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리 은우, 에어로빅을 배우고 있었구나?
박동수가 운전하는 차량에 탑승한 은우, 차형욱과 차현수 보스였다.
이곳은 황성파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 대학 병원으로 규모나 의료 서비스 방면에서 탑을 달리는 곳이었다.
특실로 바로 발걸음을 하는 이들에게 병원 내에 있는 관계자나 방문객들의 시선이 몰렸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캐주얼 양복을 입은 딱 봐도 보디가드로 보이는 건장한 박동수가 앞장서 안내를 했다.
하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섞인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초콜릿색 고가의 코트를 입은 회장님으로 보이는 이와 눈이 마주치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까는 사람들이었다. 무뚝뚝한 인상에 단단한 이미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카리스마 흘러넘치는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아들로 보이는 그 남자를 꼭 빼닮은 무표정한 미남은 애인인지 모자를 뒤집어써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과 딱 붙어 걷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가끔 모자 쓴 이가 고개를 들어 올려 쳐다보면 장신의 몸을 숙여 주었다. 귀를 가까이 가져가며 묻는 말에 자상하게 대답을 해주는데, 그때마다 차가운 인상이 부드럽게 풀렸다.
멀리서 회의가 있었던지 몇 명의 닥터들과 걸음을 옮기던 병원장이 이들을 보고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 빠르게 다가오려 했다.
회장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손을 살짝 올려 병원장에게 그냥 일보라는 신호를 보내는 모습에 주위 병원 관계자들은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얼마 전부터 병원 특실 중에서 특급으로 관리되고 있는 곳에 환자가 입원했다.
어리고 잘생긴 남자 환자가 특실에 입원 중인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무나 이용할 수 없는 병실임에 더욱 그 배경이 궁금한 관계자들이었다.
전에 대기업의 사모님이 이곳 특실을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왔지만, 병원장님이 특실 사용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이 특실을 병원에서는 ‘스페셜 특실’이라 칭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용하는 곳인지 늘 궁금했기 때문에 범상치 않은 손님들이 스페셜 특실로 향하자 시선을 돌리지 못한 것이었다.
병실 앞에 멈춘 차현수 보스는 때마침 빈 물병을 들고나오는 차민석 어머니인 조희주를 만났다.
수술 후 차민석이 깨어나질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인 조희주에게도 알린 것이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아들이 집에 오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이 뻔했기에 숨기기 힘들었다.
납치 사건 같은 자세한 이야기는 몸이 약한 조희주에게 안 하고, 단순하게 사고가 있었다고 알린 차현수 보스였다.
“오셨어요? 회장님.”
아담한 키와 마른 몸으로 아직 고운 얼굴을 지닌 청순한 인상의 조희주다.
어제 처음 아들 차민석의 사고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와서 분명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간호한 것이 분명했다. 차현수 보스가 혀를 찼다.
“아니, 간호인도 있는데 쉬엄쉬엄할 것이지…….”
“괜찮아요. 아, 안녕하세요. 형욱 도련님도 오셨네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차형욱의 옆에 은우도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들었다. 마무리로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은우야, 인사했어? 이쪽은 민석이 어머니 되는 사람이다.”
“아, 혹시 이쪽이 큰 도련님의……?”
“맞네, 큰 며느리로 생각하는 아이네. 은우라고 편하게 부르면 되네.”
은우의 모자를 뒤로 넘겨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여는 차현수 보스였다. 처음 본 은우의 외모에 매우 놀라고, 자상한 차현수 보스의 모습에 두 번 놀라는 조희주다.
“반가워요. 은우 씨.”
“민석 피 나? 아파요?”
“아니 민석이 이제 피 안 난다. 걱정하지 마라. 깊게 잠들어 있지만, 곧 깨어나겠지. 못난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혀를 차며 대신 대꾸를 한 차현수 보스가 병실로 걸음을 옮기자, 나머지 인원들로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무뚝뚝한 목소리지만, 그 속에 깃든 걱정을 알기에 조희주는 얼른 눈물을 훔치며 물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방 안 한가운데 놓인 하얀 침대 위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알 수 없는 기계와 이어진 선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차민석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확인하자, 은우가 빠르게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민석, 자?”
