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울지 마. 괜찮아. 혼내줬어
매일 피범벅이 되어 지하 감옥을 오고 간다는 큰아들 차형욱의 소식을 듣고, 차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저 지독한 놈이 저렇게라도 분노를 풀어야 오늘 퇴원한다던 둘째 아들 차민석에게 불똥이 덜 튀지 않을까 기대를 한 아버지 차현수 나름의 꼼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놈들 손본다고 은우랑 본가에 산 지 일주일이 넘어가기에 잔인한 큰아들에 대한 소문쯤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놈 잔인한 거야 원래 사실이니. 잘난 명성에 티도 나지 않았다.
아예 이번 기회에 큰아들에게 부모 부양의 의무를 팍팍 느끼게 해주어 같이 살자고 할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황성파를 은우에게 물려주면 큰아들 놈이 쌍심지를 켜고 난리를 치겠지만, 꼴 보기 싫은 두 아들놈 대신 은우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단지 힘든 일을 은우에게 시키기 싫어 참고 있을 뿐, 달라고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큰며느리 은우에게 황성파를 줄 것이었다.
아까부터 마당에서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었다.
날아갈 듯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저 귀여운 노랑나비에게 예쁘다! 귀엽다! 말을 못 하니 입이 근지러운 차현수 보스다.
“허허! 나날이 은우가 무.서.워. 지는구나. 앞차기가 날카롭다. 날카로워. 형욱이는 얼마나 든든할까?”
진지하게 발을 자신의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리는 모습이 여전히 우아한 춤사위 같았다.
박동수가 구해온 노랑 도복과 은우의 진지한 표정은 마냥 귀엽기 짝이 없었다. 조직원들은 아까부터 할 일 없이 왔다 갔다 정원을 오가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박동수는 몸이 지나치게 가벼운 은우에게 맞춰 가장 효과적으로 약점을 공략하는 법만 가르치는 중이었다. 뜻밖에 호신술 배우는데 적극적인 은우라서 가르치는 박동수도 힘이 났다.
“은우 님! 남자는 자고로 이곳을 공략하면 한 방입니다. 쳐다보고 발로 차올리면 눈치채고 방어할 수 있으니, 눈은 그 사람의 눈을 계속 쳐다보거나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방심시킨 뒤 힘껏 발로 걷어찬 뒤 얼른 뛰어 피하셔야 합니다.”
“응. 이렇게?”
“어이구, 잘한다! 은우야, 멋지구나!”
과도한 칭찬 릴레이를 펼쳐 강의를 방해하는 차현수 보스를 소심하게 노려보다가 박동수가 다시 은우의 자세를 수정해 주었다.
“그럼 실전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오늘의 보조 교관으로 뽑힌 콜라 김영수가 한쪽 다리를 발발 떨며 건들거리는 연기를 시작했다. 은우 앞에 걸어와 어깨를 툭 쳤다.
눈에 힘을 주고 콜라 김영수의 까만 얼굴을 쳐다보던 은우가 앞으로 발을 쭉 뻗어 중심을 걷어찼다.
그 순간 분명 큰 힘을 준 것이 아님에도 할리우드 스타 저리 가는 동작으로 공중을 날아 두 바퀴 회전 후 바닥에 떨어지며 몸까지 부르르 떠는 콜라 놈이었다.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화려한 오버 액션이 펼쳐지자 골치가 아픈 박동수가 인상을 썼다. 은우는 자신의 발차기 위력 앞에 매우 놀라 작은 입을 벌리고 우와, 하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얼른 뛰어가 콜라 김영수의 무사함을 살피는 자상함을 선보여 주위 조직원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순식간에 작은 실전 연습이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감동의 휴먼 드라마로 마무리되었다. 감동한 차현수 보스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콜라 김영수의 연기를 치하했다.
오른손을 하늘로 쭉 뻗어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려 칭찬하는 차현수 아빠의 포즈에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은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눈물을 쓸쓸히 삼킨 진지한 박동수 호신술 선생님이었다.
