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생일 축하요. 아빠
며칠 전부터, 정도훈이 수상했다.
수시로 찾아와 은우와 쑥덕거리며 귓속말로 대화해 차형욱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회사에 회의가 길게 잡혀 있어, 은우가 따라가지 않고 정도훈과 집에서 놀기로 했다.
얼마 전 외출해서 어이없이 다치고 온 은우이기에 요즘 집과 회사에만 있었더니 은우도 심심한 눈치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는 혼자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다.
내일 본가에 가야 하기에 오늘은 아무래도 회사에서 바쁜 시간을 보낼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은우를 얄밉기는 해도 믿을 수 있는 정도훈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왠지 음흉하게 웃고 있는 정도훈이 수상한데…….
심증은 있는데 정확한 물증이 없다.
뭔 가정교사 노릇하겠다고, 은우를 옆에 끼고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정도훈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기에 별일이 있겠냐 싶어 눈빛 경고만 보내자, 작게 휘파람을 불며 딴 곳을 본다. 흐음. 찜찜하지만, 증거가 없다.
은우가 차 타는 곳까지 마중을 나와서 차형욱과 박동수를 향해 바이바이 손 인사를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있다. 옆에서 박동수도 열심히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차형욱이 손을 뻗어 은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환하게 드러난 진한 하늘빛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가늘게 접힌 고운 눈매를 보며, 작고 도톰해 촉감 좋은 입술을 포갰다.
부드러운 감촉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입술로 살짝 깨물자, 살며시 벌어지는 따뜻한 입안에 파고들었다. 작은 혀를 휘감고 달콤함을 짧게 맛보았다.
아쉬움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떨어트리고, 깨끗한 이마에 입술을 대며 작게 속삭였다.
“은우, 금방 갔다 오마.”
“아가, 동수 잘 가. 금방 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우를 꼭 끌어안았다가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옆을 보니 박동수가 자신의 팔뚝을 위아래로 빠르게 문지르며 몸을 꼬고 있었다.
큼.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며 차에 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아쉽지만 사랑스러운 은우를 두고 출발을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일처리를 하고 퇴근해야겠다.
YJ 그룹 회장실.
비서실장 문재준의 스케줄 브리핑 후 진한 커피를 마시며, 오늘 있을 미팅 건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마케팅부서에 이미 YJ 그룹의 새로운 자동차 관련 정보를 미끼로 던져서 쥐새끼를 잡을 쥐덫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커피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앞에 놓인 보고서를 바라보는 차형욱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숨어 있는 쥐새끼를 어떻게 잘 잡아먹을까?
어차피 그냥 둬도 자동으로 자멸하며, 자신의 행동을 아주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쥐새끼 사냥은 시작됐다.
작은 회의실에는 아무도 모르게 계획된 은밀한 미팅이 진행 중이었다.
넓은 유리창의 블라인드를 내려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지만,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는 심상치 않은 내용임이 분명했다.
문재준 비서실장은 가끔 쓰는 깔끔한 은테 안경의 코 받침을 손끝으로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 이미 지금 최종 검토 시안이 거의 다 나온 상태입니다. 만약 이게 유출이 된다면, 요번에는 상당한 경제적 손실이 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전에 움직일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음. 배무영 과장이 한번 지금 상황에 대해서 말해보게.”
“네. 회장님 말씀대로, 저번 마케팅 부서에서 발생한 디자인 유출 건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조현석 대리를 관찰 결과,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최근 조현석 대리의 여동생 조현아 통장으로 거액의 현금이 입금된 현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조현아는 대학교 3학년생으로 경제적 활동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조사해보니 조현아 이름으로 만든 통장일 뿐, 조현아 본인조차 알지 못하고 만들어진 통장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빠인 조현석 대리가 여동생 명의로 개설한 통장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돈의 흐름을 보면 범인을 찾기가 가장 쉬운 법입니다. 조현석 대리가 스파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번에 계획 중인 신차 개발은 극비리에 진행된 신개념 그린 프로젝트 부분도 포함되어 있어 유출 시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엔진 기술 관련은 워낙 막대한 돈을 투자한 사업이라서, 이 부분이 밖으로 새어 나갈 시 수백 억의 손실이 예상됩니다. 회장님! 두고 보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봅니다.”
차형욱 회장이 직접 배무영 과장을 시켜 조사한 마케팅 1부서 조현석 대리에 대한 조사에 이어, 비서실장 문재준의 우려 섞인 의견이 이어졌다.
“우선 배무영 과장은 계속 조현석 대리를 감시하고,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면 바로 보고하도록. 분명 접선자가 있을 테니 당분간은 위험해도 두고 보도록 하지. 꼬리만 잡는 건 재미없지. 단번에 꼬리뿐 아니라 머리까지 끌어내야지.”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짧은 미팅이 끝나고, 배무영 과장이 자리를 떴다. 전에 유출 사건 때부터 가장 의심스러운 곳은 마케팅 부서였다.
입사 2년 차 조현석 대리를 같은 부서 배무영 과장에게 지시해 긴밀히 조사하는 중이었다. 배무영 과장은 돈을 받고 YJ 그룹의 기밀을 세운 그룹으로 넘긴 사람은 그가 확실하다고 했다.
쥐새끼가 그 동료를 만나기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차형욱 회장은 문재준 비서실장과 함께 마케팅 부서가 있는 9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쁜 업무로 이틀 연속 야근을 하는 직원들의 동기부여도 할 겸 회식을 위한 보너스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등장한 회장님과 비서실장의 모습에 마케팅 부서에 긴장감이 맴돌았으나, 회식비를 받고 다들 만세를 불렀다.
마케팅 부서 사람들과 섞여 평범한 인상의 조현석 대리도 환호했다. 차현욱 회장의 예리한 시선이 조현석 대리에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시선을 눈치챈 사람은 배무영 과장과 문재준 비서실장뿐이었다.
그 모습에 배무영 과장 역시 웃고 있는 조현석 대리에게 비웃는 눈빛을 던졌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바꿨다. 배무영 과장에게 그는 어수룩하고 멍청해서 들통 난 쥐새끼일 뿐이었다.
모두 회식으로 자리를 비운 9층 마케팅 부서 사무실.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컴퓨터 켜지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딸깍딸깍 소리가 텅 빈 사무실을 울렸다.
책상 앞에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특수제작 된 USB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던 남자는 손안의 흔적이 남지 않는 USB를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한참 시간을 끌던 남자가 USB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주위를 경계하며 마우스 위에 손을 얹고 망설이던 남자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드디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일 전송 20% 45% 60%…….
초조하게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는 양손을 펴 바지 윗부분에 문지르며 땀을 닦았다.
-파일 전송 95% 97%…….
딸칵.
바깥 사무실 스위치 들어오는 소리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 의자 위에 몸 전체가 들려 올라갔다 떨어져 내려앉았다.
밝아진 바깥 사무실에 그림자가 지며 등장한 인물이 성큼 안쪽 사무실로 들어와 스위치에 손을 가져갔다.
-파일 전송 완료
갑작스러운 환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는 조현석 대리의 둥그런 얼굴이 보였다.
조현석 대리의 컴퓨터 스크린에는 이미 회사 로고만 떠 있었다. 그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갑자기 등장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늦은 시간 회사로 돌아온 배무영 과장도 아직 사무실에 남아 있는 조현석 대리를 발견하고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 조현석 대리! 회식인데 왜 혼자 깜깜한 사무실을 지키고 있습니까?”
“배무영 과장님이야말로 어쩐 일로……. 전 아직 일이 남아서 마저 하고 회식에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냥 퇴근하기는 좀 찝찝해서요. 컴퓨터로 잠깐 작업하는 일이라 사무실 불은 켜지 않았습니다. 그게 집중이 잘되거든요. 습관입니다! 습관! 허허허 헌데, 과장님은 어쩐 일로 다시 사무실에 오셨습니까?”
동그랗고 평범한 인상의 조현석 대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갑자기 등장한 배무영 과장에게 되물었다. 표정을 능숙하게 숨긴 배무영 과장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야 휴대전화를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 다시 왔습니다만, 조 대리는 일을 참 열심히 합니다. 다시 봤다고 해야 할까요? 업무평가에 참고해야겠습니다.”
“그럼 꼭 잊지 말고, 좋은 평가 부탁합니다. 배무영 과장님. 저도 일이 지금 막 끝나서 회식자리로 가볼까 하는데, 같이 가시죠.”
허허허.
너스레를 떨며 조현석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배무영 과장에게 동행을 청했다. 배무영 과장도 책상 서랍을 뒤적거려 휴대전화를 찾아서 사무실 밖으로 같이 나섰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조현석 대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배무영 과장의 한쪽 입가가 비틀려 있었다. 배무영 과장은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어리석은 조현석 대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가 나쁘면 스파이 짓을 하지 말 것이지, 안타깝기 그지없게 멍청한 놈이었다.
마케팅 부서 사람들이 회식 중인 고깃집으로 향하는 남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들키지 않았다고 자신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 얼굴이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고깃집에 합류하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아침 일찍 일어난 은우다.
눈을 감고 있는 차형욱의 품에서 혼자 꿈지럭거리다가 고개를 드니 차형욱의 까만 눈동자가 딱하니 은우와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은우가 차형욱의 입에 냉큼 입술을 ‘쪽’소리 나게 붙였다 떨어트렸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얼굴로 차형욱이 은우를 품에 당겨 안았다.
“은우,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떨어지는 온기를 쫓아온 다른 입술 때문에 두 개의 입술이 다시 포개졌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 더 낮게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차형욱이 물었다. 은우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팔을 풀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씩, 입가를 올리며 더 세게 끌어안는 얄미운 팔 때문에 숨이 턱 막힌 은우가 차형욱의 가슴을 톡톡 두들겼다.
“아야! 아가, 안 돼. 빨리. 집 가. 아빠 생일.”
은우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차형욱이 느릿하게 팔을 풀어 은우를 품에 안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치약을 짜주고 얼굴을 씻겨주며 차형욱의 일과를 시작했다.