대답 없는 차민석 대신 차현수 보스가 넋두리하듯 은우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래. 저놈 지금 자는 중이다. 걱정하는 제 어머니는 생각 못 하고 편하게 자는 불효막심한 놈이지.”
차민석의 복부 전체에 커다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머리와 얼굴에도 하얀 붕대와 반창고가 잔뜩 붙여져 그런지, 어린 얼굴이 더욱 앳되어 보였다.
은우가 작게 손을 뻗어 부러졌는지, 깁스 한 차민석의 한쪽 손을 살짝 건드렸다. 갑자기 은우의 하얀 손에서 하얀 빛이 민석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놀란 차형욱이 은우의 어깨를 황급히 뒤로 당겼다. 차민석에게서 은우를 떨어트린 뒤 얼굴을 구기고 크게 소리쳤다.
“은. 우! 내가 절대 그러지 말랬지? 위험하니깐, 다신 그러지 말랬잖아?”
처음으로 은우에게 큰소리를 내는 차형욱의 모습에 차현수가 놀라 말리려고 했다.
그 찰나 둘째 아들 차민석이 누워 있는 침대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차현수 보스가 더듬거렸다.
“이, 이게…… 민…… 석?”
“민석아!”
쨍그랑.
병실 입구에서 물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 조희주가 눈을 뜨고 있는 아들 차민석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터트렸다. 정신을 차린 차현수가 침대 뒤에 있는 닥터 호출 버튼을 누르자, 담당 닥터가 뛰어들어왔다.
갑작스럽게 깨어난 환자 때문에 소란스러운 병실을 나와 은우를 데리고 본가로 온 차형욱이었다. 아버지 차현수만 남아 확인하기로 하고, 박동수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차형욱이 걱정을 하며 졸리거나 아프지 않으냐고 은우에게 물었다.
이제 커서 괜찮다는 은우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다음에는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고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심장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은우의 행동이었다. 이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심장 한 개 가지고도 자신은 도저히 살 수 없을 듯했다.
자신에게 있어 은우가 어떤 존재인지 안다면, 절대 자신의 앞에서 이러지 못할 터인데…….
가끔 터져 나오는 은우의 돌발행동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불안감에 수명이 팍팍 줄어들 것 같은 차형욱이었다.
정말 가두어두고 자신만 보고 살게 하고 싶은 음습함과 매일 사투를 벌이는 중인데, 천사같이 웃으며 자신에게 부탁하는 은우를 보자면 몰랑해지는 마음에 자신의 속마음 따위는 접어두게 되어버렸다.
곤히 잠든 은우가 누워 있는 침대에 한참을 같이 누워 있었다. 자신에게 맞추어 하늘에서 보내준 것 같은 완벽히 품속에 들어차는 은우의 몸을 끌어안았다.
긴 머리카락을 몸에 감고 잠든 모양이 딱 아기천사 같았다. 그 천사 같은 외모로 자잘한 말썽을 피워댄다. 얄미운 생각에 얼굴 여기저기 은우가 귀찮도록 입술을 내렸다.
엉킴 없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통과하는 은빛 머리카락을 한참을 쓸어주고, 마지막으로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형욱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창문 밖과 문 앞에 세워둔 조직원이 보였다. 소리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느덧 뒤에 따라붙은 그림자 박동수와 본가의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차형욱의 얼굴은 다시 얼음처럼 변해있었다.
새벽을 밝혀오는 시간, 단단히 잠긴 지하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걸어 나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문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이 크게 숨을 삼켰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살을 찌르는 살기를 품은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조직원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본능에 따라 숨기고 있던 총을 꺼낼뻔했다.
비릿한 피 내음과 살기를 머금은 하얀 얼굴에 튄 붉은 핏방울이 유독 선명했다. 퇴폐적이고 남성적인 아름다움이 묘하게 풍기는 살벌한 이는 바로 차형욱 도련님이었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잔뜩 굳은 얼굴의 박동수가 문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잠깐 걸음을 멈춘 차형욱이 뒤돌아보지 않고 낮은 음성으로 명령을 내린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치료해 놔.”
