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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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은 망설임 없이 걷는 애쉬를 열심히 따라가느라 바빴다. 숲속이라 발밑이 험했지만 그에게는 발 닿는 곳이 길이나 다름없었다.
길을 가다 붉은 팔찌를 찬 에스퍼와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나인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소녀는 붉은 머리칼을 높게 묶은 채였다. 체드네 팀원이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이 이번이 첫 훈련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팀원들은 다 어디 가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나인이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 나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
“히익!”
그녀는 혼자였고 나인의 뒤에 선 애쉬를 보기 무섭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줄행랑을 쳤다.
“으아아아! 살려 주세요!”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면 근처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들릴 텐데 말이다. 나인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잡으러 안 가요?”
“내버려 둬요. 살려달라잖아.”
애쉬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쭉 찢어진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에스퍼의 묶은 머리가 마치 붉은 여우의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걸 보며 나인은 저 사람에 비하면 애쉬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냥꾼 같다고 생각했다.
“저 애 이능은 다른 에스퍼의 이능을 반 등급 정도 높게 강화해 주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땐 무용지물이니 무작정 피하는 거죠.”
“…….”
하지만 이쪽이 뭔가 없기로는 더하다. 애쉬도, 자신도 제대로 된 무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데……. 나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인.”
“……?”
나인은 발밑을 주의하며 걷다 말고 애쉬를 돌아보았다. 그는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말을 건넸다.
“만약 이곳이 게이트 안이었고 우리가 마주친 게 변이 괴생물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야겠죠.”
당연한 거 아니야? 나인의 대답에 애쉬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마주치지도 않는 게 나아요.”
“…….”
그럴 거면 질문을 그렇게 하질 말든지. 이미 마주쳤다는 상황을 가정했으면서, 모범 답안이 질문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이라니.
말은 쉽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마음먹는다고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더라면 나인은 애쉬와 얽히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이트 안에 분포한 괴생물체들에게도 일종의 영역이 있어요.”
“갑자기 웬 게이트 얘기예요?”
“말했죠, 이건 생존 훈련이라고.”
그랬나. 나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애쉬의 말에 집중했다.
“게이트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조건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소리죠. 아까 걔처럼 도망을 치든 나무 위에서 상황이 지나가길 버티든.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이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라고요.”
애쉬는 구구절절 설명하더니 기다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땅에 쿡 찍었다. 그리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아까 전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게 게이트 내부고 게이트 안의 작은 원은 각종 괴생물체들의 영역이라고 쳐요.”
그는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크기가 다른 작은 원 여섯 개를 그려 넣었다. 원은 서로 겹쳐 있기도 했고, 아예 동떨어진 데에 있기도 했다. 애쉬는 작은 원 안에 숫자를 차례로 써넣으며 게이트 안에도 생태계라는 게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방출형 게이트는 세계의 파편이었다. 괴생물체들끼리의 영역이 겹치는 장소도 있고 영역 다툼을 하느라 저들끼리 싸우는 일도 잦았다.
“십 년을 넘게 게이트를 드나들었지만 매번 출몰하는 괴생물체들이 동일하지는 않아요. 작년만 해도 처음 보는 생물들만 가득한 방출형 게이트가 발견된 적이 있었고요.”
그리고 애쉬는 커다란 원의 한가운데를 콱 내리찍으며 말했다.
“이게 핵. 인간으로 치면 심장 같은 거예요. 이걸 찾아 없애야 나갈 수 있어요.”
게이트의 핵을 찾아 파괴하면 게이트에서 빠져나가는 문이 열린다. 핵은 사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몬스터 웨이브 현상이 일어나는 게이트의 경우에는 우두머리 몬스터가 게이트의 핵 자체였다.
특수 지형이나 게이트의 규모, 그 외에도 각가지 변수들이 존재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다시 말해 핵을 파괴하기만 하면 돼요. 그 외의 다른 요소와는 접점을 최소화하는 게 가장 좋죠.”
그제야 나인은 이 훈련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렸다. 애쉬의 말에 따르자면 가장 중요한 건 생존. 의미없이 위험 요소와 무작정 싸우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팀이 가지고 있는 신호 발신 장치가 바로 게이트의 ‘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는 건…. 게이트 속 ‘변수’의 눈에 띄지도 않는 편이 공략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소리인 듯했다.
‘일리있네.’
나인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듯하자 애쉬가 만족스레 웃으며 말했다.
“원하면 좀 더 자세하게 알려 줄까요? 게이트에 대한 거나 생존법 같은, 이런저런 거.”
“배워둬서 나쁠 것 없겠죠.”
