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은우야
(은우 Side)
종이 넘기는 소리와 펜으로 뭔가를 빠르게 적는 쓱쓱 소리가 났다.
멍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아가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바라보고 있다.
아! 맞다.
아침에 아가와 함께 눈을 뜨고, 밥을 먹은 건 꿈인가.
내가 잠을 잔 건가?
너무 생생했던 기억이 아쉬웠다. 이게 아쉽다는 건가?
아가를 만나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 죽는 전쟁이나 사건들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 없이 현실을 직시했었다.
아가를 만나면서 가끔 인간적인 감정이 단어가 아닌 마음으로 느껴지곤 했다.
멍하니 아가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자 어느 틈에 내 옆에 앉아 있는 아가가 보였다.
“일어났나?”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귀를 스쳤다. 아가의 까만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뻗어 나의 머리를 만져줬다.
따뜻하다?
나를 만질 수 있다.
가슴이 아릿하게 물결치며 볼에 간지러운 뭔가 흘렀다.
“왜 울지? 나쁜 꿈이라도 꾸었나?”
당황한 눈빛의 아가가 엄지로 살짝 눈 밑을 닦아주었다.
물? 이게 눈물인가?
눈에 따뜻한 물방울이 흘러 볼을 계속 적셨다.
흔들리는 눈빛의 아가가 조심스럽게 나를 감싸 안았다.
어색하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지 말라 속삭였다.
아가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내 귀를 아가의 가슴에 가져가자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가의 심장 소리뿐 아니라 작게 들리는 내 심장 소리도 아가의 심장 소리에 맞춰 뛰는 것이 들렸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고, 아가는 다정하게 눈가를 쓸어주고 입술로 눈가를 닦아주며 어색하게 토닥거려주었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한참을 안겨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배가 고프냐고 아가가 물었다.
배고픈가? 모르겠다.
고개를 수그려 아가의 가슴에 바싹 얼굴을 기댔다.
훗, 조그만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아가의 몸이 느껴졌다. 얼굴을 내밀어 올려다보자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손을 가져가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자 진지한 눈빛으로 날 마주 보는 아가가 보였다.
아직 세상은 불투명해 보이는데, 나의 아가만은 또렷했다.
“아…… 가?”
살며시 아가를 불러봤다.
오랜 시간 소리를 내보지 못해 가라앉은 목소리가 작게 입 밖으로 나왔다.
조금 커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아가가 되물었다.
“아가?”
손가락으로 아가를 가리키자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차형욱, 내 이름은 차형욱이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아까보다 또렷한 발음으로 아가를 불렀다.
“아가.”
한숨 비슷한 소리가 아가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나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내가 아가인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내 말을 알아듣는 아가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아가의 눈썹에 불만스럽게 힘이 들어가며 나를 묘하게 쳐다봤다.
“휴, 그래 알았다. 너의 이름은 뭐지?”
너무나 오랜 시간은 나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했다.
아가와 대화하고 느껴지는 잊혔던 감정들이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나의 이름을 묻는 말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자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아가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은우. 은빛 날개란 뜻이다. 너의 이름으로 어떤가?”
“은우?”
“그래, 은우.”
아가가 지어준 이름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아 웃으며 아가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름이 생겨서 설레고, 아가가 지어준 이름이라 더 좋았다.
아가가 날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생겨서 좋았다.
내가 끌어안자 작게 아가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한참을 비비적거리며 아가의 품에서 놀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당황한 아가가 내가 덮고 자던 큰 코트를 머리 위로 뒤집어씌웠다.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회장님”
머리 위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궁금한 내가 답답하게 머리를 덮고 있는 옷을 치우려 했다.
아가의 손이 머리를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버둥거리며 아가의 손에 힘이 잠시 빠진 틈을 타 잽싸게 코트 사이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놀란 숨을 토하며 눈을 마주친 그는 내가 자주 보던 얼굴인데. 아직 꿈속같이 흐릿한 기억이었다.
맞나?
고개가 계속 기울어지며 생각을 해보려 해도 멍해졌다.
늘 침착해 보이던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게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바로 옆 아가가 한숨을 쉬며 코트 속을 뚫고 나오느라 엉킨 머리를 정리해줬다.
“그래, 문재준 비서실장. 이만 나가보게”
“근데…… 이분은?”
“…….”
“은우야.”
얼굴을 자주 보긴 했지만,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것에 신이나 아가가 지어준 이름을 자랑했다.