“방금 차민석 도련님과 조희주 님이 오셨습니다. 알리지 말라고 하시며 바로 별관으로 가셨습니다. 조희주 님은 아직 몸이 매우 편찮으신 듯 보였습니다.”
“알았네.”
말없이 은우의 입에 소시지를 넣어주며 차형욱의 시선이 아버지 차현수와 마주쳤다. 가볍게 대꾸한 차현수 보스에게 은우가 소시지를 삼키고 말을 시켰다.
“아빠, 민석 왔어요?”
“그래, 은우야! 이제 건강해져서 집에 왔단다. 지금은 많이 피곤해서 자러 간 듯하니깐, 나중에 얼굴 보도록 하자꾸나. 그 나쁜 놈! 아빠가 잔뜩 혼내주마! 우리 은우한테 백배사죄 시킬 테니 기다려라.”
은우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절묘한 타이밍에 차형욱이 잽싸게 입에 넣어준 새우를 먹느라 더는 민석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오늘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차형욱 때문에 신이 난 은우도 포크로 이것저것 차형욱이 좋아하는 육류 반찬들을 챙겨주며 다정한 식사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내심 차현수 보스는 세월이 참 빠르다고 느껴졌다.
은우를 만나기 전에만 해도, 아들이 두 명이나 있어도 따뜻한 말 한마디 없던 식탁이었다.
둘째 차민석은 어려서는 그래도 귀여워해서 자주 안아주곤 했었는데, 커가면서 말도 없어지고 아버지와 거리를 두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아침은 주스나 한잔 마시고 학교에 가서 점심, 저녁을 보내고 오느라 식사를 같이하기 힘들었다.
주말에도 공부한다고 나가서, ‘킹 스파이크’ 얘들과 시간을 보내는지 집에 있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 힘든 어려운 아들이 되어갔다.
큰아들 차형욱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젊은 시절 자신은 불같은 성격에 말이 더 없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아들도 온종일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여는 걸 보기 힘들었다.
결국, 자신과 똑 닮아 그런지 무뚝뚝한 놈이라 납득했다. 서로 먼저 살가운 말 한 번 붙인 적이 없었다. 전쟁 같은 조직 다툼이 심한 시절이라 정신이 없었고, 혹시나 표적이 될까 싶어 아예 이혼한 부인의 집에 시선도 돌리지 않았었다.
전 부인의 사고 소식을 듣고서야 아들을 찾아 데리고 왔지만, 얼음덩이 저리 가게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애 어른 같은 놈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내내 싸움만 하러 다니더니 졸업과 동시에 독립해 나가버렸다. 자기 혼자 커버린 아들이었다.
자식을 전혀 돌보지 않았던 전 부인에게 오랜 시간 학대를 당하고 살았다는 걸 알고, 이가 갈렸으나 이미 죽은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위험한 조직의 상황에 아들을 너무 빨리 포기하고 데리고 오지 않은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무표정하고 감정 없이 변한 아들 차형욱의 모습이 애틋하고 안쓰러워 더욱 잘해주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었다.
막내인 차민석은 태어나서부터 같이 살아서 그런지 짧은 대화는 하고 지냈다. 몸은 약해도 차민석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어머니 조희주가 끼고 키우다시피 해서 그런지 공부도 잘하고 말썽도 크게 피우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었던 거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은우를 돌보며 대화의 즐거움과 표현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지만, 자신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아들들이고 소중한 가족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던 차현수 보스가 눈을 뜨고 큰아들 차형욱과 은우의 다정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겁게 식사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하는 자신이 부쩍 늙었다고 느껴지는 차현수 보스였다.
“아빠, 괜찮아요.”
아이같이 순수한 자신의 며느리 은우는 항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손을 잡고 웃어주었다.
가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한순간에 눈치채고 자신을 달래주거나 웃어주는 은우가 신기하고 고마웠다.
웬만한 아이라면 납치를 당하는 큰일을 겪었다면 원망을 하거나 무섭다고 도망이라도 갈 터인데,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주고 차민석을 걱정해 주는 씩씩한 은우가 고맙고 미안했다.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미쳤듯이, 그리고 자신의 부인이 떠나갔듯이 말이다.
