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만지지 마라! 닳는다 (4/23)

04. 만지지 마라! 닳는다

매일 은우는 차형욱과 같이 일어나 아침 먹고 회사에 출근했다.

차형욱이 일하는 동안 창밖 구경했다. 언젠가부터 비서실장 문재준이 쥐여준 그림책을 보다가 졸리면 잤다.

밥 먹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뽀뽀비를 얼굴에 내려 깨워주는 차형욱과 밥을 먹었다.

같이 퇴근해서 거실 TV에서 하는 어린이 방송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저녁을 먹여주는 차형욱이었다.

이른 저녁이면 늘 잠이 드는 은우를 차형욱이 씻기고 침대에 뉘었다.

못다 한 일은 은우가 잠든 침대에서 처리하는 차형욱이었다.

그 뒤 은우를 끌어안고 자는 차형욱의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되었다.

은우가 잠을 너무 자는 것이 걱정되어 차형욱은 친구이자 본가 주치의이기도 한 정도훈을 불렀다.

정도훈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눈앞의 은우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은우는 공기 중에 사라질 듯한 묘한 분위기와 믿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옅은 하늘빛 눈동자는 멍한 와중에도 너무 맑고 순수해 보였다.

허리까지 닿는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은 숨 막히는 아름다움에도 차마 건들기 힘든 신성함이 느껴졌다.

천사! 천사가 분명했다.

정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뻗어져 나간 손이 만지면 미끄러질 것 같은 은빛 머리로 다가갔다.

외국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나는 은빛 머리에 옅은 하늘빛 눈동자였다.

차형욱에 의해 중간에 매섭게 내쳐진 손을 붙잡고 정도훈이 소리쳤다.

“야! 이 치사한 놈아! 그냥 귀여워서 머리 쓰다듬어주려는데 뭔 짓이냐? 만지면 닳냐? 닳아?”

“만지지 마라! 닳는다.”

오랜만에 집으로 오라는 차형욱의 전화에 서둘러 왕진 가방을 챙겨왔다.

그곳에서 만난 건 날개 없는 천사였다.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에 옅은 하늘빛 눈동자를 가지고 웃는 얼굴에 살짝 파인 보조개를 보자 참을 수가 없는 사랑스러움에 정도훈은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을 뿐이었다.

억울한 표정으로 정도훈이 투덜거렸다.

차형욱이…….

자신이 반평생 알고 지낸 지겨운 인연 차형욱이 절대 아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닳는다고 말하는 차형욱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외계인이 분명했다.

저 낯선 놈이 누군지 알 수가 없는 정도훈의 의심은 계속되었다.

늘 차갑게 얼어 있는 얼굴로 철저히 주위에 벽을 친 메마른 감정의 차형욱이 언젠가는 자신의 불행을 잊고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가끔 15년 우정의 자신에게도 타인처럼 대하는 차형욱의 모습에 섭섭함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보스인 차형욱의 아버지 차현수 보스와의 서먹한 관계는 주위의 모든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랬던 우리 형욱이가 변했어요!’

무표정한 얼굴은 크게 바뀌진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눈빛부터 단단했던 입매까지 말랑말랑해졌다.

천사를 닮은 은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했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강한 수컷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이 사실을 차형욱의 본가에 말하면 일어날 파장이 기대되었다.

그러다가 혹여 몰리는 관심에 천사가 상처라도 받는다면?

몸이 부르르 떨리는 정도훈이었다.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날카로운 얼음 가시를 발사시킬 친구 놈의 모습이 예상되었다.

저놈 회사에서도 어떤 소문이 흘러나오지 않는 걸 보니 엄청나게 꽁꽁 싸매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

자신에 의해 공개되었다가 주위의 관심 속에 작은 상처라도 천사가 받게 된다면 그 얼음 가시가 향하는 곳에 자기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상상만으로 오싹 소름이 끼쳤다.

언젠가 알려질 일이지만, 자신이 선구자 역할을 하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라고 정도훈은 현명한 판단을 했다.