“예, 알겠습니다. 큰 도련님.”
치료를 위해 누구를 부르기 전에, 호기심으로 지하 감옥의 문을 열었던 조직원은 적막한 공간을 마주했다.
두 눈을 크게 떠 잠깐 그곳을 응시한 조직원은 공포에 몸이 굳어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떨고 있는 손 때문에 여러 번 헛손질한 뒤에야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남부파 쓰레기들을 당장 처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만일 저 차형욱 도련님을 적으로 만난다면 잡히기 전에 혀를 깨물어서라도 죽음을 선택할 것이었다. 철저히 자살을 못 하게 방비해 놓았기에 자결도 불가능한 조금의 희망도 없는 지옥을 들여다보았다.
저 멀리 걸어오는 동료 조직원의 모습에 경비를 부탁했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호기심 많은 조직원의 최후였다.
손님방에서 오랜 시간 샤워를 하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차형욱은 은우가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닫는 은우의 모습을 한참 옆에 앉아 바라보았다.
황성파 직계 남자들의 뼈와 살에 새겨진다는 유독 강한 살기다. 저주같이 떨치지 못하고 핏속에 날뛰는 광기가 은우 앞에서 깊이 숨을 죽이는 걸 느꼈다.
지금은 황성파의 강한 힘에 눌려 적들의 공격은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20년 전만 해도 달랐다. 가만히 잠자던 왕좌를 노리는 다른 조직들이 불쑥불쑥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오랜 시간 피바람이 휘몰아쳤었다.
차형욱이 황성파를 나오던 10년 전쯤부터는 얌전하게 내숭을 떨 듯 잠잠해진 황성파지만, 이빨을 드러낸 적들을 사납게 물어뜯어 가차 없이 처리하기로 유명했다.
스스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황성파에서 키우는 개도 건들지 말라는 말이 조직들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다.
가끔 전대 보스가 물러나고 새로운 후계가 정해지면 젊은 혈기에 이 말을 잊고 황성파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조직이 드물지만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잘 아는 집안에서는 후계 교육을 할 때 ‘황성파 불가침’에 대해 가장 먼저 가르칠 정도였다.
황성파 남자들의 핏속을 맴돈다는 잔인한 살기는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차형욱에게도 깃들어 있었다.
지금은 은우 앞에서 인자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 차현수 보스지만, 결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차형욱이었다.
깨끗하게 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차형욱의 눈에는 붉은 피가 아직도 가득 묻어 있는 듯해, 차마 은우를 만지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했다.
더러운 일은 내가 한다. 너에게 작은 상처라도 입힐 존재라면 가만두지 않는다. 너만이 내 안에 날뛰는 짐승 새끼를 재울 수 있다.
‘제발 부탁이다. 은우! 내 옆에 있어 줘. 내가 미치지 않도록…….’
“얍! 얍! 야압!”
어디서 사온 건지 은우가 노란색 도복을 입고 있었다. 야무지게 작은 입술을 꼭 다물고 팔을 뻗으며 기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앞에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웃음을 참는 듯한 박동수가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 중이었다.
신중히 지켜보다 은우 자세를 고정해 주고 있었다. 납치 사건 이후, 호신술을 가르쳐 보려는 박동수의 기특한 마음 씀씀이였다.
뒤에 서 있는 조직원들은 아침부터 재롱을 떠는 귀여운 손주를 보는 눈빛이었다. 모두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시선을 떼지 못하고 구경 중이었다. 지나치게 유연한 은우의 몸으로 무슨 동작을 해도 춤을 추는 모습에 가까웠다.
결코, 딱딱 끊어지는 절도 있는 무술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 요가를 하는 사람보다 훨씬 유연한 은우의 신체는 리듬체조 선수처럼 180˚ 이상으로 벌어졌다.
중국 서커스에서 식초만 먹고 훈련받는다는 여자들만큼 온갖 자세가 다 가능했다. 이런 모습을 난생처음 목격한 박동수가 속으로 감탄을 토해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시범을 보이고 운동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춤을 추듯 흐느적거리던 은우의 팔과 다리였는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조금이지만 힘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시작은 박동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할수록 은우의 모습이 웃긴 박동수다.
