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내가 지켜. 아가, 괜찮아
슥, 슥.
빠르게 손을 움직여 종이에 멋들어진 글씨로 사인을 하는 차형욱이었다.
은우는 책상 앞에 있는 가죽 소파에 몸을 늘어트리고 그런 모습을 한가롭게 구경하는 중이었다. 은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깔끔하게 정리해 뒤로 넘긴 머리의 차형욱이 고개를 들었다.
은우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심심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은우가 아까 재준이 손에 쥐어준 커다란 뻥튀기에 이빨 모양을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위인전기가 몇 권 놓여 있는데, 얼마 전 정도훈이 은우에게 선물해준 책들이었다. 자신은 한가한데 차형욱만 바빠 보였다.
그 사실이 안타까운 은우가 차형욱이 앉아 있는 의자 옆에 다가갔다.
“아가, 은우 도와줘?”
순간 어깨가 흔들린 차형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은우에게 말했다.
“크, 흠! 괜찮다.”
차형욱의 거절에 은우의 눈매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안쓰럽게 처졌다.
어깨를 힘이 빠져 손에 든 뻥튀기만 만지작거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목격한 차형욱이 만년필을 떨어트렸다.
의자를 조금 뒤로 뺀 그가 은우의 허리를 잡아채 무릎 위에 올리고 정수리에 볼을 비볐다.
“그냥 옆에 있어주면 충분해.”
‘정말?’이란 의문이 그대로 담긴 얼굴로 은우가 바라보자 차형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검은 속눈썹이 살짝 내려가며 은우의 입술에 몰캉한 차형욱의 입술이 포개졌다.
시원한 향이 나는 입술이 느껴지자, 은근슬쩍 혀를 내밀어 맛을 보는 은우다.
순간 반쯤 감겼던 차형욱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은우의 허리를 감고 있는 차형욱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은우의 몸을 자신에게 강하게 붙였다.
차형욱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 얼굴만 돌리고 있던 은우의 몸이 차형욱의 방향으로 단번에 돌아갔다.
뒷목을 감싼 큰 손에 얼굴을 잡힌 은우는 시원한 향을 입안 깊이까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낮은 울림이 목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크르륵 끓어오르는 소리가 차형욱의 숨소리와 섞여 나왔다.
“크으윽! 은우.”
억눌린 신음이 입술이 떨어진 잠깐 사이에 차형욱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입술끼리 한 치의 틈 없이 붙여진 상태에서 부딪혀 부드럽게 마찰을 일으켰다. 단번에 입술 전체를 감싼 따뜻한 온도가 점점 달아올라 뜨거워졌다.
살짝 부어오른 젖은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예민한 감각이 몸 전체로 뻗어 갔다. 고장 난 듯 빠르게 뛰는 심장은 야릇한 아픔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차형욱의 단단하고 뜨거운 혀가 은우의 입술을 자극하자 새로운 감각이 발끝까지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발끝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며 몸이 빳빳하게 펴졌다.
“아! 아, 흣!”
차형욱의 뜨거운 손이 어느 틈에 은우의 옷 속으로 들어와 맨살에 닿았다.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 조금만 움직여도 은우의 등 전체를 어루만질 수가 있었다.
그 감촉에 취한 차형욱이 손바닥을 밀착해 정신없이 쓰다듬는 와중에 은우의 바지 뒤까지 스쳐 들어갔다.
막힌 입술이 순간 떨어지며 알 수 없는 신음이 자기 입에서 튀어나오자 은우의 몸이 떨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에 차형욱이 정신을 돌아왔다.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은우를 바라보다 이마를 마주 붙였다.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달래듯 속삭였다.
“괜찮다. 은우, 그건……. 괜찮은 거다. 놀랐나?”
차분한 차형욱의 목소리에 은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눈을 멍하게 깜박이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차형욱의 입술이 시원한 향이 나지만, 뜨겁다고 지적했다. 입술이 닿으면 참 좋은데 가끔 심장이 빨리 뛰어 무섭고, 몸이 이상하고 설명했다. 좀 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자세하게 느낌을 말해주었다.
차형욱의 손이 자기 몸을 쓸어주자, 발가락도 멋대로 움직여 이상하다며 손가락으로 발을 가리켰다.
은우에게 이마를 붙이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듣던 차형욱의 몸 전체가 그 말을 듣고 크게 흔들리며 떨려왔다.
심각한 문제인 줄 알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슴을 살랑살랑 만드는 달콤한 고백이라니. 결국, 은우에게 붙이고 있던 이마를 들어 올린 차형욱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멍하게 차형욱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은우가 자기도 기분이 좋은지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운 차형욱이 은우의 얼굴 전체에 입술을 셀 수 없이 붙였다가 뗐다.