조직의 안주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신비하고 여려 보이는 은우는 누구보다 강했다.
상처와 배신감에 힘든 시간을 보냈던 자신과 큰아들 차형욱 또, 황성파 식구들까지 모두 감싸 안아 주었다.
가장 큰 피해자가 밝은 모습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차민석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감싸주자, 은우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아버지 차현수다.
“그래. 괜찮을 거다. 고맙구나.”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것 같은 천사를 닮은 은우가 삭막한 차씨 집안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소중한 빛이 되었다.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켜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장이자 아버지 차현수다.
“매제! 안녕하십니까? 오늘 민석이가 퇴원했다고 해서 겸사겸사 들렸습니다.”
조상호 사장이 차현수 보스를 보자, 크게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차현수 보스의 오른팔 불곰 황호영은 저 뻔뻔한 조상호 사장의 얼굴에 혀를 내둘렀다.
젊어서는 자신이 말려도 적 앞에서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더니 죽기 전, 아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성격이 바뀌는가 싶었다.
성격 죽인 차현수 보스가 볼수록 마음이 아픈,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 불곰 황호영이었다.
10년 전이라면, 칼이 날아가도 백번은 날아갈 상황인데도 표정 관리가 되는 침착한 차현수 보스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아직 어리고 철이 없는 늦둥이 아들이 실수한 걸로 생각해 그만 용서해주지요.”
혹시나 싶어, 황성파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들어왔는데, 특별히 자신을 막거나 잡지도 않았다. 차현수 보스도 바로 만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완전히 편해진 조상호 사장이었다.
“자네가 약속도 없이 어쩐 일인가? 민석이를 보러 왔으면 그쪽으로나 가볼 것이지.”
평소와 다르게 냉정한 차현수 보스의 태도였다. 초조한 조상호 사장이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매제, 혹시 민석이 일로 저한테 무슨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 제 말 좀 들어보시지요. 사실, 저도 민석이가 요즘 늦게 사춘기가 왔는지 반항이 심해지고,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알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 선에서 어떻게든 무마시켜보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민석이한테 물어보시지요. 그놈도 제게 많이 반성했다며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불곰 황호영이 문 쪽으로 다가가 보고를 위해 달려온 부하의 소식을 듣고 차현수 보스에게 전했다.
“보스, 지금 조희주 님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합니다.”
차현수가 서둘러 마당으로 걸음을 했다. 은우와 큰아들 차형욱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울고 있는 차민석의 어머니 조희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가녀린 몸을 떨고 울며 고개를 조아린 조희주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불쌍해 보였다.
그런 그녀 앞으로 은우가 다가가려 했지만, 은우의 어깨를 꼭 잡고 있는 냉정한 차형욱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은우 씨! 못난 어미가 자식 교육을 잘못했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차민석이 어머니 조희주의 모습에 서둘러 일으켜드리려 했다. 처음으로 아들 차민석의 손도 쳐내 버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어머니였다.
당황한 차민석이 마당에 서 있는 은우와 형 차형욱 그리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아버지 차현수를 보고 자신도 어머니 옆에 꿇어앉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수!”
뒤따라 마당으로 온 조상호 사장이 여동생과 조카의 모습에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매제, 이만 용서해주시지요. 부모가 한 울타리에서 결혼도 안 하고 각방에 살고 있으니, 어린 민석이도 불안해서 그랬을 겁니다. 이제라도 민석이에게 안정적인 부모가 되어 주시면 괜찮을 겁니다.”
“오빠, 제발 흑흑. 인제 그만 하세요!”
조상호 사장의 말에 바닥에서 꿇어앉아 있던 조희주가 울음을 터트리며 사정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격양된 상태가 걱정된 차민석이 옆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자네! 이제 그만하게. 이 사람이 힘들어하지 않나. 민석아! 어머니 몸도 불편하신데, 이만 방으로 모시고 가거라.”
힘들어 보이는 조희주의 모습에 참다못한 차현수가 말렸다. 오히려 목에 힘을 주고 더 크게 외치는 적반하장(賊反荷杖) 조상호 사장이었다.
