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아, 은혜롭고 거룩하시도다 (8/23)

08. 아, 은혜롭고 거룩하시도다

아침에 방문한 정도훈이 오두방정을 떨며 깨어난 은우를 보고 날뛰었다.

결국, 은우를 끌어안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짜증이 잔뜩 배인 손이 잽싸게 망할 정도훈을 밀쳤다. 맑게 웃고 있는 은우를 차형욱이 품에 꼭 넣었다.

아직 말이 짧고 말 수도 적은 은우이긴 하지만 몸이 자란 후 부쩍 말을 잘했다.

생생히 빛나는 은우가 차형욱은 차라리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예쁘게 빛나면 어쩌자는 건지. 살이라도 찌워야 하는지 생각하는데, 은우는 살이 쪄도 예쁠 거 같아 포기했다.

“도훈, 나 이제 커.”

몇 번 봤다고 이름까지 불러가며 은우가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에게 말을 시키는 미약하게 허스키함이 섞인 매력적인 음성에 정도훈은 감격했다.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서 춤이라도 출 기세다. 여신님이라 중얼거리며 휘둥그런 눈을 감지도 않았다.

업그레이드 은우의 미모 찬양을 랩처럼 쏟아내며 고생했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소파에서 TV 시청에 몰두하는 은우 옆에서 정도훈이 바쁘게 청진기와 체온계를 들고 여기저기 진료했다.

아침을 준비하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차형욱을 바라보며 정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느새 은우가 전부터 애청하는 어린이 채널이 끝나고, 아침 막장 드라마를 했다. TV 속에 파고들 듯 드라마에 빠져 입을 작게 벌리고 몰두한 은우가 보였다.

그 모습에 귀여워 죽겠다고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정도훈을 지나 은우를 안아 올렸다.

아까 재보니 은우의 키가 전보다는 훨씬 커져 170센티미터가 미세하게 넘었다.

전보단 약간 무거워졌어도 아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은우다.

보기에는 정상적이었다. 말랑하고 통통한 은우의 볼을 만져보며 차형욱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들린 몸에 은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른한 눈매를 살짝 접으며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는 차형욱에게 순하게 얼굴을 내밀어 주었다. 키가 컸고 외모도 티끌만큼 성숙해졌지만, 변함없이 아기천사 같은 은우의 행동이었다.

전과 달리 어린아이 다루듯이 안아 올리지 않았다.

무릎 밑에 손을 밀어 넣고 등을 감싸 안았다. 일명 공주님 안듯이 들어 올리자 정도훈이 꺅꺅 시끄럽게 군다.

은우가 좋아하니 은우 앞에서 정도훈을 집어 던질 수는 없었다.

딱 봐도 이성적인 관심보다는 은우 천사 찬양에 가까운 광신도의 모습과 팔불출 엄마 같은 정도훈의 행동이었다.

차형욱은 아까부터 시끄러운 심장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10년이 훌쩍 넘게 옆에 있고 자신이 상처를 입으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정도훈이었다. 차형욱은 깨달았다. 감정이 메말랐다고 여긴 자신도 정도훈에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을 내주고 있었나 보았다.

은우로 인해 굳게 닫혔던 감정의 문이 조금씩이나마 열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배려해 참아야 하는 것과 자신의 독선에 인한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이해가 넘나들었다. 낯설지만 은우로 인한 변화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은우를 왼쪽에 앉히고 은우의 표정과 손가락질에 따라 차형욱은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조용하던 오른쪽에서 들리는 소음에 식탁 위에 평화가 깨졌다.

탁.

잘 먹다가 멈칫한 은우 앞에 멸치 볶음을 가져가며 차형욱이 오른쪽을 힐끔 보았다.

