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된장에 비벼 먹을 놈들…… (5/23)

05. 된장에 비벼 먹을 놈들……

끼익, 쾅! 쾅!

귀를 긁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갓길로 튕긴 검은 SUV 자동차가 보였다.

다행히 능숙한 운전기술을 선보인 보디가드 박동수는 아까부터 수상하게 접근하는 모습에 미리 견제하고 있었다.

덕분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었다.

“두 분, 조심하십시오.”

요즘 따라 눈을 뜨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은우다.

집이 아닌 이름 있는 한식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는 은우를 보고 싶은 마음에 방심한 걸 차형욱은 스스로 자책했다.

이를 악물고, 차형욱은 품에서 자는 은우를 바라봤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잘 자는 은우의 모습에 처음으로 은우가 잠이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됐다.

일어나 무서움에 떠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유능한 보디가드답게 박동수는 냉정하게 백미러를 눈으로 쏘아보며 옆에서 따라 붙고 있는 자동차를 따돌리려 했다.

탕, 탕.

까맣게 선팅 된 SUV 창문이 열리며 권총 소리가 들렸다.

본가를 노린 다른 조직의 공격인지, 다른 기업의 청부인지 쉴 새 없이 머리가 돌아갔다.

YJ 그룹이 어느 정도 성장세를 달리자, 본가인 황성파에서 있었던 위협에 비하면 오합지졸(烏合之卒)이지만, 끊이지 않는 납치와 습격 위협에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요 몇 달간은 별일 없이 넘어가길래 방심한 것이 문제였다.

어금니에 힘을 주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상태에서 박동수는 모든 정신을 운전에 집중했다.

다행히 지금 타고 있는 주문 제작된 링컨은 특별 방탄유리로 무장되어 있어, 어느 정도의 테러는 예방할 수 있었다.

바퀴조차 총 한두 발이면 크게 문제없이 달릴 수 있었다.

일부 나라 대통령을 모실 때나 사용하는 차량으로 우리나라에는 특별 주문까지 넣은 개량형은 이 차량이 유일했다.

“으, 음…….”

권총 소리와 크게 흔들리며 옆에서 부딪혀온 차량 때문에 은우가 작게 소리 내며 눈을 뜨고 있었다.

차형욱이 고개를 숙여 아직 반쯤 감긴 하늘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은우, 괜찮다, 더 자라.”

눈을 비비며 힘들게 눈을 뜨려 하는 은우의 몸을 차형욱이 단단하게 다시 감싸며 작게 말했다.

마법처럼 눈이 다시 감기다가 방탄유리에 맞아 크게 울리는 탕 소리에 하늘색 눈이 커졌다.

고개를 돌리려는 은우의 머리를 차형욱이 손으로 잡아 다시 가슴에 고정하고, 자기 스스로 다짐하듯 속삭였다.

“절대 다치게 두지 않아. 걱정 마라.”

“아…… 가?”

“별거 아니야. 금방 끝난다.”

끄덕끄덕,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인 은우가 차형욱의 가슴에 얌전하게 기대앉았다.

“착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나를 믿어!”

살짝 불안하게 흔들리는 하늘빛 눈동자가 차형욱을 바라봤다.

은우를 옆 의자에 내려놓은 차형욱이 안전띠를 단단히 채웠다. 은우의 고개를 눌러 무릎 위에 숙인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가만있으라고 다정하게 말한 차형욱이 박동수를 향해 짧게 입을 열었다.

“박동수, 총!”

“네.”

끽, 끽. 정신없이 소리가 나는 차를 모는 박동수가 눈도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능숙하게 옆에서 최신 USP 권총을 꺼내 뒤로 넘겼다.

4대의 검은 SUV 차량이 포위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지만, 박동수가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시간을 끌면, 적들의 집중 공격에 포위될 수 있었다.

옆 좌석 창문을 반쯤 열고 차형욱이 몸을 살짝 빼자 총기의 방향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눈을 가늘게 떠 방향을 잡고 SUV 운전석 유리 쪽으로 조준해 당기자 끼익, 쾅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욕설이 스쳐 들렸다.

탕, 탕.

옆으로 들어오려는 다른 차량의 열린 창문 너머 보이는 총구를 보고 창 안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에 적의 총이 떨어지며 총에 맞은 건지 비명과 붉은 줄이 차창에 그어졌다.

고개 숙이고 있는 은우 쪽으로 살짝 눈길을 보냈다.

착하게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귀를 꼭 막고 있는 모습에 차형욱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욕설석인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뒤쪽을 주시했다.