진찰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살짝 은우를 스치기라도 하면, 짜증이 확 스치는 무표정한 차형욱의 눈매였다.

재미고 뭐고 자신은 천사 은우에 대해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는 결심만 커졌다.

하얀 분이 묻어나올 듯한 뽀얀 팔에 노란 고무줄을 꼭 묶어 피를 뽑으려 했다.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보자 하늘색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팔불출 외계인 차형욱이 날카롭게 정도훈을 노려봤다.

“피를 꼭 뽑아야 하나?”

“그, 그렇지. 아무래도 정확한 검사를 하려면 필요한데…….”

날카로운 눈빛에 정도훈이 말라붙어가는 용기를 부여잡고 의사의 사명감에 힘겹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는 나의 대답에 더욱 겁에 질린 은우가 차형욱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젠장, 거의 나를 단칼에 죽일 역모를 범한 죄인처럼 노려보며 겨우 허락을 한 차형욱이다.

아까부터 쥐고 있던 주사기를 은우가 보지 못하게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더 아픈 양 꼭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있는 차형욱의 모습에 주사기를 쥔 내 손이 대역죄인인 양 떨렸다.

한 번에 못 뽑으면 자신은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제일이라는 소울 대학교 의과대 수석 졸업자로 자부심이 넘치던 정도훈이 처음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채혈했다.

“아!”

주사기가 들어가자 작게 터지는 은우의 신음이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차형욱이 정도훈을 도끼 눈빛으로 난도질했다.

다행히 한 번에 성공하고 주사기를 뽑은 후 정도훈이 식은땀을 닦았다.

대략적인 검사나 문진으로는 보이는 것보다 지나치게 가벼운 체중을 제외하고는 정상으로 보였다.

은우는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차형욱보다 30센티미터 정도 작은 16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골격이지만, 정상적으로 보이는 몸이었다.

하지만 몸무게 측정결과 15킬로그램도 되지 않은 몸무게가 나와 체중계의 고장을 의심했다.

내 몸무게를 재고, 다시 측정해도 나오는 같은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은우의 가벼운 몸무게였다.

체형이 가는 편이긴 하지만 정상인 은우다. 오히려 젖살이 올라 통통한 볼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공중에 몸이 약간 들린 듯 가벼웠다. 천사가 분명하다고 다시 한 번 확신한 정도훈의 눈빛이 빛났다.

신비로운 현상에 학구열로 반짝이는 정도훈을 눈치 빠른 최형욱이 알아챘다.

은우를 뒤로 숨기며 정도훈에게 강력한 눈빛을 쏘았다.

아쉽지만, 진짜 천사인가 보다 하며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관. 심. 꺼!”

은우의 피가 담긴 투명한 병을 조심스럽게 보관용 가방에 담고 있었다.

은우가 들리지 않게 따라 나오며 작게 귀에 속삭이는 차형욱 악마 놈이었다.

“검사 결과는 철저한 비밀이다. 모든 검사는 직. 접. 하도록!”

흠칫 떨며 정도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검사가 끝나고 정도훈은 느긋하게 천사 은우를 옆에 끼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친분 좀 쌓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치사한 차형욱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바람에 축 처진 어깨로 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아! 차형욱이 저놈은 전생에 나라가 아니라 우주라도 구했나 저런 천사가 품에 떨어지다니…….

처음으로 차형욱 때문에 배가 심하게 아프고 위가 쓰린 정도훈이었다.

차형욱은 오늘따라 잠에 빠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은우를 씻기고 옷을 입혔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우다.

눈을 감은 상태로 가까스로 입만 벌려 어떻게든 아침을 먹이려는 차형욱의 손에 몇 숟가락 받아먹었다.

큰 외투 속에 푹 둘러싸여 차형욱의 품에 안긴 은우가 밖으로 나갔다.

이젠 얼굴을 익힌 보디가드 박동수에게 은우가 눈을 감고서도 힘겹게 손을 올려 살랑살랑 인사했다.

