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그가 웃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 농담도 참. 아무튼 목숨이 하나인 나인은 얌전히 애쉬에게 몸을 맡겼다. 하지만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 그때마다 등 뒤에서는 애쉬가 즐거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어떻게 싸우고 있을까?’
소리만 들으면서 상상해 봐도 장면이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며 전투 마법사들은 자연스레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물론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축제 날에는 상품을 걸고 마법 결투로 실력을 겨루기도 하지만 그것이 마법사들의 본업이 될 수는 없었다. 그저 축제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마법사들의 마법 결투도 멋있었지만,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자들의 진짜 전투는 현실감이 더할 것이다. 이능을 이용한 근접전은 또 얼마나 근사할까?
훈련이 끝나면 훈련 과정을 촬영한 영상을 보여 주며 개선할 점을 점검한다고 들었다. 지금 에스퍼들의 전투를 직접 보러 갈 수는 없으니 끝나면 꼭 나도 보여 달라고 해야지. 나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결심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다, 얼굴에 들러붙은 낙엽을 떼어내고,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청설모를 구경하다 보니 슬슬 다리에 쥐가 날 때도 된 것이다. 애쉬는 뭘 하려나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태평하긴….’
또 그새 잠들다니. 나인은 기다렸다는 듯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책을 한 권 꺼내어 들었다. 방에 있던 책꽂이에서 발견한 고서에서는 여전히 먼지 낀 종이 냄새가 났다. 여기는 그가 읽어 보지 않은 종류의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얼마 안 되는 좋은 점 중에 하나였다.
책 페이지가 백 장쯤 넘어갔을 무렵, 등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꼬대려니 싶어 못 들은 척 넘기려고 했지만, 등에 닿아 있는 애쉬의 몸이 움찔대는 게 느껴져 그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
나무줄기에 뒤통수를 기댄 채 졸던 남자의 피부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축 늘어진 주먹은 핏줄까지 불거질 정도로 꽉 쥐고 있었는데, 숨을 힘겹고 짧게 내쉬는 애쉬의 가슴팍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유독 정수리 쪽으로 구름이 끼기라도 한 듯 검은 안개가 많이 몰려 있었다.
꿈자리였다.
순간 나인은 그가 어젯밤에도, 그저께도 꿈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저렇게 짙은 악몽이라면 보통 독한 종류가 아닐 것이다. 애쉬를 흔들어 깨워 악몽을 몰아내는 수도 있었지만 요란한 엔진음을 내던 차 안에서까지 꾸벅꾸벅 졸던 걸 보면 이대로 자게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 있다.’
나인은 그를 깨우는 대신, 주머니 속을 뒤져 무언가를 찾았다. 그는 벌어진 애쉬의 입 안에 포장지를 벗긴 사탕을 밀어 넣었다. 무형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혼자 자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부모가 종종 사 가고는 하는 물건이었다.
아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일을 꿈에서 마주할 것이다. 좋은 기억을 마주한 아이들이 혼자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더 이상 길몽 사탕도 필요하지 않다.
이는 과거의 기억에 기반해 무의식으로 그 기억을 끌어내는 하급 꿈 마법이었다. 꿈 마법에 향기로운 감미료와 설탕까지 섞이면 더욱 효과가 좋아진다.
물론 이런 유치한 걸 나인이 제 돈으로 산 것은 아니었다. 체체를 보러 갈 때마다 그녀가 나인에게 한 아름씩 안겨 줬는데 주위에 마구 나눠 주어도 항상 한 주먹씩 남고는 했다. 그녀는 늘 나인에게 사탕을 자루째로 가득 쥐여 주며 말했다. “좋은 꿈 꾸렴, 아가.” 하고.
‘내 나이가 몇인지 잊으신 게 분명해.’
나인은 매번 사탕을 받을 때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툴툴거렸다. 하기야 체체는 마흔이 넘은 황제와 황후마저도 어린아이 취급하듯 했으니 그녀의 눈에 나인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일부러 깨지 말라고 사탕까지 넣어 준 건데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애쉬는 정말 얼마 되지도 않아 눈을 떴다. 내리깔린 눈꺼풀이 올라가며 드러난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흐렸다.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나인을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순간 미묘한 표정이 애쉬의 얼굴을 스쳐 간 것도 같았다. 애쉬는 몽롱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
손아귀에 뺨이 단단히 붙들렸다. 조물조물. 애쉬는 나인의 뺨을 마음껏 만지작거리다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꿈인 줄 알고.”