정도훈이 숟가락을 놓치고 소리 없이 입을 쫙 벌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부릅뜬 눈으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간질 병자처럼 몸을 떨며 정도훈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배야. 얼음덩이 차형욱! 완전 임자 만났구나. 미치겠네. 프흐흐흐흐흐”

여전히 낄낄거리는 정도훈을 차형욱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전에 시도했다가 뱉어냈던 멸치볶음을 먹는 은우를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필수 영양소 체크해 골고루 몇 번 더 먹이자, 벌써 배가 부르다고 은우가 입을 다물었다.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이거 하나만 더 먹자고 살살 달랬다.

다시 오른쪽에서 박장대소가 튀어나왔다. 시끄러운 놈.

겨우 계란말이 하나를 더 먹이고만 차형욱이었다. 은우의 입가에 붙은 밥알을 손가락으로 쓸어 차형욱이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어이없다는 콧소리를 날리는 정도훈의 입에 계란말이 하나를 처넣어 닥치라는 말을 대신했다. 작게 소매를 흔드는 느낌에 은우를 보자 어깨가 처진 은우가 계란말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벌렸다.

차형욱이 번개같이 젓가락질로 그걸 입가에 대주었다.

잘 먹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차형욱이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하늘빛 눈이 곱게 접혔다.

“헐래! 은우, 지금 질투하는 거 아니야? 차형욱이 나한테 계란말이 주니깐, 은우도 달라고 하는 거지? 와! 가슴 찢어진다, 천사님이 나한테 이럴 수가.”

흑흑 우는 시늉을 덧붙이는 정도훈의 말에 차형욱은 머리가 정리가 안 되었다.

‘뭐? 질투라니…….’

“푸하하하, 내가 진짜 미친다. 차형욱! 너 얼굴은 그대로고 귀만 빨개졌다. 애인을 만들던지 해야지…… 진짜 눈꼴시어서 못 살겠네. 네가 10년 치를 한꺼번에 웃겨 날 암살하는구나. 잔인한 차형욱이 같은 놈아!”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정도훈이었다. 그런 정도훈의 난리블루스보다 질투라는 한마디가 차형욱의 가슴을 두드렸다.

‘은우가 질투했다고?’

은우를 보자 아무것도 모르는 듯 정도훈 쇼를 구경하며 입에든 계란말이만 먹고 있다.

하지만 은우의 행동이 질투였다는 생각에 차형욱의 입매가 사정없이 풀렸다.

참기 힘든 차형욱이 미치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은우를 꼭 끌어안고 얼굴 가득 뽀뽀 비를 내렸다. 가만히 안겨 웃고 있던 은우가 식탁에 손을 뻗었다.

숟가락을 잡아들고 밥그릇에서 밥을 퍼 차형욱의 입가에 대준다.

엉겁결에 입을 열어 밥을 받아먹는 차형욱의 깨져버린 표정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무뚝뚝한 얼굴의 차형욱이지만, 입가는 계속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너 얼굴 이상하다고 옆에서 끌끌 혀를 차고 기막혀하는 정도훈의 헛소리를 차형욱은 가차 없이 무시했다. 그저 은우의 숟가락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정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우가 숟가락으로 흙을 퍼줘도 처먹을 놈!’

은우가 자꾸 긴 자기 머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아까운 머리를 하는 수 없이 잘라주기로 했다. 미용실 원장에게 차형욱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유명 연예인도 마음에 안 들면 예약을 받지 않기로 유명한 양도림 원장이었다. 주로 가명인 양드레 원장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오랜만에 걸려온 YJ 그룹 차형욱 회장의 예약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에 사고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반짝거리는 검정 링컨 차량이 청담동 숍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보디가드보단 운전기사에 가까운 박동수가 서둘러 뒷문을 열었다.

“아마 1시간쯤 걸릴 거 같군.”

안녕이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새로운 은우 모습에 차형욱 회장의 목소리는 공중으로 씹혔다. 영혼이 사라진 멍한 얼굴의 박동수가 반사적으로 같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TV 어린이 채널의 부작용인지 은우는 인사성이 너무 밝았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심장이 떨리는 주위 사람들이었다.