“아니, 매제! 그만 못 하겠습니다. 집안에 부모님은 이미 없으니, 제가 대신 희주 오빠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희주 언제까지 저렇게 두실 겁니까?”
“뭘 말인가?”
“그렇게 착하고 공부 잘하는 민석이가 이런 말썽을 부리는 이유 말씀입니다! 매제가 희주랑 혼인신고라도 하시면 훨씬 안정적으로 변할 것이 분명합니다. 민석이가 정상적이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걸 원하는 사람이 조상호 당신인가? 아니면 민석이 엄마인가? 말해보게. 아니지, 민석아 네가 말해보아라. 네 삼촌이 말한 것이 정말 이유였느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의 차현수 보스가 낮은 목소리로 조상호 사장에서 조희주 그리고 차민석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질문을 던졌다.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절대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익! 너는 가만있거라. 민석이를 생각해야지!”
“아버지, 저도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이번 일은 제 잘못이지, 어머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어머니 조희주를 부축하며 차민석이 외삼촌 조상호의 의견을 묵살했다.
얼굴이 붉게 물든 그가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모자가 쌍으로 안방에 자리를 깔아줘도 걷어차는 못난 꼴이었다.
“아무리 하룻밤이라고 해도! 그걸로 책임질 일이 생겼으면 책임지셔야지요! 민석이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만하세요! 더 이상은 회장님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오빠! 그날 회장님과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알 수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오며, 남매의 말싸움이 격해져 갔다.
특히 자신을 욕할 때는 침묵하던 조희주가 차현수 회장을 몰아붙이는 오빠 조상호의 말에 강하게 반발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거짓말하지 마라!”
“이젠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저로 충분하잖아요. 오빠의 욕심을 위한 희생으로…… 민석이는 절대 안 돼요! 제가 그렇게 놔둘 수 없어요.”
단호한 음성으로 오빠 조상호에게 맞서 처음으로 심하게 반항하는 조희주다. 머리끝까지 흥분한 조상호가 제 화를 참지 못해 손을 들어 조희주를 내리쳤다.
어머니를 감싼 차민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려 했으나 허공에 멈춘 조상호의 손은 더는 나가지 못했다.
“자네가 지금 내 집에서 감히 내 가족한테 손을 든 건가? 죽고 싶은가?”
으윽.
조상호 사장이 얼굴이 허옇게 변하며 지나치게 흥분한 자신의 모습을 뒤늦게 후회했다. 원래 자신의 말에 꼼짝도 못 하던 여동생 조희주의 반항에 순간 돌아버린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차현수 보스의 손에 잡힌 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했다. 저절로 입 밖으로 신음을 흘러나왔다.
한참 만에 더러운 걸 만진 듯 조상호의 손을 팽개친 차현수가 상황을 정리했다.
“민석 엄마도 그만하게. 민석아! 어머니 모시고 방으로 가거라. 나중에 이야기하자.”
단단히 결심을 한 듯, 차현수 보스의 말까지 거부한 조희주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동안 민석이를 친자식처럼 여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진실을 말하겠어요.”
듣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잠시 들은 것 같은 착각에 박동수가 귀를 후볐다. 아무래도 은우 님의 영향으로 간혹 시청한 아침 막장 드라마의 부작용인가 싶었다.
“흠! 희주 자네, 무슨 소리인가? 민석이가 잘못했다고 내가 민석이 아버지가 아닌가?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빨리 쉬게.”
헛기침을 뱉으며 차현수 보스가 조희주의 말을 끊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차현수의 눈짓에 조희주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 소리 아닌 거 아시잖아요. 제 오빠가 민석이를 이용 못 하게 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아요. 민석이도 이제 다 컸으니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보기보단 강한 아이니깐요.”
“꼭 그래야겠나?”
연약한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지만, 어느 때보다 단호한 표정의 조희주가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쥔, 어느덧 훌쩍 커버린 자기 아들 차민석의 손을 꼭 쥐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조희주가 힘겹게 입을 벌렸다.
“희주야! 그냥 차현수 보스가 너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진실을 말해라. 흥! 당연히 내가 대충 말했지만, 어미가 한 말이면 더 잘 믿을 거다.”