아가의 비서에게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말해주자 어쩐지 심각한 인상의 아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은우를 당분간 데리고 출퇴근할 예정이니 6시 이후 모든 스케줄은 취소하도록. 점심은 은우는 채소와 과일을 위주로. 간식은 따로 준비해주게.”
살짝 힘을 주어 꾹 내 머리를 누른 아가가 낮게 이것저것 지시 상황을 늘어놓았다.
얼이 나간 문재준 비서실장과 내가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자, 내 고개를 아가 쪽으로 휙 돌려 넓은 품에 쏙 안아 시야를 가렸다.
고개를 다시 들려고 하자 힘이 들어가며 몸을 틀지 못하게 했다.
살짝 찬기가 어리는 분위기에 올려다보려니 아가가 비서실장을 쳐다보고 있다.
지시 상황을 모두 듣고 몸을 부르르 떨며 비서실장이 후다닥 회장실 문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
어쩐지 조용해진 아가를 살짝 보자, 아까보다 가라앉은 아가의 눈이 나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뭐라 중얼거렸다.
“하, 벌써…… 가두어두면…… 날 싫어할…….”
뭐라고 혼잣말을 하며 날 꼭 품 안에 가두는 아가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가를 끌어안고 작게 등을 쓸어주자, 무표정했던 아가의 입매가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문재준 비서실장이 주고 간 도시락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아가가 예전에 먹는 도시락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로 장식된 커다란 3단 도시락이었다.
1단은 예쁜 색깔의 과일로 채워져 있었다. 2번째는 여러 종류의 고기와 나물볶음, 조림 종류가 있었다. 나머지 3번째는 총총히 초록색 콩이 박힌 따뜻한 밥과 한구석에 샌드위치 몇 조각이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신기하게 도시락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자, 아가가 작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고 나를 바라봤다.
“먹고 싶은 거 있나?”
손으로 숟가락을 잡으려는 내 손을 제지하며 나에게 묻는 아가의 말에, 먹어본 적 없는 예쁜 색색 가지 향 좋은 것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짧은 웃음과 함께 내가 가리킨 음식을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입에 가져다 대주는 아가의 손을 재촉했다.
“천천히 먹어야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 잔을 입가에 대주고 내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얼마 먹지 않아 나는 배가 불러왔다.
내가 납작한 배를 두들기며 음식을 거부하자, 나직한 아가의 음성이 들렸다.
“아직 어린데, 더 먹어야지. 키 안 큰다.”
“아가, 키 커. 먹어”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나를 쳐다보는 아가의 입가에 샌드위치를 대주며 키 크라고 말해줬다.
아가는 아직 어리니깐 더 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이자 묘한 표정으로 내가 준 샌드위치를 받아먹었다.
점심이 끝나고 나는 회장실 정면에 보이는 넓은 창문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원래 몸이 없이 돌아다닐 때에도 아가의 사무실에서 늘 하던 행동이기 때문에 계속 창밖을 내려다보고 멍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가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며 가끔 나를 쳐다보았다.
내 몸이 어떻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지, 바라보기만 했던 음식들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가가 날 볼 수 있어 좋았다.
아가는 거의 웃지 않았는데 나는 아가가 매일 웃었으면 좋겠다.
눈꺼풀이 무겁고, 꾸벅꾸벅 고개가 움직였다.
낮은 창턱에 앉아 아가의 냄새가 밴 베이지색 코트를 몸에 감고 창밖을 구경하며 아가 생각을 멍하게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내가 또 잠들었나 보다.
살짝 흔들거리는 몸에 눈을 살짝 떠보니 창밖은 어느덧 살짝 붉은빛이 감돌며 해가 지고 있었다.
흔들기는 몸에 눈이 조금 떠졌지만, 아가가 눈앞에 보이자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무거운 몸은 축 늘어져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아가가 단단한 팔로 내 몸을 안아주었다.
살짝 와 닿는 따뜻한 온기가 이마와 눈가에 느껴졌다.
눈이 너무 무겁다.
시원한 아가의 향기에, 양손에 힘을 주고 아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등을 작게 토닥거리는 아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가 냄새.
***
폭신한 곳에 몸이 내려진 느낌에 은우가 눈을 떴다.
어느덧 집에 도착해 은우를 침대 위에 내려놓던 차형욱이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멍한 표정의 은우가 차형욱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자, 단정한 검은 속눈썹이 반쯤 내려앉았다.
눈가에 따뜻한 숨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은우는 간지럽고 살랑거리는 가슴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웃음기를 담은 차형욱의 눈이 가까워졌다. 은우의 눈가와 콧등, 볼과 이마에 따뜻한 숨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까르르.