들떠 보이는 은우를 보며 벌써 한숨을 10번도 넘게 내쉰 차형욱이었다. 그는 본가에 은우를 데려갈 생각에 머리가 아파졌다.
품 안에만 넣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깊은 곳에서 치미는 아무도 못 보게 하고 싶다는 들끓는 소유욕에 마음이 잠식당하곤 했다.
같이 씻고 나와, TV 앞에 은우를 앉힌 후 좋아하는 채널을 틀어 주었다.
평소와 달리 TV에 집중 못 하고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와 차형욱의 바짓단을 붙잡고 아침을 준비하는 내내 통통 뛰는 활기찬 은우다.
결국, 차형욱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저렇게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없다. 절대로.
차형욱의 가슴에 여닫는 자물쇠와 고삐는 모두 은우 손에 있다.
차형욱이 밑단을 두어 번 접어줘 10부 정도 오는 청바지를 은우에게 입혔다. 위에는 고심 끝에 하얀 티셔츠를 꺼냈다.
목 부분이 일반 라운드보다 조금 더 파여 있어 은우의 하얗고 작은 얼굴이 돋보였다. 앞은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뒤를 돌아보면 반전 매력이 있는 옷이었다.
양 어깨뼈 부분을 중심으로 크게 하얀 실로 날개가 수놓아져 있어 문재준과 박동수가 백화점에서 발견하고 열광한 천사 날개 티셔츠였다.
정도훈이 말하기로는 오늘 점심은 본가 식구들과만 먹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저녁은 차현수 보스를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외부 손님들과 연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물론 차형욱은 저녁 연회까지 은우를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황성파는 거대한 영향력이 가진 집단이었다. 덤으로 오랜 전통으로 무장된 대대로 이어진 충성심이 전설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업체와 헤아릴 수 없는 자금력도 황성파가 하나의 조직이라는 개념으로만 보기 힘들게 했다.
황성파가 숨겨진 곳간을 열면 웬만한 나라의 어려움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한다면, 그들의 힘으로 나라를 휘청거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정·경·제를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배경, 힘과 자금을 움켜쥐고 있는 황성파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황성파의 차현수 보스의 생일이라니. 당연히 조용히 넘어가기 힘든 날이었다.
검은색 차량이 서서히 커다란 대문 앞에 멈췄다.
박동수가 뒷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큰 모자 사이로 은빛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은우가 내렸다.
서둘러 따라 내린 차형욱이 손을 뻗어 은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다시 모자 속에 밀어 넣었다.
본인 키의 두 배는 될 듯 높은 대문을 은우가 고개를 바싹 뒤로 젖혀 신기하게 올려다보다 휘청거렸다. 차형욱이 손을 뻗어 은우 어깨를 잡아주며 혹여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박동수는 작게 닭살이라고 중얼거리며 서둘러 차형욱과 은우의 뒤를 따라 대문 앞에 섰다.
본가에 있는 황성파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점심을 들기로 했으니, 평소 박동수를 자식처럼 예뻐라 하는 차현수 보스의 생신에 박동수가 참석하는 것은 당연했다.
찰캉, 스르륵.
대문 벨을 누르기도 전에,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열리자마자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은우의 어깨가 파드득 위로 솟았다 내려왔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검은색이나 비슷한 어두운 계열의 양복을 쫙 빼입은 얼추 100여 명쯤 되는 덩치 좋은 남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차형욱이 대문에 걸음을 들이자마자 동시에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큰 소리로 입을 맞춰 인사했다.
얼른 깜짝 놀란 은우의 등을 살살 쓸어주며 차형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들이 잔디밭이 깔린 정원에 쭉 놓인 넓고 판판한 돌 위를 걷는 동안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흘렀다.
그동안 차형욱이 거의 안다시피 걷고 있는 은우의 고개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개 숙인 사람들의 등을 얼굴 가득 물음표를 달고 쳐다보다가, 정원 군데군데 잘 손질된 소나무도 하나하나 구경했다.
조금 걷자 고풍스럽게 기와장이 올려진 커다란 지붕이 쭉 펼쳐졌다.
하지만 건물 자체는 현대적 디자인이 접목되어 있었다. 2층 건물이 중앙에 있고, 옆으로도 높은 건물이 없이 대부분 1층과 2층 높이의 건물들이었다. 동서양이 조화된 건물들이 안쪽을 보호하는 형태였다.
안쪽에는 여러 채의 건물들과 별채가 있고, 특히 중앙에 위치한 안채가 따로 존재했다. 이 안채가 바로 차현수 보스가 머무는 곳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철저히 보호받을 수 있게 설계된 구조였다.
한 치의 빈틈없이 설치된 CCTV와 조직적인 경비 시스템을 본가 전체에 갖추었다.
“우와.”
살랑살랑 불어온 바람에 옅은 분홍 꽃잎이 흐트러지자 은우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자동으로 굳어 있던 차형욱의 입매도 풀렸다.
사실 본가에 방문한 사람들이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칭찬하는 정원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정원의 아름다움에 빠져들다가, 건축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소나무, 꽃나무, 작은 연못과 어울리는 바위 하나하나까지 침입자의 존재를 모를 수 없게 계획하에 배치되어 있었다.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동시에 보안에 중점을 둔 완벽한 설계였다.
안채 앞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진한 고동색의 고급스러운 소파 상석에 근엄하게 앉아 있던 황성파 보스 차현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옆에서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정도훈도 일어나 반갑게 인사했다.
“은우, 왔어?”
살랑살랑 은우의 손 인사를 받으며 정도훈이 눈을 찡긋찡긋 신호를 보냈다.
“은우야, 이쪽이 차형욱의 아버지인 차현수 님이야. 인사해야지?”
“안녕…… 요. 은우입니다.”
은우의 인사에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소파 상석에서 들렸다. 자기 나름 최대한 부드럽게 인사를 받아주는 차현수 보스였다.
“크흠, 은우라고 했느냐? 그래, 잘 왔다.”
“응…… 네. 은우요.”
정도훈의 스파르타 트레이닝으로 존댓말을 간간이 섞어서 말할 수 있게 된 은우다.
차형욱이 놀란 얼굴로 그런 은우를 보다가 금세 표정을 정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 차현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생신 축하합니다.”
“그래.”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무뚝뚝한 부자 사이에 끼어 있는 정도훈은 속에 천불이 났다.
볼 때마다 참 주위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 닮은꼴 부자였다.
“은우야, 옷 벗어. 답답하게 왜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쯧쯧”
정도훈이 은우에게 손을 뻗어 모자를 뒤로 넘기며 코트를 벗겨주려 했다.
손을 움찔거린 차형욱이 정도훈의 손을 치우며 자신이 대신 은우의 옷을 마저 벗겨냈다.
모자 속에 튀어나온 은우가 웃자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리자, 차현수 보스가 눈에 띄게 경직되어 굳어졌다.
정도훈이 보기에는 사진으로 보다가 실제로 보니 그저 놀라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차형욱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 차현수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자신의 뒤로 은우를 감춰 보호하려 했다.
정도훈은 안 되겠다 싶었다.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려고 은우에게 신호를 보냈다.
은우를 보며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잡아당기는 척하자, 고개를 끄덕인 은우가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 요. 아빠.”
그 순간 은우가 차형욱의 뒤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며 듣기 좋은 허스키한 미성으로 축하를 건넸다.
맑은 하늘색 눈을 접으며 아빠라고 부르는 은우의 앞에 돌처럼 몸을 굳힌 차현수 보스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게 위로 땅겨진 광대뼈에 평소의 무표정이 깨져갔다.
마음대로 씰룩쌜룩 움직이는 입매며, 살짝 붉어진 목이며 영락없이 초창기 은우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미소 짓던 차형욱을 닮아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유전자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고 정도훈은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고맙구나.”
은우는 아가 아빠라 그런지 너무 닮은 차현수 보스의 모습에 친근감을 느끼고 방긋 웃었다.
차현수 보스는 자신도 모르게 내밀어진 손으로 병아리 털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은우의 머리를 쓸어주며 대답했다.
자신을 쓰다듬어주는 아가를 똑 닮은 차현수 보스의 모습에 처음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은우는 차현수에게 바싹 다가가 쓰다듬어 달라고 고개를 더 가까이 디밀며 눈을 예쁘게 접었다.
그 모습이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차형욱이었다. 무뚝뚝하고 늘 엄격한 아버지였다. 은우에게 이렇게 친절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은우도 무서워할지 모른다고 걱정했건만…….
둘 사이가 생각 이상으로 좋자,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은근 소심한 질투심이 치밀며 섭섭해졌다.
풋!
정도훈의 코웃음 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무의식중에 그랬는지 자신의 손은 이미 은우의 허리를 꼭 잡고 당기고 있었다. 아버지 차현수도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처음 본 네 아버지랑 은우가 인사하는 것도 질투하냐? 차형욱! 은우 허리 부러지겠다.”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살짝 힘이 빠져 내려간 차형욱의 팔을 잡은 은우가 자기 손으로 직접 허리에 두른 후 웃어주었다.
그러자 당황해 굳어졌던 차형욱의 무표정이 사르르 풀리며 다시 부드럽게 힘을 줘 은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술 더 떠서 애교를 부리듯 은우의 머리에 볼을 비비는 차형욱이다.
그걸 처음 목격한 아버지 차현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부릅뜬 눈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수습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차갑기 그지없던 큰아들 차형욱의 놀라운 변화를 직접 목격하고 경악했다. 자신의 친아들 가죽을 뒤집어쓴 저놈이 뉘 집 자식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120% 이해하는 정도훈은 완전 이해심 넘치는 표정으로 차현수 보스의 어깨를 살며시 두들겨드렸다.
평소 엄하고 무뚝뚝한 표정의 보스에게는 감히 못 할 짓이지만, 진한 동료애로 무장된 정도훈은 차현수 보스에게 넘치는 친밀감을 찐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또, 달라진 자식의 모습에 제대로 경악 중인 차현수 보스도 말없이 정도훈의 위로를 받았다.
