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여기서 다시 뵙네요
“은우야, 이것도 먹어보자. 아.”
“아.”
귀엽게 입을 벌려 꽃 모양 약과를 덥석 베어 물고 눈을 가늘게 휘고 웃는 은우를 보고, 국보 121호 하회탈을 얼굴 전체에 뒤집어쓴 거 같은 차현수 보스다.
며칠 전부터 은우 얼굴이 아른거려 아들놈을 살살 구슬리고 갖은 협박을 동원해 오늘은 본가에 데려다 놓고 그놈만 출근하라고 했다.
어차피 자기는 일하면서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구는지 요즘 들어 예쁜 구석 없어진 도둑놈 같은 아들놈이었다.
그놈 일하는 동안 은우도 본가에서 이렇게 아빠랑 오순도순 놀면 심심하지도 않고, 얼마나 좋겠는가?
애교도 없는 놈이 자기가 효도를 못 할 거면 늘그막에 얻은 귀여운 며느리 덕 좀 보겠다는데, 이렇게나 방해를 할 줄이야.
그래도 유독 예뻐한 큰 아들놈이 제 짝을 고르는 눈은 제법 쓸만했다.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를 잘도 골라왔기에 요즘 매일 은우랑 통화도 하고 가끔이지만, 얼굴도 보는 재미에 폭 빠진 차현수 보스였다.
“아빠, 아.”
속으로 열심히 큰아들 차형욱에게 투덜거리던 차현수 보스가 굳었던 얼굴을 다시 활짝 펴며 앙증맞게 내밀어진 노랑 약과를 입에 쏙 넣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며느리 은우의 머리도 자동으로 쓰다듬어줬다. 이른 아침 차현수 보스의 명으로, 정도훈이 은우를 본가로 데리고 왔다.
옆에 앉아 같이 약과를 먹던 그가 아까부터 몸을 비비 꼬며 팔불출 모습을 선보이는 차현수 보스의 모습에 유전자가 무서우니 어쩌니 하면서 혼잣말을 해대고 있었다.
은우가 보고 싶다며 자신을 달달 볶는 차현수 보스에게 매일 시달리다가 결국, 차형욱이 설득 작전까지 같이 동원되었다.
그 바람에 살벌한 눈빛에 난도질당할 뻔한 정도훈이었다. 자신을 챙겨줄 수 있는 따뜻한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요즘이었다. 옆구리 제대로 시려 주시는 정도훈이었다.
그나마 차현수 보스가 찔러주는 든든한 용돈만이 유일하게 시린 가슴을 녹여주는 작은 불꽃이었다.
은우가 좋아하는 음식 시리즈 맞춤 밥상을 점심으로 차려놓고, 이곳이 좋으냐 차형욱이 집이 좋으냐, 빨강 망토 꾀는 늑대로 변신해 보이지 않는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은우를 꾀기 한참인 차현수 보스였다.
은우가 요즘 좋아하는 달콤하게 양념이 된 궁중 떡볶이를 입가에 요리조리 흔들며 여기가 더 좋다는 대답을 유도하는 치밀한 차현수 보스였다.
여기서 계속 살고 싶지 않으냐고 살살 꾀는 차현수 보스의 물음에 궁중 떡볶이를 받아먹은 은우가 여기가 좋단다.
그럼 차형욱이 빼고 여기서 같이 살자는 말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가도 같이 살겠다는 은우다.
저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차현수 보스의 실망할 모습을 미리 비웃던 정도훈의 기대는 곧 무참히 깨졌다.
과연 황성파 큰며느리다운 의리가 있다는 둥, 지조가 있다는 둥, 장한 며느리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차현수 보스의 또 다른 레벨로 진화된 팔불출을 목격했다.
정도훈은 귀를 막고 닭다리를 집어 들고 전투적으로 뜯었다.
오후에 손님이 찾아온 차현수 보스를 빼고, 정원에 나와 산책을 했다.
정원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 앉아 정도훈은 따듯한 녹차를 마셨다. 밝은 파랑에 가장자리 둘레에만 노랑 줄이 들어간 방울 모자를 쓴 은우와 금색 뭉치 레온이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놀이터에 아이 데리고 나온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는 정도훈이었다.
평화로운 그림 같은 장면에 정원 근처를 지나는 조직원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끔 손을 흔들어 주는 은우에게 황송해하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아까 정도훈이 가르쳐준 눈사람 만들기를 시도하는 은우다.
모자랑 세트인 파랑 벙어리장갑으로 열심히 눈을 조몰락거리며 뭉치고 그 눈 뭉치를 바닥에 놓고 굴리는 은우와 그 뒤를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꼬랑지를 바람 소리 나게 흔들며 쫓는 레온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수?”
평소보다 이른 하교를 한 교복 차림의 차민석이 고작 자기 또래로 보이는 은우를 보고 어색하게 형수라 칭했다. 그가 인사를 하자 반갑게 손을 살랑거리며 은우와 레온이 뛰어왔다.
