끝까지 숨길 만한 것도 아니다. 지금 말하고 털어 버리는 게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센터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기도 했으며, 이야기를 듣자 하니 생각보다 소문 퍼지는 속도가 빨라 머지않아 센터 바깥에도 널리 알려질 것 같았다. 어거스트도 여기저기 물으러 다닐 필요 없이 인터넷만 켜면 그와 자신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가이드라는 말은 거짓말 아니에요. 저한테 그런 재능이 있다고는 하더라고요.”
“…….”
“…전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거예요. 그 전까지는 애쉬와 약속한 것도 있으니 그를 도울 수 있지만, 평생 책임진다고는 장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애쉬에 대한 어거스트의 안도를 단번에 깨 버리게 되어 미안하지만 나인은 당장 제 가책을 더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을 할까? 아니면 어쩔 수 없다며 쓰게 웃을까. 나인은 담담히 어거스트를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어거스트는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가이드님께서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되었죠?”
“한 달 정도 됐어요.”
한 달…. 어거스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예?”
“힘들지 않으세요?”
“……?”
“한 달이면 아직 적응보다는 주변 눈치를 많이 볼 때죠. 가이드님께서도 아직, 조금은 외롭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자신은 괜찮다고 둘러대려던 순간 나인은 왜인지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말 괜찮은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어거스트는 그에게서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소탈하게 웃어보였다. 세월을 걸어온 이의 한마디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들은 같은 말이라도 좀 더 깊이감 있게 들리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은 막연한 불안감이 존재했다. 힘들지 않을 리 없다.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웠다. 늘 붕 떠 있는 듯한 부유감에 나인은 가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그의 말이 맞았다. 벌써 적응을 한 게 아니다. 동요하는 것처럼 안 보이도록 놀라는 모습을 감추는 데 조금 더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사람도, 환경도. 이 세계에 온전한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 없이 얼마나 고단하셨을까요.”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도. 조금은 적응했다고 생각해도 결국 나인은 이방인이었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갈 때, 나인만이 돌아갈 곳이라고는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괜찮지 않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어거스트는 말없이 눈가가 붉어진 나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휴지를 내밀었다. 한참 뒤, 푹 숙인 고개 아래로 굵은 눈물이 간헐적으로 뚝뚝 떨어졌다. 집에 가고 싶어. 무서워.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고립감이 급격하게 몰려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발개진 눈으로 식탁만 내려다보는 청년을 어거스트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로했다. 침묵은 나인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때로는 시간이 사람을 위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금세 괜찮아지는 일이 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울렁이던 기분도 어느덧 가라앉았다. 눈앞은 여전히 흐리고 코끝이 아렸지만 머릿속은 아까 전보다 훨씬 차분해졌다.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내내 침묵하던 어거스트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저도 한때 공간미아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제가 제일 잘 알지요.”
“…….”
이번에는 나인이 놀랄 차례였다. 근래 들은 이야기 중에 최고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또다시 경험하게 된 나인이 입술을 달싹이며 어버버 했다.
어거스트는 밤이 깊어 가도록 본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세계에서는 나인의 상황과 가장 유사한 삶을 겪어본 남자의 이야기를, 나인은 귀 기울여 경청했다.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겁던 밀크티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 * *
“좋은 아침.”
“…애쉬?”
애쉬의 담당의, 다니엘은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업무 시작 전부터 진료실에서 애쉬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어제 하루 종일 센터뿐만 아니라 온 인터넷까지 뜨겁게 달구었던 장본인이었다. 그것도 무려, 1층에서 잡무를 보던 공간미아와 함께….
다니엘도 센터 내에 여러 가지 소문이 도는 것은 알고 있었다.
‘걔 매일같이 공간미아 얼굴 보러 다니는 거 알아?’
‘그 새끼 웃던데… 소름 끼쳐….’
‘자기 가이드라고 하고 다닌대. 지 입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걸 우리 누나가 직접 들었다고 했어.’
‘설마 싶어서 나도 가서 만나 봤는데 알고 보니 걘 가이드도 아니더라고. 애가 때가 덜 타서 그런가 어려서 그런가, 좀 귀엽던데. 이해가 가긴 하더라.’
다니엘도 일주일 동안 별의별 소문을 다 들었다. 센터 사람들은 소문을 정말 좋아하고 남 얘기를 즐긴다. 물론 자신이 그 소문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인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애쉬가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나인을 찾아가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다니엘은 무려 나인이 병동 1층에서 잡일을 한다는 말을 애쉬에게 전한 장본인이었다.
나인이 가이드라는 얘기는 센터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도 의견이 분분해 사실 여부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다니엘도 나름의 생각은 있었다. 그는 ‘애쉬가 정신이 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의 일로 대부분의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왜 애쉬랑…? 합의한 거 맞아? 혹시 공간미아 마약 한대?’
그리고 어제부로 나인이 마약을 했다는 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하여간 하루라도 헛소문을 안 퍼뜨리면 못 살아가는 사람들다웠다. 무슨 그딴 소문을. 다니엘은 그저 아연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의 페어 계약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 역시 많이 놀랐지만, 곱씹어 보니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능이었나 보군.’
왜 그러나 싶었는데 애쉬도 본능적으로 첫눈에 제 가이드를 알아본 것이다. 그가 공간미아와 어울리려고 별 이상한 짓들을 다 하고 다닐 때는 어리둥절했지만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괜히 이능 파장이 안정된 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고…. 결국 애쉬의 검사 결과는 정확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다니엘 역시 일주일 만에 페어 계약을 맺은 것은 지나치게 이르다고 생각했다. 저 새낀 미친놈이 따로 없다.
“여긴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냐?”
다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애쉬에게 물었다.
게이트 요원들은 게이트에서 나오고 나면 일주일을 꼬박꼬박 센터 병동에 출석해 검진을 받아야 했다. ‘게이트 감기’라고 불리는 병의 잠복기가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잠복기가 다 지나 여기 올 필요도 없는 애쉬가 또 제 발로 진료실까지 기어들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