“은우 님, 열심히 하면 차형욱 회장님도 은우 님이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은우가 정말 열심히 팔을 뻗고 발을 차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은우를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 관찰한 박동수다. 은우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진돗개 탈을 쓴 여우로 진화 중이었다.
“은우야! 허허허. 열심히 하고 있구먼? 밥 먹어야지.”
은우가 운동 중이라는 말에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구경도 할 겸 은우를 데리러 체육관에 온 차현수가 차형욱과 같이 다가왔다.
요즘 따라 은우라는 공통 화제가 생겨서 그런지 자주 부자가 같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더구나 차현수 보스의 걱정이던 둘째 아들 차민석이 깨어났고, 흉터까지 순식간에 없어지는 기적적인 일이 발생했기에 얼굴에 그늘이 많이 사라졌다.
그 일로 오랜 시간 큰아들 차형욱과 은우의 능력과 비밀을 유지하는 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아빠, 나 봐요.”
가느다란 팔을 앞으로 뻗었다가 위로 올리고, 다리는 번개처럼 옆으로 차는 동작을 흉내 낸 은우가 잔뜩 기대하고 아빠 차현수를 바라보았다. 손뼉을 친 차현수가 크게 외쳤다.
“어구, 잘 춘다. 우리 은우, 에어로빅을 배우고 있었구나?”
진지한 차현수 보스의 칭찬에 뒤에 있는 박동수가 두 팔을 휘저으며 눈치를 줬지만, 이미 입 밖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은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당황한 차현수 보스가 뒤늦게 박동수의 팔짓과 은우의 표정을 눈치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복배지수(覆杯之水)였다.
“음, 은우 멋있다. 발차기가…… 참 위협적이었다.”
눈치 빠른 차형욱은 모든 사태를 단번에 파악했다. 재빠른 판단하에 표정을 완벽히 숨기고, 은우의 성격을 고려해 알맞은 칭찬을 신중히 건넸다.
은우가 활짝 웃으며 그렇게 좋아하던 차현수 아빠를 지나쳐 차형욱의 목에 매달렸다.
‘저런 얄미운 놈!’
차현수 보스가 은우가 달려오자 벌리고 있던 팔을 어색하게 접으며 차형욱을 노려봤다.
큰일 났다.
은우가 고개를 획 돌려 차형욱의 목에 고개를 묻고 차현수 아버지를 슬쩍 무시했다. 은우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삐친 게 분명했다.
좌절하는 차현수 보스의 포즈를 보고 살며시 동정의 시선을 보낸 박동수가 히죽 웃으며 뒤를 따랐다. 따가운 차현수 보스의 눈초리가 만만한 박동수를 노려봤다.
그래, 저놈이 조금만 빨리 눈치를 줬으면 은우의 미움을 받는 일이 없었을 거라 확신하는 차현수가 식당에 갈 때까지 박동수에게 강렬한 원망의 눈빛을 뿌렸다.
오늘따라 유독 걸음이 빠른 박동수가 차형욱 회장님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조상호는 일주일이 넘게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숨어서 지내다시피 했다.
황급히 가능한 모든 재산을 현금으로 바꿔 놓고 중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매일 하루씩 날짜를 미루며 여관에서 황성파 동태를 지켜보고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남부파 전부가 황성파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 외에는 크게 자신에게 영향이 없어 어리둥절했다.
‘킹 스파이크'클럽 어린아이들은 조카인 차민석이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기에 전부 풀려났거나 입원 중이었다.
칼에 찔려 큰 수술까지 했다던 자신의 조카 차민석은 얼마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기적처럼 멀쩡해졌다는 소식을 몰래 들었다.
'그때 내가 성급했어. 남부파 돼지 놈이 자꾸 안내하라고 해서…….'
원래는 남부파만 노출하고 ‘킹 스파이크’ 뒤에서 조정만 하려고 했건만. 은우의 납치가 성공함에 기뻐서 너무 자신을 노출했다는 것을 뒤늦게 크게 후회했다.
남부파 돼지 같은 놈이 자신의 연관성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줄 의리가 있을 리 만무하기에 끝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죽였나? 조심스럽게 혼자 추측해 보았다.