“민석, 레온이랑 눈사람 만들자.”
“어…… 아, 아니.”
덥석 차민석의 한쪽 손을 쥐고 끌어당기며 신이 나서 눈사람을 굴리는 은우를 보고 엉겁결에 차민석도 눈사람의 몸통을 만드는데 동참했다.
둘이서 하니 금세 어린아이 크기의 눈사람이 만들어지고, 은우가 자신의 모자와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에 둘러주었다. 차민석은 그 모습을 보다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와 돌멩이로 눈, 코, 입과 팔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은우의 장갑을 가지 끝에 걸자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차민석의 손을 잡고, 만세 삼창을 부르며 정도훈에게 자랑하는 은우다.
“도훈, 도훈, 눈사람. 와! 눈사람.”
어깨를 하늘 높이 올려 으쓱거리는 은우를 본 정도훈이 오랜만에 파파라치에 변신해 사진을 찍어 천사 폴더에 저장했다.
“오! 은우 잘했다. 여기 봐봐, 내가 눈사람이랑 사진 찍어줄게. 하나, 둘, 셋.”
TV에서 봤는지, 요즘 사진을 찍는다면 언제나 하는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는 은우와 눈사람을 찍고, 차형욱에게 전송을 마친 정도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1시간에 몇 번씩 문자에 전화를 걸어오는 차형욱에게 귀한 사진 한 장 보냈으니, 그거 감상하느라 당분간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잠시 후, 정원으로 발걸음을 한 차현수 보스가 즐거워 보이는 은우와 둘째 아들 차민석을 바라보고 흐뭇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자가 차민석을 불렀다.
“민석아,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외삼촌.”
“매제, 저분이 혹시 큰며느님 감이라고 소개했던 분 맞으십니까?”
“자네는 처음 보겠구먼, 은우야, 이리 와봐라.”
넉살 좋게 차현수 보스를 매제이라고 부르며 차민석과 인사를 하고 은우를 소개받는 남자는, 차민석의 어머니 조희주의 오빠 되는 조상호다.
사업가인 조상호 사장은 여동생인 조희주와는 달리 활달한 성격이었다. 차현수 보스와 여동생이 혼인하지 않고 조카만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매제라고 부르며 자주 왕래했다.
물론 초기에는 혼인도 안 하고 애를 낳고 별채에 사는 여동생에 대해 불만을 비추곤 했다. 워낙 완강히 혼인을 거절하는 동생 조희주의 모습에 더는 언급할 수가 없었다.
오빠에게 순종적인 조희주가 유일하게 저항하는 부분이었다. 황성파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점도 조상호 사장의 입을 다물게 했다.
오늘도 몸이 원체 약한 여동생이 몇 달간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단 소식에 병문안 겸 중국 출장에서 오랜만에 돌아와 차현수 보스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은우는 자신을 부르는 아빠 차현수에게 쪼르르 달려가다 낯선 남자가 곁에 있자, 정도훈의 뒤에 몸을 숨겼다. 정도훈이 인사하라고 부드러운 재촉을 하자 입을 열었다.
“……안녕.”
오늘따라 유달리 부끄러워하며 작게 인사말만 하고, 정도훈의 뒤에 숨는 은우의 모습을 다들 귀엽게 바라보았다. 조상호 사장은 크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매제, 큰 며느님이 부끄러움이 많은가 봅니다. 아주 귀여운 며느님을 맞이하셨군요. 우리 민석이도 곧 고등학교 졸업이니, 빨리 색싯감을 데려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정도훈은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뒤에 숨기만 하는 은우가 이상했다.
고개를 뒤로 돌려 보려고 해도 얼굴을 꼭 숨기고 등 뒤에 달싹 붙은 새로운 은우의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매제, 이쪽은 제 수양딸입니다. 친딸같이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올해 귀국을 했습니다. 민경아, 먼저 인사 올려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조민경입니다. 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허허허, 그래, 조 사장이 자식이 없어 걱정했더니, 이렇게 미인 따님이 생겨서 정말 보기 좋군.”
차민석의 외삼촌 조상호 사장은 젊어서 한 번 이혼했다.
다시 재혼했지만, 별거 중이고 자식도 없어 조카인 차민석을 자식같이 여긴다고 늘 말했다.
차현수 보스는 비록 조희주와 결혼을 하거나 결혼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둘째 아들 차민석을 훌륭히 키운 조희주를 잘 돌봐주었다.
그 오빠인 조상호 사장에게도 사업상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자식이 없어 늘 외롭다고 하던 조상호가 이렇게 수양딸을 얻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차현수 보스였다.
수양딸 조민경도 23살의 미인상에 예의 바르고 똑똑해 보였다. 조민경도 고아로 자라 외로웠다고 했다. 둘은 정말 부녀처럼 사이가 좋아 보였다.
낮에는 일이 있어 저녁때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수양딸 조민경을 차현수 보스에게 소개해주는 자리였다.
