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실수했어요. 괜찮지요? (10/23)

10. 실수했어요. 괜찮지요?

길고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을 모자 속에 밀어 넣었다.

문재준이 씌어준 커다란 선글라스가 은우의 작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하게 얼굴을 가린 은우의 앞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차형욱 회장이 서성거렸다.

어쩐 일인지 은우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이 나 있었다. 그 모습에 백 번쯤 깊은 한숨을 몰아쉰 차형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은우, 모르는 사람이랑 말을 하면?”

“안 돼.”

“은우,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나빠.”

“은우, 모르는 사람이 먹을 거 주면?”

“안 먹어.”

아까부터 주의를 시켰던 질문들이 무한 반복 튀어나왔다.

모든 질문의 정답을 맞춘 은우의 손을 어렵게 놓고, 차형욱 회장이 문재준 비서실장에게도 거듭 당부했다.

“절. 대. 은우한테 눈 떼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즉각 연락하도록.”

“네, 알았습니다. 회장님.”

정말 은우의 외출이 싫은 표정의 차형욱 회장이 은우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라 말했다.

마지막으로 은우에게 열 번도 넘게 물었던 질문을 반복 확인했다.

“은우, 정말 나가고 싶나?”

커다란 선글라스 때문에 겨우 입만 보이는 은우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시계를 보자 회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은우를 배웅하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오전부터 빌어먹을 세운 그룹과의 미팅이 잡혀 있었다.

긴 시간 회의실에서 꼼짝도 못 할 상황 때문에 그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세운 그룹 책임자가 여우 같은 김진혁이었다.

문재준 비서실장도 없는데, 회장실에 혼자 은우를 두는 것도 마냥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제의 아침. 출근과 동시에 문재준 비서실장이 스케줄을 보고하고 있었다. 차형욱 회장은 문재준에게 은우의 옷가지와 본가에 가져갈 선물을 지시했다.

문재준 비서실장이 바로 갔다 오겠다고 대답하자마자 문제가 터졌다.

“재준, 나도…… 가.”

은우가 문재준 비서실장을 간절하게 바라보며 부탁했다. 당황한 문재준이 어떡하느냐는 듯이 차형욱 회장에게 눈으로 물었다.

처음에는 은우의 첫 바깥나들이를 말리고 싶었다. 결국은 혼자 회장실을 지키고 있게 될 은우에게 도저히 모질게 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재준이 은우를 데리고 회장실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1시간이 훌쩍 넘긴 후였다.

차형욱 회장의 엄청난 잔소리와 세뇌에 가까운 반복된 질문이 줄을 이었다. 그것을 모두 착실하게 대답하는 은우가 문재준에게는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했던 문재준 비서실장이 엘리베이터에 은우를 데리고 탑승한 순간부터 변했다.

아까 속으로 욕했던 차형욱 회장 못지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서실의 시어머니다운 모습 그대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잔소리에 흠칫 떨던 은우는 또다시 고개가 아프도록 끄덕인 후에야 대기하고 있던 박동수가 기다리는 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박동수는 운전 중에 정도훈 형님이 몰래 부탁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틀어 놓았다.

은우가 1분 45초의 생일 축하 노래를 20번을 들은 후에야 차는 백화점 VVIP 전용 주차장에 도착했다.

반복된 생일 축하 노래에 멀미를 한 문재준이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맨 먼저 차에서 뛰어나왔다. 풋!

웃음을 참은 박동수도 은우의 옆에 붙어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중앙에는 은우를 두고, 좌동수 우문재 위치로 명품관 전용 3층을 향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처음 타보는 에스컬레이터에 신이 난 은우의 한 손을 문재준이 손잡이 위에 올렸다. 에스컬레이터 안전교육자로 빙의된 문재준 시어머니였다.

그 잔소리에 이번에는 박동수가 토할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생일 축하.’ 아까 차에서 들은 노래를 은우가 작게 흥얼거렸다. 문재준에게 붙들린 팔을 흔들며 통통거리며 명품관 복도를 걸었다.

커다란 선글라스와 모자로도 가릴 수 없는 은우의 매력에 홀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보디가드 박동수는 바싹 긴장 상태로 돌변해 은우 곁을 철저히 견제했다.

“워낙 날씬하시고 몸매가 예쁘셔서…… 저희 브랜드 옷이 완벽하게 어울리세요.”

“이건 한정판 디자인이에요. 이 제품은 고객님을 위해 준비된 거 같네요.”

“연예인 맞으시죠? 모자 써도 진짜 귀여우시네요. 사인 좀…….”

“이런 스타일은 어떠세요? 시즌 신상인데…….”

은우를 끌고 이것저것 몸에 옷을 대보고, 지름신이 강림한 모습으로 카드를 긁어대는 문재준이었다.

박동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다른 옷을 권해보기도 했다. 신이 나서 백화점에 따라왔던 은우는 지쳐버렸다.

오히려 문재준과 박동수는 백화점 직원과 함께 눈을 반짝이며 은우의 스타일링을 의논했다.

“재준, 소리 나.”

은우가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꼬르륵 들리는 배고픔을 호소하는 소리에 아쉽게도 문재준이 박박 긁고 있던 카드를 집어넣었다. 구매한 물품을 집으로 배달해달라고 부탁한 뒤, 식당 층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아.

문재준과 박동수는 눈앞에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린 은우의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배가 고팠던지 양쪽에서 경쟁하듯 입에 넣어주는 크림 스파게티를 은우가 맛나게 받아먹었다.

“맛있어요? 은우 님?”

“맛있어. 재준, 동수, 먹어.”

허스키함이 섞인 느릿한 미성은 주변에서 훔쳐 듣게 된 이들에게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측근인 이들 앞에서는 엄마 미소를 일으키는 순수하고 어린 천사일 뿐이었다.

은우가 접시에 있는 길고 미끄러운 스파게티 면을 큰 포크로 어색하게 찔러 넣었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포크를 박동수 앞으로 내밀어 먹으라고 건넸다.

살인적인 은우의 깜찍한 모습을 직면하고 굳어버린 박동수가 옆으로 밀쳐졌다. 잽싸게 고개를 밀어 넣은 문재준이 얼른 후루룩 받아먹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박동수가 억울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여우 꼬랑지 문재준을 노려보았다.

“저기, 혹시…….”

낯선 목소리가 테이블 가까이에서 들려오자, 박동수의 눈빛이 변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YJ 그룹……? 전에 청담동에서 인사드렸던.”

가늘게 눈을 뜨고 박동수가 바라보았다. 큰 덩치의 남자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익었다. 눈에 띄는 외모에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전에 차형욱 회장님과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던 구철민 대표였다. 덩치에 비해 어수룩해 보이던 그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기억합니다. 스타 엔터테인먼트 구철민 대표님! 전 박동수라고 합니다. 차형욱 회장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문재준이 넣어준 스파게티를 입안에 물고 은우도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인사했다.

그 옆에서 문재준은 냅킨으로 은우의 입가에 크림소스를 꼼꼼히 닦아주고 있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는 문재준에게 구철민 대표가 시선을 주었다. 잔소리꾼에 시어머니인 문재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곧게 펴고 똑 부러진 문재준 비서실장으로 변신한 그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YJ 그룹 문재준 비서실장입니다.”

비즈니스 교과서 인사법에 나오는 정확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손동작으로 명함을 꺼내 건네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모습이었다.

은우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는 모습과는 그 격차가 너무 컸다. 구철민 대표가 명함을 받고, 더듬더듬 자신의 명함을 찾아 건넸다.

“아, 문재준 비서실장님, 반갑습니다. 스타 엔터테인먼트 구철민 대표입니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던 은우가 살랑살랑 흔들던 손으로 포크를 꼭 잡고 구철민을 올려다봤다.

“맛있어. 이거.”

접시 위에 불쑥 들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허연 스파게티 면발의 방향을 구철민 쪽으로 내밀었다.

순간 당황해 움직임을 멈추고 얼음 상태로 있던 구철민 대표가 바람같이 큰 덩치를 90도로 수그려 덥석 받아먹었다.

차형욱 회장님 표 조기교육 부작용이 여실히 드러난 모습에 박동수와 문재준이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좀 전까지 이 부작용을 즐기던 것을 까맣게 잊고 공공의 적이 된 구철민을 뻔뻔하게 노려보았다.