아니라면, 역시 자신도 가족이라 그런지 자신을 믿어준 것이거나, 넘어가 준 것일지도? 조카 차민석만 입을 다문다면 자신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넘어갈 것으로 보였다.
'큭큭, 꼭 죽으라는 법은 없군.'
사실, 황성파 예비 며느리라는 차형욱의 애인 놈을 납치했을 당시, 그놈이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음을 상기했다.
갑자기 조상호의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놈이 잘 때 딱 한 번 지하실을 남부파 두목 황두식과 방문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연관성에 대해 어떤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증인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날라리 놈들 몇 명과 ‘남부파’ 쓰레기들뿐이니.
심증은 있어도 자신이 앞으로 조카 차민석과 입을 잘 맞추면, 아무 일 없이 좋게 넘길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 조상호 사장이었다.
오히려 조카인 차민석이 나쁜 일을 할 거 같아 자신은 옆에서 말렸다고 해도 될 듯했다.
막내아들인 차민석에게는 지금이야 차현수 보스가 화를 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어린 늦둥이 자식이니만큼 용서가 될 것이고, 자신이야 조카를 사랑해 부탁을 들어준 마음 약한 외삼촌 역할을 하면 되었다.
듣기로는 차현수 보스 본인도 젊어서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었다고 했다. 평소 자신이 차현수 보스 앞에서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이자 변명이었다.
초반에 벌벌 떨던 자신의 모습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마음 약한 조카 차민석은 자신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컸다.
또, 요번 기회에 자신의 멍청한 여동생 조희주도 차현수 보스랑 담판을 지어 혼인신고를 시켜야겠다고 다부지게 결심한 조상호 사장이었다. 제 아들 차민석이 삐뚤어진 원인으로 부모님의 불안한 관계를 들면 딱 좋겠다 싶었다.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그래.'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조카 차민석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향해 가는 차 안에서 자신의 모든 태도를 정리했다.
조상호가 한결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신형 아우비를 주차하고 병실로 향했다. 혹시나 싶어 노크 없이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어본 조상호 사장이었다.
살짝 문을 열어 인기척이 느껴지면 피하려고 최대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상호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본인은 당당하다고 거짓말을 해도, 죄진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였다.
붕대 하나 없이 멀쩡한 조카 차민석이 잠들어 있었다.
칼에 찔렸다더니 헛소문이었군. 아니면 거짓말인가?
차현수 보스의 분노에 동정심을 일으키기 위해 공부 잘하는 차민석이 똑똑하게 머리를 굴렸을 수도 있었다. 특실은 과연 특실이었다.
커다란 병실에 푹신한 침대, 한쪽에 보호자가 쉴 수 있는 작은 방, 응접실까지 호텔 스위트룸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병실이었다.
조상호 사장은 냉장고 문을 열고 음료수를 꺼내 목을 축였다. 차민석이 누워 있는 침대 앞 의자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역시! 어린 막내아들이 잘못 좀 했다고, 별일 있을 리가 없지. 귀한 차씨 집안 핏줄을 쉽게 내치진 못 하지. 암! 당연하지!’
돈 지랄은. 여기저기 병실을 둘러보며 욕을 하는 조상호 사장이지만, 두 눈에는 질투와 탐욕을 진하게 드러냈다.
“오라, 이제 일어났니? 민석아, 삼촌이다. 삼촌!”
언제부터인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카 차민석의 모습을 보고 다정하게 말을 붙이는 조상호다.
이불 밖에 나온 손을 조상호 사장이 꼭 잡아오자, 차민석이 손을 비틀어 빼내고, 누워 있던 몸을 혼자 일으켜 앉았다.
“나한테 아직 화가 났나 보구나. 어쩔 수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됐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아니, 하나뿐인 조카가 병원에 입원했으니 당연히 와 봐야지. 그리고 이번 일은 아쉽게도 실패했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다시 의논해야지? 저기, 근데 민석아! 설마 싶어 하는 말인데…… 네 아버지한테 내가 연관됐다는 걸 말하지는 않았지? 네가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만, 혹시나 해서…….”
“…….”
“너! 설마 말했느냐? 빨리 말해봐라!”
