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옷 시중 때문에 나인은 가이딩을 핑계로 애쉬에게 오전 내내 끌어안겨 있어야 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부담되시겠지만 적극적인 가이딩 부탁드립니다.’
주치의 선생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차피 필요할 때마다 가이딩을 해 주는 것은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던 의무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스킨십이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 나인과 달리 애쉬는 무척 자연스럽게 굴었다.
‘또 저러네.’
신경 쓰지 않은 사이 또 한 무리에서 뒷담화가 시작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애쉬와 얽히게 되어 유감이라고 하던 이들이 이제는 에스퍼 하나 잘 물어 다행이라며 이죽거린다.
‘물긴 뭘 물어, 씨발. 언젠 나더러 불쌍하다더니.’
어이가 없었다. 말 바꾸는 게 아주 선수급이었다. 막상 본인들한테 애쉬를 떠넘기면 싫어할 거면서 제게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나인의 물음에 체드가 신이 나서 대답을 가로챘다.
“어쩐 일이긴. 우리도 훈련 있어서 왔지! 근데 이 개새낀 뭘 야리는 거야. 뭘 꼬나봐?”
“서브 가이드가 몸살이 났다고 동생 팀에서 지원 요청을 받아서요. 체드, 아무도 없는데 무섭게 혼잣말하지 마.”
“…….”
확실히 성격은 다르지만 어딘가 하는 짓이 닮았다. 죽이 척척 맞는다. 애쉬를 노려보며 괜히 시비를 거는 체드와 달리, 리온은 생글생글 웃으며 애쉬와는 눈도 안 맞췄다. 애쉬 역시 그들 남매를 신경도 안 썼다. 욕을 해도 들은 체도 안 하고 하품까지 쩍 하고 만다.
여전한 사이였다. 태도 변화 없이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모습이 여전해서 오히려 안심이 됐다.
“그럼 나인, 이따 봐요. 첫 훈련 힘내고요.”
“수고해!”
두 사람이 나인을 등지고 그들의 팀 쪽으로 걸어갔다. 애쉬는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나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쟤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별 의미 없는 투정이었다. 나인은 대충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팀에 들지 않고 단독 체제를 유지하는 애쉬와 달리 체드는 프로젝트 팀에 들어 있었다. 그의 팀은 구성원 다섯 명 모두가 강화계 에스퍼였다. 체드는 신체 부위를 강화해 물건을 쉽게 부수는 신체 강화형 이능을 가졌고, 일시적으로 타인이 사용하는 이능의 위력을 높이도록 강화해 주는 이능 강화 에스퍼도 있었다.
에스퍼 팀은 보통 한 명의 메인 가이드를 배정받는데, 필요한 경우 서브 가이드 몇을 더 두기도 했다. 공공 가이드 팀 소속인 리온이 오늘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서브 가이드의 몸살 때문이었다.
에스퍼들은 오랜만에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애쉬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애쉬는 그저 만사태평했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나인의 어깨 위에 턱까지 기댄 채, 어디라도 눕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그런 애쉬에 비해 다른 에스퍼들은 벌써부터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커다란 트럭 안에는 무언가 가둬져 있는 듯 간헐적으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들짐승이라도 사로잡아 둔 건가 싶었다. 다들 뭔가 하느라 바쁜데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싶어서 나인은 조금 마음이 촉박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애쉬를 보았다. 애쉬도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할 말 있어요?”
“……!”
나인은 급히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까, 깜짝이야.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순간 당황해서 그랬다. 어쩐지 멍해진 기분이다.
“내가 신경 쓰여요?”
그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아뇨.”
나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충고했다.
“안는 건 상관없는데 표정관리 좀 해요.”
“내 얼굴이 왜요.”
“티 좀 내지 말라고요. 사람들이 자꾸 뭐라 하잖아요.”
“부러워서 그래요.”
애쉬는 방금 전 했던 제 말을 그대로 인용해 돌려주었다. 설마 진심으로 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인은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한다고? 웃기는 소리. 고깝거나 신기해서 쳐다보는 거겠지.
“가이딩을 못 해서 걱정인 거죠?”
“……네?”
“아까부터 가이드들만 쭉 훑어보다 한숨 쉬고 그랬잖아요.”
“…….”
제대로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던 게 겉으로도 비쳤나 생각해 보니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인은 조그만 목소리로 “조금요.” 하고 대답했다.
‘짜증 나.’
나인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정말 끔찍하도록 싫었다. 그깟 가이딩 하나 나보다 잘한다고 저리 우쭐대는 꼴이라니.