얼굴을 붉힌 박동수의 모습이 눈꼴 시린 차형욱은 은우의 어깨를 감싸고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 같아서는 은우의 머리카락 한 올도 자르고 싶지 않은 차형욱의 본심이었다. 긴 머리카락에 걸려 은우가 넘어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차형욱은 큰 결심을 했다.

전과 달리 나름 활동적으로 걸어 다니는 은우를 위해 잘라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가위로 자신이 달랑 잘라주기에는 경험도 없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차형욱은 지금이라도 은우를 달랑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신기해하다가 열린 문에 먼저 몸을 집어넣고 들어서는 은우 때문에 차형욱의 한숨은 깊어갈 뿐이었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너무 오랜만이에요. 차 회장님! 설마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머리 맡기는 거 아니지요? 오늘도 머리 커트만?”

핑크색 레이스가 덧대진 화려한 블라우스, 9부 스키니 노랑 바지와 맨발에 갈색 슬립 온 슈즈를 신은 양드레 원장이었다. 보라색으로 탈색한 머리를 흔들며, 쉴 새 없이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떠들었다.

여전히 커다란 코트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은우가 양드레 원장을 구경했다. 은우의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차형욱 회장이 양드레 원장을 보았다. 뒤늦게 은우의 존재를 눈치챈 원장이 화들짝 놀랐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이쪽도 손님인가? 왜 이렇게 다 가렸어요? 유명인이라도 되나? 자기들, 그러지 말고, 우선 이쪽 내 방으로 오세요. 차 회장님이 데려온 사람이라니 궁금해 죽겠네.”

순식간에 혼잣말같이 쏟아져 나오는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그게 신기한지 은우의 시선이 양드레 원장의 입에서 돌아갈 줄을 모르고 집중되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원장 개인 방에 들어섰다.

답답했는지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은우를 보고 차형욱이 코트를 벗겨주었다.

숍에 들어서고부터 한순간도 다물어지지 않던 막강 입담을 자랑하는 양드레 원장의 수다가 드디어 멈췄다.

바닥까지 떨어진 턱은 흉하게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다시 치밀어 오는 짜증에 은우를 안고 나가고 싶은 차형욱의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고민 끝에 입을 열어 양드레 원장에게 주문했다.

“너무 길어서 불편해하니깐 적당히 잘라 주십시오.”

“아!”

양드레 원장은 홀리듯 은우의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손을 뻗어 은우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 올렸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가 폭풍 감탄을 시작했다.

“진, 진짜다. 천연 은발이라니. 이런 부드러움이라니. 악.”

거의 미친 듯이 자기 머리를 감싸고 쥐어 뽑는 포즈를 취했다.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양드레 원장이 순간 매섭게 눈빛을 바꿨다.

청담동에서 15살부터 가위든지 벌써 25년이었다.

이제 마흔에 접어든 양드레 원장은 본인 앞에 펼쳐진 발끝을 닿는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의 스타일을 구상해봤다. 어떻게 해도 작품이었다.

황홀하게 눈앞의 작품 재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양드레 원장이 처음으로 거울 속 은우의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더 커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 양드레 원장의 작은 눈이 팽팽하게 확장되었다.

쫙 벌어진 입에 손을 가져가며 신음을 뱉었다.

“천…… 사…….”

일명 은우 천사설 광신도 한 명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차형욱은 아까부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꾹 누르며 참았다.

“은우야.”

은우가 자신의 이름을 천사라고 틀리게 부르자 다시 정정해주었다.

거울을 통해 나른한 눈매를 접은 은우가 입을 열자 미성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겨우 진정이 되어가던 양드레 원장이 다시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감탄을 토해냈다.

“은우 자기야, 자기 진짜 예쁘다. 혹시 내가 모르는 외국 연예인이야? 응? 이상하다 이 정도 외모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혹시 준비 중이라거나 그런 건가? 머리 너무 예쁘다. 자른다는 게 너무 아까워. 어떻게 기른 거야, 영양이 끝까지 살아 있어! 소장하고 싶다! 자기 혹시 모델 같은 거 할 생각 있음 언제든지 말해. 헙!”