자신이 걱정되어서 병문안을 왔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조소를 지으며 차민석이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안 했으니 안심하시죠. 이젠 저는 외삼촌의 계획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황성파에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일로 다시는 저를 찾지 말아 주시지요.”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조상호 사장이 찾지 말라는 차민석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뭐라고? 네놈은 네 어머니의 일을 잊었느냐? 관심이 없다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네가 불쌍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무정한 네 아버지와 차형욱과 싸워야지! 너희 모자가 누려야 할 권리를 왜 포기해? 이번에 은우란 놈을 납치해보니, 차형욱 놈이 그 아이를 각별하게 생각하던데. 그런 약점을 알아냈으니 얼마나 쉬워? 어쩌다 이렇게 약해 빠져 가지고선. 정신 차려라!”
생각할수록 좋은 기회를 날리는 어리석은 조카 때문에 속이 뒤집힌 조상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릴 적부터 심약해서 정에 자주 휘둘리더니 커서도 말썽일 줄이야.
어째서 황성파 핏줄이면서 특유의 독기는 전혀 없는지.
“저는 황성파 따위는 원래부터 관심 없었습니다. 이번 일은 모든 걸 제 잘못으로 설명하고, 형수와 아버지께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 대신,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외삼촌과는 절대 어떤 일도 같이 할 생각이 없습니다.”
철썩.
뺨을 힘껏 후려치며 이를 가는 외삼촌 조상호의 숨겨진 모습이었다.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의 차민석이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형수라니? 이 쓸모없는 놈! 말이라고 뱉으면 다 말인 줄 아니냐?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 모든 것은 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조씨 집안도 사는 일이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조상호 사장이 평소와 다르게 화를 참지 못하고 있는 힘껏 조카 차민석에게 손찌검과 독설을 퍼부었다.
“술에 취한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하룻밤 가지고 놀아서 태어난 것이 너다! 그걸 알면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해야지. 네 복수는 당당히 황성파를 차지하는 것이다. 잊었느냐? 한번 실패했다고 포기해? 막돼먹은 새끼! 은혜를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감히 그딴 헛소리를……. 네 몸에는 차씨 집안 피만 있느냐? 너는 조씨 집안의 유일한 핏줄이기도 하다.”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온 조희주가 맞아서 입술이 터진 아들 차민석의 얼굴을 보고 놀라 오빠 조상호에게 소리쳤다.
“오빠! 아픈 애한테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시끄럽다!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사내자식이 이렇게 약해빠졌어? 넌 신경 쓰지 말고 나가 있어!”
“제가 밖에서 들었어요. 납치라니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민석이한테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건가요?”
평소 오빠 조상호를 무서워해 눈도 잘 마주치지 않는 순종적인 조희주가 따지고 들자, 조상호가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멍청하기는…… 내가 시키긴 뭘 시켜?”
“하룻밤 가지고 놀다니요? 누가…… 오빠! 설마 민석이한테 이상한 소리 한 것은 아니겠죠?”
“닥치지 못해! 뻔뻔하게 부끄럽지도 않은 지 그런 소리를 입에 담는구나. 시끄럽다! 넌 가만있어!”
“설마…… 오빠가 민석이한테 이상한 짓을 시킨 건 아니겠죠?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조희주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떨리는 몸을 기대며 힘겹게 물어보자, 조상호가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멍청한 년! 넌 전부터 쓸모가 없었어. 반반한 낯짝으로 남자 하나 제대로 못 꼬시고 쓸모없기는…… 아들을 낳았으면 안방을 차지해야지! 독수공방하는 늙은이 하나 못 꼬시고. 멍청한 건 약도 없다는데. 에잇!”
“그만! 어머니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차민석이 어머니에게 욕을 하는 삼촌 조상호를 말리자, 그가 옆에 놓인 주스 병을 바닥에 던졌다.
여태까지 조카 차민석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얼굴로 화를 터트렸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조상호 사장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눈을 희번들하게 떴다.