얼굴을 새색시처럼 붉히고 부끄러워하는 거대한 흑 곰 한 마리가 앞발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잘 조련된 얌전한 애완용 곰처럼 은우 앞에 큰 몸을 배배 꼬며 수줍게 웃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은우의 모습 뒤로 채찍과 먹이를 흔들며, 야수들을 조련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박동수는 처음으로 위대한 천사님이 무서워졌다. 역시 은우 님이 먹이사슬 최상위권의 위치임이 확실했다.

“감, 감사합니다. 은우 님.”

감격에 겨운 흑 곰의 인사에는 거의 물기마저 느껴졌다.

커다란 선글라스에 가려져 유일하게 드러난 은우의 분홍 입술 끝이 올라갔다.

그때 실례를 해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면서 구철민 대표가 자신의 일행들과 합석을 권했다.

지금이라도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는 초대를 번거롭게 할 순 없다며 문재준 비서실장이 칼같이 거절했다.

풀이 죽은 흑 곰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돌아섰다.

마음 약한 박동수는 순간 짠한 느낌이 들어 어깨라도 두들겨주고 싶었다.

독한 문재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은우 님 밥 먹이기 신공을 발휘 중이었다.

‘띠딩.’

아까부터 차형욱 회장님에게 줄기차게 오는 메시지를 한 손으로 능숙하게 확인했다.

은우 님 사진을 찍어 전송하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은우 님의 입가를 닦아주는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그가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애 다섯은 키워본 이상적인 안주인의 모습이었다.

YJ 그룹의 시어머니라더니.

박동수는 문재준 비서실장을 훔쳐보며 남몰래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지금도 그는 은우 님에게 편식이 얼마나 안 좋은지 잔소리하며, 싫어하는 셀러리를 먹이고 있었다.

디저트로 나온 촉촉한 초콜릿 푸딩을 티스푼으로 퍼 가득 입안에 넣고 정신없이 먹는 은우의 모습에 많은 사람의 이목이 몰렸다.

‘아, 귀엽다. 봤어? 웃는 거? 우리도 저거 시켜 먹자.’

‘얼굴 보고 싶다. 외국 연예인 맞나 봐. 선글라스 안 벗네. 밥 먹고 1시간째 못 나가고 있구먼.’

‘내가 떠먹여주고 싶다. 완소 귀요미야! 저쪽에도 연예인들 있던데, 이쪽이 더 예술이네.’

‘옆에 있는 남자도 대박 잘생겼다. 챙겨주는 것 봐. 차가워 보였는데 멋지다. 어머나!’

‘저 덩치 좋은 남자도 훈훈해. 팔 근육 끝내주네.’

‘아서라, 살기가 느껴진다. 어떤 아가씨가 사인받으러 접근하니깐, 장난 아니게 노려보더라.’

같은 시간.

백화점 1층에서 행사를 마치고 8층에 식사를 하러 온 R&Me 그룹의 심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레스토랑에 들어설 때만 해도 연예인으로 보이는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자신들이 누군지 추측했다.

아직 신인이지만, 차츰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괜히 으쓱한 기분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팬이라고 사인을 해달라는 소녀들도 다가왔다.

자신들의 인기를 새삼 확인하자,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자랑스레 떠들던 이들이었다. 신인 그룹의 기도 살려주고,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구철민 대표가 직접 밥을 사주는 자리였다.

연습 생활이 끝났으니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듣자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좀 전까지 스타라도 된 듯 우쭐했던 R&Me 멤버들이 지금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이상한 놈이 보였다. 일행들과 먹을 것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그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인기 그룹이라 으쓱했던 자존심에 심하게 스크래치가 났다.

더구나 그들을 보고 소속사 대표 구철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합석까지 권하러 갔다.

그걸 또 건방지게 거절하는 모습이 심히 눈꼴셨다.

아까부터 투덜거리는 멤버 사이에서 태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은근히 그쪽 테이블을 힐끔거리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 시선에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질투였다.

집안이 좋은 태윤이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음대 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다.

타고난 외모와 배경으로 어렵지 않게 새로 구성되는 그룹에 들어가 데뷔한 케이스였다.

학창시절 노느라 바빠 공부는 뒷전이었으니, 성적이 달려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다.

부모님 돈으로 놀고 있었는데, 심심해서 응시했던 오디션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변의 추켜세움과 부러운 시선은 익숙했다. 그룹 내에서도 관심을 독차지했다.

나름 탄탄한 중소기업을 운영하시는 아버지는 태윤이 스타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자마자 태윤을 위해 여러 편의를 제공했다.

태윤이 자체도 나쁘지 않은 외모에 후원까지 더해져 합격과 데뷔라는 명예를 손쉽게 쥐었다. 태윤 아버지는 R&Me에게 더 좋은 자동차와 새로운 숙소까지 제공했다.

구철민 대표가 저번에는 청담동 숍까지 동행하고, 자신과 멤버들 밥도 사준다고 하자, 자신을 위한 특별대우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이 가져야만 하는 모든 관심을 너무나 쉽게 가지고 있는 저 아이를 만났다.

자신이 가진 것이 보잘것없이 느껴지고 그 아이가 가진 것에 부러움을 느껴야 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빛이 나는 저 아이 존재 자체가 이유 없이 거슬렸다.

저 아이가 가진 걸 뺏고 싶었다. YJ 그룹 회장과 구철민 대표의 관심도, 눈부신 외모도 탐났다.

세상 어려운 줄 모르고, 자신이 갖고 싶은 모든 걸 쉽게 손에 넣던 태윤이라 더 힘들었다.

참기 힘든 자신의 비틀린 시기심이 모욕감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살짝 돌린 태윤은 투덜거리고 있는 멤버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어리석었다.

자신은 이들과 달랐다. 누굴 미워하려면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교묘하게 해야지.

저렇게 티 나는 표정을 지으며 헐뜯어봤자 본인들 이미지만 버린다. 한마디로 소용이 없는 짓이다.

태윤은 자신의 외모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다. 가느다란 골격과 둥근 눈매가 그를 청순하고 어려 보이게 했다. 간혹 잘못해도 실수라고 울면 100% 넘어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용하는 태윤이었다.

“얘들아, 그러지 마. 합석하기 싫은가 보지. 우리보다는 대표님이 불쾌할 거야. 우리가 더 유명했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태윤이는 착해. 그래 저런 건방진 놈들 무시하자. 나도 더러워서 합석하기 싫다. 지들이 얼마나 잘났다고.”

“전에 만났던 적 있는데. 그때도 대표님 쩔쩔매시더라고. 얼굴 가린 사람 빼고 YJ 그룹 사람들이야. YJ 그룹 차형욱 회장님한테 붙어 있는 거 같던데…….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고. 친해 보이더라고. 그래서 대표님도 저렇게 행동하는 거 같아. 대기업이랑 등지면 일하기 힘드시잖아. 우리가 이해하자.”

“뭐라고? 더 기가 막히네. 지들이 YJ 그룹 회장도 아니고 어디서 갑질이야? 혹시 애인이라도 되는 거 아냐? 젠장, 배경 더럽게 엄청나네. 재수 없어! 아까 대표한테 밥도 먹여주고 교태가 장난 아니던데 연예인 데뷔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글쎄, 얼핏 관심은 있는 거 같던데……. 차형욱 회장이랑 애인 사이라니……. 에이! 설마 그러겠어? 사회지도층이고 워낙 결벽증처럼 스캔들 없기로 유명한데. 그런 소리는 못 들었어.”

“그래 태윤이가 맞다. 애인은 아니겠지. 차형욱 회장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놈을 사귀겠느냐? 잠깐 노는 거면 몰라도…….”

“얘들아, 대표님도 기분 나쁠 텐데, 우리라도 그만하자.”

대화하는 중간에 은근슬쩍 끼어들어 교묘하게 꼬아진 정보를 흘리는 건 재미있었다.

착한 척 대꾸해주면 지들끼리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자기 대신 욕도 해준다. 한참 주위에서 꼴 보기 싫은 존재를 씹는 소리를 즐겼다.