“공짜는 아니에요. 수강료는 받을 거라고요.”
“저 돈 안 들고 나왔는데요?”
차라리 벼룩의 간을 떼먹어라. 나인의 떨떠름한 반응에 애쉬는 조금 웃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래도 실전 경험이 있는 에스퍼라고, 애쉬는 은근히 쓸 만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미처 감추지 못하고 남긴 흔적 같은 것을 아주 잘 찾아내는 편이었다. 바위 위에 남은 희미한 발자국을 슬쩍 만져 보는 것 정도로 발자국의 주인을 알아냈고, 흙이 마른 정도로부터 이 발자국이 남겨진 시각을 추측해 냈다.
그리고 애쉬는 이 근방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고 그 말은 맞아떨어졌다. 나인은 무척 가까운 곳에서 일부 에스퍼들이 근접전을 벌이다 흩어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상대에 대해 잘 알아 두는 것도 중요하다며 각 팀의 에스퍼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비록 그가 이름을 기억하는 에스퍼는 몇 명 없어 ‘눈 작은 놈’이나 ‘그 대머리’ 등이라는 묘사로 얼굴을 떠올려 내야 했지만 말이다.
애쉬는 에스퍼처럼 뛰어난 감각이 없는 나인도 활용 가능한 생존 수칙을 몇 가지 알려 주었다. 하지만 너무 막연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말이 쉽지, 남의 흔적을 쫓으면서 제 흔적은 남기지도 말라니요. 그게 가능해요? 사람인데?”
나인이 불만을 토로하자 애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익숙해질걸요. 전에 다른 공간미아들도 처음엔 싫은 소리 했는데 닥치니까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과도 같이 훈련했어요?”
“걔들은 각성자가 아니라 같이 훈련 할 시간은 못 냈어요. 그 대신 게이트에서 말귀 못 알아먹을 때마다 맞으면서 배웠….”
“……?”
맞으면서? 그 말에 나인이 눈에 띄게 흠칫하자 애쉬는 말을 바꿨다.
“비유적인 표현이었어요. 나 사람 안 때려요.”
“…….”
나인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냥 토 달지 않고 애쉬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치직, 직.
숲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지직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뒤 무감각한 목소리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보호 결계 일시적 해제 진행 중. ……해제 완료. 잠시 후 생포된 괴생물체가 투입됩니다. 위험도 D등급.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 올 클리어 전에 결계는 해제되지 않습니다.
“괴생물체….”
“겁먹을 필요 없어요.”
애쉬는 사람을 상대로 하여 숨어 다니는 것은 연습에 불과하며 진짜 그들이 피해야 할 것은 괴생물체니 실전과 비슷한 환경에서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결국 본 훈련은 게이트 공략을 위한 시뮬레이션이었으니까.
“그런데 위험도를 나누는 기준이 뭐예요?”
나인이 물었다. 각성자들의 등급은 센터에서 측정한 결과 중 몇 가지 항목을 종합해 수치에 따라 나누어지지만 괴생물체의 등급은 그렇게 정해지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괴생물체들을 일일이 인터뷰하지는 않을테고…. ‘안녕하세요, 혹시 당신은 위험한 편인가요?’ 하고 괴물을 인터뷰하는 사람을 생각한 나인은 입가를 움찔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D등급부터는 공격성을 탑재한 개체예요.”
“공격성이요?”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낮은 등급인 F등급 괴생물체들은 동물에 비유하자면 토끼나 새 정도로 생각하면 돼요.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외부인을 피해다니고 공격성도 전무하다는 뜻이죠.”
그는 가장 무해한 개체부터 거슬러올라가며 차근차근 위험도 등급의 기준을 설명했다.
위험도 E등급의 경우, F등급과 비슷하게 공격성은 없지만 생물 자체의 몸집이 작지 않다.
그리고 D등급부터는 그것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든 것들에게 공격성을 보인다. B부터 D등급까지는 그것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에 따라 나뉜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게이트 내에서 그것들에 의한 사상자가 나온 경우에는 위험도 A등급으로 올라간다.
“S등급도 있기는 한데 그런 게이트는 요즘 잘 안 열려요.”
“그건 뭔데요?”
나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상자를 낸 괴생물체를 A등급으로 분류하는데 그보다 더한 게 있다는 건가?
“공략이 완료되지 않고 게이트 안에서 모든 각성자들이 사망해 전멸하는 일이 두 번 이상 반복되면 게이트와 내부 괴생물체의 등급이 바뀌어요. 그게 S등급이에요, 나인.”
“…….”
나인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니 게이트가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더욱 더 확고해지는 것 같았다. 장난처럼 하다간 진짜 다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