드물게 선명히 올라간 차형욱의 입가에 은우가 손을 뻗어 만지작거렸다. 끊임없이 내려오는 뽀뽀가 간지러운 은우가 몸을 흔들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웃고 있는 은우에게 입술에 포갠 차형욱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까만 눈을 진지하게 뜨고 하늘빛 눈을 마주 봤다.
“앗!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나 몰라요? 저번에 봤잖아요.”
갑자기 들리는 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은우가 회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늘 차분한 문재준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격양되어 있었다.
“약속 없이는 절대 못 들어가십니다! 자꾸 이러시면 경비원을 부르겠습니다.”
“하! 뭐라고? 장난해? 나 김진영이야. 나라니깐!”
“경비실! 지금 당장…….”
찰캉, 쾅. 바닥에 뭔가 던져지는 소리가 회장실 안에까지 들려왔다.
“야! 너, 진짜 장난해? 해고당하고 싶어? 나 세운 그룹 김진영이야. 몰라?”
“허! 지금 전화기를 집어던진 겁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차형욱! 형욱 씨! 나 왔어요. 좀 나와봐요. 형욱 씨!”
“그만하십시오!”
요란하게 실랑이하는 잡음과 시끄러운 고음의 남자에게 맞서 싸우는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매일 도시락과 맛있는 간식을 주는 착한 문재준의 화난 목소리에 은우의 눈에 걱정이 스쳤다.
처음에는 회장실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도 무시하고 있던 차형욱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릎에 앉아 있는 은우를 내려놓고 드디어 차형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우, 여기서 잠깐 기다려.”
은우를 다시 의자에 앉히고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준 차형욱이 무표정하게 변한 얼굴로 회장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문재준 비서실장이 경비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회장실 문에 뭔가가 부딪쳐 들썩였다.
잘못하면 이곳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형욱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은우가 있는 회장실 문을 닫았다.
회장실 밖에 나와 보자, 이제 막 도착한 경비원들이 뛰어왔다. 비서실을 무단 통과해 회장실 문으로 돌진하려는 김진영을 문재준이 막고 있었다.
앙칼진 김진영은 문재준에게 막혀 끌려가는 와중에 회장실 문에 물건을 던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차형욱 회장을 보더니, 기고만장하게 비서실장 문재준을 노려보는 김진영이었다.
문재준은 평소 말끔한 상태가 아니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히도 짜증이 났던지 목까지 항상 단정히 맨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아, 형욱 씨! 정말 기가 막혀서…… 이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짜증 나! 이 사람 해고해요. 네? 아랫사람들한테 나하고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말 좀 해줘요. 진짜.”
차형욱 회장을 보자마자 험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을 펴고 투정부리듯 어깨를 흔드는 김진영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말투에 자존심이 상해, 좀 심하게 흥분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차형욱 회장의 눈치를 보며 변명으로 시작된 김진영의 이야기는 자신을 납득시키며 점차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결론은 자신은 죄가 없었다. 죄다 남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김진영이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과거의 연민에 호소하는 모습에 한 톨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내버려둔 게 화근이었다. 뜨거운 줄 모르게 달려드는 불나방 같았다. 가끔 불쌍한 모습과 그 발악하는 행동을 보고 자신을 낳아준 여자가 떠올랐었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날뛰지는 못했었는데, 저번에 허락 없이 찾아온 김진영을 참아줬던 것이 실수였다.
이런 하찮은 일에 사랑스러운 은우를 잠시라도 떼놓고 있다는 게 짜증이 날 뿐이었다.
“끌어내! 다신 올려보내지 말도록.”
경비 부장을 바라본 차형욱 회장이 싸늘하게 지시 상황을 말한 뒤 몸을 돌렸다.
뒤로 돌아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를 따라, 발악에 가까운 힘으로 문틈을 몸을 비집고 따라온 김진영이었다.
“차형욱! 형욱 씨! 나한테 이럴 순 없잖아!”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며 차형욱 회장에게 매달린 김진영의 눈이 은우를 향했다.
깜짝 놀란 은우는 의자에서 살짝 일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에 의문을 가득 담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은우가 돌연 벌떡 일어나 멍하게 서 있는 김진영에게 다가왔다.
반면 김진영은 갑자기 등장한 현실감 없는 존재에 화내던 것도 잊었다.
쫘르르 소리가 날 것 같은 긴 은발을 흩날리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얼굴마저 살짝 붉게 물든 김진영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순간 넋을 잃었다.