박동수가 짧은 신음을 토하는 것과 동시에 쇠 긁는 소리 같은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차가 360도로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어느새 앞을 막아서는 새로 등장한 검정 SUV 차량이 앞에 있었다.

돌고 있는 차량에 차형욱이 손을 뻗어 은우의 몸을 꽉 잡았다. 예리한 시선을 창 밖에서 돌리지 않았다.

뒤에서 바싹 쫓아오는 SUV 차량 두 대와 함께 앞을 막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

“된장에 비벼 먹을 놈들…….”

낮게 욕설을 뱉는 박동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집중했다.

시계방향으로 돌던 차량의 몸통이 뒤쪽으로 향하자 급하게 다시 액셀을 밟아 역주행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뒤에서 이 차의 양쪽을 포위하려 벌어진 두 대의 SUV 틈새를 귀신같이 파고들었다.

키익. 타악! 타악!

옆쪽 사이드미러가 부딪혀 떨어져 나가는 소리였다.

혼자이면 모를까 은우를 위해서는 전면전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추적해오던 차량의 뒤에 좀 거리를 두고 달리던 일반 차량이 역주행하는 차에 놀라 클랙슨을 울려댔다.

액션 배우 뺨치는 운전 실력의 박동수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피했다.

반대 방향으로 140킬로는 거뜬히 넘을 속도로 추적을 피해 빠져나왔다. 한적한 도로를 지나 고속도로를 빠져나갔다.

시내로 방향을 틀고 들어가자, 참았던 숨이 박동수의 입에서 거칠게 흘러나왔다.

은우의 고개를 계속 손으로 누르며 차형욱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추적이 멈춘 걸 확인하고 총을 박동수 쪽으로 건넸다.

차형욱이 조심스럽게 은우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놀랐는지 동그랗게 변한 눈을 깜빡거리는 은우를 차형욱이 서둘러 품에 끌어안았다.

작게 울리는 은우의 심장 소리를 확인한 차형욱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쉬었다. 얌전히 안겨 있던 은우가 돌연 차형욱 밀치더니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혹시 무서워서 자신과 같이 있는 것이 싫어졌다 할까 두려운 차형욱이 은우를 강하게 안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매달렸다.

평소와 다르게 거부하듯 자신을 밀치며 거리를 벌리는 은우의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쩔 줄 모르는 차형욱은 손에 힘이 빠지고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든 은우가 차형욱의 팔 쪽에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아파.”

갑자기 나온 은우의 아프다는 말에 차형욱의 눈이 커졌다. 은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펴보았다.

은우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차형욱의 팔을 가리켰다.

“아가, 아파.”

은우의 말과 손짓에 그제야 차형욱은 자신의 팔뚝에 흐르는 피가 보였다.

소매 단추를 풀고 올리자, 총알이 박혀 있진 않지만, 몰랐던 상처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회장님! 다치셨습니까?”

“괜찮다.”

깜짝 놀란 듯 뒤로 고개까지 돌리고 묻는 박동수다.

병원으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치료야 주치의 정도훈을 불러서 해도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올 잔소리를 상상하니 그냥 치료고 뭐고 내버려두고 싶었다.

눈앞에 걱정을 가득 담은 하늘빛 눈동자로 자신의 팔을 바라보는 은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도훈을 호출했다.

“정도훈, 당장 집으로.”

“어. 어? 차형욱! 뭐야? 천사님이 아픈 거야? 야! 차형욱!”

이놈의 지나친 은우에 대한 관심에 순간 짜증이 솟구친 차형욱이 대충 상황 설명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비록 양 사이드미러가 덜렁거리고 먼지가 내려앉았지만, 딱 보기에도 ‘나 비싸요.’라고 쓰여 있는 검정 차량이 급하게 멈춰 섰다.

평소와 다르게 박동수가 문을 열기도 전에 급하게 뒷좌석 문이 열렸다.

190센티미터 정도의 차가운 인상의 젊은 남자가 품 안에 뭔가를 들고 다급히 대문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도착한 파랑 스포츠카의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보디가드 박동수가 주치의로 방문한 정도훈의 팔을 서둘러 잡았다.

“이쪽입니다, 도훈 형님!”

“어라! 동수야, 뭔 일이야?”

평소 성격 좋기로 유명한 박동수가 얼굴을 굳힌 채 인사도 없이 정도훈을 잡아끌었다.

뭔가 설명할 틈도 없이 질질 끌려 저택으로 들어간 정도훈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입을 닫고 손에 든 진찰 가방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집안에 도착해 침실까지 날듯이 끌려온 정도훈은 침대에 누운 은우를 보았다.