“나는 재미없는 아들놈들만 둘 있는데, 조 사장은 예쁜 따님이 생겼구먼. 이젠 내가 조 사장을 부러워해야겠어.”
“제가 수양딸 삼아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민경이가 참하고 똑똑합니다. 이번에 차형욱 회장에게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며느님이 생겨서 깜짝 놀랐습니다.”
“은우 말인가? 허허허! 나도 몰랐네, 그놈이 오래간만에 효도했지. 혼자 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덜컥 임자를 만나서 데려왔으니 말일세.”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차현수 보스와 조상호 사장의 옆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조민경이었다. 조용히 앉아 비어 있는 찻잔에 얌전하게 차를 따랐다.
똑똑 드르륵.
짧은 노크 소리 후, 퇴근인사를 위해 아버지 차현수에게 들린, 차형욱 회장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아버지 차현수 옆에서 조상호가 웃으며 차형욱을 반겼다.
“오, 이게 누군가? 차형욱 회장 아닌가? 오랜만일세.”
자주 보지는 못 했지만,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익힌 조상호 사장이었다.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하는 그를 차형욱이 짧게 손을 잡고 인사했다.
아들이 눈을 살짝 돌리며 누구를 찾는 눈치에 차현수가 입을 열었다.
“은우는 잠이 들어서, 지금 네 방에 있다. 저녁은 먹였으니, 오늘 여기서 재우지 그러느냐?”
“아닙니다. 집으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짧게 혀를 차며, 아버지 차현수가 알았다고 신호를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형욱을 잡은 건, 아까부터 자리에 앉아 그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던 조민경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형욱 회장님, 조민경이라고 합니다.”
차형욱의 무심한 시선이 조민경을 스쳐 아버지 차현수에게 향했다. 조상호 사장이 웃으며 손을 올려 조민경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겼다.
“이쪽은 내가 수양딸로 삼은 조민경이네.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지. 예쁘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조민경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던 차형욱은 아버지 차현수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 짧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회장님, 요번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차분한 문재준 비서실장의 말에 이어 10여 명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이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요번에 YJ 그룹 외국어 특채로 해외 현지 면접과 외국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일부 직원들이 충원되었다.
문재준 비서실장의 소개에 따라 한 명, 한 명 소개를 받던 중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안쪽으로 말린 긴 단발머리에 세련된 베이지색 정장을 차려입고, 붉은 입술을 위로 끌어 올리며 차형욱 회장에게 아는 척을 하는 여자였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차형욱 회장님!”
조민경은 주위에서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매끄럽게 입술을 더 끌어 올렸다. 자신의 드라마틱한 등장에 깜짝 놀랄 차형욱 회장의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조민경을 쳐다보다 말없이 시선을 돌리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에 조민경의 올라간 입 끝이 흔들렸다.
고급스러움이 풍기는 검푸른 빛 정장에 옅은 하늘색 광택 나는 타이를 맨 차형욱 회장을 황홀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속에 조민경의 눈빛이 강하게 바뀌었다.
그가 가진 지위도, 외모도 정말 탐나는 사내였다. 차형욱 회장과의 인사가 끝나고 문재준 비서실장의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라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말이 끝나자, 손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네. 조민경 씨, 말씀해보세요.”
“저는 제가 배정받은 판촉부보다 회장님 비서로 일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문재준 비서실장의 허락하는 발언이 떨어지자, 조민경이 손을 내리고 차형욱 회장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문재준 비서실장은 당돌한 조민경의 말에 순간 차형욱 회장 쪽을 쳐다봤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의 모습에 자신이 대답했다.
“부서 이동을 원할 경우는 3개월 수습 기간 동안, 인사 담당자와 지금 조민경 씨가 배치된 부서 상사와의 상담을 통해 결정됩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전에 미국에서 입사지원서에 분명히 1순위로 회장 비서실을 지망했는데, 입사를 해보니 아쉽게도 2지망인 판촉 부서로 배치되었네요. 차형욱 회장님 밑에서 일하고 싶어요. 평소에 존경하기도 했고, 저도 친분이 조금 있고요. 또, 차형욱 회장님이라면 옆에서 일을 시작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 같네요. 제가 미국에서 비서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어요. 차형욱 회장님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웬만하면 회장 비서실에서 꼭 근무하고 싶어요.”
“아시다시피, 회장님 개인 비서 겸 보좌관의 업무는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회장 비서실 근무는 옆에 있는 마이클 장 씨가 이미 발령받았기에 다른 TO가 없는 상태입니다. 회장 비서실에 근무한다고 해도, 회장님께 직접 일을 배우기보다는 제 밑에서 일을 지시받게 됩니다.”
“혹시 제가 여성이기 때문인가요?”
차형욱 회장의 비서실에는 문재준 비서실장을 제외한 4명의 비서가 근무하고 있었다.
