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다니엘이 책상 위에 널린 서류를 뒤지다 원하는 정보가 있는 종이를 살짝 옆으로 비껴 나가게 했다. 그 위에는 약재 창고의 좌표와 교대 시간 따위가 적혀 있었다. 위치를 알았으니 교대 시간 따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애쉬의 이능은 이러한 쪽으로도 상당히 특화가 되어 있었다.
“들키지 마라.”
“들킬 것 같나 보지?”
그가 코웃음을 쳤다. 피 칠갑을 한 얼굴이 호러 그 자체였다. 여전히 코피는 멎지도 않았는데 뭐가 좋다고 처웃는지 모른다. 다니엘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잠은 좀 자냐? 좀 피곤해 보인다.”
“어제 꿈을 꿔서 그런가.”
“무슨 꿈.”
“옛날 꿈.”
“……”
애쉬의 악몽은 그의 고질병인 불면에 세트처럼 딸려 오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지 십 분만 되어도 발작하듯 튀어 오르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듯했다. 다니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애쉬를 살폈다.
“뭘 봐.”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사람이 걱정을 해 주려고 해도 초를 치고 난리야.”
“눈빛이 너무 재수 없길래.”
“걱정하는 눈빛이라고!”
다니엘이 황당해하며 소리쳤다. 걱정해 준 보람도 없게 만드는 놈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재수 없는 거야. 진짜 부모도 아니면서 언제까지 내 부모 노릇 하려고 그래?”
“……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젠 나도 무리 안 할 거야. 나인 덕분에 숨이 좀 트여.”
“…….”
그 말에 다니엘은 모든 전의를 잃었다. 뭐라고 따지고 들 생각이 씻은 듯 사라진 것이다. 한발 물러나서 보니 애쉬는 그가 지금껏 본 그 어느 모습보다도 훨씬 생기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결국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애쉬였다. 본인이 좋다는데 자신이 무슨 권리로 그를 말린단 말인가. 애쉬는 더 이상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근데 전화하면 화면에 나인 얼굴이 뜨게 하는 건 어떻게 설정해?”
“……연락처 저장할 때 사진 넣으면 돼.”
“어떻게 넣는데.”
“일단 휴대폰부터 사고 나서 못 하겠으면 가져와.”
방금 했던 생각은 취소.
“그리고 화장실 가서 세수하고 가라. 얼굴에 피 다 번져서 보기 흉해. 공간미아가 보면 까무러치겠다.”
다니엘은 콧등까지 내려온 안경을 치켜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애쉬가 고개를 끄덕인다.
“또 봐.”
그는 뒤돌아서 진료실을 나갔다. 두 사람의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탁. 애쉬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다니엘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보기 싫은 모양새로 엎어질 뻔했다. 애쉬에게서 처음 보는 면모였다. 죽을 듯이 아파도 참고,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하고 있던 애쉬가 저런 변화를 보이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다니엘은 늘 애쉬의 건강을 걱정해, 당장은 아프더라도 미래를 위해 매칭 검사를 받으라고 얘기했지만 막상 그에게 가이드가 생긴다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애쉬는 무척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미련도 없이 공기처럼 증발해 사라져도, 이상하다기보다는 ‘역시 그렇게 됐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취미라고는 없고 늘 무기력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딱히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어린애답지 않게 눈이 죽어 있어서.
‘숨이 좀 트여.’
동정으로 돌보기 시작한 관계였지만 다니엘은 그때 애쉬를 가만히 두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처음으로 내딛는 발걸음을 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가로막을 뻔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공간미아에게 그저 고마웠다. 어이없게도 저딴 말에 자신이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 * *
1층에 뻘쭘하게 앉아 애쉬를 기다리던 나인에게 누군가가 다가서서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커다란 은테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쳐 쓴 남자는 나인과 눈이 마주치자 확신을 가지고 손을 내밀었다.
“11지부 이능 연구소의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가이드님, 저희 몇 번 통화했죠?”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다 싶더니. 이름을 듣고 나니 유선상으로 몇 마디를 나눈 기억이 난다. 나인은 “아, 그 주치의님.” 하고 알은척을 했다. 다니엘이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 위에는 그의 소속과 함께 ‘다니엘 리 박사’라고 쓰여 있었다.
“혹시 가이드님께서 휴대폰을 마련하시면 그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연락처요?”