차형욱은 그 모습을 보자 급 불쾌해졌다.
당장 은우를 바라보는 더러운 눈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순식간에 자신을 지나쳐 김진영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은우의 어깨를 차형욱이 잡으려고 했다.
은우는 평소의 나른한 눈매가 아닌 나름 최대한 힘을 준 것처럼 보이는 눈으로 그의 손을 피했다.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 은우의 거절에 돌처럼 굳어버린 차형욱을 한 점 망설임 없이 지나쳤다.
홍조 띤 김진영의 정면에 발을 멈춘 은우가 차형욱을 등지고 두 팔을 옆으로 쫙 벌렸다.
“아가한테 오지 마. 내가 지켜. 너 가!”
뒤늦게 터져 나오는 은우의 목소리는 차형욱의 심장을 사정없이 쥐어짜 움켜쥐었다.
어머나! 캬아!
회장실 문틈에 고개를 들이민 문재준 비서실장과 경비 부장이었다. 아까 들어오려다가 급변한 상황에 어정쩡한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주말 드라마에 푹 빠진 아줌마로 빙의해 눈을 빛내고 구경 중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감탄의 소리를 쌍으로 내고 말았다.
은우 특유의 여전히 짧은 말투가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차형욱의 가슴에 뜨겁게 박히며 이해됐다. 자제할 수 없이 기쁜 마음이 날뛰었다.
눈앞에 보이는 날 지켜주려고 하는 은우의 곧은 등을 꼭 끌어안았다.
더 빠질 수 없을 만큼 빠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을 더욱 깊이 잡아끌었다.
그런 은우 때문에 차갑게 식어 있는 자신의 심장이 생생히 살아나서 가슴을 아프게 두들겨댔다. 자신을 향한 그 마음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이익! 너! 누구……. 앗! 놔! 놓으라고! 악, 형욱 씨!”
뒤늦게 상황이 눈에 들어오자 표독스럽게 변한 김진영이 기막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한바탕 욕이라도 할 듯한 그 모습에 눈치 빠른 경비부장이 그 입을 틀어막고 질질 끌어냈다.
조용히 끌려나가는 김진영의 뒤로 은우는 손을 올려 살랑살랑 바이바이 인사까지 해주었다.
김진영이 완전히 회장실 밖으로 끌려 나가자 얼른 문까지 꼭 닫았다.
엉뚱한 은우지만 지금은 무슨 생각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차형욱은 온 힘을 다해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은우를 품속으로 당겨 세게 끌어안았다.
“갔다. 내가 지켜. 아가, 괜찮아.”
차형욱의 품에 들어온 은우가 팔로 그의 등을 토닥토닥 했다.
마치 겁먹은 차형욱을 달래듯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은우가 지켜준 거 맞다. 고맙다”
은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쓸어주며 나직이 고맙다고 했다.
선명한 하늘이 반짝이다가 보이지 않게 휘어져 접혔다. 점점 쏙 들어가 선명해지는 은우의 하얀 볼우물에 입을 맞췄다.
‘고맙다, 은우. 날 지켜줘서. 어둡고 삭막한 이 세상에서 존재해줘서, 내게 와줘서 고맙다.’
(정도훈 Side)
-헤어지자고? 무슨 뜻이야?
-미안해, 그 사람 임신했어.
-괜찮아. 사실 넌 잃어버렸던 내 오빠야.
-그 아이는 다른 사람 아이야.
-뭐라고? 잘됐다. 사실 넌 내 오빠가 아니래.
-사랑해!
오늘도 변함없이 차형욱이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TV 앞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은우다.
요즘 은우는 어린이 프로가 끝나고 이어서 시작하는 막장 드라마 ‘오빠 사랑해’에 폭 빠져 꼬박꼬박 시청하는 중이었다.
살짝 입을 열고 눈을 TV 화면에서 고정하고,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가끔 귀엽게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우는 살인적인 귀염의 대상이었다.
옆에서 차형욱 몰래 볼을 쿡, 찔러보자 탱탱 볼처럼 쏙 들어갔다 튕겨 나왔다. 말랑말랑한 볼을 한번 찌르기 시작하자 멈추기 힘든 중독성이 있었다.
요즘 30대에 발을 걸치자 생긴 눈가 주름이 걱정인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콜라겐 덩어리가 살아 숨 쉰다.’는 화장품 광고의 그림이 그려졌다.
요 귀염 열매를 잔뜩 먹은 천사님은 아무리 찔러도 꼼짝도 안 하고 TV만 들여다보고 계신다.