“내가 애써서 차씨 집안으로 밀어 넣어줬으면 은혜를 갚을 것이지…… 네가 황성파 잡일하고 있을 때, 내가 전부 만들어준 기회를 그냥 날렸잖아. 입에 넣어줘도 못 먹으면 그게 사람이야? 똥 멍청이지! 다 된 밥에…… 쯧쯧! 그때 차현수 보스랑 결혼했으면 모든 것이 좋았잖아? 네가 감히 거절해서, 내 일에 초를 쳐?”
“헉! 오빠!”
조상호의 이야기에 몸을 눈에 보이게 떠는 조희주가 오빠 조상호를 불러 입을 막았다. 하얗게 질린 그녀가 아들 차민석의 눈치를 살폈다.
“차씨 집안으로 밀어 넣어줬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 어머니가 거절했다고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해서 숨겨진 일까지 입에 담아버린 것을 눈치챈 조상호가 차민석의 질문에는 입을 닫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조희주와 차민석에게 소리쳤다.
“흥! 요번 기회에 정신 차리고 빨리 차현수 보스를 꾀어서 혼인 신고서라도 작성해! 네 아들놈이 고집을 부려 납치한 차형욱의 애인 놈을 감싸는 바람에 이번에 일이 크게 어긋났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차민석? 내가 여기에 쓴 돈이 얼마인데, 남부파 돼지 놈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걸 다 망쳤다. 이번 기회에 네가 차현수 보스랑 혼인신고라도 해야지 내가 덜 억울할 거 같다. 네년이 말 못 하면 내가 차현수 보스에게 먼저 이야기를 해볼 테니 너는 잠자코 있던지.”
“안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오빠!”
“어머니!”
결국, 얼굴이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변한 조희주가 오빠 조상호 사장의 말을 듣고 말리다가 쓰러졌다.
차민석이 침대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부축했다. 침대 뒤에 있는 버튼으로 닥터를 호출했다.
몸이 약해 쓰러진 조희주의 모습에도 끝까지 짜증을 내는 외삼촌 조상호의 모습이 아프게 차민석의 눈에 들어왔다.
“보스! 조희주 님이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병원에서 왔습니다.”
“어쩌다가? 혹시 무리해서 그런가?”
“아니, 그게…… 쓰러지실 당시 조상호 사장이 병실로 찾아와 언성을 높여 싸웠다고 합니다.”
생각에 잠긴 차현수 보스가 오른팔 불곰의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쓰러졌다는 말에는 우려를 표현했지만, 조희주의 오라버니인 조상호 사장과 언쟁이 있었다고 하자,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차현수 보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쯧! 그 사람은 젊었을 적부터 유달리 몸도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지.”
“보스! 어떻게 할까요? 조상호 사장을 잡아들일까요?”
“아니네. 우선 감시만 붙여! 잠시 두고 보지. 급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시간이 걸릴 거야. 당분간 지켜봐야겠지. 그나저나 우리 은우는 지금 뭐 하고 있나?”
“큰 도련님이 출근하신 뒤, 은우 님은 지금 방에서 정도훈과 TV를 시청 중이십니다. 프로그램은 요즘 은우 님이 가장 즐겨보는 ‘가출 며느리’라는 일일 드라마이며, 유자차와 복숭아를 간식으로 들고 계십니다.”
병실에서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대충 언쟁이 있었다.’에서 끝이 난 보고였다.
은우에 관해서 묻자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차현수 보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팔 불곰 황호영을 쳐다봤다.
차현수 보스의 황당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불곰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은우 님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앞으로 3분 뒤면 ‘가출 며느리’가 끝날 예정이니, 곧 박동수와 함께 호신술 수업을 하러 체육관에 가실 거로 예상됩니다.”
‘저것들이 남의 며느리 일정을 저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부하들의 팬클럽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차현수 보스였지만, 은우의 모든 스케줄을 줄줄이 꿰고 있는 저 부하 놈의 모습과 흐뭇한 미소는 어이가 없었다.
조만간 황성파 교육을 좀 시행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은우의 호신술 수업을 구경하러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에 은우가 삐친 걸 만회하려면 빨리 가서 큰아들 차형욱보다 엄청난 칭찬을 해줘야겠다.’ 결심하고 있는 자신의 심각성은 전혀 모르는 최종 보스 차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