한 손은 은우의 손을 꼭 쥔 차형욱은 다른 손으로 연신 은우의 젖은 이마에 쓰다듬고 있었다.

정도훈이 처음 보는 당황한 눈빛이 역력한 자신의 친구였다.

“야! 차형욱!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다친 거 아니었어?”

“…….”

다른 곳은 보지도 못하는 듯 아픈 은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차형욱의 모습이었다.

정도훈이 서둘러 차형욱을 밀고 은우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정신 나간 듯 보이는 차형욱은 자신을 건드는 손길에 사납게 몸을 흔들었다.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사나운 짐승 같았다.

우선 차형욱의 진정이 먼저인 듯싶어 조금 물러선 정도훈이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차형욱! 정신 차려! 내가 봐야 은우가 괜찮은가 알 거 아니야? 네가 이러는 거 전혀 은우한테 도움 되는 행동 아니다. 비켜봐.”

따끔한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차형욱이 긴장했던 어깨의 힘을 빼고, 천천히 옆으로 비켜섰다.

물러선 차형욱은 우두커니 선 상태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은우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설명 듣는 걸 포기한 정도훈이 침대 위 은우를 살펴봤다.

애처롭게 감긴 기다란 은빛 속눈썹이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작은 얼굴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고, 살짝 만져본 이마는 차가웠다.

“아씨! 젠장! 차형욱 이게 무슨 일이야? 너만 다쳤다면서? 은우는 갑자기 왜 이래? 차라리 바로 병원으로 가지 그랬어?”

“안돼! 은우를 병원에 데려갈 수 없다.”

‘신체검사를 한 너도 이유를 알잖아.’라고 작게 덧붙이는 차형욱의 말에 정도훈이 고개를 들고 천장을 쳐다봤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연 차형욱에게 정도훈이 따지듯 말했다.

“그럼, 나라고 별수 있느냐, 이 망할 놈아! 상황을 설명해봐야지 어떻게 된 줄 알지. 미친놈처럼 굴지 말고.”

“나 때문에…… 내가…….”

은우가 아프자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차형욱을 대신해 뒤에 물러나 있던 박동수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걸 설명하는 박동수의 목소리에는 경이로운 기적을 본 떨림과 놀라움이 그대로 배여 있었다.

“원래 은우 님은 괜찮고 회장님만 다치셨었습니다. 근데, 회장님의 다친 팔을 보고 은우 님이 손을 가져다 대자, 회장님의 팔이 순식간에 아물었습니다. 그 뒤에 은우 님이 쓰러진 겁니다.”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정도훈은 다시 자세히 물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설명인즉, 다친 팔에 손을 얹은 천사님의 손에 빛이 반짝이더니 차형욱의 총상이 단번에 치료가 되었다. 대신 천사님은 쓰러지셨다는 결론이었다.

‘헐! 진짜 천사님이 맞나? 맞네, 맞아.’

천사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에 천사님이라고 불러 젖히던 정도훈이 은우 진짜 천사설의 광신자가 된 시점이었다.

“전에 했던 피 검사 결과가 믿기지 않아 다시 재검사해서 오늘 결과를 받아왔는데…… 차형욱! 정신 차리고 잘 들어라. 은우는 피 검사 결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혈액형을 지니고 있었다. 결과에 대한 파장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직접 해서 소문날 일은 없다.”

피 검사 결과에 견제하는 차형욱의 눈빛을 느끼고, 서둘러 덧붙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조심해야 할 문제로, 수혈이나 수술 등이 힘든 은우의 상황도 차형욱에게 설명했다.

“우선 내가 지금 당장 은우의 몸 상태에 대해서 확실하게 치료를 못 한다는 건 너도 이해할 거다. 약물치료가 보편적인데, 어떤 부작용이 올지, 얼마만큼의 양을 써야 할지 확인이 필요하다.”

침대 곁에 서서 조용히 설명을 들으며 다시 은우의 하얀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차형욱의 모습에 우려 섞인 말을 계속 이어갔다.

사실, 정도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좌절감이 들었다.

겨우 행복해 보이는 차형욱이었는데,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어둡게 내려앉은 눈동자를 보고도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나, 이 손 절대 못 놓는다, 정도훈. 이 심장이 멈추면 나도…….”

멈춘다. 작게 부서지는 차형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깊고 허탈한 숨이 내쉬었다.