속이 비틀렸던 태윤의 기분이 약간 시원해졌다. 화장실에 들렸던 구철민 대표가 돌아오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대표님! 다음에도 맛있는 거 또 사주세요.”

“그래, 오늘 정말 수고 많았다.”

네 명의 멤버로 구성된 R&Me 그룹이다. 23살 태윤와 최고, 21살 루크와 쌤이 있었다. 밝게 웃으며 구철민 대표에게 인사를 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철민 대표 역시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을 했다.

때마침 화장실에서 은우의 손에 묻은 끈끈한 푸딩을 꼼꼼히 비누로 닦아주고 나오는 문재준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동수를 다시 마주쳤다.

은우는 다시 만난 구철민 대표에게 또다시 살랑살랑 손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구철민 대표도 손을 흔들어 주며 헤벌쭉 웃었다. 배알이 꼬인 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R&Me 멤버들이었다.

“아, 이쪽은 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신인그룹 R&Me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구철민 대표의 소개에 다들 어쩔 수 없이 대충 고개를 까딱했다. 박동수는 같이 고개를 숙였지만, 문재준 비서실장은 시선만 보낼 뿐 무시했다.

얼굴을 붉힌 R&Me 멤버들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감한 낯빛의 구철민 대표도 이들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철없는 소속 가수들 때문에 저절로 한숨이 쉬었다.

저들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단순히 YJ 그룹 비서실장이라고 생각해서 저러는 거지만, 구철민 대표는 잘 알고 있다.

차형욱 회장의 곁에서 그림자같이 움직여온 인물이었다. 그가 원하는 경우 스타 엔터테인먼트쯤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문재준 비서실장은 YJ 그룹의 숨겨진 권력자였다.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올려 꾹 눌렀다가 본인의 실수를 자각했다. 이렇게 인사를 시킬 줄 알았으면 아까 미리 단단히 주의를 주었을 것을.

요즘 갑자기 인기를 얻으면 제멋대로 구는 애들이 꼭 생겼다. 집안이 좋은 아이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회사에서도 이런 애들은 관리가 어려웠다. 헌데 하필 오늘 이렇게 골치를 썩일 줄 몰랐다.

특히 은우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순간 자신의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이었다. 철없는 이들은 모르겠지만, 차형욱 회장은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오늘 당장 예절교육 프로그램이라도 다시 짜야 할 판이었다.

“아이스크림 먹어. 같이 가?”

은우가 구철민 대표를 보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구철민 대표는 슬쩍 문재준 비서실장의 눈치를 봤다. 문재준은 아까부터 불량한 눈초리를 한 껄렁한 놈들을 보고,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눈을 마주치고 해맑게 웃는 은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은우에게 점수를 딸 상황에 구철민 대표가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은우 님, 아이스크림 제가 사드려도 될까요? 뭐가 좋을까? 초콜릿? 딸기? 바닐라?”

옆에 붙어 고개를 숙여 다정하게 묻는 구철민 대표에게 은우가 작게 딸기라고 대답했다.

걸음을 재촉해 레스토랑과 같은 층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박동수와 문재준은 한숨을 삼키며 구철민 대표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은우를 따라갔다.

‘아, 차형욱 회장님! 모르는 사람뿐 아니라, 아는 사람도 쫓아가지 말라고 했어야지요…….’

구철민 대표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수한 인상이었다.

여리고 어린아이 같은 면까지 보였다. 혹시 또래 친구가 없는 은우가 친구로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둘이었다.

아까부터 찬밥 신세로 멀뚱히 서 있던 R&Me 멤버들은 급변한 상황에 당황했다. 망설이던 이들이 아이스크림 가게로 같이 이동했다.

“뭐야, 장난해! 저따위가…….”

“아씨, 대표는 또 왜 저래? 쩔쩔매는 꼴이라니 쪽팔리게.”

“대표님이 착해서 그렇지, 뭐. 바빠 죽겠는데, 시간 아깝게시리. 아무한테나…….”

“쉿, 조용해! 들리겠다.”

불쾌함이 덕지덕지 붙은 작게 떠드는 소리에 박동수가 힐끗 그들을 쳐다보다 다시 은우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은우는 벌써 투명한 아이스크림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그런 은우에게 아이스크림을 푸는 주걱에 힘을 잔뜩 주어 넉넉히 서비스를 주는 직원이었다.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컵을 안은 은우가 테이블로 걸어갔다.

나머지 일행들도 어색한 자리에 자동 합석이 되었다. 은우와 구철민 대표를 제외하고는 모두 커피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얀 볼에 홍조를 띤 은우가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먹을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흘렸다. 가끔 숟가락으로 문재준과 박동수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먹여주기도 했다.

사실 그 모습이 아까 멀리서 보았을 때와 다르게 R&Me 멤버의 눈에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벗지도 않고 그들 쪽은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모습에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였다.

태윤이 마시던 커피잔을 절묘하게 앞에 있는 은우를 향해 넘어트렸다.

뜨거운 커피가 은우 쪽으로 쏟아지자, 박동수와 문재준이 서둘러 은우를 뒤로 끌어당겼다.

이미 은우의 팔은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태윤이 미안한 얼굴로 변명했다.

“어머나, 어떡하지요? 내가 모르고, 딴 곳을 보다가 실수했어요. 괜찮지요?”

여전히 뜨거운 커피를 뒤집어쓴 은우의 팔에 깜짝 놀란 박동수가 찬 수건을 얻어왔다.

문재준은 서둘러 옷을 걷고 붉어진 팔을 감싸주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박동수와 아까보다 한층 더 차가워진 문재준이 태윤을 노려봤다.

“헉! 은우 님, 죄송합니다. 가까운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당황한 구철민 대표가 대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태윤은 눈물만 글썽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옆에 있던 멤버들이 태윤을 감싸주며 입을 열었다.

“실수잖아. 그럴 수도 있지. 태윤아 뭘 그렇게 울려고까지 해?”

“뭐라고? 조용히 못 해! 사람이 다쳤는데 실수라면 다냐? 태윤아 빨리 사과 드려!”

“정말 손이 미끄러워서…….”

고개를 푹 수그린 태윤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파란색, 왜…….”

조용조용한 은우가 속삭이자, 옆에 있던 박동수가 고개를 은우에게 돌렸다.

“네? 은우 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파란색, 거짓말인데…….”

“거짓말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는 구철민 대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은우는 아직도 자신의 팔에 차가운 수건을 대주고 있는 문재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은우는 문재준을 바라보던 얼굴을 똑바로 들어 태윤을 바라보았다.

순간 선글라스 너머로 자신의 속마음이 꿰뚫리는 느낌에 태윤은 주먹을 쥐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증거 있어?”

사나운 태윤의 반박에 눈이 동그래진 은우가 어깨가 움츠렸다.

태윤을 잠시 노려보던 박동수가 옆에 앉은 은우의 몸을 감싸며 일으켰다.

문재준은 은우의 말을 이해하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R&Me 멤버들과 구철민 대표를 둘러보고 나직이 말을 뱉었다.

“구철민 대표님, 직원들 관리 좀 하셔야겠습니다. 이번 일, 아시다시피 저는 괜찮아도 아마 괜찮지 않으신 분이 계실 겁니다. 이만.”

“아, 아니, 잠깐…….”

구철민 대표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려는 은우를 문재준과 박동수가 보호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는 멤버들은 짜증을 토해냈다.

“아니, 태윤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게 무슨 짓이야? 어이가 없네. 진짜…….”

“거짓말이라니? 지가 뭔 거짓말 탐지기라도 돼? 기가 막혀. 대표님! 신경 쓰지 마세요.”

급변하는 상황에 사태 파악이 힘겨운 구철민 대표였다. 소란스러움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태윤에게 냉정하게 물었다.

“태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 진짜 실수였냐?”

늘 친절했던 구철민 대표가 차갑게 물어보는 질문에 태윤은 긴장된 눈으로 입술을 축였다.

“당연하죠. 대표님, 실수 맞아요. 제가 설마 일부러 뜨거운 커피를 부었겠어요?”

자신을 바라보며 따지듯 대꾸하는 태윤의 모습에 구철민 대표의 눈에는 그에 대한 실망감이 들어찼다.