익숙한 차형욱의 무릎에 앉아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은우가 눈을 감았다.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본 차형욱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은우의 눈꺼풀은 이미 천근만근이었다.

한참을 정신 놓고 자던 은우가 일어나 고개를 드니 회장실 한쪽에 마련된 침대였다.

회장실에 들어온 사람들은 볼 수 없고, 차형욱 회장의 책상에서야 보이는 벽으로 막힌 공간에 침대가 위치했다.

매일 회장실에 출근해 소파에서 잠을 자는 은우를 위해 차형욱 회장이 주말 동안 공사를 해 마련해놓은 곳이었다.

은우도 침대에서 고개를 내밀면 차형욱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숨겨진 공간을 매우 좋아했다. 자주 침대에 누워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요즘 따라 더욱 길어진 은우의 잠이었다.

어제는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 오늘 아침 사무실에 도착한 11시쯤에서야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은우가 고개를 살짝 들어 평소처럼 차형욱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책상을 발견한 은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바닥을 보자 매일 차형욱에게 안겨 다녀 필요 없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차형욱이 꼭 신겨주는 신발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차형욱의 품에 안겨 자느라 신발 없이 온 듯했다.

조심스럽게 은우가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폭신하고 촉감이 좋은 카펫을 걸어보았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신기해 어색한 다리를 움직여 한참 걸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은우가 커다란 책상 앞에 있는 검정 가죽 의자에 앉았다.

차형욱의 냄새가 밴 코트를 은우가 몸에 칭칭 감고 모자까지 푹 눌러 썼다. 어둑한 모자 속에 있으려니 눈꺼풀이 다시 내려앉았다.

시원한 향이 밴 가죽 의자 위에 몸을 푹 기댔다. 무릎을 살짝 접어 다리를 올리자 편한 자세가 되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올려보자 살짝 열린 사무실 문 쪽에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디서 본 남자 같은데?

멍한 정신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은우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을 내렸다.

“흐흠. 안녕? 차형욱이 애 키운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이건 뭐지?”

은우가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하는데 낯선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호기심이 어린 질문들이 당황스러웠다.

여기는 차형욱과 도시락을 챙겨주는 문재준 비서실장만 오는 곳인데, 갑자기 등장한 남자가 이상하게 꺼려진 은우가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코트 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어찌해야 하나 멍하게 고민에 빠졌다.

어느새 윤기 나는 갈색 구두가 은우가 앉아 있는 의자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래, 꼬마야! 너 차형욱 회장이랑 무슨 사이인데 여기 있는 거야? 왜 아무 대답도 없어? 모자 좀 벗어 보렴. 착하지?”

은우가 남자의 구두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몸에 적당히 붙는 기다란 남자의 다리를 감싼 와인 색 줄무늬가 들어간 연회색의 정장 바지를 지났다.

모자 안에 몸을 숨기고 말 거는 남자의 얼굴까지 올려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비싸 보이는 장신구가 돋보였다.

차형욱보다 조금 작은 키에 깔끔하게 커트된 결 좋은 갈색 머리가 보였다.

그림 같은 웃음을 얼굴 전체에 달고 있었다.

은우는 웃고 있는 남자에게서 전혀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속 쌍꺼풀이 살짝 진 고동색 눈동자와 또렷하고 부드러운 이목구비를 보고도 거부감에 몸을 뒤로 빼는 은우다.

아주 예전 차형욱과 있는 걸 봤다는 생각을 어렴풋했다.

희미한 기억에 포기한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점점 움츠러드는 어깨를 의자에 묻으며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쑥 뻗은 남자의 긴 팔이 은우의 모자 쪽으로 다가왔다.

짜악!

모자에 남자의 손을 닿는 것과 동시에 찰진 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은우의 몸이 번쩍 들렸다.

살짝 벗겨진 모자 사이에 흘러나온 은빛 머리카락을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남자의 시선으로부터 차단했다.

