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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넌 누구지? (2/23)

02. 넌 누구지?

오랜 불면증으로 하루 짧은 수면시간이 전부였건만, 얼마 만인지 알 수도 없이 오랜만에 제대로 잠을 잔 기분이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보드랍고 따뜻한 뭔가에서 풍기는 기분 좋은 향에 취해 죽은 듯이 잤다.

얼굴에 닿은 부들부들한 느낌이 좋아 몇 번 볼에 비벼보자 귀찮다는 듯 품 안에 뭔가가 깊게 파고들어 왔다.

뭐지?

눈이 번쩍 떠졌다. 급하게 이불을 걷고 내려다본 차형욱은 순간 숨을 멈춰버렸다.

길게 흘러내린 은빛 실타래가 진한 남색 침대 시트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둘러싸인 작은 머리가 자기 품에 파고들어 섹섹 고운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같은 은빛의 속눈썹은 하얀 볼 위에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살짝 열린 입술은 옅은 분홍빛 젤리처럼 탱탱하고 달콤한 내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으응.

이불을 걷자 들어온 햇살이 싫은 듯 귀엽게 미간을 찡그리며, 작은 입술에서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차형욱은 무의식중에 다시 이불로 빛을 가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하얀 얼굴이 펴지며 편안한 표정이 되자 순간 굳었던 차형욱의 몸에 힘이 빠졌다.

평소 자기답지 않은 행동에 당황한 차형욱이었다.

꿈인가?

멍해지는 기분에 다시 이불을 조금 걷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라지지 않는 작은 얼굴과 자신의 허리를 감싼 뽀얗고 가느다란 팔이 보였다. 시선을 돌리면 곧 사라질 듯 이질적인 존재에 차형욱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파르르 흔들리는 긴 속눈썹이 간지러운지 자신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들어 주먹으로 눈가를 비볐다.

한참 비벼대는 눈가가 붉어질 듯해 차형욱은 자신도 모르게 얇은 손목을 잡아 주먹 쥔 손을 밑으로 내렸다.

긴 속눈썹에 가려졌던 하늘빛 눈동자가 까만 차형욱의 눈과 멍하니 마주쳤다.

‘꿈인가? 도대체 어떻게……?’

차형욱은 자신의 눈을 피하며 혼란스런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품속의 존재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마주치자 하늘을 닮은 눈에 오롯이 들어찬 자신이 보였다.

기분이 다시 풀렸다.

참 이상했다. 누군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다그치고 싶지도, 쫓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라져버릴까, 그냥 나가버릴까, 긴장된 마음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알고 싶었다. 누군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듯 친숙하고 그리운 느낌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늘 자신의 옆에 있었던 존재란 미친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차형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아…….”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매우 놀란 듯 뭐라 말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말을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스쳤다.

혹은 한국어를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이지 않은 외모와 신비한 분위기가 다른 세상의 존재라는 비이성적인 환상마저 들게 했다.

경계심을 풀게 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차형욱은 아직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자신의 상상일지 모른다고, 헛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둘러싸인 이불을 풀어내고 본인의 양손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소리 없는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이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입가가 풀려왔다.

그러자, 작은 손을 내밀어 자신의 입가를 만지작거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비로소 자신의 표정을 인식한 차형욱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첫 만남부터 들었다.

은은한 향기도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따뜻한 하늘빛도 오랜 시간 옆에 있었던 듯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낯설기는커녕 원래 내 것이 나에게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차형욱은 이런 낯선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생각에 잠긴 차형욱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작은 손을 내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아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제 갓 태어난 새끼처럼 기울어지는 몸으로 어색하게 다리에 힘을 주는 모습이 불안해 보여 자기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가 아이를 부축했다.

옷을 걸치지 않아 눈부시게 하얀 어깨와 가슴이 보였다. 시선을 겨우 돌리고 작은 몸을 이불로 다시 감싸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너무 가벼워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비현실적인 무게에 차형욱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다시금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16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몸이지만, 그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지 않나 싶었다.

아이는 마른 편이었지만, 젖살이 올라 통통한 볼과 정상적인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품 안에 누군가를 안는 것이 처음이기에 어색했지만, 차형욱은 자신이 안아 든 아이에게는 그 어떤 거부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돌리면 자신의 품에서 갑자기 사라져 이 모든 것이 환상으로 변할까 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사라질까 걱정? 도대체 너는 뭘까…….’

오랜만에 취한 숙면에 시계를 보니 이미 평소 출근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가득한 휴대전화를 찾아 비서에게 점심 후 회사에 출근할 것을 알렸다.