자신은 완벽하게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흔들리는 태윤의 눈빛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형님의 과보호를 받고 자랐지만, 자신도 큰 조직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다. 자신이 이 계통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처음에는 정에 약한 성격 탓에 실수도 있었지만, 30대 중반에 들어선 구철민 대표는 달랐다. 아직 어리니, 철이 들고 나중에 천천히 가르치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아니, 회사의 발목을 아프게 잡아당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상대로. 태어나기를 조직에서 자랐고, 방송계에 뛰어들어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굴렀다.

그런 구철민 대표가 아무리 순진하고 사람이 좋다고 해도 절대 바보는 아니었다.

태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소속 가수 보다 몇 번 안 만난 은우에게 신뢰가 생기는지 의문이었다.

또, 냉철한 문재준 비서실장과 조직세계에서 유명한 보디가드 박동수 씨는 은우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또한, 자신조차도…….

옆에는 소리 높여 태윤을 위로하는 철없는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우선 회사가 커지면서 신경을 크게 못 썼던, 예절 교육에 좀 더 투자해야겠다.

또한, 자신보다 어리지만 무서운 YJ 그룹 차형욱 회장을 만나 사과해야 한다는 사실에 골치가 아팠다.

전에 보았던 차형욱 회장의 모습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따라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구철민 대표였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은우의 양쪽에서 서로 눈치를 보던 문재준과 박동수가 살살 은우를 달랬다.

“은우 님, 신경 쓰지 마세요. 회장님한테 일러버리세요.”

장난기 어린 박동수의 말에 그를 눈으로 살짝 흘기며 문재준이 한참 고민 끝에 한술 더 뜬 소리를 했다.

“제가 다시 가서 때려주고 올까요?”

어이없음에 잠시 멈칫했던 박동수는 차가운 도시 남자 이미지의 문재준을 정색하며 응시했다.

대화가 없음에도 이해가 가는 박동수의 눈빛에 문재준은 슬쩍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은우는 아까 엉겁결에 손에 쥐고 온 분홍색 아이스크림 스푼만 바라보았다.

“은우 님, 그 새…… 아니, 사람, 거짓말하는 것 어떻게 아셨어요?”

“파란색, 알아. 거짓말…….”

“네? 어디가 파랗게 보여요? 신기해라. 난 안 보이던데?”

파란색이라고만 슬쩍 말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에도 어렴풋이 은우의 특별함을 알고 있는 문재준과 박동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은우를 볼 때부터 추잡한 질투의 눈빛을 드러내던 태윤이었다. 남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식하는데 훈련된 박동수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좁고, 순진한 은우가 한 번에 알아차린 것이 신기했다.

문재준도 박동수와 마찬가지로 은우의 급작스런 성장 등을 옆에서 지켜본 최측근이었다.

동시에 은우 천사설의 광신도 3인방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아마 은우가 된장을 고추장이라 우기면 된장으로 김치찌개를 끓어먹을 이들이었다.

태윤의 가식은 혼자 탭 댄스를 추는 어이 상실, 라이브 생 쇼에 불과했다.

광신도들 앞에서 그들의 종교를 모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

역시나 문재준과 박동수는 ‘천사님! 진리설!’을 외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풀 죽은 은우의 모습에 생각할수록 열불이 나는 두 사람이었다.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고……. 아니 챙겨주고 있었는데, 더러운 것과는 절대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천사님을 감히!

입술을 깨문 문재준은 은우의 붉어진 팔에 화상 연고를 발라주며 속으로 열불이 치솟았다.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 가증스럽게 굴던 태윤과 건방진 나머지 놈들까지 이가 갈렸다.

그 전에 이 꼴을 보고 난리 칠 차형욱 회장의 모습이 훤히 보여 한숨을 내쉬는 이들이었다.

“은우 님, 아이스크림 더 드실래요?”

평소 은우 간식을 챙기는 문재준은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절대 2번 주지 않았다. 오늘은 은우를 달래며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고개를 저으면서 은우가 작게 말했다.

“아가한테 갈래.”

헉!

신음이 터져 나온 두 사람은 잠시 후 분노할 차형욱 회장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띠딩.

때마침 울리는 문재준의 문자 소리에 흠칫 놀랐다.

이들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하며 중간에 은우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잔뜩 사서 손에 쥐여주었다. 조금이라도 은우 님 기분이 나아지길 기도하는 이들이었다.

“아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은우를 기다리고 있던 차형욱이었다. 그를 부르며 빠르게 뛰어와 따뜻한 품에 달싹 안겨드는 은우다.

뒤따라온 문재준 비서실장은 슬쩍 눈치를 보며 눈을 피했다.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빠른 차형욱 회장의 눈썹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은우 오늘 재미있었어? 많이 힘들었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을 받쳐주는 든든한 품에 꼭 매달렸다.

차형욱은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사랑스럽게 구는 은우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입매가 풀려 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어쩐지 어색한 표정의 문재준 비서실장을 보며 눈빛은 날카롭게 번뜩인 차형욱이었다.

기분이 별로인 은우의 모자를 벗겨주었다.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뒤로 넘겨주며 달래듯 말을 붙였다.

맛있는 건 많이 먹었나? 가지고 싶은 건 샀나? 힘들지 않았는가? 평상시 대화로 물어보자 긴장을 푼 은우도 하늘빛 눈을 마주치며 하나하나 대답했다.

오늘 누구 만났느냐는 질문에 살짝 떠는 문재준의 몸짓을 살피며 차형욱 회장의 스무고개는 계속되었다.

“은우, 오늘 누구 만났어?”

“철민, 아이스크림 사줬어. 딸기.”

“아, 구철민 대표랑? 맛있었겠네. 다른 사람은 없었나?”

다른 사람도 만났다는 의미로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은우를 달래며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점점 문제점을 찾아가는 치밀한 차형욱 회장의 질문에 문재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은우를 이끌고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차형욱의 눈빛이 은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자마자 차갑게 가라앉았다.

은우가 놀라지 않도록 움켜쥔 주먹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은우의 팔을 가리켰다.

“은우, 여기 팔 다쳤네?”

“응, 재준 약 줬어. 괜찮아.”

“은우, 근데 어쩌다 이랬을까?”

“커피 뜨거워서.”

커피를 안 마시는 은우가 커피라니. 눈썹이 올라간 차형욱이 다시 질문을 구체적으로 바꾸며 부드럽게 물었다.

“누구 커피일까? 그 사람이 은우한테 쏟았어?”

“몰라. 말 안 했어.”

부드러운 아가의 목소리에 순진한 표정의 은우는 모른다는 답했다.

대답을 회피하는 게 아닌, 정말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뜻으로 들렸다. 또, 아침에 약속한 모르는 사람과 말을 안 했다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은우다.

차형욱의 시선이 다시 문재준 비서실장에게 꽂힐 듯 박혔다. 화들짝 놀란 문재준이 눈동자를 불안하게 돌렸다.

은우의 다친 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위로하듯이 이마에 입술을 눌러주었다. 소매를 올리고 붕대를 풀었다. 상처를 진지하게 살펴보던 차형욱은 붉게 데인 피부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히 빠른 응급처치에 물집이 생기진 않았지만, 속이 뒤집히긴 마찬가지였다.

잠깐 혼자 두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치게 하다니 문재준과 박동수에게도 분노가 끓어올랐다.

“오늘 은우 간식이 참 많네. 문재준이 뭔가 많. 이. 미안했나 보구나. 여기서 이거 먹고 잠깐 기다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봉지 안에 은우가 좋아하는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평소 불량식품이라며 문재준이 잘 주지 않던 버섯이 그려진 과자를 꺼내 은우의 손에 꼭 쥐여주며 말했다.

차형욱은 곧장 문재준의 목덜미를 낚아채 회장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말해!”

아까부터 차형욱 회장의 행동을 관찰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던 문재준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전원 켜진 라디오처럼 줄줄이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이라 넘길 수 있겠지만, 문제는 피해자가 은우란 점과 그 사실을 차형욱 회장이 알았다는 것이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 형태가 되고 말았다. 우리 아이가 맞았어요. 저놈이 그랬대요.

차형욱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감히 은우를 상처 입힌 쥐방울과 그 건방진 패거리들, 덤으로 전부터 은우가 잘해줘서 거슬리던 구철민 대표의 처리 문제에 골몰했다.