요번에 한 명이 해외 발령되면서 영국에서 온 신입사원 마이클 장이 새로 배치되었다. 회장님의 보좌관으로 비서실의 모든 업무를 꾸려 나가는 문재준이기에 이들 모두가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자신이 일부러 여성 비서를 배치하지 않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여성 비서를 뽑았었다. 미모와 지성을 지녀 자기애가 넘치는 몇 명이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차형욱 회장에게 펼치고 말았다. 그 후 옆에서 보기 살벌하게 내쳐지는 여비서들이었다.
몰래 사진 촬영, 개인 물건 훔치는 스토커형!
러브레터, 선물 공세 등의 물량공세형!
나체로 달려드는 저돌형!
마지막에는 약까지 먹고 죽겠다는 구걸형!
처치 곤란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자, 그럴 가능성 자체를 문재준 비서실장이 없애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남녀 차별적 발언을 할 수 없었던 문재준 비서실장은 모르는 척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당돌한 신입사원은 문제의 핵심을 뽑아 되물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혹시 자리가 나거나 마이클 장 씨가 다른 곳에서 근무하길 원할 경우, 저도 회장 비서실 근무가 가능하단 말씀이시죠?”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끈질기게 확답을 받으려고 질문을 던지는 조민경에 문재준 비서실장은 두리뭉실하게 이야기를 끝냈다.
가능할 수도 있다는 대답을 끝내 듣고서는 조민경이 눈웃음으로 회답했다. 귀엽게 혀를 살짝 내밀었다가 넣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와! 저는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했으면 정말 좋겠어요. 꼭 유능한 문재준 비서실장님과 같은 부서에서 일하면 좋을 텐데……. 정말 제 소원이에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가장 잘 아는 팔색조 같은 여인이란 생각을 문재준 비서실장은 했다.
자신감 넘치는 몸짓과 발언들, 자신이 매력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림 같은 미소와 강하게 어필한 뒤에는 여성성이 엿보이게 하는 밉지 않은 귀여움까지 보이는 조민경이었다.
예리한 문재준의 눈에는 계산적인 부분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주위의 남자들은 마이클 장을 포함해 그녀를 향해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매력적이고, 자신감이 넘치고, 귀엽고 애교 많은 여자라 생각하는 신입 남자들이었다.
문재준 비서실장은 어쩐지 만만하지 않은 이 여성이 자신에게 골치 아픈 존재가 될 것 같은 예감에 제발 그러지 않길 기도했다.
가령, 차형욱 회장님을 향한 호의 가득한 눈빛이나 언사가 행동으로 이어져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랐다.
똑똑.
“실례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회장 비서실에 들어가게 된 조민경은 인사차 회장실에 올라갔다.
때마침 미팅으로 인해 비워진 문재준 비서실장의 자리를 보고 눈을 빛낸 조민경은 빠르게 걸어가 회장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섰다.
문을 통해 회장실에 들어서자,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그림 같은 장면이 조민경의 눈앞에 펼쳐졌다.
평소 이미지와 다르게 자신도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신경 써서 바른 마스카라를 잊고 눈을 비빌 뻔하다가 놀라 손을 내렸다.
반짝이는 은빛 긴 머리카락을 창가에 드리우고, 낮은 창턱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길고 하얀 손으로 커피 잔을 쥔 채, 우수에 잠긴 긴 속눈썹을 반쯤 감고 있었다. 차형욱 회장의 남성적이고 강한 수컷의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이 풍겼다.
당장에라도 공기 중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목표인 차형욱 회장만 아니라면 몸을 던져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시멜로가 듬뿍 들어 있는 달콤한 코코아를 마시다 졸고 있던 은우는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에 빈 컵을 내려놓고, 눈을 겨우 뜨고 바라봤다.
처음에는 차형욱이나 문재준 비서실장이 들어오는 줄 알고 고개만 살짝 돌렸던 은우가 처음 보는 여성을 보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여기 차형욱 회장님의 방인데, 실례지만, 은우 씨 맞으세요?”
양아버지인 조상호 사장에게 들었던 이름을 겨우 생각해낸 조민경이 은우를 보고 물었다.
처음 본 여자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놀란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회장님의 동생분인 차민석 씨의 외삼촌 되시는 분의 수양딸 조민경이에요. 오늘부터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전에 제 양부이신 조상호 사장님이랑 인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기억하시죠?”
소파에 앉아 눈을 살짝 올린 은우가 기억이 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렇다저렇다 말도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 같은 남자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조민경이었다.
나름 라이벌이라고 여기던 자가 남자라고 들어서 자신감 있게 자신을 어필해보려고 했으나, 대화가 진척되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에서 있을 때부터 조상호 사장을 통해 차형욱 회장의 취향을 다 꿰고 있었다.
조상호 사장이 알려준 차형욱 회장이 좋아하는 취미나 음식, 싫어하는 것들을 모두 익히고 완벽하게 준비하고 귀국했다.
또, 외국에서 현지 인터뷰를 통해 YJ 그룹에 들어가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근데 애인이 생겼다니. 어이가 없었다.