모델이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하던 양드레 원장이 낮아진 주변 온도에 오싹함을 느꼈다.

서늘하게 노려보며 경고를 보내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부랴부랴 가위를 챙겨 들었다. 가위를 보자 입을 찢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차형욱은 불쾌감이 샘솟았다.

지금 은우를 보고 침 흘리는 양드레 원장은 업계 최고라는 스타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 여러 엔터테인먼트들과 긴밀한 관계였다.

탑 연예인들 관리도 해주고 있기에, 입에 발린 말로 은우에게 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림없는 헛소리였다.

은우를 밖으로 내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었다.

지금도 눈이 닿는 모든 것들이 모조리 치워버리고 싶은데 감히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조용해진 실내가 이상한지 은우가 고개를 돌려 차형욱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은우의 모습에 양드레 원장을 차갑게 바라보는 것을 멈췄다.

마주친 차형욱의 눈이 좋은지 은우의 눈매가 살짝 접히며 예쁜 곡선을 만들었다.

차형욱의 불쾌했던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굳어 있던 양드레 원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은우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짧게 자르기 너무 아깝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은우에게 어울리니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긴 머리를 유지해 자르기로 했다.

허리선을 중심으로 끝 부분은 숱을 쳐 조금 가볍게 했다. 가장 긴 기장은 엉덩이 밑으로 몇 가닥 살짝 흩날리듯 내려왔다. 걸을 때 은빛이 휘날리는 환상적인 디자인이라고 양드레 원장이 자신했다.

시끄럽긴 해도 역시 20년 이상 이 바닥에서 밑바닥부터 굴러 최고로 평가받는 양드레 원장다운 솜씨였다.

차형욱은 굳었던 입매를 조금 풀었다.

예술가의 번뜩이는 눈초리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며 양드레 원장 혼자 하얗게 불태운 시간이 꽤 지났다.

드디어 가위를 내려놓고 예술 작품 만지듯 은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원장의 손길이었다.

차형욱은 주먹을 쥐었다 놨다 반복하다가 결국 원장의 손을 살짝 막으며 대신 은우의 머리를 살살 매만져주었다.

“어머, 어머! 은우 자기 최고당!”

이 말을 무한 반복하며 양드레 원장이 손뼉을 쳤다. 은우의 잘린 머리카락을 가지는 조건으로 돈을 안 받겠다고 했다.

차형욱이 듣기에는 어림없는 소리였다.

칼같이 거절하고 싹싹 긁어모아 박동수를 호출해 사온 상자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워진 머리가 좋은지 연신 머리를 흔들며 은우가 좋아하는 모습을 원장과 차형욱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코트를 입혀 주려는 찰라,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양드레 원장님, 저 왔습니다.”

“어라! 안에 다른 손님 계신 모양인데요, 대표님?”

금발로 탈색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순한 외모의 남자와 전에 마주친 기억이 있는 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구철민이었다.

성큼 걸어온 구철민 대표는 사람 좋게 웃었다.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한 차형욱 회장을 마주 보고 인사를 건넸다.

“YJ 그룹 차형욱 회장님 아니십니까? 이거 실례했습니다. 전에 인사를 드렸던, 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구철민 입니다.”

슬쩍 같이 들어온 금발머리에게 눈치를 주자, 올해 데뷔한 R&Me 멤버 태윤이라고 소개했다.

눈치 빠른 태윤이 차형욱 회장에게 인사를 하며 눈웃음을 흘렸다.

전체적으로 검정 가죽이 포인트로 들어간 카키색 티셔츠에 달라붙는 블랙 스키니 바지가 눈에 보였다. 같은 색의 굽이 있는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175센티미터 조금 넘어 보이는 태윤은 옅은 화장까지 하고 있어 그의 중성적 외모가 돋보였다.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빠르게 은우를 등 뒤로 보냈다. 차형욱 회장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네, 저는 볼일은 끝났으니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억!”