은우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가슴의 주인인 차형욱이 사납게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다시 은우를 꼼꼼히 싸매주며 모자 안을 들여다보고 은우가 무사한지 살펴보는 차형욱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였다.

은우가 차형욱의 가슴에 바싹 몸을 붙이고,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빨갛게 부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쥔 남자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야. 차형욱 회장!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인사 좀 하겠다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하, 김진혁! 네가 내 사무실에 왜 온 거지? 죽고 싶은가?”

“난 그냥 오랜만에 문재준 비서실장 얼굴 좀 보려고 왔지. 이렇게 차형욱이 누군가를 꽁꽁 숨겨놓고 있는 줄은 몰랐네? 반응을 보니, 설마 천하의 차형욱이 연애라도 하는 건가?”

어금니를 세게 다문 차형욱의 싸늘한 눈이 남자를 사납게 응시했다.

차형욱의 가슴에 푹 안겨 있던 은우가 하얀 손을 코트 자락에서 꺼내 싸늘히 굳은 차형욱의 얼굴을 만져왔다.

악 다문 입매가 조금 풀린 차형욱이 모자 속 은우를 들여다보았다.

은우의 허리를 강한 힘으로 휘감고 있던 차형욱의 팔도 긴장이 약간 풀렸다.

눈을 마주친 은우가 배실 웃자 보조개가 패인 볼이 드러났다. 그곳에 작게 입술을 가져갔다가 다시 고개를 든 차형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외쳤다.

“꺼져라! 김진혁.”

“쳇! 너도 여전하네. 세운 그룹 장남한테 꺼지라니…… 차형욱 회장! 진짜 많이 컸네. 우린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잖아. 미운 정도 정인데 너무하네. 아무리 나라도 이러면 상처받는다고.”

“헛소리! 아무도 없는 다른 회사 회장실에 몰래 들어온 너다. 도둑고양이 주제에 집주인에게 좋은 말을 듣길 기대한 건가?”

장난기 있게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응수하던 세운 그룹 김진혁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착각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다시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차형욱의 품에서 말소리가 들릴 때마다 번갈아 고개를 돌리며 쳐다보는 은우를 예리하게 훑어봤다.

날카로운 시선에 몸을 떠는 품속 은우를 보고 아까보다 차가워진 차형욱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나가!”

차형욱을 둘러싼 공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양 손바닥을 펴 항복을 자세를 취하며 웃는 얼굴로 천천히 물러서는 김진혁이었다.

회장실 문을 열고 은우를 향해 손까지 흔들고 끝까지 능글능글한 모습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모자를 완전히 뒤로 넘기고 은우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는 차형욱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머리를 비비는 은우를 꼭 끌어안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은우를 보고 차형욱이 타이르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은우, 낯선 사람 가까이 가면 안 돼.”

조용히 계속되는 차형욱의 잔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쏟아지는 잠에 드디어 은우가 눈을 감았다.

한참을 모르는 사람의 위험성에 대해 설교를 하던 차형욱은 어느새 입까지 벌리고 잠이 든 자신의 천사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차형욱 Side)

이가 갈렸다.

항상 웃는 얼굴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기로 유명한 세운 그룹 첫째 아들인 김진혁이었다.

밑으로는 둘째 김진호와 단골 술집 마담이 낳아 데려온 숨겨진 사생아 김진영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김진영이 회장실에 쳐들어와 추태를 부리더니, 이번에는 김진혁이었다.

우리나라 경제 순위 18위의 세운 그룹은 5년 남짓한 시간에 가파른 성장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 YJ 그룹이 무시하기에는 아직 위험 부담이 컸다.

물론 싸움이 붙는다면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본가와 합세한다면 당장에라도 눌러버릴 수 있었다.

본가를 배제한 YJ 그룹과 세운 그룹의 싸움이라면 어느 정도 손실을 볼 각오로 덤벼야 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아직 이빨을 숨기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신차 정보 유출 건과 연관되어 아직 경위를 조사 중인 관계로 적을 가까이 두고 지켜보려는 계획이었다.