그는 입 안에 든 사탕을 굴리며 나인이 읽고 있던 책을 향해 잠깐 시선을 주더니 또 금세 신경을 껐다. 축 늘어져 있던 팔이 나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막 잠에서 깨어 따끈따끈한 몸이 등 뒤를 포근하게 감쌌다.
“깜빡 잠들었네…. 깨우지 그랬어요.”
“어제 제대로 못 주무셨어요? 아까 보니까 차에서도 조시던데.”
“내려갈까요?”
“…….”
왜 말을 돌리는 건가 싶으면서도, 나인은 대답 대신 책을 덮었다. 여기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애쉬가 내려가기로 정했다면 내려가는 게 맞았다. 어디까지나 나인은 애쉬를 보조하는 가이드일 뿐 본 훈련의 주체는 애쉬였으니까.
그가 잠들지만 않았어도 좀 더 빨리 내려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애쉬는 늘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번갈아 하다가 아주 빠르게 싫증을 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나무줄기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애쉬는 나인의 끄덕임에 갑작스레 태도가 돌변했다. 나인의 허리를 덥석 감아쥐더니 몸을 돌려 높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휘이익. 중력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악!”
나인이 숨을 집어삼키며 짧게 소리 질렀다. 이렇게 내려간다는 말은 없었잖아! 눈앞이 아득해졌다.
순간 나인의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쳐 갔다. 처음으로 승마를 하던 날,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날, 학년 대표 임명장을 받던 날, 체체에게 최고급 인공 마석을 선물받던 기억….
각종 좋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마지막으로 애쉬가 웃는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열이 올라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나인은 정신을 번뜩 차렸다. 그는 결코 남자의 기억이 일생의 마지막 기억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인을 옆구리에 낀 채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애쉬가 나인을 쥔 팔에서 힘을 풀었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땅에 발을 디딘 나인이 바들거렸다.
‘죽는 줄 알았어….’
나인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선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심호흡을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애쉬는 무릎을 짚은 채 바들바들 떠는 나인을 조금 미안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미안……. 놀랐어요? 이능 너무 남발하지 말라길래.”
“누가요?”
“의사가요.”
“…….”
나인은 화를 내려다 말고 납득했다. 의사의 말은 듣는 편이 좋다. 애초에 처음부터 나무 같은 데에는 올라가지 않는 편이 나았을 듯싶었지만….
“한 팀만 남을 때까지 숨어서 버티자면서요?”
“가만히 있으니까 너무 졸려서 안 되겠어요. 나 혼자 있을 땐 상관없는데 내가 조는 사이에 나인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 버리면 어떡해요?”
“…….”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건 조심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죽으면 안 되지. 애쉬는 입을 앙다문 나인을 빤히 응시하다 “겁주려던 건 아니었고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가 나인의 팔을 쥐어 들었다. 커다란 손이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쥐자 느낌이 묘했다.
“이제 보니 근육은 겨우 살아 있을 정도로만 남아 있네요. 운동이라고는 안 하고 살았나 봐요.”
“평범한 편인데요.”
“평범하지 않아요. 아주 말랑말랑해요.”
“……당신이 일반인 기준에서 너무 근육질인 거겠죠. 보통 사람들은 이게 맞아요.”
“총도 더럽게 못 다루고.”
“그거 조금 못한다고 인생 안 망해요. 그리고 저 건강하거든요?”
“이 정도로는 안 돼요.”
그야 일상이 죄다 이런 일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을 현역 에스퍼들에 비하면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군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제 체력이 대단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 정도는 되었다.
나인은 자신을 무슨 뼈 꼬챙이 정도로 취급하는 애쉬를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았다. 자신은 정말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일 뿐이었다. 애초에 남에게 이런 지적을 듣는 것도 처음이다.
“게이트에서 써먹으려면 좀 굴러야 하는데 나인을 굴릴 수는 없고….”
“저 게이트에도 들어가나요?”
“겁나요?”
“…….”
솔직히 말해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실제로 게이트가 뭔지 제대로 본 적은 없었지만 들은 게 있었으니까. 그 안에서 괴물도 나오고 사람도 몇 명 죽어 나왔다는데 그런 데를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 생각하니 조금 소름 끼쳤다.
“괜찮아요, 나인. 당신 털끝 하나 다치게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수로요.”
나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굴려 애쉬를 쳐다봤다. 글쎄요…. 애쉬는 쭉 찢어진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짙게 웃었다.
“여차하면 시간이라도 돌릴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