어느덧 조금 진정된 일행들은, 아니 차현수 보스는 소파에 다시 앉아 식은 녹차로 목을 축였다.
그걸 은우가 빤히 바라보자 차형욱이 냉큼 일어나 구석에 놓인 냉장고 문을 열고 물었다.
“은우, 주스 줄까?”
“응, 아가.”
“은우, 오렌지? 포도?”
“오렌지 주스.”
냉큼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 빨대를 꽂아 은우의 입가에 대주기까지 하는 기막힌 아들이었다.
정신이 반쯤 외출한 차현수 보스가 옆에 앉은 정도훈에게 작게 물었다.
“아가라니?”
“에, 그게 아버님. 그거 있지 않습니까? 연인끼리 부르는 그거…….”
“그게 뭔가?”
“제 생각에 저건 애칭입니다. 애칭! 아가, 애기야, 마이 베이비.”
‘내 자식 차형욱이 아가라니…… 애칭이라니…….’
차현수의 귀에 정도훈이 입을 가져가 작게 속닥거렸다.
차현수 보스는 30년간 지켜본 자신의 친자식 차형욱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처음 보는 팔불출 차형욱 아가를 멍하게 보았다.
다시금 저절로 벌어진 입은, 오늘따라 차현수 보스에게 과다한 친밀감을 분출 중인 정도훈이 따뜻한 손으로 살짝 밀어 닫아주기 전까지 벌어져 있었다.
커다란 좌식의자와 상들이 여러 줄로 일정하게 이어져 있었다.
실내는 족히 500여 명은 되는 인원이 자리했다. 상 위에는 육. 해. 공 산해진미들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져 있었다.
통으로 된 거대한 참치가 중앙에 길게 누워 있었고, 생일잔치인 만큼 빠지지 않는 전복이 듬뿍 들어간 미역국과 장수기원 국수가 자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지속된 고요한 침묵 속에 모두의 시선은 상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긴 은빛 머리카락 뒤로 눈부신 후광을 뿌리고 계신 천사님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은우를 향하는 시선에 날카롭게 변한 차형욱이 차가운 기를 마구 날리기 직전임을 눈치챈 차현수 보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늘 이 늙은이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와준 모두에게 감사하는 바이네. 내가 황성파 식구들 앞에 기쁘게 소개하고자 하는 이가 있으니 모두 기억하고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차현수 보스 특유의 카리스마 있고 간결한 인사를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강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큰 도련님과 보스의 사이에 앉아 계신 눈부신 저분이 유일했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큼. 이쪽은 모두 알다시피 내 큰아들 차형욱 회장이고, 옆의 이 아이는 큼, 내 큰 며느리 될 아이네.”
헉! 컥!
경악과 놀람이 넘실거리는 수백 쌍의 눈동자 중에는 은우 옆에 앉아 있는 차형욱의 눈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은우를 소개할 줄 몰랐던 차형욱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버지 차현수에게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도훈이 히죽 웃으며 은우에게 속삭였다.
“은우, 인사해야지?”
“응. 안녕…… 요. 은우입니다.”
살랑살랑 은우의 귀여운 손 인사가 먼저 좌중의 시선을 송두리째 집중시켰다.
정도훈에게 배운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매력적인 음성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한 실내에 은우가 고개를 갸웃 기울고 차형욱을 쳐다보자, 아까부터 말이 없던 차형욱이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악! 저!
순간 작은 신음과 경악의 외침들이 아까부터 겨우 참고 있었던 황성파 식구들의 입을 비집고 거의 들리지 않게 쏟아져 나왔다.
‘저 사람은 절대 큰 도련님이 아니다! 보스에게 혹시 쌍둥이 아들이 있는 거 아니야?’
‘지금 쓰다듬어준 거냐? 말도 안 돼! 차형욱 도련님이? 머리를 문질러 혼낸 거다.’
‘보스께서 외국인 며느리를? 한국말 진짜 귀엽다. 뷰티풀.’
‘아, 천사 강림! 우유 빛깔 형수님!’
‘벌써 큰며느리로 내정? 혹시! 설마! 큰 도련님이 납치? 협박?’
‘오! 천사 형수님! 완전 눈부셔.’
작은 소음만 들리자, 인사를 한 은우의 어깨가 축 쳐졌다. 차형욱이 눈가에 힘을 주고 좌중을 노려봤다.
그제야 은우의 기분을 눈치챈 정도훈이 은우 몰래 황성파 식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시늉을 했다.
커다란 덩치의 조직원들이 굳은 얼굴을 어색하게 펴며 은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반갑습니다. 은우 님.”
“천사…… 아니, 형수님, 환영합니다.”
하얀 볼에 그린듯한 볼우물을 진하게 드러내며 살랑살랑 손 인사를 하는 은우의 사랑스러움에 덩치들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한동안 멈추지 않는 살랑거리는 손 인사 바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차형욱은 괜히 살랑살랑 인사 잘하는 은우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은우의 손을 꼭 쥐며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질투를 표현하고 있었다. 정도훈과 박동수가 서로 눈빛 대화를 나누며 차형욱을 씹고 있었다.
차현수 보스의 건배를 시작으로 황성파 식구들만의 점심 연회가 시작됐다.
색색의 예쁜 음식들의 향연에 은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이었다.
은우의 시선을 오래 사로잡은 신선로 그릇에 젓가락을 냉큼 가져간 차형욱은 예쁘게 칼집을 낸 버섯을 집어 은우 입가에 가져갔다.
아, 하고 벌어지는 은우 입에 버섯을 쏙 넣어주자 오물거리며 맛있게 받아먹는다.
또다시 다가온 젓가락에는 참기름을 콕 찍은 김에 싼 참치 뱃살이 걸려 있다.
중간중간에 미역국을 밥에 말아 떠먹여주고 물 잔도 입가에 대주자 어느 순간 은우가 고개를 쭉 빼고 주위를 둘러본다.
식사가 시작되고 다들 한 숟가락이나 먹기 시작했을까?
순간 목격된 괴현상에 황성파 식구들은 입을 벌리거나, 수저를 입에 물고 있거나, 젓가락을 손에 쥔 채 돌 조각이 되어버렸다.
냉혹하기 그지없어 찬바람 쌩쌩 피도 눈물도 없다던 큰 도련님! 차형욱 형님이 신성한 차현수 보스의 생신상에서 닭 털을 뽑아 날리고 계셨다.
은우의 의아한 눈빛을 보고 차현수 보스가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까부터 쥐고만 있던 젓가락으로 자연스럽게 미역국을 떠먹으려 하며 입을 벌렸다.
오늘 친근감 넘치는 정도훈이 또, 옆에서 잽싸게 숟가락을 차현수 보스의 손에 꼭 쥐여 드렸다.
“큼, 다들 먹지 그러나?”
절대적인 보스의 권유에 돌 조각들은 삐걱삐걱 어색하게 팔을 움직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상당수의 동료였다. 오늘따라 이해심 넘치는 동료들이 팔을 툭툭 쳐주거나, 어깨를 흔들어 주어야 하나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와중 주위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지런히 형수님의 입을 향해 움직이는 차형욱 도련님의 젓가락질에 모든 이들은 오싹한 공포마저 느껴졌다.
저 강철 철판을 깐 무서운 차형욱 도련님의 애정행각을 계속 지켜보는 것보다, 차라리 피 터지는 싸움터에 익숙해지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대화가 통하고 서로가 이해가 되는 황성파 식구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창단 이후 가장 끈끈하게 단결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푸훕, 읍.
이 상황을 지켜보는 정도훈과 박동수는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들은 차형욱의 머슴 짓을 많이 목격해 면역력이 조금 생긴 상태였다.
주변 분위기를 초토화시켜버리는 막강 철면피 커플의 모습을 처음 보고 집단 패닉 상태인 이들을 보자 미칠 것 같았다. 웃음이 튀어나와 죽을 것 같았다.
심각하게 조용한 분위기에 차마 터트리지 못하는 웃음보따리를 배에 힘을 줘 참느라 호흡곤란 중인 두 사람이었다.
“아가, 이거, 아.”
“아.”
은우가 차형욱을 아가라고 부르며 숟가락에 올린 떡갈비를 앞으로 내밀었다. 차형욱이 그것을 입으로 받아먹는 순간이었다.
여기저기 터지는 헉! 악! 거리는 신음에 결국은 터지고만 정도훈의 웃음소리로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푸하, 픕! 쿠파, 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거의 동시에 웃기 시작한 박동수도 미치겠네, 라며 추임새까지 섞으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오늘 내내 조용히 사태를 관전하고 경악을 반복하기만 하던 차현수 보스도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인간은 적응이 가능한 동물이었다. 나머지 식구들도 차형욱 도련님의 변화를 차츰 받아들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저녁 연회가 남아 있기에 도수가 낮은 술을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자 한두 잔 마시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풀려나갔다.
언제나 엄격한 위계질서와 질서 정연한 황성파의 평소 분위기와는 달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은우 형수님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를 모두 환영하는 바였다.
물론 차형욱 도련님의 애정행각이 여전히 소름 끼치고 적응이 되진 않았다.
그래도 싸늘한 차형욱 도련님이나 다정한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하던 무뚝뚝한 차현수 보스의 부드럽게 풀린 입매나 분위기는 아주 바람직했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현실감 떨어지는 미모의 형수님이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커먼 덩치들만 가득해 칙칙한 연회장을 꽃처럼 빛내주었다. 벌써 신도가 된 듯한 대부분의 조직원 사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천사 형수님의 찬양이 퍼져나갔다.
정도훈은 대충 식사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은우를 보고 눈을 찡긋 찡긋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눈짓에 은우도 자리에서 따라 일어서자, 차형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도훈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정도훈의 모습을 아까부터 관찰하던 차형욱이었다. 그가 은우에게 신호를 보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가, 기다려. 아빠 생일 선물.”