은우의 눈이 곱게 접히며 얼굴을 마주 봤다.
긴 은빛 머리카락을 차형욱은 손으로 잡아 올려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은우도 차형욱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여기저기 입술 도장을 찍으며 흉내를 냈다.
짙은 눈썹, 날카롭고 길게 찢어진 눈매, 부드럽게 풀린 눈꺼풀 위, 높은 콧등, 잡티 없이 깨끗한 볼.
마지막으로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살짝 입을 가져갔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차형욱이 앞에 있었다. 왜 그러는지 은우가 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얀 손으로 차형욱의 굳어 버린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아까보다 진해진 까만 눈동자가 은우를 뚫어지라 바라보다 입술을 포개왔다.
부드럽게 입술을 붙이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입술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이와 이가 느껴지게 살짝 내리누르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은우의 얼굴을 지켜보는 차형욱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입술을 포갰다가 촉촉한 혀로 입술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차형욱은 살짝 고개의 방향을 틀어 은우의 목 위로 내려갔다. 아침에 그가 남긴 붉은 자국이 있는 곳에 입술을 가져갔다.
거의 사라진 붉은 자국을 마치 치유해주는 것처럼 여러 번 핥았다. 뜨거운 차형욱의 숨이 은우의 목을 닿았다. 꼭 끌어안은 은우와 차형욱의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었다.
은우는 그 심장 박동이 자신의 것인지 차형욱의 것인지 몰랐다. 단지 자신의 영혼까지 울리는 강한 떨림이 느껴졌다.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죽은 듯이 멈췄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렇게 차형욱의 가슴에 기대 귀를 기울이는 은우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
저녁을 차려주는 차형욱의 다리에 매달려 졸졸 쫓아다니며 은우가 구경을 했다.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차형욱이 은우의 몸을 들어 올려 커다란 TV 앞에 앉혀 놓았다.
고심해서 채널을 돌려 은우 앞에 틀어주고 간 건 뽀로롱이 나오는 어린이 채널이었다.
나쁘지 않은 듯 은우가 TV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은우! TV는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안 된다. 다음부터는 꼭 멀리서 보도록 해.”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파에서 내려와 TV 앞에 바싹 다가앉은 은우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려 다시 뒤에 앉힌 후 엄한 표정을 한 차형욱의 얼굴이 보였다.
TV 화면에 눈을 고정한 은우가 성의 없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TV화면을 가리며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차형욱의 입꼬리는 이미 풀려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나?”
소파 옆에 앉아 다정스럽게 머리를 쓸어주며 차형욱이 묻는 말에 은우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저녁 먹고 보자고 설득한 차형욱이 은우를 안아 식탁 쪽으로 옮겼다.
아쉬운 은우가 TV 쪽으로 자꾸 시선을 돌렸지만, 밥을 먹이려는 의지가 확고한 차형욱의 발걸음은 단호했다.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식탁 앞에 앉자 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양한 음식들을 구경했다.
식탁 위에 놓인 숟가락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숟가락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숟가락을 손에 쥔 차형욱이 뻔히 은우를 쳐다봤다.
아.
작게 입을 벌리며 차형욱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앞에 놓인 샐러드를 은우가 가리키자 젓가락으로 들어 올려 입가에 대준다.
고소한 드레싱이 묻은 샐러드가 입에 맞는지 계속 은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가를 끌어올린 차형욱이 다른 반찬도 밥과 함께 입에 대주며 편식하지 말라고 했다. 샐러드, 콩나물도, 깻잎 조림도 감자볶음도 골고루 먹였다.
은우가 숟가락을 뺏어 밥을 듬뿍 퍼서 차형욱의 입으로 내밀었다.
또, 차형욱이 잘 먹는 불고기랑 매운 김치도 포크로 폭 찍어주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차형욱에게 음식을 나르는 은우다.
어느새 차형욱의 커다란 손이 바쁜 은우의 머리 위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자 작은 머리를 커다랗고 따뜻한 손 쪽으로 더 밀어 넣으며 웃는 은우다.
그 모습에 가슴이 떨린 차형욱의 손은 한참 동안 은우의 머리 위에서 떠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배가 부른지 다시 은우의 눈이 감겼다.
더욱 멍해진 얼굴로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린다. 작게 입을 벌리고 아까부터 나오는 하품을 참는 은우의 눈에 물방울이 고였다.
“은우, 졸려?”
반쯤 감긴 은우의 눈을 보더니 차형욱이 물었다.