놀란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비서는 유능한 사람답게 스케줄 조정을 하겠다며 차분히 대답 후 통화를 끝냈다.

품속에서 이불에 둘러싸여 살짝 멍한 눈을 자신에게 고정하고 있는 아이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우선 씻기고 같이 데리고 출근하기로 하고 욕실로 갔다. 적당한 온도에 평소 사용하는 페퍼민트 향의 입욕제를 넣고 아이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작게 바동거리며 놀란 듯 옷을 꼭 잡기에 어쩔 수 없이 욕조에 같이 몸을 담갔다.

불안해 보이던 눈동자가 차형욱이 같이 욕조에 들어오자 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바싹 몸을 붙였다.

새하얗고 믿기 힘든 부드러운 몸이 자꾸 몸에 와 닿자 손을 뻗어 어루만져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평소 스킨십이라고는 질색하고 가끔 성욕을 풀 적에도 끈적이게 달라붙는 몸은 냉정히 쳐내고 무감각한 상하 운동으로 빠르게 끝내는 걸 선호하는 스타일이기에 아직 어려 보이는 상대를 두고 느끼는 이런 욕망은 낯설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킨 차형욱이 빠르게 몸을 씻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눈망울로 자신이 씻는 걸 구경하는 존재에 서둘러 머리를 샴푸로 헹궈주었다.

큰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욕조를 나왔다.

차형욱은 옷장을 뒤져 가장 작아 보이는 흰색 티셔츠와 새 속옷을 아이에게 대충 입혀주었다. 바지를 입히기도 뭐 하게 티셔츠가 무릎까지 내려왔다.

소매는 아빠 옷을 입은 양 길게 늘어져 중간쯤에 있는 짧은 팔을 돌리며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차형욱 자신이 만든 환상처럼 보여, 꼭 끌어안자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갈팡질팡하는 머릿속에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저 사라지게 두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 같았다. 끌어안은 작은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깊숙한 뭔가를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낯설고 목이 탔다.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것이 환상이라면, 이것이 꿈이라면, 점점 더 강하게 품속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도대체 너는 누구지?’

차형욱은 눈앞의 하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베어 물면 가득 향이 밀려올 것 같은 새하얀 피부가 입술을 닿자, 입을 열어 지근거려보았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상황에 눈앞의 존재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때 이런 행동을 한 것의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될 차형욱이었다.

환상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누군가를 향해 소유욕을 느낀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에 표시하고, 집착을 보이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의 감정에 무지한 차형욱이었다.

“아!”

놀란 신음이 귓가를 울렸다.

품 안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짧게 튀어나온 신음에 가슴이 이상하게 널뛰어 바로 고개를 든 차형욱이었다.

고작 한 뼘 거리에서 보이는 옅은 하늘빛 마법에 빠져들어 다디단 향을 토해내는 입술을 향해 저절로 다가갔다.

어떤 의심도 없는 맑고 순수한 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작은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그 눈빛이 차형욱을 꿈속에서 현실로 끌어 올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때였다.

그가 한 것과 똑같이 작은 입술이 다가와 차형욱의 어깨를 덥석 깨물고 떨어졌다.

아프지 않게 살짝 몇 번 깨무는 시늉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반짝이며 곱게 접혔다.

그 모습이 차형욱의 가슴에 파고들어 절대 잊지 못하게 각인되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처음으로 마주한 존재를 인식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의 파장이 심장에 박혔다.

차형욱의 가슴은 다르게 뛰었다.

품 안에 들어온 이 존재는 현실이었다.

음습한 쓰레기 더미 속 더러운 짐승의 헐떡임 같은 일시적인 욕망이나 악마가 만들어낸 잠깐의 상상이 아니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낀 내 것이 되었으면 싶은 누군가에 대한 갈망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이처럼 한순간에 다가왔다.

따뜻한 온기가 쫓기는 짐승 같았던 초조한 두려움을 내리눌러주었다.

작은 어깨를 보자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 상처가 아프게 눈을 찔렀다.

미안함을 담고 가만히 그의 어깨에 입술을 내려 새끼의 상처를 돌보는 짐승처럼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움찔하고 떨리는 작은 어깨를 겁먹지 않도록 쓸어주며 작게 사과의 말을 쏟아냈다.

“미안하다. 미안.”

자신을 자신이 아니게 만드는 품 안의 존재가 꿈이 아니란 것을 믿지 못했던 차형욱이었다.