은우가 생일 선물에 대해 언급하자, 다들 호기심을 얼굴에 떠올렸다.
모두의 눈은 저 깜찍한 형수님이 도대체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지 기대감으로 넘실거렸다.
특히 차현수 보스는 괜히 반이나 남은 술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애써 못 들은 척하는 모습이었으나, 눈빛은 기대감에 살짝 빛나고 입매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은우가 정원에서 돌을 주워다 줘도 기뻐할 준비가 된 표정이었다.
은우가 정도훈을 따라 나가자, 차형욱은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얼굴로 묵묵히 앉아 문 쪽을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냉기가 폴폴 올라오는 차형욱 회장의 옆에 앉아 있는 박동수는 물 잔만 손에 쥐고, 빨리 은우 님이 나타나기를 빌었다.
이제는 진짜 은우 없는 차형욱 회장을 상상만 해도 오싹한 소름이 돋는 박동수다. 이렇게 잠깐 자리를 비워도 무섭게 바뀌니 거의 매일 붙어 있다시피 하는 보디가드 박동수에게는 끔찍했다.
완전 공포 영화 주인공 뺨 후려치게 무시무시했다.
갑자기 열리는 문과 함께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허스키함이 깃든 미성이 들리자 연회장은 돌연 조용해졌다. 무슨 노래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가사를 들어보니 생일 축하 노래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빠의
생일 축하합니다.
매력적인 음성에 대비되는 엄청난 박치란 생각이 박동수의 머리를 스쳤다. 완벽한 은우 님에게 발견된 유일한 약점조차 사랑스러웠다. 전에 백화점에서 흥얼흥얼 한두 마디 연습할 때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분홍색 고깔모자를 깜찍하게 눌러쓴 은우의 등장에 좌중은 열광했다. 박자 따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광적인 분위기에 박동수만 혼자 웃음을 삼켰다.
양손으로 불이 켜진 초가 가득 꽂아진 정체불명의 흰색 크림 뭉치를 조심스럽게 차현수 보스 앞으로 내밀었다.
딱 봐도 은우의 손길이 듬뿍 닿은 케이크를 닮은 크림 뭉치였다. 뒤에는 역시 박동수와 같은 생각으로 웃음을 참느라 붉어진 정도훈이 보였다.
그의 오른손은 은우가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살짝 잡아주고 있었다. 좌중의 분위기에 만족한 그의 웃음이 흐뭇한 엄마 미소로 바뀌었다.
“아빠, 후.”
차현수 보스의 눈이 주책맞게 살짝 촉촉해졌다.
자식 놈들한테도 거의 불린 적 없는 아빠라는 친근한 호칭과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은우의 선물이었다.
가슴이 뻐근하게 감동이 흘러넘쳤다. 당장에라도 요 예쁜 큰며느리를 업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유독 신경이 쓰이고 예뻐한 아들놈이 아버지에게 사랑을 표현한 적이 없더니, 이렇게 말년에 효도할 줄이야. 어려서부터 똑똑하더니 이런 사랑스러운 생물체를 어디서 찾아 데려왔는지.
어쩔 줄 모르는 차현수 보스는 밀려오는 감동의 쓰나미에 몸을 떨었다.
은우가 직접 만든 걸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흰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떤 케이크보다 최고로 멋진 케이크 위로 몸을 굽혀 불을 껐다.
“은우야, 정말 고맙구나…….”
감사 인사를 건네는 차현수를 보고 활짝 웃고 있는 은우의 손에 들린 케이크를 차형욱이 서둘러 상 위에 내려놓았다.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은우를 얼른 자기 무릎 위로 앉혔다. 발그레해진 뽀얀 볼에 입술을 살짝 가져가며 주위를 견제하는 질투 마왕 차형욱이었다. 자신도 못 들어본 은우의 노래를 모두와 공유하니 속이 복잡했다.
좀 전까지 차형욱 칭찬을 하고 있던 차현수가 불효막심한 아들놈으로 하향 조정된 쪼잔한 차형욱을 째려보았다. 아들의 견제를 무시하고 손을 뻗어 며느리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뭐래도 사랑스러운 차씨 가문의 귀한 큰 며느님 확정이었다.
잠시 문재준 비서실장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 차형욱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상석에 위치한 생일상 위에는 긴장감이 넘쳤다.
절호의 찬스를 맞아, 얼른 젓가락으로 현지에서 공급해온 신선한 다금바리 회를 집어 간장을 살짝 찍어 은우 입에 넣어주는 정도훈이 보였다.
박동수도 뭘 먹여 줄까 싶어 잽싸게 음식들을 스캔 했다. 은우는 눈앞에 동시에 불쑥, 내밀어진 음식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도훈의 새우튀김과 박동수의 갈비찜, 마지막으로 노란 동그랑땡을 내민 차현수 보스의 젓가락이었다.
순간 김장감이 돌더니 짬밥에 밀린 새우튀김과 갈비찜은 조용히 사라지고, 노란 동그랑땡이 은우 입안으로 쏙 사라졌다.
“맛있어. 아빠, 이거 아.”
차현수 보스는 눈앞에 앙증맞게 내밀어진 불고기 조각을 응시했다.
입에 들어온 불고기를 감격에 목이 콱 막혀 힘겹게 삼키며 다정스럽게 대꾸했다.
“맛있네. 은우도 더 먹자.”
언제부터 알았다고, 더없이 다정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시.며 커플은 차형욱과는 또 다른 의미로 눈꼴셨다.
눈이 빼죽 세모꼴로 올라간 원조 천사광신도 정도훈과 박동수지만, 최종 보스 레벨인 차현수 보스기에 남몰래 눈물을 삼키고 아쉽게 젓가락을 내려야 했다.
상 위에 놓인 달콤한 분홍색 복분자주를 홀짝이며 육회를 날름 입에 넣고 쓰게 삼키던 정도훈이었다. 옆에는 너비아니를 입에 가득 욱여넣고 전투적으로 씹고 있는 박동수도 있었다.
엇! 하는 짧은 외침에 고개를 사선으로 돌렸다.
‘순딩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25살 우락부락한 얼굴의 최태환이 손가락으로 은우 쪽을 가리켰다.
홱,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은우가 어느 틈에 작은 잔에 들은 달콤한 향의 복분자주를 입으로 가져가 쭉, 들이켜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잽싸게 손을 뻗은 정도훈이 은우 손에 들린 잔을 압수했지만, 이미 비어 있는 잔이었다.
어! 어! 어!
호들갑스러운 외마디만 토해내는 정도훈이었다.
그사이 문이 열리고 차형욱이 들어와 은우 옆에 앉았다. 다들 입을 다물고 이쪽을 보는 눈길에 짙은 차형욱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예리하게 은우를 살폈지만, 차현수 보스가 건네준 조그만 꿀떡을 입에 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은우다.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차형욱의 올라간 눈썹이 얌전히 내려갔다.
“도훈 형님, 아까 복분자주 아니었나요?”
작게 속삭이듯 묻는 박동수다.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레 은우를 살피던 정도훈은 별일 없어 보이는 은우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마시는 술이라 걱정했는데 괜찮은 모양이군.
꾸벅, 딸꾹, 꾸벅, 딸꾹.
고개가 한번 밑으로 숙어졌다 귀엽게 튀어나오는 딸꾹질에 고개가 절로 들렸다.
반쯤 감긴 하늘빛 눈동자가 서서히 사라지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딸꾹 소리에 어리둥절한 하늘빛 눈동자가 다시 반쯤 뜨여 주위를 둘러본다.
‘인사 잘한다.’고 놀리고 싶도록 열심히 고개 숙여 인사 중인 은우다. 어느 순간부터 모두 상석을 흘끔거리며, 은우의 아슬아슬 조는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때마침 차형욱이 화장실에 간 직후 시작된 은우의 딸꾹질이었다.
박동수가 내민 물 잔을 손에 쥐고 멍하게 있는 은우로부터 정도훈이 다시 물 잔을 빼앗아 상 위에 올려놓았다.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려 졸기 시작한 은우에게 불안한 시선들이 몰렸다.
툭.
떨어지는 머리가 상에 닿기 바로 전에, 큼직한 손이 은우의 하얀 이마를 감싸서 살며시 눕혔다.
단단한 무릎에 머리를 기댄 은우가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표정으로 눈을 꼭 감자, 큼직한 손이 은우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딸꾹, 잠이 들었지만 계속되는 딸꾹질에 몸이 규칙적으로 움찔거리자, 그 큼직한 손이 은우의 등을 토닥거려 준다.
잠시 후 들어온 차형욱은 은우의 작은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재우는 자신의 아버지 차현수를 바라봤다.
고개를 살짝 숙여 아버지에게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한 차형욱은 은우를 자기 쪽으로 옮기려 했다.
그 순간 다시 툭 튀어나오는 은우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은우의 꾹 감긴 눈이 불편한지 힘이 들어갔다 빠지는 것이 보였다.
차형욱은 아버지 차현수의 무릎을 베고 자는 은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받쳐 일으켰다.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물을 먹이려고 했지만, 은우가 고개를 돌렸다.
고심하던 차형욱이 물 잔을 들어 자신의 입에 머금고, 자는 은우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잠이 든 은우가 물을 잘 삼킬 수 있도록 단단한 혀로 은우의 혀를 살짝 밑으로 내려 고정한 후 조심스럽게 흘려보냈다.
모두 삼킨 걸 확인 후, 다시 물을 입으로 가져가 한 번 더 흘려보내주자 겨우 멈춘 딸꾹질에 은우의 얼굴도 편하게 펴졌다.
입 밖으로 조금 흘러나온 물줄기를 차형욱이 살짝 혀로 핥아 없앴다. 꼭 안고 머리를 가슴에 기대게 하자, 은우가 따뜻한 온기에 볼을 가볍게 비볐다.
순식간에 얄딱꾸리하고 야시꾸리한 분위기를 연출한 커플은 주위 사람들이 신음을 삼키던 술잔을 떨어트린 건 돌 조각상이 되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강 철판 신공을 발휘하며 주변을 초토화할 뿐이었다. 얼굴만 보면 조각 같은 냉 미남 차형욱 도련님이었다.