차라리 잘됐다는 듯이 한술 더 떠서 조희주를 재촉하는 조상호다. 오히려 주변을 둘러보며 기고만장하게 떠들었다.
“오빠, 무슨 진실이요? 그날 오빠가 술에 취해 쓰러진 저를 회장님 방에 억지로 밀어 넣은 것 말씀인가요? 아니면, 오빠가 회장님께서 드시는 술잔에 약을 탄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생사람 잡지나 마라.”
확연히 당황한 얼굴의 조상호가 펄쩍 뛰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며 주변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나 수상쩍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여겼던 비밀이 조희주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술은 차현수 회장님이 드시지 않으셨어요. 제가 그 잔을 버렸거든요. 또, 그날 회장님께서는 방에 오시지 않으셨어요. 오빠는 연회가 끝난 뒤 집에 가셔서 모르셨겠지만, 그 당시 정적인 명성파에서 쳐들어오는 바람에 회장님은 현장에 가시고, 저 혼자 회장님 방에 잠들어 있다가…… 흑흑, 제가 혼자 있다가 그만…… 쿨럭. 쿨럭.”
20년을 숨겨온 서러운 세월을 토해내는 조희주의 한 맺힌 음성이었다. 끝내 서러운 울음을 터트린 조희주가 숨이 막히는지 말하는 도중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이제 그만하시게! 민석이 너, 당장 어머니 모시고 안 들어가느냐?”
아버지 차현수의 호통에 갈팡질팡하는 차민석의 손을 움켜쥔 조희주가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 소리쳤다.
“아니에요. 회장님, 이젠 모든 진실을 말하고 싶어요. 제발 끝까지 말하게 해주세요. 그날 명성파에서 본가에 침입을 해왔고, 회장님 방에 자는 절 회장님의 여자로 오해하고……흑흑, 새벽에 회장님께서 방에 오셔서 구해주셨어요. 끝까지 모든 비밀도 지켜주셨고요. 임신 사실을 알고, 본인의 책임이라고 하시면서 민석이도 호적에 넣어주셨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큰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들을 절대 두고 볼 수는 없어요.”
다들 입이 절로 벌어지는 엄청난 고백이었다.
모두 차현수 보스의 친아들로 알고 있던 차민석이 알고 보니, 양아들이었다. 절대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었던 보스였기에 주변 조직원들도 몰랐었다.
차형욱에게 유독 신경 쓴 차현수 보스였지만, 이유는 어린 시절 친모의 학대와 무관심에서 온 죄책감이 컸다. 솔직히 큰아들, 둘째 아들 관계없이 속으로만 애정을 간직한 무뚝뚝한 보스였다. 절대 차민석보다 차형욱을 챙기지는 않았다.
황성파에서 유일하게 사실을 짐작하고 있던 차현수 보스의 오른팔 불곰 황호영만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지금 네가 뭐라고…… 그럼, 민석이가 차현수 보스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냐? 여태까지 날 속였단 말이냐? 이 망할 계집이!”
믿었던 자신의 평생 보험 같았던 조카 차민석이 차씨 집안 핏줄이 아니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조상호가 조희주에게 막말을 뱉었다.
“네! 속였어요! 만일 오빠가 다 알았으면요? 배 속의 아이는 죽이고, 다른 부잣집 남자에게 저를 어떻게든 팔아먹으려는 오빠의 계획을 제가 몰랐을 거 같아요?
차라리 그러느니 죽으려고 했는데, 회장님께서 저희 모자를 구해주셨어요. 제 자식 민석이를 품에 안은 순간 처음으로 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태어난 민석이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 고마운 분이세요. 표현은 서투셔도 민석이를 아끼고 예뻐해 주셨어요. 이기적인 제가 생명보다 소중한 민석이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회장님께는 민폐인 줄 알지만, 저희 모자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걸 염치없이 받아들였어요.”
어머니 조희주의 어깨를 힘 있게 받쳐주고 있었던 차민석의 손이 어머니의 말이 계속될 때마다 힘이 빠져나갔다. 충격적인 자신의 출생에 얽힌 사연들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동치는 가슴이었다.