저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아이 교육상 적합한 프로그램인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차형욱은 아마 은우가 좋아하면 무조건 OK를 날릴 것이다.
쯧쯧.
아침부터 내가 차형욱의 눈치를 보며 엄마 고민을 하고 있는지…….
요즘 따라 말수가 늘어 더욱 깜찍해진 은우 중독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대놓고 싫다는 표정인 차형욱을 무시하고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차형욱 몰래 휴대전화를 꺼냈다.
입을 벌리고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우의 사진을 찍어서 내 천사 폴더에 저장했다.
본가에서도 요즘 은우에 대해 궁금증이 넘쳤다. 차형욱의 아버지이자, 황성파 차현수 보스에게 자랑할 사진이 또 늘었다.
은우가 잠이 들고 차형욱의 미친 짓거리 때문에 본가에서도 한바탕 찬바람이 불었다.
무뚝뚝한 대한민국 아버지의 대표인 차현수 보스였지만, 사실은 표현을 잘 못 할 뿐이었다. 본가에서는 차현수 보스가 아들이라면 자다가도 일어서는 팔불출임을 모두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은 아마 차형욱이 하나일 뿐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후계자 자리 필요 없다고 차형욱은 독립을 선택했다. 여전히 본가에서는 차형욱 외 다른 사람은 후계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차현수 보스였다. 물론, 워낙 뛰어난 최고의 후계자란 이유도 컸다.
하지만 차현수 보스의 맹목적 애정과 암묵적으로 비워둔 자리도 큰 몫을 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차현수 보스는 차형욱 외에 둘째인 차민석이라는 아들이 있다.
차형욱이 어렸을 때 이혼을 하고 혼자 살다가, 하룻밤 관계로 둘째가 생겼다고 들었다.
자세한 상황은 입을 다문 차현수 보스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술에 취한 차현수 보스가 황성파에서 집안일을 돕던 어린 조희주와 실수로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그 결과 거의 띠동갑 차이의 배다른 동생이 차형욱에게 생겼다.
차민석의 어머니인 조희주 님은 현재 본가의 별채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차현수 보스와 정식 혼인관계는 아니었다.
워낙 몸도 약해서 거의 누워 있는 날이 많은 분이었다. 성격이 여리고 욕심도 없어 유일한 아들 차민석을 키우며 조용히 지냈다.
아들 차민석을 호적에 올려주고 자신을 거둬준 차현수 보스에게 고마워하고 만족해하는 그런 분이었다. 듣기로는 고등학생인 차민석 역시 모범생이었다. 차형욱과는 달리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는 착한 아들이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현수 보스에게 큰아들 차형욱은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의 차형욱 바라기는 측근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요즘 차현수의 보스의 기쁨은 차형욱에게서 은우의 소식이나 사진 등을 모으는 것으로 바뀌었다. 워낙 잘난 큰아들이지만 얼음 바람이 휙휙 날아다녔다. 아쉽게도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머리 한번 쓰다듬을 수도 없었다.
차현수 보스가 본 사진 속에 은우는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어여뻐 보였다. 딸이 없어 내심 아쉬웠던 차현수 보스의 가장 큰 기쁨으로 자리 잡았다.
기쁘게도 지금 나의 가장 짭짤한 수입원이기도 했다.
크흐흐흐.
나도 모르게 기쁨의 넘쳐 음흉스러운 웃음이 튀어나왔다. 밥 차리던 차형욱의 예리한 시선이 잠깐 느껴져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은우 사진 컬렉션이 들어 있는 휴대전화이자 나의 돈줄을 손에 꼭 움켜쥐었다. 휘파람을 불며 은우 옆에 앉아 TV를 보는 척하자, 차형욱의 시선이 멀어졌다.
차현수 보스는 이미 유능하고 잘생긴 소식통을 통해 은우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큰아들 차형욱이 목매는 상대가 있다는 말에 처음에는 질투에 분노를 터트렸다. 그랬던 차현수 보스가 은우의 사진을 본 후 달라졌다.
어차피 얼음덩이 아들놈이 평생 혼자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던 차였다. 아버지 차현수에게 아들의 동거인이 남자건 여자건 전혀 상관없었다.
단지 자기 아들 차형욱이 좋아 죽는다는 말에 엄청난 질투를 드러냈던 차현수 보스였다. 자식새끼 키워봤자라고 답지 않게 삐친 보스였다.
크게 낙담한 차현수 보스가 마음을 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엄청 유능하고 잘생긴 소식통이 슬쩍 보여준 사진 한 장에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벌써부터 아들 팔불출에서 며느리 팔불출로 노선 갈아탈 기미가 보이는 변덕쟁이 차현수 보스였다.