차형욱 회장은 고정적인 파트너 없이 가볍고 탈 없는 만남을 선호했다. 관계한 남자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대부분 여성 파트너와 관계를 했다고 알고 있었다.
주로 자신감 넘치고 질척이지 않는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이 남자는 그런 스타일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눈부신 외모를 제외하고는 말도 없고 소심한 성격인 거 같았다.
귀국 후,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남성이라는 말에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런 성격이라면 자기가 다루기 쉬웠다.
차현수 보스의 큰아들 차형욱 사랑은 유명했다.
그렇게 예뻐하는 맏아들, 즉 장남이라면 당연히 그도 손자를 원하지 않겠는가?
우선 임신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게임이라 싱겁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아름다운 은우의 모습에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은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었다.
자신은 YJ 그룹 회장 사모님이 된다면 차형욱 회장이 남자 애인 한 명 정도 있다고 해도 용납해줄 수 있는 아량이 있는 여자였다.
차현수 보스 입장에서도 자기같이 포용력 있는 며느리라면 허락할 거라 확신했다. 이건 자신의 양부인 조상호의 생각과도 같았다. 양부에게 듣기로는, 몇 년 전에 차현수 보스가 은퇴해서 손주나 보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 손주, 내가 낳아준다고.
“이렇게 둘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사실, 제가 차형욱 회장님에게 관심이 있어요.”
“…….”
“물론, 그쪽 입장은 기분이 안 좋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지금이야 둘이 좋아하니 괜찮다 상관없다 해도, 차형욱 회장님의 본가도 보통 집안이 아니잖아요? 그런 집안에서 맏아들에게 기대가 얼마나 크겠어요. 차형욱 회장님도 자신의 아이를 낳고 싶으실 것이 분명해요. YJ 그룹의 미래를 생각해보세요. 차현수 보스께서도 말씀은 없으셔도 손주를 원하실 것이 분명하고요.”
“…….”
“혹시, 남자인 은우 씨가 차현욱 회장님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
“제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현명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제가 차형욱 회장님과 결혼을 하더라도, 은우 씨에 대해서 묵인할 수 있어요.”
“…….”
아까 인사 후 앉은 소파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수에 찬 축 처진 은우의 몸을 바라보던 조민경은, 이쯤 말했으면 자신도 생각을 좀 할 것이라고 여겼다.
훗!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죠. 다행이네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인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제 말에 동의한 줄 알고 있을게요. 은우 씨의 현명한 처신 기대하도록 하죠.”
붉은 입술을 한쪽으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 문고리를 잡고, 아까부터 아무 말도 못 하는 은우에게 마지막 훈계를 하며 당당하게 나갔다.
조민경은 몰랐지만, 은우의 눈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고, 규칙적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차형욱 회장은 소파에 앉아 깊이 잠들어 있는 은우의 어깨와 무릎을 안아 올렸다. 구석에 있는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긴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고, 드러난 하얗고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살짝 가져갔다.
꼭 감긴 눈, 보기 좋게 살짝 올라간 코, 살며시 벌어진 붉은 입술까지 깃털같이 가볍게 입술로 도장을 찍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한참을 천사같이 잠든 은우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 차형욱이었다.
커다란 기계들이 입을 쩍 벌리고 인공 눈을 쏟아내며 황량한 동산을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어이! 이쪽에도 기계 돌려, 빨리해. 아! 그쪽은 이제 됐네. 점심시간 거의 끝나가니깐, 서둘러!”
20년 차 불곰 황호영 형님의 지시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다른 황성파 조직원들이었다. 본가의 뒤쪽에 위치한 민둥산이 순식간에 하얀 설산으로 바뀐 것은 불과 몇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여러 대의 제설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은 마치 함박눈이 내리는 모양으로 순식간에 작은 동산의 한쪽 면을 눈 동산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오늘 아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제저녁 차현수가 은우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에 놀러오라고 했다.
차현수 보스는 정도훈을 새벽부터 보내 재촉을 한 뒤 은우를 데리고 아침을 같이 먹었다.
기어이 쫓아와 아침까지 같이 먹고 애틋한 이별 장면을 마당에서 흉하게 연출한 차형욱 자식놈 때문에 아침을 먹는 내내 입을 삐죽이던 차현수 보스였다.
은우랑 친해지고 나서부터 자식놈보다 며느리 사랑에 폭 빠진 차현수는 알콩달콩 아침을 같이 먹을 생각에 은우가 잘 먹는 전주비빔밥을 아침부터 준비해 놓았다.
저 귀여운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아들놈이 떡 하니 은우를 옆에 끼고 밥을 먹이고 있으니 배가 아팠다.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은퇴하고 싶은 차현수 보스가 소원 풀었다. 요즘에는 며느리가 아니라 늦게 얻은 손주같이 은우를 돌보는 재미에 폭 빠진 차현수 아빠가 속이 상할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은우 덕분에 아침부터 한 상 거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은 박동수와 정도훈은 맛있게 밥을 먹었다.