극성 학부형이 된 차형욱 표 치맛바람이 날리기 시작했다. 양드레 원장 방에서 봤던 쥐방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도 은우를 보는 눈빛이 좋지 못했음을 짐승의 본능에 가까운 차형욱은 느꼈었다. 하찮은 질투를 드러내는 벌레에게 하등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방심이 화를 불렀다. 꿈틀거리지 못하게 밟아버려야겠다.

네까짓 것이 같잖은 발톱을 어설프게 드러내? 다시는 숨도 못 쉬게 이빨로 물어뜯어주마.

내 것을 상처 입힌 것이 고의든, 실수든, 혹은 자신도 몰랐든, 결과는 하나다. 뻔뻔하게 사과도 안 했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문재준은 자신 앞에서 말없이 분노를 분출 중인 차형욱 회장님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중에 호출되어 나타난 보디가드 박동수도 나란히 세워두었다. 차형욱 회장은 침묵과 눈빛만으로 피를 말리는 고도의 수법으로 고문을 가했다.

한참 기다리던 은우가 회장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야 이 지옥 같은 시간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둘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차형욱은 은우의 붕대를 풀었다. 하얗고 여린 피부 위 덴 상처를 보자 다시 화가 끓어올랐다.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일에 은우도 많이 놀랐던 모양이었다. 일찍부터 졸려 하는 은우의 모습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짠했다.

처음 놀이터에 놀러 나갔다가 동네 형들에게 맞고 온 막내 자식을 보는 양, 안타깝고 속상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재준 비서실장에게 건네받은 화상 연고를 바르고, 살살 붕대를 감아두었다. 붕대 위를 아프지 않게 깃털처럼 뽀뽀하자, 졸고 있던 은우가 반쯤 눈을 뜨고 웃어주었다.

새삼 은우가 거짓말을 구분했다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말이 생각났다.

차형욱에게는 은우가 그런 능력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이 소중했지만, 혹여 은우의 능력을 탐내는 이들이 나타날까 두려운 형욱이었다.

지금은 최측근만 아는 철저히 비밀인 은우의 존재나 능력이었지만, 탐욕스러운 돼지들은 어디나 존재했다. 은우 자체의 아름다움과 매력도 큰 문제인데, 그의 신비한 능력까지 소문나게 둘 순 없었다. 은우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었다.

작은 문제라도 처음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벌레 같은 쥐방울도 아파야겠지? 다시는 꿈틀거리지 못하도록.

잠든 은우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차형욱의 검은 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R&Me 태윤은 거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차형욱 회장에 대한 소문이 워낙 무성해 주말 내내 걱정했었다.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자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전화로 항의할 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럼 그렇지. 별것도 아닌 일이고, 자기가 실수라는데 증거도 없이 지들이 어쩔 거냐.

자신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모니터링하며, 태평한 시간을 보냈다. 걱정한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 당시 살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난 이들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람 좋아 보이던 구철민 대표가 뜻밖에 정색을 하고 쳐다봤다. 한결같은 자신의 변명에 결국 넘어갔다.

멍청한 것들!

지금 생각하면 커피가 더 뜨거울 때 부어버릴 걸 그랬다. 같이 앉아 있던 눈빛이 날카로운 박동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길 기다리다 좀 식어버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실수인 척 뜨거운 커피를 부었다. 슬쩍 보아도 꽤 붉어진 여린 피부로 보아하니 상당히 따갑고 뜨거웠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통쾌했다. 그 반반한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었지만, 자신도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걸로 어느 정도 비틀린 마음이 좀 풀렸다.

잘생긴 재벌 애인을 두고, 자신은 어렵게 얻은 관심을 쉽게 받는 놈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꼴 보기 싫은 놈이 있었다.

가난한 주제에 우등생에 운동도 잘해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주제에 반장이라고 교실에서 조용히 해달라고 훈계까지 하는 꼴이 보기 싫어 손을 봐줬다.

같이 어울린 놈 중 성질 더러운 놈의 지갑을 훔쳐 그놈 가방에 넣었다. 친절하게 목격자까지 섭외해두자 그때부터 그놈은 왕따를 당했다. 성질 더러운 놈에게 매일 두들겨 맞았다. 가난한 친척 집에 얹혀사는 고아라는 소문도 내주자 뭐든지 쉬웠다.

결국, 지속적인 신체적, 정신적 공격에 교실 창문에서 뛰어들면서 일이 커졌지만…….

증인으로 섭외됐던 놈이 겁에 질려 고백을 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하지만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해결해주셨다. 합의금과 입막음을 위한 후원금으로 큰돈이 들었다고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피 같은 내 용돈까지 깎였다.

그래서 고백한 배신자 놈을 사람을 사서 평생 앉아 지내야 하는 병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때는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완벽했는데, 그 재수 없는 놈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어이가 없었다.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놀라긴 했지만, 내가 아니라는데 지가 어쩔 텐가.

결국, 구철민 대표도 실수일지라도 상대가 다쳤으니, 당장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이 청순한 얼굴과 가녀린 몸매를 가진 자신이 연기까지 완벽한데,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지.

자꾸 YJ 그룹에 찾아가 사과를 하라는 구철민 대표한테 짜증이 났다. 아직 안 갔으면 오늘은 꼭 같이 가자는 말에 귀찮아서 혼자 사과하고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별것도 아닌데 호들갑 좀 그만 떨었으면 좋겠다. 이러다 보면 잊어버리고 넘어갈 것이다.

늘 그렇듯이.

남자인 자신이 남자만 좋아하는 취향이란 건,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첫 몽정도 당시 인기 있던 잘생긴 남자 배우였다.

처음 본 차형욱 회장의 잘생긴 얼굴이나 배경은 이상형과 가까웠다. 마음이 동하기는 하지만, 이미 공인인 자신이 거기까지 별것도 아닌 일에 사과하러 간다는 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더구나, 차형욱 회장에게 하는 사과도 아니었다.

단지 차형욱 회장에게 붙어 있는 껌딱지한테 왜 그래야 하나 싶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금방 잊힐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차형욱 회장과 다시 만날 기회도 있겠지?

아직 별말 없는 것 보니…… 음. 차형욱 회장에 대한 소문은 과장이 많거나, 그 허연 머리랑 별 사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오늘 R&Me 그룹 생방송 무대 취소되었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 피디님!”

당황한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멤버들도 강하게 항의했다.

“아니, 우리 신곡 발표한다고 이미 두 달 전부터 계획 되어 있었던 건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형! 젠장! 이게 몇 번째예요? 요번 주 들어 우리 스케줄 다 펑크 났어요. 음악 방송, CF, 라디오, 협찬 다 취소됐잖아요. 이게 뭐냐고요?”

흥분한 R&Me 그룹 멤버들이 시끄럽게 항의하는 사이 매니저는 구철민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대표님! R&Me 스케줄 또 취소되었어요. KMS방송국은 설명 없이 아예 영구제명이랍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우선 매니저는 이들을 달래서 숙소에 데려다주었다.

그 후에 그만 긴급회의를 하러 스타 엔터테인먼트 건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이미 초상집 분위기였다. R&Me 그룹에서 시작된 불운의 바람은 유행처럼 스타 엔터테인먼트 소속 모든 연예인에게도 찾아왔다.

줄줄이 CF 취소와 스케줄이 비어가는 기현상으로 회사 설립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낌새를 눈치챈 주식시장에서도 악성루머가 나돌기 시작했다.

어제, 오늘 스타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은 하한가를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큰 손이 움직이고 있는 거 같은데, 도통 밝혀내질 못했다. 이유를 알아보러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피땀 흘려 겨우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방법이 없어 미치는 구철민 대표였다.

Rrrr. Rrrr.

휴대전화가 울리자 통화 버튼을 누른 구철민 대표는 길지 않은 통화를 끝냈다.

전화를 끝낸 구철민 대표의 까무잡잡한 피부는 허옇게 질려 있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큰 덩치를 쓰러질 듯 의자에 기댔다.

“철민아, 형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차형욱 회장과 얽힌 거냐? 그쪽은 아무리 형이라도 어렵다. 문제가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좋게 풀어야 할 듯하다.”