푹 숙인 얼굴에는 어느덧 작은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숨죽이고 살아온 불쌍한 어머니! 죽고 싶었다가 자신 때문에 또, 살고 싶었다는 자신의 어머니!
울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차마 만지지도 못 하고 허공을 헤매는 어머니 조희주의 손이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입을 벌리고 허탈하게 서 있던 조상호 사장이 발작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이! 거짓말쟁이 년! 드디어 내 인생을 다 말아먹는구나. 그래, 내가 네년이 황성파 아들을 낳은 줄 알고 잘해줬더니. 감히 내 뒤통수를 쳐? 누구 씨인지 알 수도 없는 저딴 잡종을 조카라고 했단 말이야?”
아까부터 주위에 있던 조직원들과 차형욱은 이미 바닥까지 보인 조상호의 더러운 진면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차현수 보스와 관련된 일이라 그의 허락 없이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인상만 쓰고 있었다.
은우의 어깨를 잡고 있던 차형욱의 손에 힘이 빠지자, 부드러운 은실이 차형욱의 손을 스치듯 빠져나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얍!"
조상호 사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하늘빛에 순간 정신이 팔렸다가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 앞에 몸이 저절로 반으로 접혔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도 제대로 못 지르고 몸 전체를 부르르 떨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너무 의외의 장면이 연출되자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차형욱마저 은우를 말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유일하게 뒤쪽에 서 있던 박동수만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수업 성과에 감동하고 있었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정확히 들어간 발차기에 같은 남자로서 보기만 해도 그 아픔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돌렸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가족들은 처음 본 은우의 당찬 모습에 눈이 커졌다.
힘껏 올라갔던 은우의 오른 다리가 다시 땅에 내려오고 눈에 힘을 준 은우가 조상호 사장을 보고 따끔하게 한마디 건넸다.
“혼나!”
쪼르르 달려간 은우가 서로 떨어져 울고 있었던 젖은 얼굴의 조희주와 차민석을 한꺼번에 껴안고 괜찮다고 울지 말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달라붙은 은우 때문에 떨어져 있던 모자까지 저절로 셋이서 꼭 끌어안게 되어버렸다.
은우는 모르지만, 그의 파격적 행동에 놀란 조희주와 차민석은 순간 눈물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울지 마. 괜찮아. 혼내줬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극도의 분노에 조상호 사장이 은우가 누군지도 잊고 가까이 다가서려다가 차형욱이 반사적으로 날린 주먹에 맞아 뒤로 튕겨 나갔다.
잠시 정신이 나갈 정도로 센 주먹에 바닥을 뒹굴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조상호가 차형욱에게 따졌다.
“이건 우리 조씨 집안일이니, 이만 다들 빠져주십시오. 어차피, 그쪽도 민석이 저 아이에게 좋은 감정 없을 것 아닙니까? 매제, 아니 차현수 보스의 아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했나? 민석이는 내 아들일세. 한 번도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네. 자네가 혹여 내 아들에게 손 하나 까딱한다면 각오해야 할 걸세.”
아까부터 착잡한 눈으로 울고 있는 조희주와 차민석을 바라보던 차현수 보스가 싸늘하게 조상호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차민석이 그런 아버지 차현수를 바라보았다.
“저런 말은 들을 것도 없다. 태어날 때도 넌 차민석이고, 죽을 때까지 넌 차민석 내 아들이다.
네가 몰랐으면 했다만, 네 어머니가 평생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것도 아니지 싶어 그냥 두었다. 미안하구나. 평생 힘들어하셨던 네 어머니다. 여린 사람이니 네가 잘 감싸주었으면 좋겠구나. 민석아.”
말없이 아들 차민석을 바라보며 울고 있던 조희주가 어렵게 손을 뻗어 힘주어 차민석을 끌어안았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차민석이 어머니의 등 뒤를 힘줘 끌어안자,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아들의 품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조희주다. 발작이었다.
“학…… 하…… 하악! 하우윽!”
“어, 어머니! 왜 이러세요? 숨을 쉬세요.”