이렇게 깊어질 차형욱의 마음을 사실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 느껴본 강한 소유욕에 어쩔 줄 몰라 사방으로 단단한 벽을 만들어 견제하는 차형욱이었다. 그 눈빛이 확고하고 맹목적으로 빛나고 있기에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그저 별일 없고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아. 하. 아…… 가.”

아픈 와중에도 차형욱을 부르는 은우의 목소리였다.

무너지듯 침대 밑에 주저앉아 작은 손을 자신의 양손을 붙들고 있는 차형욱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돌처럼 굳어버린 얼굴로 작은 손을 생명줄인 양 붙들고 있었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세상은 또 이 아픈 남자에게 상처를 주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치고 싶은 정도훈이었다.

“우선 약물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니깐, 최대한 쓰지 않고 보류하는 걸로 하자. 지금 저체온에 힘들어하니깐, 몸을 따뜻하게 해줘.”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차형욱이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떨리는 은우의 몸을 감싸 들고 옷을 입은 채로 같이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온도에 약간 편해진 은우의 얼굴을 확인하고, 식은땀으로 젖은 작은 얼굴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욕조 안에서 불편해 보이는 바지와 겉옷을 벗겨냈다. 얇은 티셔츠 차림이 된 은우를 꼭 끌어안고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의미 없는 ‘제발’이라는 단어만 끊임없이 내뱉는 차형욱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눈물 없이 울고 있는 듯 보여 정도훈과 박동수의 가슴이 메여왔다.

“도착했습니다.”

YJ 그룹 정문에 검은색 링컨 차량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아무 표정 없는 차형욱 회장이 걸어 나왔다. 회사 정문에 나열한 경비원들이 90도로 인사를 했다.

이른 아침 출근을 서두른 직원들도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차형욱 회장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나친 차형욱 회장이 회장실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은우가 쓰려지고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은우는 사흘간 신음을 흘리며 아파했고, 그날 이후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전처럼 식은땀을 흘리거나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평온하게 잠이 든 은우의 모습은 차형욱에게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경험시켰다.

미동 없이 잠에 빠진 모습에 가끔 자신을 두고 가버리지 않았나 끔찍한 상상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은우의 심장 가까이에 귀를 가져갔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명의 박동에 차형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형욱이 숨을 쉬게 해주는 유일한 소리였다.

차마 아파 정신이 없는 은우를 데리고 회사에 출근할 수가 없어 당분간 정도훈이 은우를 보살펴주기로 했다.

그 대신 회사에서 언제든 은우를 볼 수 있게 미니 캠을 은우가 있는 방에 설치했다.

첫 일주일 동안 차형욱은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힘들게 일궈놓은 모든 게 은우의 부재를 느끼자마자 덧없고 하찮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은우가 다시 돌아올 때를 대비해야 했다.

은우를 지켜줄 수 있는 더욱 단단한 울타리를 마련해두고 싶었다. 다신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은우를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문재준 비서실장의 눈물겨운 설득과 급박히 돌아가는 보고들이 차형욱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다시 차갑게 얼어붙은 공허함 속에 차형욱은 숨만 쉬고 있었다.

퇴근 후 따뜻한 은우를 품에 안고 있을 때만 오직 숨을 내쉬고 살아 있다고 느꼈다.

사랑? 헛소리였다.

이렇게 숨 막히게 맹목적이고, 자신을 자신이 아니게 만드는 이런 게 남들이 말하는 달콤한 사랑인가!

큭!

비틀린 조소가 차형욱의 목구멍 깊이에서 튀어나왔다.

자신의 심장이라도 파주고, 자신의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라도 눈을 뜨게 해서 옆에 두고 싶었다.

이런 마음은 남들이 말하는 달콤한 사랑 따위인가?

차형욱의 눈빛이 단호하게 바뀌었다.

자신이 은우를 만난 건 달력에 의미 없이 표시된 숫자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고작 반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혼에 찍힌 각인이나, 우습게도 남들이 쉽게 지껄였던 ‘운명’이라는 놈일 거다.

비록 남들이 말하는 운명이 자신이 은우를 생각하는 무게와는 차원이 다르더라도 말이다.

‘은우, 더는 날 혼자 버려두지 마라! 내가 완전히 미치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대기 중이던 문재준 비서실장이 회장실로 쫓아 들어오며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

본가 출신인 보디가드 박동수를 통해 전에 있었던 공격의 뒤를 캐고 있었다. 생각보다 꼬리가 잘 잘려 있어, 고작 이용당한 멍청한 신진 조직 꼬리만 물었을 뿐이다.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또, 일부러 흘려놓는 회사 기밀이 다시 세운 그룹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이미 덫에 걸린 쥐새끼를 철저히 잡기 위해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중이었다.