구철민은 백화점에서 은우를 데리고 돌아가는 문재준과 박동수를 보내면서 설마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서 우선 일을 친 당사자를 바로 보내 정중히 사과까지 시켰다. 태윤에게 듣기로는 잘 넘어갔다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어이가 없었다.

구철민 대표는 연이어 터지는 문제로 정신이 없어 아직 YJ 그룹에 찾아가 보지 못했다. 사태가 진정되면 자신도 가서 사과를 건넬 계획이었다.

근데,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사건에 넋이 나간 구철민 대표였다. 고작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서둘러 전화기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YJ 그룹 회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차형욱 회장은 물론, 문재준 비서실장까지 바쁘다고 통화조차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차형욱 회장은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름 조심한다고 노력했는데,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진즉 찾아가 확실히 일을 매듭지었어야 했는데, 바쁜 일정에 시간을 놓쳤다. 태윤이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증거가 없었다. 더구나 소속 가수다 보니 유하게 넘어간 사실이 후회스러웠다.

“윤 매니저! 태윤이 놈, 당장 불러와!”

“예? 태윤이요?”

“그래, R&Me 애들 싹 다 불러!”

연이어 취소되는 스케줄에 짜증이 난 태윤은 간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집에 갔다.

용돈 좀 타기 위해 모처럼 애교라도 피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기분전환으로 요번에 새로 나온 신형 스포츠카를 사고 싶었다.

요즘 얌전히 지내는 태윤 때문에, 좋아 죽는 어머니가 어떻게든지 해줄 거라 믿었다.

삐용. 삐용. 삐용.

단독주택들이 밀집된 집들 사이에 경찰차 여러 대가 눈에 보였다.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태윤이다. 어느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싸움이라도 났나 보다. 모처럼 찾은 집인데 저런 소란스러움은 딱 질색이었다.

결국, 통행이 막혀 불편한 집 앞이 아닌, 골목 쪽에 주차하고 걸어가야 했다. 가까이 가보니 대문이 열려 있고, 경찰차가 멈춰 선 곳은 자신의 집 앞이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너네들 내가 가만둘 줄 알아? 내가 아는 판검사가 몇 명인데, 이게 무슨 짓이야?”

음대 교수인 어머니는 남들 앞에서는 고상한 행동을 선호했다.

지금 높은 고성을 지르며 경찰에게 끌려오는 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자신의 어머니였다.

회사에 급한 문제가 발생해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아버지가 달려왔다. 급하게 경찰을 쫓아가 사정을 묻고 있었다.

최근, 그의 회사에서 수입 판매하는 고가의 기계들의 연이은 주문 취소가 발생했다. 거래처에 사정을 알아보러 갔다가 딸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기 위해 경찰차로 출발하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아버지도 따라 나섰다.

아무래도 공인인 태윤은 자신을 노출시키기 꺼려져 경찰차가 출발한 뒤에 집으로 들어갔다. 2살 많은 평소 태윤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누나가 거실에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사정을 들으니, 경찰이 찾아와 음대 입학과 관련된 뇌물수수 혐의로 경찰서 출두를 요구했다. 아니라고 반항하던 어머니에게 명단과 증거자료를 보여주며 끌고 갔다고 했다.

또, 태윤이 고등학교 시절 저질렀던 사건 처리를 위해 학교 이사회에 준 뇌물도 조사하고 있다는 말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태윤이었다.

지금 이렇게 공개돼서는 결코 안 되는 문제였다.

자신이 힘들게 쌓아 올린 이미지가 이렇게 무너져서는 절대 안 됐다. 우선 숨겨진 배경이 든든하다던 구철민 대표의 도움을 받아 소문을 덮어야 했다.

선배 가수나 배우의 스캔들 기사도 회사에서 적당히 없던 일로 무마시켜주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이번 일 처리를 부탁해야 했다.

처음으로 든든한 바람막이였던 부모님이 없어진 상황에서 태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약간의 희망이 있었다.

우선은 일을 덮은 후, 나중에 기자회견을 열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뒤집어쓴 피해자 행세를 하면 되지 않나 생각들이 들었다.

오히려 어머니의 불행한 상황이 자신에게는 동정표로 작용할 묘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쉴 새 없이 잔머리가 돌아갔다.

그래! 이대로 포기란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조사뿐이니 아직은 최악은 아닐 것이다. 아까부터 울리던 전화기를 꺼내자, 회사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찍혀 있었다.

Rrrr. Rrrr.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급히 소리치는 매니저 형의 음성이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 너 전화 왜 이렇게 안 받아? 당장 회사로 튀어와. 큰일 났어! 대표 호출이야. 빨리!”

아무래도 회사에도 연락이 들어간 거 같다고 생각한 태윤은 서둘러 회사로 들어갔다.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포장해서 피해자가 되어볼 생각이었다.

이상하게 긴장감 넘치는 사무실 분위기에 말문이 막힌 태윤이 주변을 둘러봤다. 구철민 대표가 태윤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태윤! 너 그날 YJ 그룹 회장실 찾아가서 사과했어? 안 했어?”

“아, 아니 그게…….”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우물쭈물 대답을 흐리는 태윤을 보자 속이 부글거리는 구철민 대표였다. 제발 갔다 왔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소리쳐 되물었다.

“네가 갔다 왔다면서? 다시 말해봐. 갔어, 안 갔어?”

“그것 때문에 부르셨어요? 제가 차형욱 회장님한테 직접 그런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애한테 사과해요? 고작 작은 실수인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요?”

자신에게 급한 일이 터진 상황이라 태윤은 평소 이미지 관리고 뭐고 내팽개친 짜증 난 음성으로 따졌다.

태윤에겐 지금 급한 것은 사과 따위가 아니었다. 눈치 없는 대표의 행동에 도리어 신경질을 냈다.

“장난해? 네가 정식으로 사과했다면서? 그쪽에서 괜찮다고 했다면서?”

적반하장(賊反荷杖)에 주객전도(主客顚倒), 방귀 뀐 놈이 성내는 모양새에 구철민 대표의 혈압이 무한 상승했다.

“…….”

계속되는 추궁에도 태윤은 아랫입술만 질끈 물고, 고집스럽게 침묵했다.

사무실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평소와 다르게 화를 내는 대표와 태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대충 모든 문제의 중심에 태윤이 있었음을 짐작하자 싸늘하게 눈빛이 변했다.

얼마 전 구철민 대표는 스타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이 데뷔하기 전에 인성 부분에 신경을 쓰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당장 예절 교육 시간을 늘리라는 소리가 왜 나왔는지 드디어 알게 된 직원들이었다. 늘 호의적이던 회사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에 태윤은 당황했다.

하지만 가슴 깊이 자리한 자존심과 오기가 쉽게 고개 숙이지 못하게 했다. 결국, 간절한 목소리로 변명을 주절거렸다.

“그때 대표님도 보셨잖아요. 난 실수로 커피 좀 쏟았을 뿐인데. 걔가 재수 없게 다친 거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봤잖아요. 내가 끼얹은 것도 아닌데, 뭐가 잘못이에요? 난 공인이잖아요. 그 애가 막말로 YJ 그룹 회장도 아니잖아요. 근데, 내가 왜 사과를 해요? 그때 내가 실수라고 말했으니 충분하지. 우리 집에서 회사에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이래도 돼요?”

그동안도 가끔 태윤의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튀어나왔었다. 사회 밥을 오래 먹은 예리한 직원들은 이미 태윤에 대해서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었기에 모르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의 배신감은 더 컸다.

자신의 집에서 회사에 무엇을 했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태윤의 아버지가 후원하는 건 태윤만을 위해서였다.

원래 있는 R&Me 그룹의 차와 숙소가 태윤의 마음에 안 든다면서 태윤의 아버지가 사비를 들여서 옮기겠다고 했다.

그것을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준 것처럼 말하자 듣는 사람들 입이 쩍 벌어졌다.

“허! 그래서 네가 실수했다고 치자. 사람이 다쳐도 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실수니깐. 그런 거야?”

“아…… 그건.”

추궁하듯 터지는 구철민 대표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태윤은 억울하다는 듯이 눈물만 쥐어짰다. 주위에 있던 같은 멤버들이 어색하게 끼어들어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태윤과 마찬가지로, 대표가 왜 사소한 문제에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됐다.