브라질 건축 사업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미끼로 세운 그룹에 접근했는데 벌써 뒤집어버리고 싶었다.

김진혁은 본가로 돌아간 중학교 시절부터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된 불면증과 질풍노도 사춘기를 화려하게 겪던 시절이라 몇 년간 미친 듯이 하지 말라는 짓만 하고 다녔다.

주먹질하며 조직 전쟁에 파고들던 자신과는 다르게 김진혁은 어려서부터 교묘하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즐겼다.

주위에 사람을 두지 않고 미친 듯 주먹질만 하던 나를 김진혁은 술, 여자와 약이 난무하는 더러운 파티에 끌어들이려 애썼다.

철없이 날뛰던 시절 잠시 호기심에 참석한 파티는 쓰레기 냄새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때 당시 김진혁은 항상 부드럽게 웃으며 평범하고 순진한 학생을 한두 명씩 끌어들여 희생자를 만들어 즐기는 더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김진혁이 저지른 온갖 난잡한 일들은 세운 그룹에서 돈으로 처발라 말끔히 뒤처리해왔기에 크게 문제가 된 건 마지막 한 사건뿐이었다.

마지막 희생자는 그의 배다른 동생 김진영이었다.

그때의 사건으로 세운 그룹에서는 서둘러 절차를 밟아 김진혁을 미국으로 보냈다.

6년 만에 다시 귀국한 김진혁은 세운 그룹 첫째 장자로 이름을 알리며 세운 그룹 사장 중의 한 명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부드러운 귀공자로 불리며, 많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어던진 밑바닥에 깔린 더러운 기질은 세월이 지나 능숙하게 감출지언정 사라지지 않았다.

절대 믿을 수 없는 게 바로 김진혁이란 인간이었다.

오늘따라 길어지는 회의에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혹여 은우가 깨어나 자신을 찾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잠깐이라도 자리를 뜨려 했으나 10분 간격으로 사인을 보내주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신호에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문재준이 도시락을 가지러 잠시 1층 로비 내려간 틈을 김진혁이 귀신같이 노렸다.

평소에도 잔머리를 비상하게 쓸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눈치가 빠른 김진혁이었다.

자신이 문재준 비서실장과 자주 회의실 창문으로 눈짓을 주고받는 걸 눈치채도록 한 것이 실수였다.

표정 관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은우를 만난 후 나도 모르게 느슨해졌던 모양이었다.

화장실을 간 김진혁의 부재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날카롭게 곤두서는 신경에 회의를 중간에 멈추고, 빠른 걸음으로 은우가 잠들어 있는 회장실로 뛰어갔다.

비어 있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책상을 지나 빠르게 회장실 앞에 도착했다.

평소와 다르게 살짝 열려 있는 회장실에서 웃음기가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회장실에는 의자 위에 자신의 모자가 달린 코트를 뒤집어쓴 은우가, 작은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없게도 김진혁은 손을 뻗어 감히 은우의 모자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보는 순간 발끝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은우 앞에서 실실 웃는 김진혁이라는 존재를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었다.

우선은 불안해 보이는 은우부터 뛰어가 안아주었다.

아까부터 날뛰던 심장이 김진혁의 손을 쳐내고, 가슴에 넣은 은우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조금 진정되었다.

은우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계속 떠보는 간사한 김진혁이었다.

뻔뻔하게 아무도 없는 경쟁사 그룹 회장실에 기어들어가 은우를 건드리려고 했다.

나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은우의 손짓이 시끄럽게 울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남자는 지킬 것이 있으면 강해진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었다. 나에게 의지해 기대 있는 따뜻한 온기를 지키기 위해 나는 어떤 것도 치워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은우의 얼굴에 티끌만 한 그늘이라도 줄 수 있는 존재라면 난 망설임 없이 이빨과 발톱을 빼들어 물어뜯을 것이었다.