긴 은발의 눈부신 천사님과 처음에는 애정 영화를 보여주시다 결국 에로영화까지 찍고 계셨다.
수줍은 주변 덩치들이 붉어진 얼굴로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은우를 뺏기고 허전한 무릎을 아쉬워하던 아버지 차현수가 뻔뻔한 제 아들을 바라보며 겨우 한마디 던졌다.
“잠든 거 같으니 네 방에서 조금 재우지 그러느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차형욱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은우가 초점 잃은 멍한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자기가 차형욱에게 안겨 있음을 확인하자 어쩐지 묘하게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손을 들어 느릿하게 차형욱의 볼을 쓰다듬는 은우다. 별거 아닌 손동작 하나까지도 어쩐지 끈적이게 느껴져 다들 숨을 멈췄다.
“하아, 아가.”
막 잠에서 깨서 낮아진 허스키한 미성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주위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에로 커플로 진화한 이들의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였다.
훗날 황성파 20년 차인 ‘불곰’ 황호영은 여태껏 긴 시간을 보낸 조직생활을 통틀어, 오늘 차수현 보스의 생신날을 가장 긴장감 있고 흥미 있는 날이라고 회상했다.
심지어는 그! 차형욱조차 살짝 당황한 건지 시선이 흔들리고, 목덜미가 미미하게 붉어 보였다.
“아가야.”
대답이 없는 차형욱의 모습에 볼을 쓰다듬던 은우의 손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왔다. 차형욱의 뒷목을 감싸고 자신의 고개를 뜨거워진 목덜미에 가까이 묻었다.
확 목에 와 닿는 뜨거운 은우의 긴 숨결에 차형욱의 목은 확연히 붉은 빛깔로 물들었다.
흠칫 몸을 떨면서도 까만 눈동자를 은우에게 고정했다.
“응…….”
낮은 음성으로 차형욱이 대답을 했다. 원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비로소 만족한 은우가 나른히 웃었다. 입술을 목덜미에 완전히 붙이고 깊게 고개를 파묻고 숨을 내뿜었다.
“하아, 아가 냄새.”
할짝, 은우의 입술에서 나온 붉은 혀가 예민한 목에 스치듯 닿자 하체에 몰리는 긴장감에 당황한 차형욱이 목을 뒤로 뺐다. 하지만 떨어트려 은우의 얼굴을 본 차형욱은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붉어진 뺨과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을 몽롱하게 뜨고, 목이 탄지 혀를 내밀어 천천히 입술을 적시는 은우의 모습을 정면으로 당한 차형욱의 이성은 희미해져 갔다.
은우가 차형욱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붙이며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새가 모이를 쪼듯 쪽쪽, 다시 쪽쪽.
“아…… 읍.”
영혼이 멀리 외출 중이라 반응 없는 차형욱이 이상한지 은우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아가를 부르러 입을 벌리는 은우의 입이 순식간에 침범한 뜨겁고 단단한 불덩이에 막혀버렸다.
차형욱의 한 손은 은우의 뒷목을 강하게 잡아 끌어당기며 다른 손은 순간 가느다란 은우의 허리를 바싹 조였다.
“아읍! 하, 하아, 하. 핫으, 읍.”
그 와중에도 은우의 얼굴을 겉옷으로 감싸 가리는 가느다란 이성을 보여준 차형욱이었다.
하지만 질척거리는 소리와 야하고 숨찬 신음들이 시각적인 효과보다 더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생방송 라이브로 진행되는 엄청난 키스신에 얼이 나간 좌중들이었다.
사랑스럽기만 하던 천사님이 복분자 한 잔에 시원하게 들이키시고, 엄청난 반전 매력으로 모두에게 크리티컬 쇼크를 선사해주셨다.
항상 차갑고 이성적인 큰 도련님을 단숨에 유혹에 빠지게 하는 마성의 페로몬에 황성파 식구들은 넋이 나갔다. 진정 무서운 절대 기술이었다.
쨍그렁.
손에 쥐고 있던 누군가의 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차형욱은 이성을 움켜쥐고 서서히 달콤한 입안에서 벗어났다.
길게 반짝이는 은실이 은우의 입술에 이어져 있는 심장 떨리는 모습에 차형욱이 붉은 혀를 내밀어 정리를 해주었다.
흐릿하게 떠진 하늘빛 나른한 눈매에 입술을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차형욱 아가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우가 고개를 들어 키스로 촉촉해진 입술을 다시 찾았다.
겨우 정신 차린 차형욱의 질긴 인내심은 다시금 금이 가고 있었다.
실낱같이 남아 있는 가는 이성이 은우의 야한 모습을 주변에 보이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 경고를 보냈다.
은우의 붉어진 얼굴을 옷으로 감싸고 있자, 어느덧 목덜미에 와 닿은 은우의 뜨거운 숨결과 촉촉한 혀가 예민해진 살을 훑어왔다.
차형욱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시 달콤한 동굴을 파고들 듯 가로질러 들어가 탐험을 시작했다.
미칠 듯 빠듯이 당겨오는 원초적 고통에 억지로 주먹을 움켜쥐며 살이 떨어지는 심정으로 힘겹게 은우에게 떨어졌다.
더 이상은 절대 무리였다.
뇌가 타는 듯한 뜨거움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거추장스러운 모든 걸 찢어 갈기고 미쳐 날뛰고 싶었다. 손톱이 단단한 손바닥에 박혀 들어가도 느끼지 못했다.
떨어지는 입술의 온기를 쫓아 다가오는 은우를 뜨거운 입술로 지그시 누르고 달래듯 가만히 있었다.
작은 사랑스러운 얼굴을 품속에 꼭꼭 숨기며 끊임없이 주변의 시선을 경계하고 차단한 것은 차형욱의 본능적 행동이었다.
아직 어리고, 그의 눈에는 부서질 듯 여리고, 목숨보다 소중한 은우다.
차형욱은 은우가 원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그를 지키리라 결심했었다.
그런 모든 각오가 고작 은우의 작은 몸짓에 땅속 깊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자신의 인내심의 한계를 심각하게 의심하는 차형욱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은우를 상처 입힐 수는 없다는 것이 은우 한정 팔불출 머슴다운 생각이었다.
은우의 입안에 조금 남아 있는 달콤한 복분자 맛에 상황 파악이 된 차형욱이었다.
생각할수록 자신에게는 아찔하고 무서운 은우의 술버릇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유혹적인 자태에 차형욱은 ‘은우 금주령’을 내려야겠다 결심 또 결심했다. 자신만 가끔 보고 싶은 건 솔직한 심정이었고.
처음 만난 시아버지 생신상에서 생생 라이브로 진행되는 큰 아드님과 며느님의 인상 깊은 19금 키스신이 드디어 끝났다.
그 장면의 여운에 얼굴 가득 수줍은 홍조를 띤, 남자들이 모두 한 곳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는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감히 컵을 떨어트려 흥을 깨버린 까만 피부의 모태솔로 ‘콜라’ 김영수 죄인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던 차형욱이 슬쩍 옷을 들춰보자, 어느덧 규칙적인 작은 숨소리를 내쉬는 자신의 천사가 잠들어 있었다.
은우의 치명적인 유혹에 기쁘면서도 두려웠던 차형욱은, 아쉬움이 묻어 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은우를 안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보디가드 박동수가 엉겁결에 일어나 문을 열어주며 따라 나가자 다들 잃어버렸던 정신 줄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차현수 보스가 있다는 것도 잊고 자기들끼리 쑥덕이는 수다쟁이로 변해버린 황성파 남자 아줌마들이었다.
어머, 어머! 꺅, 하는 소녀답기 그지없어, 못 들어먹을 귀여운 감탄사도 큰 덩치들 사이에서 쉼 없이 튀어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카리스마를 보이며 분위기를 바꿀 차현수 보스도 큰아들과 며느리의 모습에 영혼이 빠져나가 앉아 있었다.
친근감 넘치는 정도훈도 이번만큼은 감당하기 힘든지 영혼이 빠져나가 있는 인물2로 상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엄청난 형수님을 모시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느꼈다. 조직의 권력이 이후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
안채 1층에 위치한 문을 열자, 10년 전 차형욱이 쓰던 방 그대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차형욱은 거실을 지나 안쪽 미닫이문을 열자 보이는 커다란 침대 위에 은우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을 감싸는 가느다란 팔만 아니라면 분명 조용히 나가려는 계획이었다. 어느 틈에 깨어났는지, 반쯤 감긴 흐려진 하늘색 눈동자가 차형욱을 응시하고 있었다.
탐스러운 입술이 살며시 벌어져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해냈다. 가까이에서 직격탄을 맞은 차형욱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침대 위에서 자신의 목을 껴안고 있는 하얀 팔목은 세상 어떤 것보다 단단한 무기가 되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촉촉한 입술이 거리낌 없이 차형욱의 입술 위로 다가왔다. 꼼짝도 안 하고 그대로 멈춰선 차형욱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갔다.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고, 겹쳐진 작은 입술이 잡아먹듯이 삼켜졌다. 짙은 검은 속눈썹 사이로 흐려진 까만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정장 재킷이 침대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뜨겁고 단단한 혀가 미끄러지듯 좁은 입안으로 사라졌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수줍은 혀를 한 번에 찾아 휘감고 당겼다.
고른 치아를 하나하나 더듬던 열기가 입천장을 훑고 지나갔다.
하아, 일부러 비워둔 틈을 비집고 은우가 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막혀버린 입술 틈으로 뜨거운 열기가 요동쳤다.
거칠게 휘감긴 다디단 혀를 잘게 씹으며, 여린 입안을 거침없이 유린했다. 열기를 참지 못하고 살짝 들썩이는 허리가 단단한 팔에 휘감겼다.
하얀 티셔츠 사이로 매끄러운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순간 새카만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 위로 올라간 하얀 티셔츠가 바닥에 뒹굴었다.