나인이 고개를 갸웃하자 다니엘은 나인이 착각할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손을 들어 보였다. 왼쪽 약지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가이드를 긴급 호출하려면 연락 수단이 필요하니까요. 일단 지금 애쉬에게는 긴급 연락처가 없지만 훈련에 변동 사항이 생겼을 때나 당신 에스퍼가 중태에 빠졌을 때 페어 가이드를 호출하는 게 최우선이라서요. 괜찮으시다면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 긴급 호출도 하나요…?”
연락처 그런 거 없는데. 만들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애쉬는 나인에게 무엇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모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나인이 곤란한 듯 말을 흐리자 다니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새로 하나 마련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어차피 곧 생길 것 같긴 하지만….”
그가 우스운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며 픽 웃었다.
“애쉬는 금방 올 겁니다. 세수하러 갔거든요. 저희가 만난 건 그 자식한테 비밀입니다.”
그가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은밀하게 중얼거렸다. 왜 비밀로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락 수단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드리면 되나요?”
“예. 저한테 말하셔도 되고 센터 직원 누구에게나 등록해 달라고 부탁해도 됩니다. 아, 단말기는 웬만해선 항상 켜 두시고요.”
다니엘은 애쉬와 달리 말을 빙빙 돌리지도, 개기지도 않고 순순히 말을 듣는 가이드가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가이드가 되니까 기분이 이상하죠?”
“……아니라고는 못 하죠.”
나인의 솔직한 대답에 다니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응할 겁니다. 다들 처음에는 그래요. 하필이면 첫 매칭 상대가 애쉬라는 게 좀… 아니, 많이….”
“…….”
“그래도 가이드님은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인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웃기지도 않는다. 그 전에 할 말 다 해놓고서 마무리만 잘 맺으면 다인 줄 아나? 그의 말에 신뢰성이라고는 참새 눈곱만큼도 없었다.
“매칭률 때문에 말이 많죠?”
“높은 수치는 아니니까요.”
“가이드님,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8%는커녕 다른 가이드들과 애쉬의 매칭률은 1%를 넘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검사를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체질적으로 그 자식 몸은 가이딩을 잘 못 받아들여요.”
“…….”
“8% 정도면 애쉬도 ‘아, 이거 잡아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저희끼리는 그가 당신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게 아니냐고 내기까지 했었다니까요.”
나인은 차마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는다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걱정하는 말이야 지겹도록 많이 들으셨을 테니 저는 다른 말을 드리겠습니다.”
“…….”
“애쉬를 잘 부탁드려요.”
그가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염치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애쉬의 가이드가 된 이상 나인은 누가 뭐래도 센터에서 중요한 존재가 된 거라고 다니엘은 말했다. 그는 휴대용 패드에서 무언가를 검색해 그래프를 화면 가득 띄우더니 나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애쉬의 이능 파장 그래프였다. 들쑥날쑥한 그래프 모양에 나인마저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병동에서 서류 정리를 하며 종종 볼 수 있던 에스퍼들의 것과는 모양 자체가 너무 달랐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애쉬는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예요. 애쉬 곁에서 파장이 잘 맞는 가이드가 지속적으로 가이딩을 넣어 안정시키고 나면 매칭률도 자연스레 올라갈 겁니다. 다른 페어의 경우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끌어 올리는 데 한 달밖에 소요되지 않았어요. 노력 여부에 따라 발전 속도도 상당히 다르죠.”
“…….”
“각성자 페어 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지만…….”
다니엘은 지난 한 달간 애쉬가 병동에 꾸준히 출퇴근을 하게 만든 원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아마 당신 마음에 달린 문제 같군요.”
* * *
거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애쉬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인터넷에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애쉬를 향한 공격성을 내보였다. 하지만 실제 거리에서는 그에게 죽어라 시비를 걸며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휴대폰을 꺼내어 들어 사진을 찍으면 찍었지, 싫은 말이 대놓고 들려오지도 않았다.
“옆에 누구야?”
“글쎄. 처음 보는데.”
하지만 애쉬에 대한 호기심은 그와 동행한 나인에게까지 옮겨 왔다. 나인은 긴장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번 외출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인은 손을 뻗어 애쉬의 소매를 꽉 쥔 채로 세게 당겼다. 애쉬는 긴장한 나인의 표정을 보고는 반항 없이 순순히 그에게 끌려와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