“아!”

은우를 데리고 서둘러 나가려는데, 앞쪽 두 남자에게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등 뒤에 있던 은우가 어느새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인사하는 이들에게 손을 살살 흔들어주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은 차형욱이 뒤로 몸을 돌려 은우를 챙겼다.

반쯤 벗겨진 은우의 모자를 꼼꼼히 씌워주고, 은우의 어깨를 감싸 밖으로 걸었다.

“잠깐! 차형욱 회장님!”

하지만 구철민 대표의 큰 덩치 때문에 문 앞이 자연스럽게 막혀 있었다.

은우를 바라보며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구철민 대표가 차형욱을 불렀다.

“혹시, 이분도 외국 모델이나 연예인입니까?”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괜찮다면, 우리 회사와…….”

“됐습니다.”

“잠깐 앉아서 말이라도 해보면…….”

“박동수!”

끈질기게 늘어져 문을 막고 말을 시키는 구철민 대표였다.

점차 불쾌해지는 차형욱이지만, 은우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좀 전에 들어와 대기 중이던 보디가드 박동수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모처럼 운전이 아닌 보디가드 임무에 박동수는 신이 났다.

잽싸게 튀어나와 차형욱 회장의 앞을 막고 있는 구철민 대표 쪽에 손을 뻗어 옆으로 밀어냈다. 문 쪽으로 길을 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비켜주십시오.”

“어, 어! 잠시만요.”

다급해 보이는 구철민 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급히 입을 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은우의 어깨를 감싼 차형욱 회장은 보디가드 박동수의 도움에 이미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구철민 대표, 이 사람은 지금도 앞으로도, 그쪽으로는 상관없을 사람입니다. 이만 실례.”

사실 구철민 대표의 평판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성격도 모나지 않고, 능력 있다는 평이 많았다. 고작 35살의 젊은 대표가 최상급 가수, 모델, 배우를 데리고 있기 위해서는 남다른 감각이 필요했다.

날카롭게 스타성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끈질긴 근성은 필수였다. 그것이 그를 짧은 시간에 업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할 수 있게 하는 뒷받침이었다.

또한, 그의 뒷배경이 든든한 거 역시 플러스 요인이었다. 이쪽 계통에 정보가 빠삭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는 이야기였다.

초창기에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무른 면이 많은 구철민 대표에게 사기를 치려 접근하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물론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어디 야산에 묻혔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자 더는 그런 사기꾼이 접근하지 않았다.

그렇게 뒤에서 몰래 돕는 손길들도 그가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요인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그의 집안은 보성파였다.

비록 황성파와 비교해서는 작은 규모지만, 일제 시절부터 대대로 내려온 탄탄한 조직이었다. 그가 20대 후반에 보성파를 나와서 스타 엔터테인먼트를 창설하자 조직 내에 말이 많았었다.

하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독하거나 냉정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 가족들은 수긍했다.

지금 보성파는 구철민 대표와는 7살 차이의 친형 구중석이 보스로 있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형인 구중석이 어린 구철민을 키우다시피 했다. 어려서부터 형이 동생을 업고 다니며 돌봐주었다.

거의 과보호하다시피 키워서 그런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하고 고지식한 성격으로 자란 구철민이었다.

브라콤으로 유명한 보성파 보스 구중석이었다. 190센티미터 가까운 큰 키와 한 덩치 하는 구철민 대표를 행여 넘어져서 다칠까 감기라도 걸릴까 감싸고 돌았다.

구철민보다 작은 덩치인 구중석이지만 동생을 만나기만 하면 옆에 끼고 앉아 귀여워했다.

커다란 동생의 살이 빠졌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하며 밥을 먹이고, 용돈까지 매달 챙겨주었다.

곰 같은 겉모습과 다르게 곱게 자란 구철민 대표였다. 물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평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구철민 대표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지만, 그가 은우에게 관심을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래서 일부러 보디가드 박동수까지 동원했다. 어떤 접근이라도 초반에 강하게 막아야 했다. 사전에 차갑게 거절을 표현한 것이었다.