“은우.”
들릴 듯 말 듯 한 낮고 간절한 음성이 침실을 울렸다. 벗겨진 상의 때문에 온기를 찾는 몸짓이 차형욱을 잡았다.
커다란 손바닥에 티끌하나 없이 매끄러운 등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뜨겁게 부딪친 입술을 돌려 귀여운 귓불을 입에 넣고 굴렸다.
목에 감겨 있는 가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당겨진 차형욱의 입술이 하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강한 미약 같은 체향을 가득 들이마신 차형욱은 보이는 하얀 살결을 통째로 물어뜯고 싶은 욕구를 겨우 밀어냈다. 그의 중심에 강한 고통이 밀려왔다.
“크윽!”
흥분된 숨을 참아보려던 차형욱의 눈앞에 옅은 분홍빛 과실을 향기를 토해내며 그를 유혹했다. 목이 바싹 갈라져 타는 듯 갈증이 났다.
멈춰야 한다는 실낱같은 이성이 흐려지고, 짐승이 날뛰었다. 입안에 들어온 달콤한 열매에 취해 정말 어린 아가처럼 쉼 없이 빨아들였다.
그의 욕망에 선명한 붉은빛으로 피어난 열매가 그를 옭아맸다.
조금만 맛을 보려던 그의 눈빛이 완전히 이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하얀 몸을 품 안에 끌어안은 차형욱은 자신의 중심을 강하게 밀착하고 몸을 움직였다. 지퍼가 열린 청바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동그랗고 폭신한 엉덩이를 양손에 붙잡고 서로의 몸이 비벼졌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잔뜩 흥분한 뜨거운 중심이 느껴졌다.
브리프를 뚫고 나올 듯이 서 있는 딱딱한 중심이 답답함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탐스러운 언덕을 움켜쥐어보았다.
하아, 하아.
허리를 휘며, 하늘색 눈동자를 가늘게 뜬 그의 심장이 숨을 쉬는 것만으로 그는 자극되었다. 붉게 상기된 하얀 뺨에 차형욱의 입술이 닿았다.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들의 거친 숨소리만 세상에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언제 벗었는지 침대 바닥에 뒹구는 검은 정장 바지가 재킷 위에 겹쳐져 있었다.
단추가 풀어진 와이셔츠와 검정 브리프만 걸친 차형욱의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모조리 찢어버리고 싶은 구속물을 몸에 감고 끝까지 버텨냈다.
점점 빠르게 몸을 마찰하던 차형욱이 떨어졌던 촉촉한 입술을 다시 찾아 단단한 혀를 밀어 넣었다.
“크윽!”
마치 실제 행위를 하듯이 움직이던 전신 근육이 격렬하게 진동을 하며 멈춰 섰다. 강하게 은우를 옥죄였던 차형욱의 몸에서 힘이 빠지자, 하늘색 눈동자가 완전히 눈을 감았다.
거친 숨소리를 고르며 차형욱이 부드럽게 작은 입술을 여러 번 붙였다 떼어냈다. 땀에 젖은 은빛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다.”
참지 못했다. 은우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참기 힘든 유혹에 그를 빠트렸다. 짧은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자 차형욱의 눈동자에 죄책감이 스쳤다.
갈수록 짙어지는 갈망과 갈증이 술에 취한 소중한 사람을 하마터면 상처 입힐 뻔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지켜주겠다. 미안하다.
그의 심장의 무게는 본능을 뛰어넘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준비될 때까지 그가 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다려야 했다.
자신의 뒤처리를 마치고 옷을 입은 차형욱이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깊게 잠든 은우의 곁에 앉아 한참동안 은빛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한옥 스타일 문의 입구에 조용히 서 있는 박동수에게 거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은우가 깨어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아버지 차현수를 위한 연회장에 다시 걸음을 옮기는 차형욱이었다.
은우가 저녁 연회 끝나기 전에 깨어날 거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일찍 일어나 낯선 곳에 당황해 자신을 찾을까 박동수를 대기시킨 것이었다.
차현수 보스의 장남으로 손님 접대를 위해 얼굴을 비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무표정한 평소 얼굴로 돌아간 차형욱은 연회장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눈을 비비며 아직 졸린 눈을 억지로 떴다. 낯선 색깔의 나무 천장이 눈에 딱 보이자 은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분명 밥을 먹고 있었는데, 눈을 굴리며 생각해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방 안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아가?”
작게 차형욱을 부르며 고개를 휙휙 돌리던 은우의 귀에 희미한 새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엎드려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리니 작은 테이블 구석에 단추 모양의 동그라미들이 보였다.
첫 번째 큰 단추는 돌리자 방 안이 환하게 불이 켜졌다. 좌우로 돌리자 점점 더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빛이 신기했다. 마지막 단추도 눌러보았다.
지잉.
소리가 나면서 벽이 옆으로 쭉 열리기 시작했다.
환하게 열린 벽 너머 보이는 건 푸른 잔디가 있는 정원이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푸드덕 하늘로 날아갔다.
작은 감탄사를 터트리며 은우가 맨발로 폭신한 잔디를 밟았다. 조금 걷자 구석에 작은 연못이 보였다.
얼른 뛰어가 자리에 앉아 손을 담그고,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와 같이 헤엄을 치듯 손을 움직이며 놀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주변과 쌀쌀한 공기로 인해 코끝이 약간 빨개진 은우다. 요기조기 손을 피해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랑 노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다.
골든리트리버로 보이는 금색 뭉치가 코를 킁킁거리며 은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 안녕?”
작게 인사를 건네며 손을 내미는 은우를 보고 신이 난 골든 리트리버는 촉촉이 젖은 은우의 손을 거친 혀로 빠르게 닦아 올렸다.
하늘로 치켜 올라간 복실한 꼬리를 빠르게 흔들고 엉덩이를 뒤로 빼며 몸을 낮춘 후 좌우로 경쾌하게 움직이는 ‘반가워 죽겠어’라는 동작이었다.
격하게 자신을 환영하는 순한 모습에 은우의 입도 살며시 올라갔다. 한참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배를 하늘로 드러내며 ‘날 쓰다듬어.’라는 행동을 취했다.
작은 손을 내밀어 열심히 배를 긁어주는 서비스 좋은 은우에게 더욱 친근하게 구는 금색 뭉치였다.
뾰족한 이빨이 보이는 웃는 얼굴로 같이 놀자며 은우를 온몸으로 덮치는 금색 뭉치와 한참을 같이 뒹굴며 놀았다.
긴 혀를 빼고 헉헉거리며 겨우 진정한 금색 뭉치와 머리에 풀과 나무 잎사귀를 군데군데 붙인 은우가 같이 누워 해맑게 웃었다.
“어라, 어라, 어라. 이게 누구야? 여기 이런 게 다 숨어 있었네?”
벌떡 일어나 귀를 움직이며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금색 뭉치였다. 은우도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쳐다봤다.
코를 자극하는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큰 그림자에 은우가 물음표를 얼굴에 그리며 올려다보았다.
은우의 얼굴을 마주한 남자가 감탄하며 다가왔다.
“크핫! 죽이네. 이런 보물을 여기서 줍다니…… 재수 좋은데?”
전체적으로 준수한 편인 남자는 유독 얇은 입술의 한쪽만 삐뚤게 올라가 야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눈에 가득 욕정을 담고, 멀뚱멀뚱하게 그를 쳐다보고 앉아 있는 은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정신이라면 황성파에 방문해 소란을 피우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미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환상적인 미모를 접하자 본래의 더러운 속성이 피어오른 것이었다.
“악! 이 미친 개새끼가!”
은우에게 다가오는 손을 순식간에 물어뜯은 금색 뭉치의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겨우 이빨을 떨친 남자가 발을 들어 올려 금색 뭉치를 차려고 했다.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하지 마! 아파!”
“뭐? 넌 내가 이따 예뻐해줄 테니 보채지 마. 망할 개새끼 넌 꼭 죽여버릴 테다!”
딱 봐도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비틀거리는 남자가 으름장을 놓았다.
으르렁거리며 경계하는 금색 뭉치를 차지 못하고 헛발질을 했다.
다급한 상황에 은우는 눈에 띈 돌멩이를 오른손에 쥐고, 긴 나뭇가지를 왼손에 쥐었다. 새로 사귄 친구를 서로 보호하려는 은우와 금색 뭉치였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던지 낄낄거리는 남자는 욕설을 뱉어내며 금색 뭉치에게 다가갔다.
눈에 힘을 준 은우가 손에 쥔 큰 돌멩이로 어떻게든 남자를 막아보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마구잡이로 휘두른 남자의 다리에 채인 금색 뭉치가 깽, 하고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가 손에 힘을 주고 남자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돌이 등에 맞자 뒤를 돌아본 남자와 그동안 다행히 뒤쪽으로 몸을 빼낸 잽싼 금색 뭉치였다.
개를 쫓던 걸 포기하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은우에게 다가오는 남자였다.
“오호, 너부터 천당 구경시켜달라고? 그렇게 급해? 그래, 그러지 뭐. 낄낄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기분 나쁜 남자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새로 사귄 금색 뭉치를 구해내기 위해 애쓰던 은우는 비틀거리는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작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아까 던진 돌 대신 움켜쥔 다른 돌을 휙 던지자, 몸에 닿지도 못하고 남자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걸 보자 또다시 낄낄거리는 남자였다.
그 순간 은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뒤로 피했던 금색 뭉치가 바람같이 뛰어와 은우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종아리를 물고 늘어졌다.
비틀비틀 흔들리던 남자는 물린 한쪽 다리를 들고 크게 몸을 휘청거리더니 아까 은우가 던진 돌멩이를 한쪽 다리로만 밟았다가 제풀에 혼자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은우는 입을 작게 벌리고 아직도 남자의 종아리를 물고 있는 금색 뭉치를 불렀다.
“먹는 거 아니야. 먹지 마.”