미친놈들. 나 보고 불쌍하댔잖아. 말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도 돼?
“잡아요.”
나인의 어깨에 뺨을 묻은 채 구부정하게 기대어 있던 애쉬가 똑바로 일어서더니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시야에 굳은살 박인 애쉬의 손바닥이 들어왔다. 잡았을 때의 감촉이 제법 거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손 군데군데에 자잘한 흉터도 많았고 손가락 마디가 굵게 불거져있기도 했다. 나인이 곧바로 손을 쥐지 않자 그는 빨리 잡아달라는 듯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갑자기 손은 왜 달라고 하는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인은 얌전히 반대쪽 손을 들어 애쉬의 손바닥 위에 얹어 두었다. 애쉬가 손가락을 벌려 나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깍지를 낀 채 손을 꽉 쥐었다. 얼마 안 지나 나인은 어제의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이질적인 에너지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덩달아 움찔거렸다. 그것이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신체를 한 바퀴 돈 에너지는 자연스레 애쉬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나인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어제의 짧은 경험만으로 나인에게서 가이딩을 뽑아 먹는 법을 터득한 애쉬가 가볍게 손을 놓으며 명쾌한 듯 말했다.
“자, 해결됐죠? 나인, 당신 가이드 맞아요.”
“해결이 되긴 뭐가 됐다고….”
제 입장에서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능력 조절을 못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가이딩 자체로 건강 상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건가?’
나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와 오늘 제게서 가이딩을 뽑아 갔음에도 애쉬를 둘러싼 안개는 여전히 나인의 눈에 보였다. 아니, 오히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짙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멀찍이 떨어져 이것저것 지시하던 훈련 교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여 주십시오. 훈련 대기 들어갑니다!”
각자 딴짓을 하던 에스퍼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애쉬도 애착 인형처럼 끌어안고 있던 나인을 놔주었다.
“좀 살 것 같네….”
그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등 뒤에 남자의 따끈한 온기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도움이 됐다면야 다행이지만. 겨우 그에게서 벗어난 나인이 뻐근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주변은 온통 숲이었다. 분위기 돌아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넓은 숲에 들어가게 되는 것 같았다.
“미리 말 좀 해 주시지….”
나인이 중얼거렸다. 가이드의 훈련은 개인 가이딩 훈련과 에스퍼와 함께 받는 훈련으로 나뉜다. 하지만 나인의 경우 애쉬가 아니면 가이딩을 다루는 방법조차 알 수 없다. 따라서 혼자 개인 훈련을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므로 모든 스케줄이 애쉬의 일정에 맞추어 짜이게 되었다.
“일단 들어가면 최소 하루는 노숙해야 하는데 많이 힘들 것 같으면 빨리 끝내 줄게요.”
“빨리 끝낼 수가 있어요?”
“좀 무리하면? 그 대신 쓰러질 수도 있긴 한데….”
“누가요?”
“나죠.”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인은 혈색이 도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당신이 무리하는 동안 저는 뭐 해요?”
“보조 배터리처럼 옆에 붙어 있는 거죠.”
애쉬는 나긋한 목소리로 나인의 현 위치를 정의했다. 보조 배터리…. 나인이 입 안으로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곳 사람들이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며 기기들을 충전하는 도구라고 알고 있다. 스스로 가이딩을 할 줄은 모르지만 타의에 의해 가이딩을 빨아 먹히는 것만 가능한 나인을 그것에 비유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이대로 있다간 아무 발전도 없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다. 나인은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달라지고 싶었다. 애쉬가 첫 훈련부터 가이딩실이 아닌 야외 훈련장으로 자신을 데리고 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에요. 빨리 끝낼 필요 없으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나인은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듣기론 꽤 곱게 자랐다던데 괜찮겠어요?”
“누가 곱게 자랐대요.”
“애지중지 자란 왕자님이라 침대 아니면 못 잔다던데?”
“왜 그런 소문이…. 저 아무 데서나 잘 자요.”
나인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자님 황자님 하고 불러대던 것들을 가만히 뒀더니 이런 소문이 다 퍼지는구나 싶었다.
“가요, 나인.”
커다란 손이 나인의 머리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듯 북북 쓰다듬으니 얇은 머리카락이 붕 뜨며 머리 위에 까치집이 생겼다. 나인은 애쉬의 손을 탁, 쳐내고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켰다.
내내 소중한 듯 끼고 있던 공간미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애쉬….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힐긋대던 사람들은 제법 상냥해 보이는 모습에 기절할 듯 놀랐다. 상냥함과 애쉬는 반의어다.
저 새끼 쥐약 먹었나 봐.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외로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다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