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방송 이후 애쉬는 좀 더 신속하게 움직였다. 접점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답게, 두 사람은 사람 그림자는커녕 괴생물체를 마주칠 일도 전혀 없었다. 애쉬는 이능 사용을 최소화하면서도 넓은 숲을 마치 제 앞마당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이곳 지형 자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해 지기 전에 야영할 장소를 찾아봐요.”
“벌써요? 아직 밝은데요.”
“산에서는 순식간에 해가 떨어지니까 미리 자리를 봐둬야 해요. 다 어두워지고 나서도 지금처럼 돌아다닐 수 있겠어요?”
납득이 갔다. 평지도 아닌 숲에서 해가 다 지고 난 뒤에 움직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애쉬의 조언은 마냥 생소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은 꼭 사냥꾼들의 조언과도 닮아 있었다. 학과 실습 때문에 뒤쪽 숲에서 야영할 때 만난 사냥꾼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목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된다. 특히 괴생물체가 근처에 있으면 숨소리도 조심하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에도 발밑을 들여다봐라. 목적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둘 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으니 비슷한 건 당연했다.
사냥감에게 들키지 않게 흔적을 최소화하는 법, 체취를 감추는 법, 배설물이나 발자국 등의 흔적을 보고 그들의 위치나 출현 시각 등을 추측하는 법. 모두 한 번쯤은 배운 것들이다.
나인은 진지한 얼굴로 애쉬가 알려 준 생존 수칙을 습득했다. 힘들다는 투정 하나 없이 생각보다 잘 따라오니 애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여기, 아까 지나온 길 아니에요?”
나인이 물었다. 아까 전에 저기 놓인 바위에 앉아 잠깐 쉬어갔던 것 같은데 왜 여기로 다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뒤로 돌아가지 않고 길이 난 곳으로만 쭉 걸었던 것 같은데.
“어.”
바위 근처에 축축한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아까 이 근방을 지날 때만 해도 못 보던 것이었다. 나인이 근처의 나뭇가지를 주워 물웅덩이를 건드려 보니, 투명하게 고여 있던 물이 마치 달팽이 점액처럼 나뭇가지에 붙어 주욱 늘어졌다.
“…….”
확실히 일반적인 물은 아니었다. 점액에 닿은 나뭇가지 끝부분의 색이 얼마 안 지나 희게 바랬다. 웅덩이를 기준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근방의 나무들에서도 희끗한 색이 보이는 부분이 존재했다. 나인은 무릎을 짚고 쪼그려 앉아 웅덩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폈다.
그새 환경의 변화를 감지한 나인을 애쉬는 기특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지나온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나인은 의외로 관찰력이 좋았다.
“게이트에서 생포가 가능한 괴생물체는 몇 종류 없어요.”
애쉬는 나인이 여전히 점액을 나뭇가지로 뒤적이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게 뭐냐면….”
“독 슬라임인 것 같은데요.”
나인은 애쉬가 점액의 정체를 설명하기도 전에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군데군데 색이 바랜 나무 줄기들을 확인하고는 확신했다. 지나간 자리에 남는 점액이 일부 물체를 부식시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여기도 슬라임이 있나 보네.’
하기야 그건 하급 몬스터 중에 가장 개체 수가 많으니까. 아주 지긋지긋할 정도로 널렸지…. 해충으로 치면 바퀴벌레 급이다. 나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슬라임?”
애쉬는 난데없는 단어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괴생물체의 이름은 그것이 최초로 발견된 게이트 코드 뒤에 알파벳을 붙인 특수 코드로 정해진다. 따라서 게이트 경험이 없는 나인이 괴생물체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는데, 어째서인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 때, 근처 나무 위에 달려 있던 스피커가 다시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보호 결계 일시적 해제 진행 중. …해제 완료. CODE 3. 부상자는 제자리에서 대기해 주세요. 구조 팀을 투입합니다.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의 훈련 진행이 어려울 경우 위와 같은 짧은 방송과 함께 그들을 데리고 나갈 구조 팀이 투입되기도 했다. 길이 엇갈리지 않게 제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말은 덤이었다. 애쉬의 바람대로 다른 팀끼리는 치고받고 잘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나인이 근처의 흙을 가져와 점액 웅덩이 위를 골고루 덮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뭔가를 물어보려던 애쉬는 타이밍을 놓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인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신호 발신 장치가 파괴된 블루 팀의 훈련이 종료됩니다. 남은 팀은 레드 팀, 그리고 그린 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블루 팀의 발신기가 파괴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작은 절벽 아래 사각지대에 몸을 감추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던 때였다.