이미 수면상태로 고개만 끄덕이는 은우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음. 너무 자는데…… 우선 씻고 자야지. 은우?”
눈을 감고 고개만 끄덕이는 은우가 차형욱에게 안겨 욕실로 갔다.
차갑고 화한 민트 향 치약이 입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움직이고, 물이 입안으로 들어와 헹구란 말에 어찌어찌 따라 한 것까지 기억났다.
서서히 들어오는 빛줄기에 은우가 눈을 떴다. 단단한 팔뚝에 머리를 대고 넓은 가슴에 바싹 안겨 있었다.
어제 씻던 중간에 잠이 들었던 은우가 중간중간 끊어진 기억을 더듬었다.
시원한 향이 나는 따뜻한 물속이 기분 좋았고, 머리를 말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도 조금 기억났다.
몸이 생긴 건 아주 좋은데 매일 너무 졸렸다.
약간 서늘한 공기에 따뜻한 아가 품에 파고들어 은우가 얼굴을 비비며 혼자 놀았다.
손을 심장 있는 곳에 가져다 대보기도 하고, 귀를 가져가 심장 박동 소리를 듣기도 했다.
차형욱을 만지며 혼자만의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즐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규칙적이던 심장 박동 소리가 빨라졌다. 이상하고 걱정스러워서 빠르게 뛰는 차형욱을 껴안고 가슴에 귀를 가까이 붙였다.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은우가 고개를 들자 차형욱의 새카만 눈이 마주쳤다.
“은우, 벌써 일어났나?”
쪽, 머리에 살며시 닿는 따뜻한 숨이었다.
아침이라 더 낮아진 허스키한 차형욱의 목소리가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은우의 귀에 울렸다.
차형욱과 침대에서 눈을 뜨고, 같이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 신이 난 은우의 어깨가 들썩였다.
가족인가? 그래, 가족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지만, 가족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차형욱은 심각한 눈으로 옷걸이를 뒤적거리며 은우의 옷을 골랐다.
물 빠진 편해 보이는 청바지에 위에는 그림이 그려진 파란 모자 티를 입혀주었다.
옷을 다 입은 은우가 빤히 차형욱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찌푸려진 눈매로 생각에 잠긴 차형욱이 모자 달린 코트를 뒤집어씌워 은우를 꽁꽁 싸맸다.
모자가 내려와 앞이 보이지 않는 은우가 답답한지 머리를 건들자, 차형욱이 다시 꼼꼼하게 은우를 감쌌다.
“은우, 가만히…… 음. 착하다.”
답답해서 모자를 살짝 벗으려다가 머리 위에 울리는 차형욱의 단호한 목소리에 움찔한 은우가 손을 멈췄다.
모자를 살짝 올려 따듯한 차형욱의 입술이 은우의 이마에 닿았다.
좋았다.
아가가 원하면 커다란 모자 두 개라도 써야겠다는 표정으로 바뀐 은우가 스스로 모자를 눌러썼다.
오늘도 차형욱의 손에 달랑 들려진 은우가 자동차로 출근길에 올랐다.
문을 열어준 키가 큰 박동수가 운전석에 앉아 출발했다. 차형욱의 무릎에 앉아 차창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은우는 구경했다.
갑자기 달리던 차가 끽, 소리를 내고 급격하게 몸이 앞으로 쏠렸다.
느슨하게 허리에 감겨 있던 차형욱의 손이 잽싸게 은우의 허리를 강하게 잡았다. 차형욱이 다른 손으로 앞 의자 꽉 붙들어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막았다.
깜짝 놀란 은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두 분 괜찮으십니까?”
급정거한 박동수가 숨을 삼키며 빠르게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살폈다.
불쾌하게 찌푸려진 차형욱의 눈매가 은우의 안전을 확인한 뒤에야 창밖을 응시했다.
차형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박동수는 차 문을 열고 밖에 나가 사고를 낼 뻔한 다른 차량 쪽으로 다가갔다.
평소보다 천천히 달리던 차형욱의 커다란 검은색 차량 앞을 빨간 스포츠카가 순식간에 끼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앞쪽에 신호가 바뀌자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운전하던 박동수가 아슬아슬하게 앞 차를 피해 정지한 것이었다.
화가 난 박동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빨간 스포츠카를 향해 걸어갔다. 빨간 스포츠카의 운전석 문이 위로 열렸다.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린 검정 미니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높은 킬 힐을 신은 날씬한 다리를 꺼내 차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특별 제작된 검정 차량과 번호판을 바라보더니 눈을 빛낸 여자가 자신감 있는 손짓으로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었다.