조희주는 바닥에 누워 입술이 파랗게 변해 금방 숨이 끊어질 듯했다.
그런 모습에 은우가 손을 뻗다 말고, 차형욱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얼굴을 구긴 차형욱은 다급한 은우의 눈빛과 차민석의 외침에 정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말았다.
길고 가느다란 은우의 손이 조희주의 가슴에 얹어지자, 차민석의 불안한 시선이 은우의 손으로 옮겨갔다.
은우의 손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하얀 빛이 조희주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거세게 흔들리는 차민석의 눈이 이 기적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한참 빛을 품은 손을 조희주에게 붙이고 있던 은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자 옆에 있던 차형욱이 황급히 은우를 강제로 조희주의 몸에서 떼어냈다.
“은우! 그만!”
선천적으로 심장과 폐가 약했던 조희주다.
20살 때까지 힘겹게 공부하고 일하며 오빠의 모진 구박을 견디며 살았었다. 그 뒤 어린 나이에 차민석을 키우며 말 못 할 비밀을 간직한 스트레스로 갈수록 약해지기만 한 몸이었다.
민석이를 가진 걸 알고 매일 죽으려고 했었다. 목을 메기도 하고 어설프게 칼로 손목도 그어보았지만, 그때마다 차현수 회장님이 불같이 화내며 자신을 다독여주었다.
죄 없는 아이는 죽이지 말고 낳은 뒤 생각해 보라고 설득하셨다. 약한 몸으로 어렵게 품에 안은 작은 생명은 점차 자신에게 살아갈 희망이 되어주었다.
그런 아이가 태어난 날, 말도 없이 ‘차민석’ 석 자가 써진 출생신고를 마친 차현수 회장님을 알고 뒤늦게 감사의 눈물을 터트렸다.
자신이 오래 살기 힘들 것 같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장 힘든 순간 민석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피어 보지도 못 했던 염치없는 자신의 사랑도 아쉽다고 느꼈다.
숨이 막혀와 이제 정말 눈을 감아야 할 때라고 느껴지는 와중,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와 어루만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길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따사로운 느낌이었다. 자신을 안아주는 기분 좋은 황홀함에 빠져 있었던 조희주가 차형욱 도련님의 외침에 눈을 떴다.
“아가, 괜찮아. 졸려.”
눈을 감고 힘없이 늘어진 은우를 품에 안고 소리치던 차형욱이 살며시 눈을 떴다가 감으며 작게 하품을 하는 은우의 모습에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혹시 전처럼 오래 잠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운 차형욱이 다시 한 번 은우의 이름을 부르자, 시끄러운지 눈을 감고 손을 올려 자신의 입을 턱 막는 하얀 손바닥에 긴장이 풀린 차형욱이었다.
잠이 든 은우를 방해하지 않으려 주위에 모든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방으로 가버리는 차형욱의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한 표정의 차현수 보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세.”
은우를 감싸 안고 혹시 아프지 않은지 돌보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차형욱은 많이 피곤한지 입까지 살짝 벌리고 깊게 잠든 은우의 모습에 안심했다.
새벽에 몇 번 은우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가 은우 손바닥에 입 막힘을 당한 차형욱은 그때마다 피식 웃으며 뽀뽀세례를 손에 퍼부었다.
잠을 자꾸 방해하는 그의 반대로 몸을 홱 돌리고 이불을 말고 잠에 빠지는 모습을 보아도 마냥 행복한 차형욱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눈앞에서 누가 죽든 말든 은우의 능력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에 서린 간절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식은땀이 맺힌 은우의 반듯한 이마를 본 순간 그 여자가 누구든 죽여버리고 싶었다. 은우가 싫어할 것이 뻔해 겨우 참았지만, 강하게 밀쳐 떨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자제했다.
만에 하나 은우의 몸에 이상이 있었다면, 그게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쉽게 일어날 거 같지 않은 은우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차형욱이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조직원을 확인하고, 자신과는 다른 이유로 잠을 이루지 못하셨을 아버지 차현수에게 갔다.
똑똑.
