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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47)화 (47/63)

#47

날짜를 착각했나? 용건 없이 놀러 올 놈도 아닌데.

“뭐긴 뭐야. 약 달라고.”

“……뭐?”

다니엘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 가이드 생겼다며?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순간 애쉬가 흠칫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퍽 징그럽다는 듯 눈을 찡그린 채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혹시 당신 나 좋아해?”

“뭐?”

씨발, 미친놈.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결혼까지 했다고. 애쉬는 가끔 이런 식으로 다니엘의 인내심을 자극하고는 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미리 말 안했다고 서운해 하는 것 같길래. 은연중에 날 좋아하나 싶었지.”

“안 좋아해.”

다니엘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했다.

“아니. 내 말은…… 이제는 가이드도 생겼으니 네 가이드한테 가이딩을 받으면 해결이 되잖아.”

“그거랑 이건 별개지.”

“…….”

“별개야.”

“……뭐가 별개야, 이 또라이 새끼야!”

다니엘은 순간의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 애쉬에게로 던졌다. 애쉬는 이능을 사용해 날아오는 물건을 다시 다니엘의 책상 위로 이동시켰다. 애쉬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 좀 해.”

“…….”

지금 진정해야 할 게 누군데? 아무나 데려와서 좀 물어보자! 다니엘은 어이가 없어 씩씩거렸다.

애초에 폭주 억제제, 즉 가이딩 필은 비상약이다. 에스퍼의 폭주 증상을 빠르게 억누르기 위해 개발된 약인 만큼 효과는 확실했으나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가이딩 수치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폭주 세포를 약물로 파괴해 버리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많이 민감한 에스퍼의 경우,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기까지 내내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각혈하는 사례도 수두룩했다. 그러니 웬만하면 약을 먹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고 가이딩을 받는 것이 낫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애쉬에게는 이것 외에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은 다니엘도 인정하는 바였다.

가이딩 필로 인해 받는 고통보다 실제 가이딩을 받을 때가 더 효율도 나쁘고 극심한 불쾌감을 느낀다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가이딩 필을 복용하는 사람은 애쉬 외에는 없었다. 그가 하도 가이드 기피증이 심하니 할 수 없이 약을 처방했던 건데, 전담 가이드가 생긴 이상 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페어 맺은 지 하루밖에 안 된 놈이 지금 뻔뻔하게 뭐라고? 약이랑 가이드가 별개?’

다니엘은 또 울컥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 여기 온 거 공간미아도 알아?”

“아니. 몰래 와서 금방 가 봐야 해.”

“같이 오지 그랬냐. 네가 이딴 터무니없는 요구 하는 거 보면 걔도 참 좋아할 텐데.”

애쉬는 빈정대는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요새 휴대폰은 뭐가 제일 괜찮아?”

“왜 말을 돌리고 난리야.”

“요즘 애들은 하나씩 다 갖고 있다던데. 그럼 나인도 갖고 싶지 않을까 해서.”

“……너는 요즘 애가 아니고?”

“그래서 내 것도 오늘 같이 사러 가려고.”

“…….”

“나인이 좋아할까? 사실 좀 밉보인 게 있어서 만회하고 싶은데.”

잠깐.

“야, 너 전자파 때문에 휴대전화는 머리 아프다며?”

“그걸 믿네.”

다니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지금까지 머리 아프다, 신경에 거슬린다, 온갖 핑계를 다 대 가며 십 년 넘게 제 휴대전화 하나 마련하지 않던 놈이 이제 와서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고?

……아이고, 아이고 혈압. 저 개씹새끼를 어쩌면 좋을까. 다니엘은 목뒤를 잡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경고했다.

“공간미… 아니, 네 가이드에게 들키기 전에 얌전히 꺼져. 이건 계약 해지 사유로도 충분하거든….”

세상에 어느 가이드가 자신을 두고 가이딩 필을 처먹으려는 에스퍼를 가만히 두겠는가. 다니엘은 애쉬의 이러한 부탁이 제게도, 그리고 나인에게도 실례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귀책사유가 이런 거면 애쉬, 너한테만 손해라고….’

다니엘은 애쉬를 동생 비스무리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공간미아의 상황도 참 안됐지만, 다니엘에게는 나인보다는 그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애쉬가 더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애쉬는 나인 때문에 십 년 넘게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휴대전화를 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웃기도 하고, 무엇보다 늘 무기력하던 놈이 일상에 활력이 생긴 것처럼 요새는 무척 활기차 보였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애쉬가 가이드 하나 생겼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여간 그만큼 그에게 나인이 비중 있는 존재라는 거겠지. 에스퍼란 종족이 원체 그렇다. 다니엘은 그런 놈에게 십 년 만에 처음 생긴 그의 가이드를 잃게 둘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불쌍한 공간미아 잡아다 가이드까지 만들었으면 됐지, 또 왜 이러는 건데?”