뭐라 말을 거는 박동수를 무시하고 차형욱이 타고 있는 차창을 두들겼다.
까맣게 씌워진 차창 때문에 밖에서 안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타고 있는 기척을 느낀 여자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괜찮으신가요?”
“아, 아가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만두세요! 갑자기 끼어들어 사고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사고를 낼 뻔한 여자가 차에서 내려 따지고 있는 자신을 지나쳐버렸다.
더구나 개념 없이 회장님이 탄 차창을 두들기며 말까지 걸고 있었다.
차형욱 회장의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 박동수가 기가 막힌 눈초리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좀 내려보시겠어요?”
박동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굳게 닫힌 까만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계속 말을 시키는 여자였다.
그 모습에 박동수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늘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동수지만, 그에게 운전은 선택이고 차형욱 회장님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더 중요한 필수 업무였다.
차창으로 접근하는 여자의 움직임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차 쪽에 몸을 밀어 넣고 차와 여자의 간격을 떨어트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가요? 제 잘못인 거 같아 사과하는 거잖아요.”
“사과는 됐으니, 이만 가시죠.”
“아니요, 저는 차 안에 계신 차형욱 회장님께 직접 사과를 하고 싶어요.”
“필요 없으니, 그만하시죠.”
“얼마 전 사교 모임에서 이 차에서 차형욱 회장님이 내리는 걸 제가 봤어요. 차 회장님이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차이니 분명 이 차 안에는 차 회장님이 타고 있겠죠? 제가 실수했으니 직. 접. 사과하고 싶다는데 뭐가 문제죠?”
당당하게 따지고 드는 여자는 본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웃음을 입가에 지었다.
박동수에게 말을 하고는 있지만, 여자의 눈은 계속 차창 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차 안의 차형욱 회장을 보고 있는 듯 자신감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차형욱 회장님, 전에 인사했던 효영 그룹 최미현이에요. 기억하시죠? 사과하고 싶은데 잠깐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아니! 이 아가씨가…….”
아까 심하게 움직여지는 바람에 모자가 살짝 벗겨진 은우가 고개를 쑥 빼놓고 여자를 구경했다.
말리는 박동수를 무시하고 여자가 차 쪽으로 접근해 잠긴 뒷문을 열려고 하자 깜짝 놀랐다.
차형욱은 찌푸려졌던 얼굴을 무표정으로 굳혔다.
차 안에서 여자의 모습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차형욱의 시선이 막무가내인 여자의 행동에 더욱 차갑게 변해갔다. 차형욱 회장과 안면이 있다는 여자였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잘나가는 중소기업인 효영 그룹이었다.
박동수는 차 안쪽에 슬쩍 살피며 강하게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더욱 자신감이 생긴 여자는 자꾸 손을 뒤쪽 차 손잡이에 가져갔다.
아직도 막아서는 박동수에게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봐요. 내가 효영 그룹 최미현이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무례죠? 당장 비키지 못해요?
박동수는 제지하면서도 연약한 여자라는 생각에 차마 거칠게 대응하지 못했다.
도로 한복판에 차가 세워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차형욱의 눈빛은 사나워졌다.
차형욱은 가는 허리에 감싸던 팔을 아쉽게 풀고 은우를 가죽 시트 위로 앉혔다.
“은우, 안에서 가만히 있어.”
허전한 품에 짜증을 섞인 한숨을 쉬며 차형욱은 여자가 보이지 않는 반대 방향 문을 열고 나갔다.
차형욱 회장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에 눈을 빛낸 여자가 이것 보라는 듯 입가를 올리며 박동수를 째려보았다.
차형욱 회장이 다가오자 박동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옆에 섰다.
은우가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눈을 빛내며 환하게 웃는 여자의 바로 앞에 다가간 차형욱이 귓속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차형욱이 뭐라고 말할수록 여자는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지고 하얗게 질려갔다.
도톰한 입술을 꼭 깨문 여자가 몸을 돌려 빨강 스포츠카로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차형욱은 박동수가 열어주는 차 안으로 들어와 은우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어쩐지 어색하게 얼굴을 굳힌 박동수가 미끄러지듯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에 있던 은우는 듣지 못했지만, 혹시 모를 위협에 가까이 있던 박동수는 차형욱 회장의 얼음이 떨어지는 차가운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까 봤던 제멋대로인 여자에게 마음 약한 박동수는 연민마저 느껴졌다.
“꺼져! 네가 그렇게 소리치던 효영 그룹. 부숴버리기 전에 역겨운 얼굴 치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