모자 밖에 빠져나온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에 잠시 멈칫한 김진혁의 시선을 눈치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것도 못 본 척, 나를 자극하고 떠난 김진혁이었다.

그가 절대로 보아서도, 건들 수도 없는 존재에 아주 작은 호기심이라도 품게 된다면 그날로 그는 이 세상에 숨 쉴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가기 전 눈빛으로 강하게 경고를 했지만, 그의 성격상 아마 이번에 마지막이 아닐 것이었다.

나를 아니, 나의 것을 건들지 마라! 이번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일 것이다.

(박동수 Side)

나는 올해 29살이 된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이다.

내 자랑 같지만, 태권도, 검도, 무예 타이와 특공무술 등 공인 무술 20단이 넘었다.

또, 비공식적 살인 무술까지 익히고, YJ 그룹 차형욱 회장님의 보디가드로 본가에서 이곳에 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아였다.

대한민국 최대 조직인 황성파의 보스이자 차형욱 회장님의 아버님 되시는 차현수 보스의 후원을 받아왔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아버지 같은 분이다.

공부를 마치고 운동을 하며 본가에서 생활하다 YJ 그룹에 들어와 차형욱 회장님을 모시게 되었다.

처음 만난 차형욱 회장님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차가운 눈과 표정 없는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싸늘하고 냉정한 남자였다.

뜻밖에 돈이 썩어나는 냉 미남과 나쁜 남자를 선호하는 미친 사회 풍속에 접근해오는 미녀들은 끝도 없었다.

하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달라붙는 수많은 미녀와 때로는 곱상한 남자까지 넘쳤지만, 그들은 절대 차형욱 회장님에게 어떠한 의미도 될 수 없었다.

결코, 뒤끝이 있을 만한 상대는 건들지 않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필요해 의해 가끔 모시고 가는 고급 오피스텔에서도 주차장에서 2시간 이상을 기다린 적 없이 칼같이 나오는 회장님이었다.

가끔 매달리는 눈치 없는 인간들을 잡음 없이 떨구는 것도 나의 일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 냉정한 관계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보면 된다.

차형욱 회장은 한 번 잔 사람은 다시 건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인연에 목매는 사람들은 넘쳤다.

한 번이라도 기회를 얻게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차형욱 회장님의 별채에 살면서 출근을 하는 회장님을 새벽부터 차로 모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또, 해가 저물고도 늦은 밤이 되어야 퇴근을 하는 회장님을 모셔왔다.

집에서도 늦은 시간까지 서재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회장님 불면증과 일 중독은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기업을 짧은 시간 동안 우리나라 경제에 우뚝 솟는 대기업이자 주춧돌로 성장시킬 수 있던 것이리라.

머리가 비상한 천재가 쉬지 않고 일을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 회장님이 달라졌어요!’

회장님의 인생에 뭔가 크게 어긋난 하루였기에 똑똑히 기억난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점심 출근을 하겠다는 연락에 어디 아픈가 생각했다.

한 번도 아픈 모습을 티 낸 적 없었던 차형욱 회장님이었다.

전에 본가인 황성파에 악감정을 품은 명성파의 공격에 옆구리를 30바늘 꿰매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을 한 차형욱이라는 남자였다.

점심 후 대기 신호에 평소처럼 나온 대문 앞에는 회장님이 커다란 옷으로 꽁꽁 싸맨 누군가를 품에 소중히 안고 있었다.

헉! 어제 늦게 집에 올 때도 분명 혼자였다.

외부 사람이 CCTV 감시망이나 경보기를 지나, 아무도 모르게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엄청난 혼란에 나는 차 문을 여는 타이밍도 놓칠 뻔했다.

다행히 몇 년간 습관처럼 배어 있는 내 속에 숨어 있는 운전기사로서의 본능이 내 정신과 다르게 착실히 회장님의 차 문을 열고 있었다.