“말하면 약 줄 수 있어?”

“애쉬!”

다니엘이 언성을 높였다. 쓰레기 마약 중독자도 식상해서 안 할 말을 애쉬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책상 위의 명패를 잡아 들었다. 이능력자 순환계 전문의, 다니엘 리. 자랑스러운 자신의 이름이 각인된 명패는 꽤나 묵직했다.

“……아니다, 됐다.”

하지만 애쉬를 상대로 하면 자신만 진땀을 빼다 끝날 게 뻔했기 때문에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애쉬는 이미 명패가 날아올 것을 대비해 이능을 써 다니엘의 뒤로 대피한 후였다.

…이럴 줄 알았지. 꼭 나만 힘 빼게 되더라니까. 다니엘이 화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너 밖에서 약 중독자 소리 듣는 걸 알기는 해?”

가이딩 필이 보급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사건. 다니엘은 그 사건들을 일어난 시간순으로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대학을 다니고 있을 무렵 바로 옆 동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속속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많은 미성년자나 동네 노숙자들이 마약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던 가이딩 필을 구해 복용하다 가이딩 필을 구성하는 성분인 ‘루시드’에 중독되었다.

비록 루시드는 다른 마약에 비해 중독성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마약류로 분류되는 만큼 관리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건의 책임자들은 기자 회견 자리에서 고개 숙여 사과했고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이는 이후 가이딩 필의 유통 절차가 무척 까다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해당 사건은 건수가 어마어마했고 미성년자들이 엮여 있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 일 때문에 아직까지도 가이딩 필에 대한 이미지 자체는 무척 좋지 않다.

그리고 다니엘은 ‘루시드 사건’을 한 학기 과제로 잡고 조원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다 흥미가 생겨 이능력자 의학과 쪽으로 빠지게 된 케이스였다.

에스퍼와 일반인의 신체가 같지 않다고는 해도 혹시 모르는 것이었다. 십 년을 꾸준히 가이딩 필을 복용해 온 애쉬에게는 언제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가 이미 루시드에 중독되었다고 해도 납득이 될 것 같았다.

다짜고짜 화를 내려던 다니엘은 순간 입을 작게 벌린 채로 굳었다.

“너, 코피….”

“아.”

애쉬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코 아래를 슥 훔쳤다. 검붉은 선혈이 손등에 쓸려 넓은 범위로 번졌다. 그럼에도 코피는 여전히 멎지 않고 번진 자리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흰 타일로 된 진료실 바닥에도 피 몇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별거 아냐. 피곤해서.”

“…….”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얼버무리려 했지만 다니엘은 속지 않았다. 이래 봬도 저 인격 파탄자 골칫덩이를 십 년이나 혼자 전담해 온 의사의 감이라는 게 있었다.

뭔가 있구나. 그는 단번에 그 사실을 직감하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다른 놈들이 나인은 가이드가 아니라던데. 너 지금 센터 상대로 사기 친 거면 징계감이야 이거.”

“사기는 무슨.”

애쉬는 한심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매칭 검사 결과지 없이는 절차도 못 밟는데 내가 무슨 수로 사기를 쳐….”

“요점만 말해. 걔 가이드 맞아?”

“맞아. 기계에도 가이딩 수치 출력은 문제없이 잘되고. 다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걔 등급이 나한테 턱도 없어서 문제인 거지.”

“등급?”

등급이 뭐 어떻길래. 애쉬의 말을 듣자마자 다니엘은 망설이지도 않고 전산에 나인의 이름을 검색했다.

‘나인.’

……아, 찾았다. 나인 엘로윈. 전산에 등록이 되어 있기는 했다. 어제 날짜로 기록이 갱신되어 있는 나인은 ‘각성자’. 그 안에서도 ‘가이드’ 형질 쪽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등급은….

“너 미쳤어? 매칭률이 8%?”

다니엘이 기겁하며 소리치자 애쉬가 피식 웃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은은해서 기분 좋아.”

“가이딩이 은은하면 어떡해! 그리고 네가 F등급 따위랑 페어를 왜 맺어?!”

이걸 안 말린 사람들도 죄다 불러와 문책해야 했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F등급 가이드 한 명이 애쉬를 어떻게 혼자 감당해? 다니엘이 기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무슨 목적이야. 가이딩 말고 다른 꿍꿍이 있는 거 맞지? 이거 공간미아랑 합의된 것도 확실해? 무슨 말을 좀 해 봐!”

미치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펄펄 날뛰는 다니엘을 보고도 애쉬는 태연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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