한눈에 반해 심장을 빼앗겨버렸다.

사람이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에 무지한 차형욱을 숨 막히는 두려움에 빠트리고 마구 흔들어댔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눈조차 믿지 못하고, 누군가를 가지고 싶단 상상에 이성을 잃었던 순간이었다.

처음 겪는 혼란스런 감정의 기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고, 손을 놓으면 그렇게 꿈처럼 혹은, 환상인 양 사라져버릴 것 같은 천사 같은 존재를 품에 안고 차형욱은 힘겨운 감정의 파도에 여기저기 흔들렸다.

두렵고, 사랑스럽고, 갈증 나고, 놀랍고, 무섭고, 미칠 듯했다.

그 순간, 작고 보드라운 손이 다가와 그의 머리를 조심이 건드려왔다.

그 따스함은 차형욱이 지금 느껴는 낯선 두려움을 알고, 달래주는 듯했다.

먼 훗날 생각했다.

단 한순간이었다. 이건 내 거라고 확신하는 심장의 소리를 듣는 건.

갑자기 나타나 내 품에 눈을 떴을 때부터 모든 게 운명처럼 당연했다.

그가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는 내 운명이 되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회상을 하게 된 이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꼬르르륵.

작은 배에서 나는 소리가 신기한지 연신 티셔츠를 걷어내고 배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모습에 피식, 입가가 풀린 차형욱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작은 손을 잡아 입에 가져갔다가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식탁 의자에 아이를 앉히고, 냉장고 문을 연 차형욱이 먹을 것을 꺼냈다.

집에서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일하는 아줌마가 항시 준비해놓는 반찬을 꺼내고 국을 데워 어색하게 식탁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밥통에서 밥을 넉넉히 퍼 앞에 두고 앉았다.

앉혀준 그대로 식탁에 앉아 가만히 앞에 있는 밥그릇을 들여다보는 모습에 차형욱이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으로 밥을 퍼 위에 장조림을 올려 내밀었다.

“아.”

“아?”

말하는 대로 따라서 작게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는 차형욱이었다.

어색하게 입에 넣고 가만히 있는 모습이 어린아이가 처음 입에 뭔가를 넣고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입을 움직여 씹는 모습을 보여주자, 따라서 흉내를 내다 퉤, 하고 장조림을 뱉어냈다.

야릇한 표정으로 밥만 씹어 넘기는 모습에 이번에는 감자조림을 잘라 숟가락에 얹어주자 잘 씹어 먹는다.

이것저것 입에 넣어보자, 육류를 뱉어내고 채소, 야채류와 과일만 먹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작고 어린 모습에 여러 영양소를 골고루 먹길 원했지만, 강요할 수는 없어 차형욱은 천천히 식습관을 고쳐주기로 했다.

다시 숟가락을 내밀자 ‘앙’ 하고 입을 꼭 다물고 차형욱만 바라보다 작은 손을 숟가락 쪽으로 뻗었다.

그 모습에 숟가락을 건네자 밥그릇을 자기 앞으로 당겨 밥을 푹 푸더니 손으로 장조림을 위에 얹어 차형욱이 했던 것처럼 그 앞에 내밀었다.

“아.”

그 모습에 어색하게 밥을 받아먹는 차형욱을 보고, 하얀 볼에 그린 듯한 보조개가 보이며 동그란 하늘빛 눈을 곱게 접었다.

아직 젓가락질을 못하는 그를 위해 포크를 꺼내주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밥을 먹자, 금방 배가 부른지 다시 식탁에서 졸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양쪽 겨드랑이 밑에 손을 밀어 넣고 식탁의자에서 올려 어린아이 안듯이 품에 넣었다.

자기 가슴 쪽으로 작은 머리를 기대며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어여뻐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술을 댄 차형욱이었다.

식탁에 먹은 그릇만 대충 싱크대에 두고, 서둘러 나갈 차비를 했다.

윤기 나는 얇은 은색 줄무늬가 쳐진 검정 정장을 입었다. 자주색 타이를 매고 심플한 백금 넥타이핀을 단 후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겼다.

운전기사를 호출하고 차형욱은 잠시 침대를 바라보았다.

아직 사라질까 두려운 불안감은 여전했다. 차형욱은 깊게 잠든 그를 모자가 달린 큰 겉옷으로 꼼꼼히 감싸 안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앞에 대기해 있는 차 앞에 서자 오랜 시간 알아온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 박동수가 깜짝 놀란 눈으로 뒷문을 열어 주었다.