작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역시 작은 교자상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 차현수가 보였다. 해가 뜨자마자 자기의 방으로 온 큰아들의 모습이 얄미운지 대뜸 눈부터 흘겼다.
“그래, 이놈아! 어제는 네 마누라가 졸린다고 하자마자 아비고 뭐고 버리고 쌩 가버리더니, 늙은 아비가 궁금하긴 하더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형욱이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누구 말이냐? 민석이?”
“모른 체 마십시오. 조상호 사장 말입니다. 이미 제가 오래 참아 드린 것 모르십니까?”
역시 아비가 죽는 소리를 아무리 해도 씨알도 안 먹힐 놈이라고 차현수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게 말이다. 사실 어제 내가 작은 약속을 하나 했는데 말이다. 희주하고 민석이를 다시는 찾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황성파에서 그놈을 놓아주기로 말이다. 흠. 대신, 희주하고 민석이도 그놈을 다시 찾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이제는 조씨 집안과 인연을 끊겠다고 말이다. 영원히!”
“하! 아버님이 원하는 결과가 그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인연을 잘라내기를 말입니다. 민석이 어머니한테 관심 있으십니까? 가족이니 거머리처럼 떨쳐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기회가 좋았습니다.”
살짝 비꼬는 차형욱의 말투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부정하는 아버지 차현수다.
“다 늙어서 관심은…… 무슨. 상황이 어쨌든 내 집에서 어린 나이에 그런 험한 일도 겪고, 불쌍한 여자다. 평생 돌봐주고 싶은 사람이지.”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눈치 빠른 큰아들의 눈을 은근슬쩍 피하며 창밖의 마당으로 시선을 돌리는 차현수다.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은 차민석까지입니다. 은우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아니어도, 넘어가긴 하겠습니다. 그 아이의 처벌은 용서하든지 내치든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십시오. 하지만 조상호는 아닙니다.”
“납치 사건 전에 남부파 두목 놈과 불법 약품 사업을 벌인 것과 황성파의 이름을 팔아 뒤에서 한 나쁜 짓들을 따지자, 벌벌 떨더구나. 그 거머리 같은 놈을 황성파에서 놔주는 조건으로 희주와 민석이 곁에서 자연스럽게 떼어냈으니 성공한 것이지. 근데 네놈은 놀라지도 않느냐? 정 없는 놈! 민석이 말이다. 어째 묻지도 않아?”
“저는 상관없습니다.”
“매정한 놈!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것이겠지. 은우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도 없지 않으냐?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조상호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 내가 이미 놔주기로 약속했는데…… 내 이름값은 비싸다. 이놈아!”
“은우가 능력을 쓰는 걸 봤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황성파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날카롭게 변해 살기 어린 차형욱의 눈빛에 이미 조상호 사장의 미래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철저한 차형욱이 벌써 전화기로 뭔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끝났네. 조상호 끝났군.
혹시나 이렇게 진행될 것을 짐작하고 목숨을 보장하고 황성파가 쫓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큰아들 차형욱 회장 이야기는 쏙 빼놓은 능구렁이 차현수 보스였다. 지금 큰아들 차형욱은 염연히 황성파 소속이 아니었다.
하지만 찬바람 나는 대꾸가 섭섭한지 눈을 흘기는 차현수가 냉정한 자기 아들을 노려보다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네놈 언제까지 남부파 놈들 잡아 놓은 감옥에 새벽 산책을 하겠느냐? 내가 말하면 우리 은우가 너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협박조로 말투를 바꾼 차현수 보스가 큰아들을 놀리듯 입을 열어도 믿는 구석이 있는지 꿈쩍도 안 하는 독한 아들이었다.
역시 놀리는 재미는 쥐똥만큼도 없는 큰아들 놈이었다.
“에구. 내가 이제 눈도 침침하고 힘도 없다. 그저 재미없는 아들놈들만 있으니, 도시도 싫다. 곧 우리 은우 데리고 섬으로 내려가 공기 좋은 곳에서 낚시도 하고…….”
다시 시작된 아버지의 황당한 은퇴 계획 퍼레이드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차형욱은 은우가 깨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내내 귀가 간지러운 차형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