‘슬슬 밤인가.’
울창한 숲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아도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 돌아다니기는 힘들 것 같았다. 겨울밤의 숲은 위험하다.
나인은 애쉬가 내려놓았던 커다란 배낭을 힐긋 바라보았다. 배낭에는 야영에 필요한 도구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 다리도 아팠고, 이곳은 저지대라서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슬라임이나 다른 에스퍼들의 눈에 띌 일도 없을 듯했다.
“나인, 오늘은 이만 여기서 쉬어요. 해도 지는데 상대 팀도 더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 같고.”
애쉬는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와 불을 붙일 낙엽을 모아왔다. 그가 가방을 뒤적여 불을 붙일 라이터를 찾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어째서인지 이미 그럴듯한 모닥불이 완성된 뒤였다.
“춥다.”
“…….”
나인은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불 근처에 가져다대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불은 어디서 난 거지? 애쉬는 의아했지만 어떻게 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야영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바람이 들지 않게 단단히 텐트를 치고, 물을 끓여 식량을 데워먹었다.
숲에서는 해가 정말 금방 떨어졌다. 하늘이 캄캄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정돈을 마치고 조금이나마 쉴 수 있었다.
“아, 어깨가 좀 뻐근한데.”
애쉬가 어깨를 슬쩍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인이 주섬주섬 침낭을 펼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인, 이리 와요.”
“…….”
다시 그를 힐긋 쳐다보자 애쉬가 손가락을 까딱한다.
“수강료, 몸으로 갚아야죠.”
“…….”
피곤한데. 그나마 몸으로 갚으라는 말이 이런 의미라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나인은 뭐 씹은 얼굴이 되어 순순히 애쉬가 손짓하는 대로 자리를 옮겼다.
애쉬의 뒤로 가서 살포시 앉자 그가 상의를 단번에 벗었다. 희미한 흉터가 남은 등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인은 그의 등판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흉터를 내려다보며 신기해했다. 어쩜 이렇게 위치가 같을 수가 있지? 너무 오래되어 희게 변색된 선의 느낌까지 비슷했다.
“어깨 좀 주물러줘요.”
“혹시 노출증 있으신 거 아니죠?”
“아닌데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그럼 나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줄 건가요?”
“옮으니까 다 나을 때까지는 얼씬도 안 할 건데요.”
“…….”
남자의 눈이 샐쭉해졌다. 얼마 안 지나 서운하다고 징징댈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러기 전에 옷 좀 입으라고요….”
“왜요, 막상 몸 보니까 꼴려요?”
“…….”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게 더 소름끼쳤다. 나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런 날이 오면 자살할게요.”
늘 그랬듯 능글거리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나인. 내 앞에선 농담으로라도 죽는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농담으로 받아 줄 것 같은 남자가 웬일로 정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으면서…. 나인은 제가 툭 내뱉은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다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정했다.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는 직업 앞에서 너무 생각 없는 말을 해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진심은 아니었어요. 조심할게요.”
“인정이 빠르니 좋네요.”
애쉬는 그제야 픽 웃더니 건조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겸사겸사 가이딩도 받을까 싶어서 그래요. 제대로 몸으로 갚을 게 아니면 얌전히 시키는 거나 해요.”
그리고 그는 정말 한 시간 내내 나인을 알차게 부려 먹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자신도 피곤해 죽겠는데 조금이라도 손을 쉬면 눈치를 줬다. 제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이니 내심 조금은 봐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인, 혹시 자요? 손이 안 움직이는데.”
“안 자요!”
나인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별로 뭉치지도 않은 어깨를 샌드백처럼 팼다. 애쉬가 이건 안마가 아니라 화풀이라는 것을 눈치챌까봐, 몇 번 그러다가 말고 다시 손을 펴서 그 자리를 주물렀지만. 남자를 몰래 패니 그나마 짜증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 * *
밤이 되자 기온이 내려가 으슬으슬했다. 침낭을 펴고 텐트 안쪽에 자리를 잡은 나인이 모닥불 앞에 앉은 애쉬를 바라보았다. 그는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는 불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안 자려나.’
왜 여태 저기서 저러고 있지? 먼저 자도 되나 싶어서 눈치를 보던 나인은 졸음기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애쉬. 저 먼저 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