칼같이 출근 시간을 지키던 차형욱 회장이 평소와는 달리 점심 이후 출근할 거란 연락에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런 와중 회장님이 무언가를 꽁꽁 싸매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집에서 나오는 모습은 박동수에게 의문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차에 타고나서도 차형욱 회장은 손에 들고 있는 누군가를 내려놓지 않았다.

무릎에 앉히고 보이지 않게 꽁꽁 싼 옷 속으로 들여다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평소 얼음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냉정한 모습에 익숙할 대로 익숙한 박동수는 입술을 꽉 깨물어 경악의 신음을 뱉지 않으려 노력했다.

백미러로 계속 그 놀라운 모습을 훔쳐보며 조심스러운 차형욱 회장의 몸짓에 맞춰 흔들림 없이 운전하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평소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거의 30분에 걸쳐 힘겹게 운전해서 드디어 회사에 도착한 박동수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제가 들어, 아니 모실까요?”

“…….”

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일어서는 차형욱 회장에게 박동수가 손을 뻗으며 물어보자, 대답 없이 차갑게 쳐다보는 눈길에 식은땀이 흘리며 손을 치웠다.

열린 차 문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여 품에 감싼 사람을 안고 내렸다.

으응, 하는 작은 숨을 토해내는 소리에 흠칫 놀라 더욱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그 순간 로비에 있는 회사 직원들과 경비원들은 모두 소리 없는 경악에 입을 벌리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다들 마법이 풀린 듯 비명을 흘렸다.

회장실 개인비서로 근무한 지 올해로 6년 차인 베테랑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오늘도 회장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탑승해 비서실 책상에 앉아 하루를 시작했다.

비서실 구석에 마련된 주방에 들어가 진한 원두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접시에 담아 회장실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지난 6년간 출장이나 조찬 미팅을 제외하고 일어나지 않았던 차형욱 회장의 부재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OMG!

고작 30살에 대기업 회장이 된 인물로 경제 신문에 신화창조란 타이틀을 걸고 소개되었다.

차형욱 회장은 만성 불면증으로 새벽부터 나와 근무를 시작하곤 했다.

아침 8시 출근이 보통인 비서실에서도 자신은 차형욱 회장의 빠른 출근 시간에 맞춰 7시에 출근을 하곤 했다.

그래도 자신보다 항상 먼저 도착해 근무를 시작하고 있는 차형욱 회장이기에 회장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늘 준비하는 커피와 함께 노크했건만, 회장실은 서늘하게 비어 있었다.

실종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은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바쁘게 오전 스케줄을 확인하고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되지 않아서 차형욱 회장의 자택에 전화를 걸어 아직 출근 전임을 연락받았다.

나중에 다시 걸려온 전화로 회장님이 점심 이후 출근하겠다는 말에 서둘러 오전 스케줄을 조정하고 각 부서에서 올라온 서류를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경비실에서 온 회장님 출근 통보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발견한 차형욱 회장의 모습을 보고 턱이 빠지는 경험을 했다.

회장님이 품속에 누군가를 꽁꽁 싸매 끌어안고 회장실에 도착한 거였다.

“회장님, 안…… 뇽……!”

평소처럼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려던 순간 턱이 쑥 밑으로 내려와 발음이 새버렸다.

‘젠장, 안뇽이라니…….’

진짜 놀랐다. 힐끔 문재준 비서실장을 쳐다본 차형욱 회장은 별말 없이 회장실로 들어갔다.

쩍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다물고 회장실로 들어간 그는 다시 턱이 바닥까지 빠지는 경험을 했다.

냉정의 아이콘 차형욱 회장이 회장실 중앙에 놓인 최고급 가죽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옷으로 감싸 안은 사람을 내려놓고 머리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헉! 천사님!’

반짝이는 은빛 실타래에 둘러싸인 하얀 얼굴은 치사한 차형욱 회장이 급하게 가리는 바람에 자세히 보진 못했다.

짧은 순간에 눈앞에 보였던 잔상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얼굴이 따가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넋이 나가 천사님을 쳐다보는 그를 짐승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차형욱 회장이 노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나오는 딸꾹질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침을 삼키자, 차형욱 회장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장실을 울렸다.

“문재준 비서실장, 지금 당장 백화점에서 갔다 오게. 작은 치수로 당분간 입을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 등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 사오도록.”

쑥 내밀어진 우리나라 극소수 상류층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블랙 플래티넘 카드를 손에 쥐고 얼이 빠져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큰일 났다.

회장님이 천사님을 납치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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