“대표님, 태윤이도 실수인데 그쪽에서 예민하게 반응해서 화가 났겠죠.”

“맞아요, 솔직히 우리는 이제 공인인데……. 찾아가서 사과라니 너무 과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같은 멤버들의 모습에 구철민 대표는 머리를 감싸고 큰소리로 그들의 말을 막았다.

“시끄러워! 공인이라고? 올해 데뷔한 핏덩어리들이…… 허!”

기가 막힌 상황에 구철민 대표는 말문이 막혀 2년 전에 끊은 담배가 그리웠다.

오냐오냐 자라서 철이 없구나 싶었지 이 정도로 오만할 줄이야.

천천히 고쳐주면 되겠지. 나이 들면 철들겠지. 태평하게 생각했던 구철민은 본인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이미 끝난 일로 왜 그러세요?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죠. 그것보다 우리 방송은 언제 나가요?”

R&Me 리더인 최고가 묻자, 쌤과 루크도 구철민 대표에게 투덜거렸다.

“시끄러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당장 다 같이 YJ 그룹 찾아간다. 사람이 다쳤는데 공인이니깐, 사과를 안 해도 된다니. 기가 막히는군! 어차피 스케줄 취소돼서 정리할 필요도 없으니 찾아가서 빌어! 나도 가서 같이 빌 테니깐. 너희도 헛소리는 그만하고, 찾아가서 진심으로 싹싹 빌어라. 용서받지 못하면 회사도 너희도 다 끝이라는 것만 명심해!”

다음 날.

벌컥.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김 과장이 허겁지겁 구철민 대표의 코앞에 신문을 내밀었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기, 기사가…… 신문기사 떴습니다!”

며칠째 회사에서 야근 중인 구철민은 내밀어진 조간신문들을 가까이 당겨 살펴보자마자 결국, 의자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고 말았다. 너무 늦어버렸다.

[충격! 신인 가수의 숨겨진 이중성.

청순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신인가수 T군은 고등학교 시절 일진으로 활동하며 같은 반 동급생을 따돌리고 누명을 씌워 자살하게…… 돈으로 소문을 막은 유명대학 교수인 모친…… 결국, 뇌물수수 혐의 조사…… 이미 밝혀진…… 잔인한 행각을 지속…… 같은 반 A군을 사람을 사서 폭행해 불구로 만든…… 뻔뻔한 모습을 보다 못한 피해자 A군이 용기를 내기로 결정…… T군은 올해부터 활동하는 국내 대표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4인조 그룹…….]

다른 신문과 인터넷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줄줄이 도배되어 있었다.

조금만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누구나 신인 가수 T군이 누군지 알았다. 이미 인터넷에는 태윤의 실명이 거론되면서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 휩쓸고 있었다.

더구나, 피해자 A군이 인터넷에 직접 올린 사연과 인터뷰 내용에는 이미 태윤의 실명까지 정확히 공개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끝이라고 보면 되었다.

TV 뉴스 속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창백한 남자의 모습과 억울한 사연을 특종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연이어 R&Me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스캔들까지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클럽에서 난잡하게 놀고 있는 사진과 학창시절 폭행당했다는 이들까지 나왔다.

R&Me 데뷔 이래 처음으로 폭발적인 관심과 검색 순위를 차지했다. 덤으로 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이름도.

이상하게 회사 앞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어 뒷문을 통해서 R&Me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젯밤에도 회사와 대표를 욕하느라고 늦게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 전화기도 꺼놓고 항의하듯이 늦잠을 잤다.

그 바람에 매니저가 찾아가 억지로 끌어와서 그런지 얼굴 가득 불만이었다. 늦었다고 한마디 할만한 상황임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구철민 대표에게 다가갔다.

어리둥절해하던 태윤과 멤버들은 대표의 책상 위에 올려진 신문기사를 보고 하얗게 질려갔다.

Rrrr. Rrrr.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태윤이 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야 이놈의 자식아! 너 밖에서 뭔 짓을 하고 다닌 거냐? 너 YJ 그룹에 무슨 짓을 했길래 거래처에서 네놈 이름이 나와? 마음잡고 일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너 하나 때문에 집안이 다 망하게 생겼어. 어떡할 테냐? 신문기사는 또 뭐고? 너 쓰레기짓 하고, 네 엄마가 돈으로 막고 다니는 것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삑.

귓가에 이명이 들려 마치 이곳이 꿈속같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물고 있던 아랫입술에 피가 맺혔다. 설마 싶었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

스케줄 취소와 방송 문제 등이 다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한 줄 알았는데, 별것도 아닌 자신의 작은 장난이 빌미가 된 것이 확실했다.

‘젠장! 잘못 건드렸다.’

차형욱 회장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소속사의 도움으로 우선 기자회견이라도 열어 가해자를 피해자로 바꿔야 했다.

‘그래. 명예훼손!’

그거라면 될지도 모른다.

증거를 없애면 자신이 이길 수도 있다. 자신을 질책하는 분위기를 무시하고 혼자 생각에 잠긴 태윤이었다.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제는 이 모든 사건의 뒤에 YJ 그룹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을 눈치채고, 같은 멤버들조차 태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사과하고 문제를 덮어보던지, 태윤을 퇴출해서라도 자신들은 살고자 했다.

어제까지 태윤에게 사과하지 말고 같이 버티자고 했던 의리는 자신들이 피해를 보자 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구철민 대표는 계속 전화해도 차형욱 회장과 연락이 되지 않자, 약속 없이 무작정 가기로 했다.

결국, R&Me 멤버들을 끌고 다짜고짜 YJ 그룹 본사를 찾아갔지만, 경비에 막혀 회사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자 막막했다.

회사 입구에서 차형욱 회장이 퇴근할 때까지 버틸 생각으로 기다리는데, 두 시간이 지나자 회장실 옆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차형욱 회장은 눈앞의 인물들을 보는 순간 눈가에 사납게 힘이 들어갔다. 은우를 일부러 다치게 하고,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 건방진 금발머리 애송이를 노려봤다.

은우가 친절하게 대해준 구철민 대표의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닫게 해주어야 했다. 본보기 삼아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경고를 하고자 불렀다.

그들이 장난이라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차형욱 회장의 앞에 눈물을 글썽인 금발머리 애송이가 다가왔다.

“회장님, 제가 실수로 회장님 심기를 어지럽혀 죄송해요. 뭐라고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절대 고의가 아니었어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너무…… 하세요. 그만 용서해주세요.”

울먹울먹 입을 벌린 태윤의 변명투성이 헛소리에 차형욱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구철민 대표! 지금 저 애송이가 뭐라고 하는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

태윤을 철저하게 무시한 차형욱이 구철민 대표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평소 구철민 대표를 대하면서 나름 예의를 갖추던 차형욱 회장은 더 볼 수 없었다. 눈앞의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고 던지는 살벌한 반응이었다.

태윤의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구철민 대표였다. 그가 다시 태윤에게 정색하고 야단쳤다.

“태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은우 님한테 상처를 입혔으니 은우 님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겠다고 해야지! 똑바로 말하지 못해! 차형욱 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차형욱 회장 앞에서 태윤은 끝까지 입을 꼭 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옆에 있는 멤버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죽이고 있었다. 차형욱 회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와 살기에 다들 숨쉬기도 버거운 멤버들이었다.

하다못해 조직을 본가로 둔 구철민 대표조차 버티기 힘든 냉기를 곱게 자라 이들이 견디기 힘든 건 당연했다.

말없이 눈빛 하나만으로 실내를 장악한 차형욱 회장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나가!”

결국, 얼어붙어 말문이 막힌 구철민 대표와 벌벌 떨기만 하는 R&Me 멤버들은 차형욱 회장의 한마디에 회의실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엉겁결에 회의실을 나오자 의자에 앉아 있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차갑게 외면하는 그 얼굴에 절망에 빠진 구철민 대표의 고개를 절로 숙어졌다.

구철민은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다친 은우 님에게 그때 있었던 일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또한, 마지막 기회인 은우에게 매달려보고 싶은 것도 구철민 대표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필사적인 구철민에게 지금 상황 이상의 최악은 없었다.

털썩.

거구의 덩치가 비서실 앞 회장실 입구 쪽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화들짝 놀란 R&Me 멤버들이 엉거주춤 서서 그들의 대표를 바라봤다.