부지런히 움직인 차현수 보스 때문에,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먹고 오늘도 어김없이 TV 앞에 앉아 아침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는 은우다.
다른 때와 다르게, 오늘은 옆에 차현수 보스와 정도훈까지 같이 자리에 앉아 드라마에 폭 빠진 은우를 구경하고 있었다.
정도훈이 보기에도 은우는 무슨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이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외모이지만, 표정이 풍부한 편이 아니고 자세히 보면 좀 멍한 구석이 많았다.
한데, 요 막장 아침 드라마 시간만 오면 유독 다양한 은우 표정 퍼레이드를 볼 수가 있기에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큰 재미를 선사해줬다.
더 웃긴 건, 은우가 보는 유치찬란한 아침 드라마에 자신도 중독되었다. 언젠가부터 은우가 없어도 아침마다 시청하게 된 정도훈이었다.
이 전염성은 결국 차현수 보스에게까지 옮겨져 아침을 잘 차려 먹은 세 명의 남자는 커다란 TV 앞에 앉아 드라마 속에 푹 빠져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 쌍욕을 날리고 있었다. 욕하면서 본다는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에 빠진 시청자들이었다.
“어구, 저런 나쁜 년을 보게나.”
“저럴 줄 알았다니까……. 저놈이 바람을 피우다니, 이혼해, 이혼!”
“세상에 저 바람둥이 자식! 딴 여자를 또 만나다니, 조강지처는 어쩌고 저런 천하에 몹쓸 놈!”
“아, 아파!”
“은우야 놀랐어? 아파도 돼! 저런 놈은 뺨을 쌍으로 맞아야 해. 윽! 저놈이 또! 아이고 속 터져.”
“어허, 괘씸하구먼! 저놈은 우리 조직원들 좀 동원해서 처리하면 순간인데…….”
“어, 어, 어! 저것이 또, 조강지처에게 찾아가는데요?”
“저런 나쁜 놈! 바람둥이는 묻어버리고 저 총각이랑 다시 살면 되겠구먼……. 큼.”
“앗! 안 돼, 이 장면에서 끝나다니.”
짧은 정도훈의 외침을 뒤로하고 가장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드라마의 OST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튀어나온 세 사람의 아쉬운 한숨 소리가 애절한 OST 속에 묻혔다.
그 후에 시작되는 아침 방송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리포터가 눈썰매장에 가서 즐겁게 노는 가족을 찍고 있었다. 스키장 한쪽에서 운영하는 눈썰매장에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큼직한 플라스틱판에 앉아 미끄러져 내렸다.
하나같이 웃음꽃을 피우는 밝은 얼굴의 사람들이 가득 화면을 차지하자, 은우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은우야, 저거 타봤어?”
“아니. 저거 몰라.”
“저런! 우리 며느리, 저거 타고 싶으냐?”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는 은우의 모습에 인자한 웃음을 흘린 차현수가 뒤에 서 있는 사내에게 눈빛을 보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사내가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들어온 사내가 차현수 보스의 귀에 작게 속닥거렸다.
은우를 보고 자신 있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차현수 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흠, 이 아빠가 해주마. 점심 먹고 나면, 우리 은우가 저걸 탈 수 있을 거 같구나.”
“아빠, 우리 저기 가?”
“귀찮게 은우가 저기 갈 필요도 없다. 여기에 아빠가 만들어주마. 아빠 믿지?”
감탄사와 함께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려 믿는다고 외치는 은우의 모습에 승천한 광대가 내려올 줄 모르는 차현수 보스였다.
다른 조직회장들이 모임에서 자랑하던 손주 자랑을 더는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남들이 만나는 봤겠는가. 요렇게 깜찍한 며느리가 우리 차씨 집안 맏며느리라고 전국에 신문이라도 돌리고 싶었다.
다행히 은우 앞에서 능력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 저 존경하는 눈빛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조만간 조직원들 회식이라도 시켜줘야 할 판이었다.
점심으로 토종닭을 삶아 진하게 우려낸 국물로 닭 칼국수를 맛나게 먹은 일행은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도훈의 손길에 허벅지까지 살짝 내려오는 남색 더블 버튼 코트에 빨강 목도리, 장갑에 모자를 둘러썼다.
목도리는 목에 두 번 둘둘 감아 뒤로 묶고, 전에 구매해둔 얼룩무늬 귀마개까지 하자, 그사이 상기된 얼굴로 빨리 나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은우다. 차현수 아빠와 정도훈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집 뒤에 위치한 작은 동산이었다.
조직원들을 총동원한 작품이 완벽한 결과물로 펼쳐져 있었다. 새하얀 눈 산이 앞에 보이자,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환하게 웃으며 냉큼 뛰어가는 은우다.
그걸 바라보는 조직원들은 자신들의 고생이 모두 보상되는 느낌이었다. 빨강 모자를 눌러 쓴 긴 은발을 휘날리며 눈 속을 뛰어다니는 그들의 형수님은 정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모습이었다.
