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셨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정우는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빛에 적응하며 눈을 뜨려고 했지만 마치 풀로 붙여 놓은 듯 두 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은 며칠 여행이라도 한 것처럼 피곤했고 온 몸이 침대에 푹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잘 떠지지 않는 두 눈을 잘 움직여지지 않은 손으로 겨우 비볐다. 비비니까 시야가 좀 트이는 것 같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환하게 켜진 형광등이었다.
밖은 이미 해가 졌는지 깜깜했고 자신은 침대위에 누워 있었다.
"잘 잤어?"
언제나 보아오던 형의 얼굴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형..."
"너 진짜 잘 자더라. 어떻게 한 번도 안 깨고 잘 수 있냐?"
정우는 낮에 형의 다리를 베고 졸던 게 생각났다. '그때 이후로 계속 잠든 건가...'라고 생각하며 정우는 자신의 한심함에 혀를 찼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생각외의 통증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괜찮아?"라고 묻는다.
"아..아..괘, 괜찮아...이거 왜 이러지?"
"정말 괜찮아?"
"으응..."
형의 얼굴에서 걱정하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리곤 평소답지 않게 씨익 하고 웃는 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 진짜 바보군."
무언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신과 형은 전라인 채 한 침대의 이불속에 있었다. 아니, 그것뿐이면 괜찮다. 침대 옆의 탁자위엔 꿈속에서 집주인이 사용했던 이상한 도구와 먹다 남은 녹차가 담긴 컵, 그리고 담배 한 갑.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던 정우는 곧바로 자신의 몸에 눈을 돌렸다. 상체는 온통 울긋불긋했고 조금만 허리를 움직여도 허리를 타고 격통이 밀려왔다. 더구나 온 몸은 마치 마스터베이션을 잔뜩 한 듯 힘이 쭉 빠져 있었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정우는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더니 경악의 눈으로 형을 바라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오렌지주스에 탄 최음제는 맛있었나 모르겠네?
효과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된 약이었나 봐."
형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점심식사에 약을 너무 많이 탄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지.
솔직하게 반응하길래 단순히 잠든 것 뿐이라는 걸 알고 안심했지만 말야.
하지만 줄곧 그런 일을 당하는데도 한번도 눈 뜨지 않다니 정말 굉장한걸."
형의 손이 스물스물 기어와 정우의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정원 형!!"
정우가 절망감에 휩싸여 소리 질렀다.
꿈이 아니었던 거다.
자신을 만지며 농락하던 아랍인도,
이상한 기계로 흥분시키던 집주인도,
모자장수의 강간도,
왕의 펠라치오도...
정우는 머리가 빙빙 돌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정우가 울먹이며 외쳤다.
형은 가만히 정우의 몸 위로 겹쳐와 정우가 날뛰지 못하도록 등 뒤로 팔을 돌려 꽉 끌어 안았다. 굳이 그렇게 까지 안해도 하체가 망가지고 정신적으로 충격 받은 정우가 날뛰는 건 무리였지만 형은 정우의 몸을 있는 힘껏 안았다.
"이제 돌이키기엔 늦었어."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제, 좋은 형노릇하는 거 지쳤어. 나답지 않게 쩔쩔매는 거 이제 관두련다.
너는 둔하고 멍청해서 평생가도 내 맘 따윈 몰라.
끝까지 가면을 쓰고 괴로운척하며 네게 속마음을 털어 놓을까 생각해봤지만
어차피 그 가면은 오래못가.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짓은 좋은 형의 가면을 쓰곤 절대 못하거든."
"가령 이런거라든지..." 하고 말을 맺은 형이 들어 보인 건 꿈에서 집주인이 사용했던 이상한 기계였다. 웃어 보이는 형의 얼굴은 꿈속의 모자장수와 닮아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똑같은 얼굴이었다.
형은 얼어있는 정우를 보며 빙긋 웃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알다시피 오늘 부모님은 안 오셔."
형은 부드럽게 자신의 하체를 정우에게 밀착시키며 위 아래로 비볐다.
"흥분하는 네 모습은 실컷 즐겼으니 이번엔 우는 모습이 보고 싶어."
한 손으로 엉덩이를 주무르며 다른 한 손으로 정우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깊이 넣어 그 얼굴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쾌감에 절어서 우는 모습이 보고 싶어......"
형은 정우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이불 속에서 밧줄을 꺼내었다.
빨래밧줄이 아닌, 용도는 모르겠지만 튼튼한 밧줄로 정우의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결박한 형은 빙긋 웃으며 정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실은 아까 네가 잠들어 있을 때 이걸로 묶은 적이 있는데...
역시 이런 건 깨어 있을 때 해야 제 맛인 것 같아서 말야."
정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아니다. 마음속에서 이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침대 위에서 형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던 한가로운 한 때는 어느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고작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인데. 오늘 오후만 해도 그렇게 평화로웠는데...
'나도 형이 좋아...
하지만 이건...이건 아냐. 꿈은 꿈으로 끝났어야 하는 거라구...
현실에서...형이 나한테 이래선 안돼는 거야...!'
꿈속에서는 제법 대담한 행동도 했던 정우였지만 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까지 믿어왔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느끼자 눈물이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런 정우를 보고 빙긋 웃던 형은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자신의 손수건으로 정우에게 재갈을 물렸다.
"오늘은 부드럽게 할게."
방긋 웃는 형의 얼굴은 낯설었다. 정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연약한 살을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 과연 자신의 형인지 의심스러웠다. 다만 이게 꿈이 아니라는 생생한 현실감이 정우의 정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눈물로 흐려진 두 눈이 뜬 건지 감은 건지도 판단이 안 되는 정우에게 쓸쓸하게 멀어져 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스쳐지나갔다. 유일하게 이성적이었던 검은 정장을 한 형의 뒷모습은 뿌옇게 흐려져 어느새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