차마 자신들도 무릎을 꿇지 못해서 뒤쪽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머지 인간들을 문재준은 한심하게 노려봤다.

다행히 구철민 대표가 최악의 상황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보여준 이런 과감한 행동력이 문재준 비서실장의 마음에 들었다. 순할 줄만 알았더니 제법 강단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딱히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두기로 한 문재준이었다. 적어도 구철민 대표가 보인 눈빛은 강직하고 정직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문재준은 차형욱 회장을 기다렸다.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온 차형욱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회장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태윤의 눈에 독기가 스쳤다. 입을 악다물고, 구철민 대표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 보여줬던 오기도, 동정도, 울음도 소용없음을 깨우쳤다. 차형욱 회장은 절대 대충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계산 착오다.

그 허연 머리가 차형욱 회장의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킬레스건임을 이제 태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인정하자 자신의 자존심이 갈가리 찢겨 바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자존심을 일찍 버려서라도 좀 전에 차형욱 회장에게 매달려볼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설마 했던 허연 머리의 존재는 자신이 장난이라도 건들지 못할 만큼 가치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허연 머리를 만나 사과하면 모질지 못한 구철민 대표는 자신을 버리지 못할 거였다. 지금 가버리면 아무것도 안 됐다.

집에서 온 전화로 어머니는 구속될 거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의 사업도 YJ 그룹의 압력 때문에 거의 망한 거 같았다.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유일한 곳은 스타 엔터테인먼트의 힘과 YJ 그룹의 용서였다. 그 뒤에 거짓된 소문의 피해자임을 강조한 자신의 기자회견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자신을 둘러싼 더러운 소문이 잊힐 것이다.

원래 대중은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기 마련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복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구철민 대표와 태윤의 모습에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모르는 척 관찰 중인 문재준 비서실장은 눈으로 시간을 체크했다.

오후 3시.

과연 저 애송이들이 얼마나 저러고 있을 수 있을지 흥미 있게 바라봤다. 오늘 하루가 지루하지 않았다.

감히 천사님을 골탕 먹이려다가 차형욱 회장에게 크게 혼나는 애송이들을 보고 기분이 상쾌해진 사악한 시어머니 문재준이었다.

사실 태윤이 당한 대부분의 사건은 문재준 비서실장의 입김이 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연예인 생활 못 하게 하고 경고 수준에서 끝내려 했는데, 알면 알수록 제대로 쓰레기였다.

태윤의 과거를 조사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이기적이고 더러운 사건들에 문재준은 깔끔하게 죄책감을 털었다. 그가 판단한 적당한 기준선에서 살짝 간만 보여준 것이었다.

저런 애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모두 사라져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것이 친절한 문재준 식의 교육적 판단이었다.

4시가 되자 다리를 옆으로 펴며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하려는 놈들이 보였다.

독하게 이를 악문 태윤은 구철민 대표를 따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고 허리가 아파져 왔지만 참을 수 있었다. 끝내 다리를 펴고 쉬는 나머지 놈들이었다.

5시가 넘어가자, 허옇게 질린 태윤도 결국 다리를 펴고 앉아버렸다. 이미 다리에는 감각이 전혀 없었고, 목과 허리는 끊어지게 아팠다.

구철민 대표만이 처음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굵은 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려 턱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소리 없이 감탄한 문재준이었다.

회장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테이블에 앉아 망고 주스를 손에 쥐고 그림으로 그려진 위인전기에 푹 빠져 있는 은우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차형욱 회장은 혼자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아는 구철민 대표라면, 분명히 아직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사업가지만, 조직에서 자란 자였다. 근본적인 예법을 조직에서 익혔으니, 끝까지 강직하게 나올 가능성이 컸다.

차형욱 회장의 배경 또한 잘 알고 있으니 용서를 받으려 목숨까지 내놓겠다면 골치가 아팠다. 곰 대표의 목숨 따위야 티끌만큼도 걱정되지 않았지만, 은우의 반응이 걱정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독불장군(獨不將軍) 차형욱 회장이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평소 구철민 대표에게 친절한 은우가 지금 그를 보면 분명 왜 그러고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었다. 곰이 사과라도 하면 냉큼 괜찮다고 할 은우다.

차갑고 용서라고는 없었던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차형욱 회장의 고민이었다.

모든 일을 은우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은우가 싫어하는 일을 멋대로 처리할 수 없는 완벽히 길들여진 야수 차형욱이었다.

어느 정도 머리를 정리한 차형욱 회장이 혼자서 회장실 밖으로 나왔다. 역시 짐작대로 무릎을 꿇고 있는 고지식한 구철민 대표 쪽으로 걸어갔다.

땀이 범벅된 얼굴을 들어 올린 구철민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차형욱 회장에게 우직한 눈으로 물었다.

“제가 사죄드릴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좋다. 은우를 봐서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 내가 치울까, 당신이 치우겠나?”

꾹 감겼던 눈을 번쩍 뜬 구철민 대표가 차형욱 회장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R&Me 멤버들은 저렇게까지 비굴하게 구는 구철민 대표가 이상해 보였다.

더욱이 알아듣지 못하는 질문과 대답이었다. 태윤은 까칠하게 각질이 올라온 입술을 앞니로 뜯으며 차형욱 회장을 흘끔거렸다.

구철민 대표의 눈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쳐다봤던 차형욱 회장이 방향을 바꿔서 태윤 쪽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있는 태윤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는 고개를 숙였다.

태윤은 자신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댄 잘생긴 차형욱 회장의 얼굴에 볼을 붉혔다.

“다시 더러운 네놈이 내 눈에 띄면 넌 죽. 어! 숨도 크게 쉬지 마! 내 사람의 그림자만 봐도 넌 죽. 어! 당장 꺼져!”

잇새로 비집고 나오는 지독히 낮게 깔린 살기를 품은 음성에, 태윤은 새하얗게 질려 아까부터 참았던 노란 물을 몸 밖으로 흘렸다.

가까이에서 그 경고를 훔쳐 들은 R&Me 멤버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최대한 수그리고 숨을 멈췄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회장실로 들어가버리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그가 눈에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R&Me는 전격 해체되었고, 이들 모두 스타 엔터테인먼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소속 가수 사건에 솔직히 공개 사과를 했다. 그 후로 회사에 몰리던 압력이 사라지고, 구철민 대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론은 진정한 가해자를 대신해 공개 사과를 하는 엔터테인먼트에 천천히 호의로 돌아섰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형에게 찾아가 그간의 상황을 말하자 차형욱 회장을 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구철민 대표는 은우가 옆에 있을 때 보았던 차형욱 회장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했다. 형님 말대로 감춰진 그의 진면목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구철민 대표는 큰 교훈을 얻고 악몽을 겨우 끝냈으나, 태윤과의 악몽은 지속되었다.

동생 구철민이 약속한 깔끔한 처리를 위해 형 구중석이 두 팔을 걷어 올렸다. 최대한 차형욱 회장이 만족스럽도록 나머지 일들을 동생 대신 마무리를 지었다.

동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브라콤 보성파 보스 구중석이었다. 그 결과 태윤에게는 악몽이었다.

결국, 검색어 1위 ‘국민 쓰레기 태윤’이 장식되었다.

갑자기 자수한 청부 폭행 당사자로 인해 태윤의 모든 죄는 빼도 박도 못하게 공개되었다.

청부 폭행과 다른 죄목들로 꼼꼼히 묶여 체포영장을 받는 태윤의 모습이 TV 뉴스에 나왔다.

원래라면 있는 집의 이기적인 아이가 저질러 돈으로 덮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냥 잊힐 수 있었던 끔찍한 범죄가, 작은 질투로 인해 전부 드러나서 가해자가 모든 걸 잃고 나락에 떨어져버린 황당한 일이었다.

구철민 대표는 부피만 너무 커진 회사를 다시 정비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품이나 성품을 자질이나 외모보다 우선에 두었다. 연습생 생활을 필수로 해 통과한 후에만 데뷔를 시켰다.

새로운 경영전략은 성공했다. 인간적인 스타의 모습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결국, 스타 엔터테인먼트에 그 일은 한층 큰 성장을 위한 밑바탕이 되는 사건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