잠깐 사이에 위로 올라가려다 넘어진 은우는 그래도 좋다고 활짝 웃으며 차현수 아빠를 돌아보았다. 참지 못하고 냉큼 달려가 눈을 털어주는 팔불출 아빠와 보모 정도훈이었다.
양손을 잡힌 은우가 미끄러지지 않는 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동산 꼭대기에 큰 튜브, 마대자루, 플라스틱 썰매, 나무 썰매 등이 취향대로 탈 수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심사숙고 신경을 썼는지 보여주었다.
장난기를 입에 가득 물고, 정도훈이 잽싸게 커다란 고무대야를 꺼내 은우에게 손짓했다.
“자, 은우 이리 와서 앉아봐.”
쪼르르 다가온 은우가 정도훈이 앉으라고 한 빨간색 김장용 고무대야 속으로 쏙 들어가 앉았다. 씩 웃는 정도훈이 대야를 앞뒤로 살살 흔들더니 힘을 주고 앞으로 쭉 밀었다.
캭, 급격하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속도에 저절로 비명을 터트리는 은우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동그랗게 뜬 상태에서 바람을 가로질러 밑에 도착했다.
마지막에 눈을 가득 쌓아 안전선을 만들어놓은 곳에 멈춰 서자, 천사 형수님 팬클럽 중 한 명인 ‘순딩이’ 최태환이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얀 볼은 잔뜩 흥분해 붉게 물들어 있고, 여전히 입을 벌리고 와, 하는 모양을 만들고 있는 은우의 모습은 밑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의 단체 아빠 미소를 야기하는 중이었다.
‘순딩이’ 최태환이 부축해 은우를 내려주자 신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자기 몸만 한 고무대야에 붙어 있는 줄을 질질 끌고 위쪽으로 날듯이 뛰어 올라가는 은우다.
대신 들어 주겠다는 조직원들의 말에 괜찮다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런 큰 형수님을 볼 수 있다면 뒷동산쯤이 아니라 온 동네 산을 모조리 눈 동산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우야, 재미있느냐?”
“응, 아빠 같이요.”
짙은 하늘빛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접힌 눈매로 뛰어가 외치는 모습에 엉겁결에 은우의 김장용 고무대야 안에 같이 탑승한 차현수 아빠였다.
워낙 큼직한 고무대야이기에 쪼그리고 앉은 은우의 뒤에 다리를 대야 밖으로 뻗고 앉은 차현수 보스가 어색하게 탑승했다.
킥킥거리는 웃음을 겨우 누르며 정도훈이 힘을 주어 밀어주자 아빠의 묵직한 무게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빨강 고무대야였다.
“크아아아악, 아악!”
품위 없이 들리는 굵직한 비명과 맑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며 고무대야가 맨 밑에 도착했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어금니에 힘을 줘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는 조직원들이었다. 오른팔 ‘불곰’ 황호영은 20년 경력을 날로 먹은 것이 아닌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넋이 나간 차현수 보스를 부축해 내려드렸다.
은우는 눈을 반짝이며 고무대야에서 팔짝 뛰어나와 비틀거리는 차현수 보스의 품에 매달렸다.
귀엽디귀여운 은우가 평소 잘 안 하는 매달리기 애교를 펴며 다시 타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허세 작렬 차현수 아빠는 흔쾌히 콜을 외치며 고무대야를 끌고 앞장섰다.
‘불곰’ 황호영은 20년을 같이 보낸 영원한 보스 차현수의 뒷모습에 오늘 처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린 며느님이 매달리자, 억지로 힘을 잔뜩 준 어깨지만, 부르르 떨리는 다리며, 파르르 떨리는 입매가 마냥 슬펐다. 안쓰럽고 측은함과 내일 모래 60인 나이가 느껴져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3번을 더 은우의 고무대야에 탑승한 차현수 보스는 화장실을 핑계로 도망가고, 은우는 정도훈과 시합을 하고 놀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이 소리 높여 천사 형수님을 응원했다. 몸무게가 너무 가벼운 은우의 고무대야가 애초에 얇은 마대자루에 묵직한 몸무게를 싣고 바람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정도훈을 이기기는 불가능했다.
모두의 시선이 날카롭게 정도훈에게 박혀 노려보았지만,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터트리며 은우의 고무대야까지 들고 위로 뛰어 올라가는 철없는 30살 정도훈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많이 깨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무서운 차현수 보스가 사라지자, 은우의 요청으로 눈썰매에 합류한 조직원들이었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긴 은발을 눈밭에 휘날리는 환상적인 천사 형수님과 눈썰매를 타는 조직원들은 꿈같은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코끝이 새빨개지도록 눈썰매를 탄 뒤, 밑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은우의 사랑스러움에 조직원들은 남몰래 충성을 맹세하며 천사 형수님 팬클럽에 가입하는 중이었다.