뒤로 물러선 은우와 금색 뭉치가 함께 남자를 경계했다. 충격이 컸던지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남자가 낮은 욕설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짧은 신음이 은우의 입을 타고 나올 만큼, 남자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재수 없게 잔디가 아닌 돌멩이가 있던 곳에 얼굴로 넘어졌는지, 몰골이 엉망이었다. 옆으로 휘어진 콧날과 양 콧구멍에서 선명한 붉은 코피가 줄줄 흘러나와 얼굴을 지나 턱까지 흐르고 있었다.
눈빛마저 아까와는 달리 살기를 띠고 있어 으스스했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어!”
엄청난 분노와 통증에 술이 좀 깬 듯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핏줄이 서 있었다.
아까 금색 뭉치에게 물려서 부어오른 손과 피가 떨어지는 얼굴은 사람 꼴이 아니었다. 제대로 물린 다리에 인해 절뚝거리면서 남자가 좀비처럼 걸어왔다.
은우는 금색 뭉치를 꼭 끌어안고 슬슬 뒤로 피했다. 위치도 정원의 구석 그것도 연못이 바로 뒤에 있어,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 남자가 은우에게 손을 뻗는 동시에, 갑자기 공중에 떠올라 연못으로 사라졌다.
“은우 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박동수는 여기저기 풀과 흙에 뒹군 듯 꾀죄죄한 모습으로 금색 뭉치를 안고 웅크린 은우를 일으켜 세웠다.
옷을 털어주며 다급하게 다친 곳을 살폈다. 30분에 한 번씩 은우가 잠든 방을 열어 확인하던 박동수가 은우의 부재를 발견했다.
은우가 열어놓은 뒷문을 따라 은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은우를 부재를 눈치챈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박동수는 지옥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혹여 무슨 일이 있을까 미친 듯이 뛰어다닌 박동수의 이마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이 번들거렸다.
더구나 겨우 발견한 은우에게 술 냄새가 풍기는 남자가 살벌하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생각할 틈도 없이 날려 차기로 처리한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죽었다.”
“네에?”
죽음을 확신하는 은우의 시선을 따라보자, 고작 무릎까지 닿는 옅은 물에 상체만 잠긴 남자가 움직이지 않고 떠 있었다. 그제야 박동수가 쓰러진 남자를 발로 차 뒤집어 얼굴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
분명 등 뒤를 한 번 찬 기억밖에 없는데…….
부러졌는지 휘어진 콧날이 보이지 않게 부어 있었고, 쌍코피까지 흘리는 처참한 얼굴이었다. 기절해서 물에 잠겨 있는 남자를 보니 화를 내는 것도 잊었다.
“레온! 레온아!”
은우 옆에 있던 금색 뭉치가 꼬리를 빠르게 흔들며 귀를 쫑긋거렸다.
왈왈.
대답을 하듯 크게 짖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를 향해 뛰어가 앞발을 들어 올리고 혀로 얼굴을 핥으며 ‘난 네가 정말 반가워.’ 인사하는 금색 뭉치다.
박동수의 시선에 예리해지며 그쪽을 보았다. 깔끔한 교복을 입은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의 남학생이 레온이라고 이름이 밝혀진 금색 뭉치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혹시, 차민석 도련님 아니십니까?”
박동수는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채고 인사를 건넸다. 본가에서 둘째 도련님을 어릴 적부터 몇 번 본 기억이 있기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차현수 보스보다는 어머니를 닮은 섬세한 얼굴의 꽃미남 스타일의 고등학생이었다. 인상도 선하고 유한 분위기였다. 자신이 모시는 사나운 차형욱 회장과는 전혀 다르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박동수다.
유명 사립 고등학교 3학년으로 학생회장도 맡고 있다고 들었다. 학교 때문에 점심 연회는 참석 못 한 둘째 차민석이었다.
몸이 약하신 데다 오늘은 특히 몸살로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러다 별채에 있는 레온이 없어진 것을 보고 찾는 중이었다.
박동수가 혹시 몰라 뒤로 보내 가리고 있던 은우가 고개를 내밀자, 차민석은 놀라 커진 눈으로 은우를 빤히 쳐다봤다.
둘째 도련님 차민석과 은우가 서로 멀뚱하게 보고만 있자, 박동수가 둘을 인사시켰다.
“은우 님, 이쪽은 차형욱 회장님 동생인 차민석 도련님이세요. 도련님 이분은 형수님 될 분이세요.”
“어? 형수?”
은우에 대한 소개를 듣고 차민석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반문했다.
박동수가 다시 차형욱 도련님이 모시고 온 분으로 점심때, 큰 며느님이 될 사람이라 차현수 보스가 공식적으로 소개했단 말도 꺼냈다.
“은우!”
멀리서 들리는 익숙한 음성에 은우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갔다.
덥석 안기는 은우의 몸에 여기저기 흙과 풀들을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차형욱이 은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펴보며 빠르게 물었다.
“은우. 왜? 혹시 어디 다쳤나?”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안기려는 은우를 최대한 엄한 표정으로 저지하며 차형욱이 말을 이었다.
“은. 우! 이렇게 말도 안하고 혼자 돌아다니면 돼, 안 돼?”
“……안 돼?”
“당연하다. 다들 걱정하잖아. 또, 그럴 건가?”
“아니.”
기껏 엄한 표정으로 고작 질문 2개하고 어화둥둥 은우를 꼭 안는 팔불출 차형욱 회장을 보고 박동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우 님을 다시 살피며 수긍하고 말았다. 자신이라도 은우 님을 혼내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처음 엄한 표정을 지은 차형욱 회장이 자신보다는 대단하다고 느꼈다.
다시 안아주는 차형욱 회장님 품에서 고개를 푹 넣고 웃는 저 사랑스러운 은우 님을 보라!
어떻게 화를 내고, 누가 엄하게 하겠는가? 자신은 절대 못 한다.
다정하게 엉킨 머리를 정리해주고, 흙을 털어주는 차형욱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의 배다른 남동생이 놀란 눈으로 자신과 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외모는 안 닮아도, 요런 모습은 은근히 닮은 형제에 박동수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좀 전에, 키우던 강아지를 찾던 차민석 도련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차형욱은 시선을 돌려 은우의 옷을 다시 정리해주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견한 차형욱이 입을 열었다.
“저건 뭐지?”
양어깨가 들썩이게 놀란 은우가 얼른 그쪽으로 뛰어가더니 차형욱에게 보이지 않도록 자신이 남자를 가렸다.
자신의 품을 벗어나 다른 남자에게, 차형욱의 눈에는 달려간 걸로 보이는 은우의 행동에 눈썹을 크게 꿈틀거리는 차형욱이었다.
폭발 직전인 차형욱 회장의 상태를 짐작한 박동수가 서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신이 은우를 발견 당시 술에 취한 저 남자가 은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고 했다.
차갑게 얼굴을 굳힌 차형욱은 위험한 남자 근처에 서 있는 은우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아가, 오지 마.”
모르는 남자를 자신에게서 보호하려고 막아서는 은우에게 차형욱이 충격을 받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표정을 순식간에 굳히고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은 차형욱에게, 은우가 양팔을 크게 퍼덕이며 외쳤다.
“죽었어! 아가 오지 마.”
“네에?”
“헉!”
“……!”
깜짝 놀란 박동수가 반문하고, 차민석도 당황했다. 차형욱까지 흠칫 놀라 눈이 커지자, 은우가 눈꼬리를 내리며 땅바닥을 바라봤다.
너무 황당한 사건 전개를 따라가지 못하고 당황한 3인의 남자와 고개 숙인 은우의 침묵이 이어졌다.
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리자 3인의 남자의 시선이 은우 뒤로 모였다. 그 시선에 은우도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죽은(?) 남자를 쳐다봤다. 꿈틀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에 은우가 눈꼬리를 다시 올리며 밝게 말했다.
“아가, 안 죽었다. 이리 와.”
신비로운 천사 외모의 여린 형수라고 여겼던 차민석의 환상이 와그작 깨졌다.
어째서 은우가 자신의 잔인한 이복형의 연인인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저 해맑은 얼굴을 가진 처음 본 자신의 형수가 두려운 차민석이었다.
은우 천사님의 새로운 모습에 경악한 박동수는 차형욱이 회장 놈, 아니 회장님의 옆에서 물들었다며 좌절했다.
차형욱이야 은우가 저놈을 죽였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이리 오라도 은우의 명령에 냉큼 다가온 충성스런 차형욱은 모르는 남자의 곁에서 은우를 떼어내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인 남자는 경비에게 끌려갔고, 감히 큰 며느님에게 무례했다는 이야기에 길길이 날뛰는 차현수 보스가 친히 감옥을 방문했다.
망가진 남자의 얼굴을 보고 차현수는 과연 차씨 집안 맏며느리 감이라 크게 기뻐했다는 뒷이야기다.
문재준 비서실장이 건네준 초콜릿이 콕콕 박힌 자신의 얼굴만 한 크기의 쿠키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창밖을 구경하는 은우다.
변함없이 차형욱 회장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일하다 피곤하면 가끔 쿠키를 먹는 은우를 바라보며 자체 피로회복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이들의 일상이었다.
“우와. 눈.”
작게 터진 탄성에 창밖을 보자, 하얀 눈이 하늘에서 천천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첫눈! 올해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유리창에 바싹 얼굴을 붙이고 있는 은우가 귀여운 차형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우의 허리와 어깨를 감싸 뒤에서 안으며 물었다.
“은우, 눈이 와서 좋나?”
“응, 예뻐!”
“은우가 더 예뻐.”
“아가, 더, 더 예뻐.”
엄청난 느끼느끼 멘트를 날리는 차형욱 회장과 은우 주변에 속이 뒤집힐 피해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둘만 있는 회장실에 핑크빛이 감돌았다.
은우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자 드러나는 하얀 목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간 차형욱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우가 훨씬 예쁘다고.
목에 닿는 느낌이 간지러운지 몸을 작게 흔들며 고개를 뒤로 돌려 웃는 은우다.