물론 그 아주 유능하고 잘생긴 소식통에게는 든든한 용돈도 쥐여주셨다.
차형욱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나는 휴대전화에 얼굴을 비비며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날 보더니 전염병 환자취급을 하며 은우를 서둘러 내게서 떨어트렸다.
쳇! 치사한 놈!
아무튼, 차형욱 놈 때문에 은우는 걸어 다닐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저 놈이 적당한 운동이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몰라서 저 모양이지. 아무리 은우가 가볍다고 해도 매일 툭하면 번쩍번쩍 들어 꼭 끌어안고 다니다니.
가끔 아니, 자주 눈꼴이 제대로 시려주신다.
전에 은우가 쪼끄마했을 때는 늦둥이 얻은 팔불출 아빠 같았다.
지금은 은우가 조금 자라서 그런지 그림은 나쁘지 않았다.
닭 털을 공중에 하도 나부끼고 다녀서, 내 고운 피부가 요즘 따라 닭살 트러블로 고생 중이었다.
나날이 두둑해지는 지갑의 무게마저 없었으면, 진즉 배가 꼬여도 천 번은 더 꼬였을 것이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저 빤질빤질한 차형욱 능구렁이는 은우한테 젓가락질을 절대 가르쳐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식탁 위에 달랑 두 쌍의 젓가락과 숟가락이 있었다.
구석에 던져 놓은 내 것과 차형욱 손에 들려 은우 입으로 열심히 왕복 운동하는 저놈 것만 보였다.
은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전에 슬쩍 눈으로 바라보는 반찬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독심술이라도 배웠는지. 식탁 위에 날듯이 움직이는 저놈의 젓가락은 신들린 것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뼉이라도 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푹, 숟가락에 밥을 가득 퍼 외로운 내 입으로 날랐다.
“야! 다다음 주에 본가 가야 하는 거 알지?”
대꾸도 없이 왜 그러냐는 눈빛만 보내는 차형욱의 모습에 속이 터졌다.
“아씨! 저 불효자식 놈! 보스 생신이시잖아. 너네 아버님!”
“…….”
내 말을 듣고서야 무슨 날인지 깨달았는지 슬쩍 시선을 돌려 대답을 회피하는 차형욱이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기에, 전에 한 약속까지 끄집어내어 밀어붙였다.
“전에 네가 한 약속 기억해라. 진료비 대신이라도 꼭 와! 저번처럼 얼굴만 달랑 내밀고 그냥 가지 말고, 은우도 데리고 가서 식사도 하고 좀 해라.”
오물오물 잡채를 입에 넣고,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우가 차형욱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입에 든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고, 차형욱을 향해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아가 집에 가? 아빠 생일 가?”
옷소매를 꼭 잡고 반짝이는 눈으로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던지는 은우의 모습이었다.
결국, 차형욱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은우 최고다! 만세! 아유 예뻐 죽겠어. 그냥! 차형욱 아가! 약속 꼭 지켜라. 점심 은우랑 같이 하는 걸로 말씀 드려놓을 테니깐 일찍 와라.”
만세를 부르며 은우에게 칭찬을 마구 날려주었다.
자기도 신이 나는지 나를 따라 두 팔을 올려 만세를 부르는 은우다. 그 모습이 깜찍해 손을 쭉 뻗어 보드라운 머리 위를 슥슥 쓰다듬어 마구 칭찬해주었다.
그래 이렇게 착하고 예쁘게만 자라라.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날 은우가 마주 웃어주며 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배알이 배배 꼬인 차형욱이 끼어들었다. 긴 팔을 쑥 내밀어 내 손을 은우 몰래 휙, 치우고 자신이 대신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 모습에 내 눈이 세모꼴로 쭉 올라갔다.
잠깐 만졌다고 차형욱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 서둘러 올라간 눈꼬리를 밑으로 내렸다.
아무렇지 않게 맑은 조개 국물을 입에 넣었다.
“음, 국물 맛이 제대로네. 은우야, 맛있지?”
끄덕끄덕.
고개를 위아래도 흔드는 은우를 보더니 차형욱이 말없이 국을 숟가락에 퍼 은우 입가에 대준다. 형욱아, 난 전생에 네가 무쇠 얼굴, 무쇠 주먹, 무쇠 다리 로봇쯤 되는 줄 알았더니 넌 딱 머슴이었나 부다. 태생이 의심스러운 몸짓이구나.
위험했지만, 오늘 미션 완료다! 용돈 받으면 은우 간식이나 더 사다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