“회장님, 마케팅 회의 시간 10분 전입니다. 10층 세미나실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를 든 문재준 비서실장이 성큼성큼 앞서가는 차형욱 회장의 뒤를 따라 세미나실에 들어갔다.

이미 착석한 마케팅 부서 직원들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에 신차 디자인의 사전 유출이 있었다.

흉흉한 사건으로 부서 전체가 뒤집혀 난리가 났던 만큼, 다들 바싹 긴장한 모습들이 역력했다.

프레젠테이션은 마케팅 1부서의 배무영 과장이 주도했다.

배무영 과장은 미국 유명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2년 전 회사에 입사했다. 32살의 젊은 나이로 능력을 인정받아 올해 과장으로 승진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로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감 있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마케팅부서 미혼 여직원들의 뜨거운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원래 회사 내 최고 인기남은 차형욱 회장이 부동의 1위다.

하지만 얼음 칼날 풀풀 날리는 무표정으로 독설을 날리는 모습이 몇 번 목격된 이후로 접근하는 간 큰 여자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고 나자 차형욱 회장을 제외하고, 탑 10위 안에 드는 잘생기고 성격 덜 더러운 남자들에게 여직원들의 시선은 옮겨갔다.

어려서야 짝사랑도 즐겁고 설렌다지만, 나이가 찬 여자들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먹이를 노렸다.

그중에는 입사 후 계속 회장님의 오른팔로 있는 문재준 비서실장도 당당히 순위에 있었다.

깔끔하고 스마트해 보이는 얼굴과 늘씬하고 균형 잡힌 겉모습은 요즘 흔히 말하는 차도남의 전형이었다.

깊게 알고 보면 차형욱 회장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가끔 비서실 내 직원들에게 폭발시키는 문재준이었다.

잔소리가 엄청난 바람에 비서실 내에서는 ‘시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걸 다른 부서 사람들은 자세히 몰랐다.

만약 소문이 퍼진다면 반드시 잡아낼 꼼꼼함으로 가장된 쪼잔함도 비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맡은 마케팅 1부서의 배무영 과장입니다.”

중앙 스크린에 회사의 로고가 보이는 화면이 나타났다.

듣기 좋은 톤으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의 주 내용은 새롭게 개발된 YJ 자동차의 디자인과 혁신적인 친환경 엔진에 관해서였다.

주요 소비층의 다양화를 추구해 기존의 중년 소비층에서 젊은 소비층의 시선을 끄는 신선한 디자인을 소개했다. 더불어 안전성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기획임을 덧붙여 강조했다.

아직 기밀인 사항을 제외한 전반적인 신차 개발에 관한 브리핑과 판매 전략이었다.

추가로 들어오는 질문들을 여유 있는 태도로 막힘없이 대답하는 배무영 과장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은 기술 분야와 해외 판촉 관련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어둡던 회의실의 불이 켜지며 가벼운 박수 소리와 함께 밝아졌다.

구체적인 일정, 프로젝트 방향과 마케팅을 여러모로 분석해놓은 보고서에 대한 실질적 감사를 진행하고 검토했다.

회의는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때우고도 한참 지난 오후 늦게야 정리되었다.

회장실로 돌아온 차형욱은 의자에 앉아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였다.

은우가 잠든 방의 화면을 확대했다. 방에 들어온 주치의 정도훈이 체온계로 온도를 재느라 침대 옆에 앉았다가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곤히 감긴 눈은 뜨여지지 않고 잠자는 공주처럼 누워 있는 은우의 모습이었다.

잠자기 전에 늘 가볍게 입맞춤을 건네며 깨어나길 기대해보지만, 역시 동화책 속 해피엔딩은 현실과는 달랐다.

책상 위에 놓인 진한 커피를 입가로 가져간 차형욱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있었던 세미나 미팅에서 보았던 그는 조사 결과를 보지 않고 만났다면 쥐새끼라는 걸 의심 못 할 만큼 성실해 보였다.

그만 잡아들여 처리하기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기에 잠시 두고 보기로 했다.

쥐새끼는 쥐새끼일 뿐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썩은 하수구를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안심한 쥐새끼가 입에 독이든 먹이를 물고 다른 쥐새끼를 만다는 그 순간이 이들의 박멸할 타이밍이었다.

초기 프로젝트 진행 중에 일어난 유출 사건이라 회사에 끼치는 경제적 손실은 크진 않았다.

하지만 주인이 있는 마당에서 기어 다니는 쥐새끼는 사나운 짐승을 자극했다.

세게 움켜쥔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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