말수는 적어도 입만 열면 귀엽기 짝이 없고, 어떠한 차별도 없는 자애로운 형수 님이었다. 코코아를 마시며 주위에 이름을 익힌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챙기며 코코아를 마시라고 권했다.
겉과 속까지 완벽한 천사님이 분명했다.
하늘빛 눈이 곱게 접히고 따뜻한 코코아로 붉어진 입술이 크게 벌어져 눈부신 얼굴이 된 천사 형수님이 온몸으로 ‘나 반가워.’를 외치며 눈밭을 뛰기 시작했다.
저기서 작게 손을 올리며 다가서는 무뚝뚝한 차형욱 도련님이 말랑하게 바뀐 얼굴로 바로 앞에서 넘어질 뻔한 형수님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자연스럽게 마주 닿은 입술에 인사했다. 눈을 마주치고 웃는 은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다시 가볍게 입술을 가져가는 차형욱이었다.
차현수 보스의 등쌀에 자주 찾아오는 은우가 본가에 있을 때면 어김없이 평소보다 이르게 퇴근하는 차형욱이었다.
어떻게 보면, 귀여운 며느리를 집에 데려다놓고 보기 힘든 무뚝뚝한 아들놈의 얼굴도 볼 수 있는 차현수 보스의 일석이조(一石二鳥), 일타쌍피(一打雙皮), 일거양득(一擧兩得), 양광(兩光)치기의 묘수였다.
차형욱의 이른 퇴근에 신이 난 은우가 그의 품에 안겨 손가락으로 열심히 자신의 빨간 고무대야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작게 웃으며 은우가 원하는 곳으로 걸어가 고무대야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팔 위에 은우를 올려놓은 자세로 여유 있게 언덕을 올라가는 차형욱이었다. 워낙 가벼운 은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조직원들은 170센티미터가 넘는 형수님을 저렇게 훌쩍 한 손으로 안고 다른 손에 대형 고무대야까지 들고 걷는 차형욱에 감탄했다.
품 안의 은우가 신이 났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좋아하자 기분 좋게 은우를 쳐다보던 차형욱의 눈빛이 살짝 굳었다.
얼마나 오래 밖에서 놀았던지 알 수 있는 빨간 코와 볼에 인상을 쓴 차형욱이 은우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자신의 코트 자락을 열어 품속에 넣었다.
바닥에 있는 고무대야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던 은우가 따뜻한 품에 들어서자 고개를 들어 차형욱을 바라봤다.
“아가, 나랑 저거 타.”
차형욱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은우를 데리고 따뜻한 방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활기찬 은우의 모습에 고민했다.
“아가, 타자.”
그의 망설이는 모습에 코트 안에서 양손을 차형욱의 목에 두르고, 눈을 마주 보며 간절히 말하는 은우의 모습에 한숨을 쉬는 차형욱이었다.
“은우, 안 춥나?”
“추워. 괜찮아. 아가, 저거 타자.”
거짓말도 못 하고 춥다고 하면서 타자는 은우의 모습에 단호한 모습으로 바뀐 차형욱이 엄하게 말했다.
“은우, 그럼 딱 1번만 타고 들어가자.”
“응? 안 돼. 10번 타요”
요즘 부탁할 때 나오는 귀여운 존경어가 튀어나오자 차형욱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1번 타고 저녁 먹자. 은우가 좋아하는 궁중 떡볶이.”
“1번만?”
은우가 차형욱의 눈치를 보며 고민하자 차형욱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음…… 2번 타고, 대신…….”
2번 타고를 말한 뒤 작게 은우의 귀에 속삭이는 말에, 차형욱을 바라보던 은우가 그의 입에 냉큼 입술을 붙였다.
차형욱의 혀가 단숨에 달콤한 코코아 내음이 나는 입안을 빠르게 훑고 나왔다. 차형욱은 코트 속에서 얼굴만 쏙 내민 은우의 얼굴에 뽀뽀 비를 뿌렸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오래간만에 보는 철판 커플의 닭살 행각에 주변은 급격히 냉각되어 갔다.
차가운 차형욱 도련님이 귀여운 뽀뽀 질이라니. 시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괴로운 주변인이었다.
짧지만 강력한 테러를 눈에 선사하고 차형욱이 빨간 고무대야에 몸을 실었다.
190센티미터의 길쭉한 몸으로 은우를 코트 안에 감싸고 빨간 고무대야 속에 앉아 있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은 심각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정도훈이 마구 비웃음의 시선을 던져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고무대야를 출발시키는 차형욱이었다.
품 안에서 머리만 쑥 내밀고 있다가 속도가 빨라지자 까르르 웃음소리를 토해내며 가슴에 얼굴을 숙이자, 차형욱의 큰 손이 은우의 턱을 잡아 올려 그대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바람에 날리는 긴 은빛 머리카락이 차형욱의 검디검은 머리카락을 스치며 겹쳐진 두 사람의 모습은 그림같이 아름답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