슬쩍 누군지 궁금증을 표했지만, 역시 아무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폭신한 가죽 시트 위에 앉아 품 안의 작은 존재를 황송하게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옷이 흘러내려오면 추슬러주며,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평생 안경과 렌즈가 필요 없었던 2.0 시력을 가진 건강한 나의 눈이 유통기간 오버로 상한 것이 아니라면, 저 무표정한 차형욱 회장님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가 미소 쪼가리를 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에 칼 밥 먹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유지되던 ‘나 잘났다.’는 무표정이 사라졌다.

시대가 낳은 냉정의 아이콘 차형욱 회장님이 변했다.

아니면 내 눈이 썩었나?

보디가드라 외치지만, 늘 운전기사로 빙의 중인 내 손모가지는 눈을 비비지도 못하고 착실하게 핸들 위에 올려져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나오는 오랜 본능에 평소보다 더 흔들림 없이 차를 몰기 위해 식은땀까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핸들 위에 부착시키고 몸을 긴장시켰다.

사고 나면 내 생명이 위험할 것 같은 생존 본능에 몸을 맡겼다.

늦은 출근에 회사 앞을 지키는 경비원들과 몇몇 회사 직원들이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차형욱 회장님을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 유유히 누군가를 품에 끌어안고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무신경하게 지나쳐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회장님은 역시 강적이었다.

이젠 정시 출퇴근이 익숙해진 회장님의 달라진 스케줄에 따라 오늘도 나는 회장님의 특별 제작된 차량의 천장을 먼지 하나 없이 털고 있었다.

확실히 편해진 스케줄이지만, 두 달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은 나는 오늘도 온몸을 바싹 긴장한 상태로 운전 중이다.

얼마 전, 일부러 접촉 사고를 위장해 여우 꼬랑지를 흔들던 재수 없는 여자를 말 한마디로 박살 낸 차형욱 회장님이었다.

그때 불던 차형욱 회장님 표 칼바람은 바람직하기 그지없으니 넘어가겠다.

그때의 급정거 사건에 직접적인 문책은 없었지만, 그 날카롭고 무서운 눈빛에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각인되었다.

오늘도 나는 매의 눈을 하고 어떤 사고라도 철저히 사전 봉쇄를 부르짖으며 운전을 한다.

뒤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미묘하게 풀린 입매를 이제는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차형욱 회장님과 그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든 은우 님이 앉아 계셨다.

전에 차형욱 회장님이 정말 싫은 표정으로 은우 님을 정식으로 소개해 주었다.

처음 은우 님을 제대로 본 나는 그 자리에 고개를 조아리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을 만큼 감격했다.

어려서 성당 부설 보육원에서 들었던 천사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나에게 살짝 웃어주시는 은우 님! 아니 천사님은 내가 몸 바쳐 지켜드려야 할 차형욱 회장님 말고 처음으로 지켜드리고 싶은 존재 1순위로 내 머리에 새겨졌다.

인간이 아닌듯한 신비한 분위기! 허리쯤 찰랑거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신 은발 뒤로 후광이 비쳤다.

아! 그 밑에 자리한 하늘색 눈동자와 내 이름을 회장님에게 듣고 작게 속삭이는 “동수?”라는 맑은 목소리는 내 이름마저 성스럽게 느끼게 해줬다.

하! 진정 그게 제 이름인가요?

흔들리는 눈으로 한없이 천사님을 바라보고 감격에 떨었다.

천사님을 번쩍 돌려 안아 시선을 차단하고, 천사님 몰래 차가운 눈초리로 경고를 보내는 악마 같은 존재는 차형욱 놈…… 아니, 회장님이었다.

날 눈빛만으로 찔러 죽일 거 같은 살기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날쌔게 운전대를 잡은 나란 보디가드는, 오늘도 운전대를 잡고 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저 악마에게 사로잡힌 천사님의 만수무강(萬壽無疆)만을 바랄 뿐이다.

덤으로 나의 만수무강(萬壽無疆)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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