“회장님, 잠깐만…… 헉!”

구철민의 손에 걸린 은우의 큼직한 모자가 순식간에 뒤로 벗겨졌다.

차형욱의 옆에 걷던 은우가 고개를 올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구철민 대표를 바라봤다.

왜?

눈동자에 궁금증을 담고 가만히 구철민 대표를 쳐다보는 은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은우의 어깨를 감싸고 걷던 차형욱 회장의 발걸음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물러섰던 보디가드 박동수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빠른 손놀림으로 구철민 대표의 손을 쳐내고 은우의 옆에 섰다.

은우의 은빛 머리가 모자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은우가 멈춘 원인을 뒤늦게 발견한 차형욱 회장이었다.

끓어오르는 화에 눈빛만으로 찔러 죽일 듯 구철민 대표를 차갑게 노려봤다.

“아! 아…… 저기…… 실례…… 그니깐,”

구철민 대표는 갑자기 마주친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놀란 얼굴로 순식간에 밀쳐진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를 죽을 듯 노려본 차형욱이 은우를 옆으로 바싹 당겼다.

그제야 살벌한 분위기와 자신에게 향하는 살기를 눈치채고 몸을 흠칫 떨었다.

잔뜩 풀이 죽은 큰 덩치를 푹 숙이고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

쓱, 쓱.

은우의 하얀 손이 어느새 다가와 큰 덩치를 푹 숙이며 사과를 하는 구철민 대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은우!”

이에 놀란 차형욱이 강하게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 자리에 굳어 은우를 바라보는 그에게 눈이 마주친 은우가 눈가를 접으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매력적인 허스키한 미성의 목소리에 비로소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린 구철민 대표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차형욱이 아직도 구철민 대표의 머리 위에 올려 있는 은우의 손을 얼른 잡아챘다.

손을 잡힌 은우가 차형욱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얼굴을 보자 차형욱은 끓어오르던 불구덩이가 가라앉았지만, 은우의 손을 옷자락에 빠르게 닦아냈다.

그 뒤에서 은우의 손을 놓지 않고 자신의 손과 단단히 깍지를 꼈다.

좀 전까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감히 은우의 쓰다듬을 받았던 덩치 큰 놈이 이제 뻔뻔하게 고개를 슬쩍 들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덩치도 크고 나이는 오히려 자신보다 많은 구철민 대표였지만, 어째 하는 짓은 커다란 새끼 곰이 생각나는 행동거지였다.

도저히 30대 중반의 그것도 조직과 연관된 놈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은우의 괜찮다는 발언에 차형욱은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다.

차형욱에게 손이 꼭 잡힌 상태에서도 연신 새끼 곰을 바라보며 관심을 표현하는 은우의 모습이었다.

가슴에서 시커먼 불로 지져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억눌린 분노에 인해 살짝 떨리는 손으로 은우의 손만 말없이 쥐고 서 있었다.

갑자기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훅하고 차형욱의 콧속에 흘러들어왔다.

“아가, 추워?”

떨리는 차형욱의 손을 눈치챈 은우가 그의 허리를 양손으로 꼭 안아주었다.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은우의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린 차형욱이었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은우가 더욱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차형욱은 추잡한 소유욕에 떨리던 손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차갑게 식었던 손에 드디어 피가 돌아 심장까지 흘러갔다.

자신에게 고정된 깨끗한 하늘빛과 자신을 걱정하는 사랑스러운 입술을 쳐다보았다. 자석에 끌리듯 앞으로 나간 입술이 은우의 입술에 닿았다.

헐! 학! 헉!

놀란 숨소리들이 거의 동시에 터져 작은 방을 울렸다.

쪼옥. 말캉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간 은우의 하얀 웃음만 차형욱 세상에 선명했다.