하얗고 말랑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웃고 있는 눈가에도 입술을 붙였다. 부드러운 은우를 꼭 끌어안고 볼을 비비는 차형욱이었다.
요즘 따라 부쩍 애교가 늘어난 차형욱 회장은 때마침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들어오던 문재준 비서실장의 눈에 정면으로 테러를 선사했다.
“흠, 회장님, 점심 준비되었습니다.”
오늘도 사이좋게 도시락을 나눠 먹고 아까부터 창밖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은우를 데리고 옥상으로 나갔다. 옥상은 헬기장과 작은 정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데, 이미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신이 난 은우가 하얀 눈밭을 사뿐사뿐 걸으며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환하게 웃으며 아가를 부르자, 차형욱 역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은우를 바라보며 작게 대답해 주었다. 둘만의 로맨틱한 분위기는 얼마 전부터 걸려오기 시작한 전화로 깨져버렸다.
Rrrr, Rrrr.
“여보세요. 흠, 나다. 은우 옆에 있느냐?”
이마에 빠지직 힘줄이 드러난 차형욱이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아빠야?”
자신을 바라보는 차형욱의 시선을 느낀 은우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와 휴대전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바꿔준 차형욱이었다.
전화를 받은 은우는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오늘 점심에 뭘 먹었는지 맛있었는지 어쩐지 꼬박꼬박 대답했다. 바이바이 손 인사까지 보이지도 않는 전화에 해대며 한참 만에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차현수가 생신잔치 이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은우를 찾는 통에 노이로제에 걸린 차형욱이었다. 급격하게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깨버린 휴대전화를 화형이라도 시키듯 노려보는 차형욱의 불타는 시선이었다.
날씬한 나신에 땀이 흘렀다.
또르르 흐르는 땀방울이 유연하게 휘어진 허리를 타고 밑으로 떨어졌다. 건장한 사내의 중심에 매달려 바쁘게 입을 움직이던 남자는 드디어 입안에 넘치는 진득한 액체를 삼켰다.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칠한 숨을 내쉬던 사내가 남자를 뒤로 밀쳤다.
밑에 깔린 남자의 갈색빛 작은 돌기를 입에 문 사내가 강하게 빨아 당겼다.
혀에 넣고 굴리다가 잇새로 지근거리자, 부풀어 오른 돌기가 꼿꼿하게 섰다. 기다란 손가락이 예민해진 곳을 배려 없이 꼬집자 신경질적인 비명이 들렸다.
“악! 아프잖아. 살살 하란 말이야!”
“이렇게 섰는데, 무슨 소리야? 좋으면서 내숭은. 큭!”
사내의 손이 아까부터 딱딱하게 흥분해 있는 상대의 중심을 잡고 놀리듯 입을 열었다. 몇 번 단단한 중심을 빠르게 흔들어 주던 사내가 얇은 허리를 꽉 움켜쥐고 뒤로 돌렸다.
밑에 있던 몸이 침대에 엎드리자, 드러난 비밀스러운 곳에 투명한 젤을 쏟아 부었다. 굵은 손가락 두 개가 작은 구멍을 파고들어 성의 없이 휘저었다.
아직 뻑뻑한 곳이지만, 다급한 표정의 남자가 자신의 중심을 가져가 성급하게 밀어 넣었다.
“아악!”
웬만한 사람이면 피를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남자는 무리 없이 낯선 침입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하는 곳을 차지한 중심은 금방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킨 밑에 있는 남자가 몸의 방향을 슬쩍 틀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사내를 유도하며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여갔다.
빠져나갔다가 순간적으로 다시 파고들어 오는 묵직한 중심에 밑에선 어김없이 신음이 터졌다.
천천히 박자를 맞추듯 능숙하게 움직이던 얇은 허리가 어느 순간 엇박자로 제멋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음조차 토해내지 못하고 벌어진 남자의 입에서는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나왔다.
침대 헤드에 머리가 닿도록 엎드려 앞뒤로 흔들리던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사내의 위에 스스로 올라타, 몸속에 중심을 밀어 넣고 입술을 찾아 달라붙었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잠깐 멈추었던 흔들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타액을 교환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숙였던 허리가 펴지며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됐다.
밑에 누운 사내의 큰 손이 마른 허벅지 살을 움켜쥐고 공중에 뜬 허리를 빠르게 쳐올렸다. 올라갔던 몸은 다시 빠르게 밑으로 내려오며 찰박찰박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쇄골을 타고 내려와 밑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땀으로 번들거리며 엉켜 있던 두 나신이 미친듯한 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에 있던 허리가 뒤로 꺾일 듯 넘어가며 온몸에 경련과 고함을 토해냈다.
“아앙…… 아앙…… 아, 악!”
“헉! 으윽!”
열기가 넘치던 침대는 어느덧 노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담배 향기가 퍼지며 비릿한 향과 섞여 들어갔다. 엎드려 누운 마른 몸을 가진 남자가 팔꿈치로 얼굴을 받치며 담배를 입에 물고 하얀 연기를 토해냈다.
“역시 죽여준다니까. 너 좋아 죽던데? 오래 굶었나 봐? 큭큭! 이렇게 속궁합이 잘 맞는 커플은 다시없을 걸?”
열심히 헬스장에서 단련한 팔로 엎드려 있는 남자의 얇은 허리를 끈적이게 만지작거렸다. 점점 노골적으로 신호를 주며 밑으로 손을 내렸다.
찰싹.
앙칼지게 쳐내는 손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사내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랜만인데, 한 판 더 하지. 튕기기는, 큭큭. 그게 매력인가?”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자료는 언제 가져올 수 있어?”
“쳇! 차형욱 회장이 눈치가 보통이라야 말이지. 극비 문서라 쉽지 않아. 다행히 멍청한 쥐새끼 놈이 한 마리가 있어서 생각보다 쉽겠어……. 아무튼 조만간 내 손에 들어오지 않겠어? 일부는 이미 들어왔잖아. 나한테 힘을 더 불어넣어주면 날짜가 빨라질 것 같기도 한데…….”
은근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사내가 옆에 있는 남자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슬슬 힘을 줘 자신의 중심 쪽으로 잡아 내렸다.
그 순간 확연히 드러난 짜증을 숨기며 밑에 있는 남자가 얼굴을 들어 올리고 요염하게 눈을 마주쳤다.
잠시 후 실내에는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세운그룹 사장실.
큰 테이블이 놓인 아이보리 소파에 기대앉은 남자가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노크 소리도 없이 들어온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맞은편 소파에 풀썩 앉았다.
“자료는?”
“뭐야? 지금 그딴 자료 때문에 내가 그 자식 비위 맞추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보자마자 자료 타령이야?”
구김 하나 없는 깔끔한 클래식 회색 정장을 입은 세운 그룹의 장남 김진혁이 입술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복수다 뭐다 하면서, 네가 하겠다고 달라붙더니 고작 그게 다였나?”
“아니, 이제 거의 다 됐어! 내가 차형욱 새끼 꼭 후회하게 할 거라고.”
“전에는 돈 때문에 하는 척만 하더니…… 꽤 적극적으로 덤비는 건 좋지만, 성과 없이는 곤란해.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이 이미 받아간 돈이 얼마인지는 알지?”
“웃기지 마! 형이 전에 훔친 YJ 그룹 자료 쓸모없었던 거 내가 몰랐을 꺼 같아? 그때 쓴 돈이 얼만데…… 이번엔 확실해. 돈이나 빨리 준비해! 돈 안 건네면 자료 줄 놈 절대 아니야! 보기와는 달리 영악해. 변태새끼가!”
와인 빛 광택이 나는 몸에 쫙 달라붙는 명품 캐주얼 정장을 걸친 김진영이 분홍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감히 자신을 무시한 차형욱 회장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눈에 담은 사람이었다.
유난히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처음부터 확신했다. 철저히 고독한 늑대 같은 모습과 사나운 눈빛이 자신에게 구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쓰레기 더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혼자서 벗어나려 하는 그에게 배신감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기에 참을 수 있었다.
저번에 마주친 그의 시선에 담긴 것은 같잖은 사랑임이 확실했다. 자신이 부숴버려야 할 사랑이라는 것을.
반드시 조각조각 부숴버릴 것이다. 나처럼 너도.
김진혁의 눈이 생각에 빠진 김진영을 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은 배다른 반쪽짜리 동생은 집착이 가득한 눈동자로 몸을 굴러가며 복수를 꿈꾸고 있다.
진한 화장을 한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여자의 손에 붙들려 집 안에 들어온 꼬마 아이는 집안을 뒤집어 놓았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로 시집을 왔던 어머니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순진한 눈으로 집에 들어왔던 꼬마는 보이지 않은 무시와 학대를 받으며 천천히 망가져 갔다. 천한 여자에게 태어났다며 집안에서 단 한 번도 가족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칭찬과 관심에 굶주려 발악하는 모습이 불쌍한지 생물학적 아버지는 그래도 사고를 치면 돈으로 처리는 해주었다.
아니 사실 아버지의 비서가 조용히 처리할 뿐, 자신의 아버지는 자식 중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밖에서 데리고 온 자식이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나마 철저한 유전자 검사 끝에 핏줄이라 밝혀지자 호적에 넣어 주었다. 비서를 통해 용돈을 통장에 넣어 주는 일을 할 뿐이었다.
김진혁은 기억했다.
김진영이 중학생 무렵 자신이 모임에 데려온 차형욱을 보고 빛내던 눈빛을.
멍청한 놈!
냉정하고, 차가운 차형욱은 절대 김진영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아이의 눈이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던져 진흙탕에 굴러서까지 가지려고 드는 저 진득한 애정은 이미 애정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전에 차형욱의 회장실에 몰래 들어가서 마주친 사람을 대하는 차형욱의 모습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차형욱이 강한 수컷의 향을 풍기며 자신의 것을 지키려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견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반쪽짜리 동생이 저렇게 난리를 치며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 건.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지 결코 말릴 이유가 없기에 그냥 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