다들 턱 끝이 바닥에 떨어져 입이 쩍 벌어졌다. 라이브로 펼쳐지는 소문난 얼음덩이 차형욱 회장의 애정행각이었다.

정말 희귀한 동영상을 보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마치 꽃송이가 배경으로 흩날리는 착각에 눈을 비볐다.

그 상황이 남들보다 조금은 익숙한 박동수만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박동수는 아까부터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에 제발 저 구철민 대표가 눈치껏 물러나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차형욱 회장이 나서기 전에 불쌍한 인간 하나 구제하고자 열심히 경고의 시선을 던졌다.

눈치는 밥 말아 처드신 저 대표 놈은 끝까지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박동수가 눈을 질끈 감고 한탄했다.

아! 하늘이시여, 오늘 밤 시체 하나가 또 위로 올라갑니다. 쭉쭉, 쭉쭉.

천사님이 잠든 사이 벌어졌던 사건이 생각났다.

피를 뒤집어쓴 반쯤 돌아버린 저 회장님이 미쳐서…… 아니, 화가 조금 많이 나셔서 일어난 사건! 일 친 놈들 조금 심하게 혼내주시고, 애써서 성불시켜주신 사건!

천사님이 깨어나자마자 겨우 얌전한 척 내숭을 떨고 계시는데 또 이런 시련이라니.

전에 사건 처리하느라 2박 3일 구토를 했던 불쌍한 조직원을 제발 배려해주길 기도했다.

천사님이 손수 옥수를 내밀어 곰 대표 놈에게 은총을 내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박동수가 눈마저 질끈 감고 미리 곰 대표에게 묵념을 보내고 있었다.

천사님이 냉혹하게 변한 얼굴로 날뛰려는 차형욱 회장님을 품에 안고 보듬어주시었다.

‘아, 은혜롭고 거룩하시도다.’

새하얗게 빛나는 깨끗한 볼에 쏙 패인 보조개 필살기를 드러내시었다.

사나운 짐승이 이빨과 발톱을 쏙 숨기고 꼬랑지를 흔드는 대형견으로 변신했다.

한술 더 떠서 입술까지 내미는 차형욱 회장님의 말도 안 되는 애교가 펼쳐졌다.

저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에 잘 모르는 이들이 차형욱 회장을 본다면 눈치채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회장님을 곁에서 모시는 측근의 입장에선, 저건 완전히 흐물흐물 풀려 좋아 죽겠다고 쓰여 있는 표정임이 확실했다.

그 눈치 없던 곰 대표마저 완전히 수긍한 얼굴이었다.

아! 그랬구나!

득도의 표정으로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곰 대표 옆에 있는 놈이 박동수의 보디가드 레이더에 걸려들었다. 다른 사람 눈을 피해 은우 님을 노려보고 있는 금발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눈빛으로만 대화를 주고받던 구철민 대표와 차형욱 회장이 극적으로 화해했다.

차형욱 회장님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곰 대표가 실례했다고 말했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아까부터 옆에서 꺅꺅거리며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양드레 원장이었다.

박동수는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을 보여드립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생각났다.

기분이 풀린 듯 작게 고개마저 끄덕인 차형욱 회장이었다. 전보다는 키가 컸지만, 여전히 190센티미터의 회장님 옆에선 한참이나 작은 은우 천사님을 공주님처럼 번쩍 안아 올렸다.

뻔뻔하게 그 상태로 방에서 나가는 그가 바로 YJ 그룹의 회장이자 나의 보스인 차형욱 회장님이었다.

박동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서둘러 차형욱 회장님과 은우 님의 뒤를 쫓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사방팔방에서 ‘꺅, 꺅, 꺅.’ 하는 무수한 감탄사가 들렸다.

왜 그런지 모르고 고개를 여기저기 돌리는 은우 님과 기막히게 좋은 머리로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차형욱 회장님이었다.

그는 특유의 무심함으로 은우 님을 꼭 안고 걸으며 깔끔히 주변을 초토화하고 계셨다. 강적 커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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