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아가, 덤벼 (19/23)

19. 아가, 덤벼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쪼그리고 앉은 은우가 차민석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는 정도훈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자 걷기 힘들 만큼 부어오른 종아리는 가느다란 줄이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차현수 보스가 일주일 뒤 자신을 다시 찾아온 아들 차민석의 종아리를 호되게 쳐서 혼낸 것이었다.

자신의 출생에 얽힌 사연을 모두 듣고 방에서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얼굴 살이 빠져 원래 작은 얼굴이 더 작아진 차민석이 한결 성숙한 눈빛으로 차현수 보스를 찾아왔다.

마침 옆에 같이 있던 은우가 차현수 보스가 한 대 칠 때마다 추임새를 넣지 않았으면 한 달 이상 걷지 못할 만큼 맞았을 차민석이었다.

힘껏 내리칠 때마다 들려오는 은우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결심하고 혼내던 아버지 차현수의 팔에 힘이 빠졌다.

찰싹.

“아야.”

찰싹.

“아파.”

찰싹.

“아고.”

딱히 때리는 차현수 보스를 말리지는 않으면서 회초리로 때릴 때마다 은우 특유의 멍한 표정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불곰 황호영이 심각한 상황에 차마 웃음을 터트릴 수 없어 방을 뛰쳐나갔다.

차현수 보스도 말썽꾸러기 막내아들놈을 작정하고 혼내주는데, 한 대씩 내리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은우의 목소리에 마치 은우가 아픈 듯한 착각이 들어 심하게 때리지 못하고 금방 멈추고 말았던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태어나서 처음 막내아들을 때린 아버지 차현수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에게 맞은 차민석이나 둘 다 후련해 보였다.

회초리를 맞아 시뻘겋게 멍이 들어 있는 아들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는 고개 숙인 아버지의 흰머리가 군데군데 섞인 머리를 말없이 바라보다 눈물을 보인 차민석이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또다시 나쁜 짓 하면 다리몽둥이가 뚝 부러지게 맞을 줄 알아라. 어린놈이 아버지가 뭐야…….”

아빠도 아니고. 끝을 흐리며 투덜거리는 차현수 보스의 말을 알아듣고 오랜만에 차민석이 작게 웃었다. 큰놈이나 작은놈이나 아빠 어쩌고저쩌고하며 타박과 한탄의 말이 들려왔던 것이었다.

“그래, 민석아! 그렇게 웃어라. 네 어머니는 너 하나만 바라보고 살고 있다. 앞에서 자주 웃어 드리는 것이 효도지. 은우 덕에 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으니, 걱정 근심 없이 살게 해드리려무나. 넌 누가 뭐래도 나 차현수의 둘째 아들이다. 당당하게 행동해라!”

약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차민석의 어깨를 두들기는 차현수의 모습을 보더니 은우가 무슨 생각인지 차현수 보스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은우야! 너도 아빠 위로하는 것이냐? 허허허.”

바싹 옆에 앉아 있는 은우를 번쩍 들어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 없는 위로를 받아들이는 차현수 보스였다.

은우가 손을 뻗어 차민석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자, 차민석도 고개를 들어 은우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전과 다르게 맑게 눈을 뜨고 은우를 마주한 차민석이 속으로 다짐을 했다. 자신의 목숨은 은우가 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감사의 정도가 너무나 깊어 입 밖으로 내뱉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몸이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자신의 몸도 은우가 치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형욱 형님의 태도를 볼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우 형수에게도 위험한 일이란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 알고 홀로 방에서 힘든 시간을 겪으며 살아야 할 이유조차 차츰 잃어갔다.

민망한 마음에 쓸모없는 자신을 지우고 싶었고, 아니면 이곳을 나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숨어 살고 싶었다.

그 혼란의 시간에 계속 생각나는 것은 하늘을 옮겨놓은 눈동자였다.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당당히 싸워주었고, 생명도 이어준 은인이 되어버린 사람이 끊임없이 생각났다.

이대로 지워버리기에는 너무 큰 사랑이었다. 자신을 납치한 나쁜 사람에게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베푸는 손길이었다.

타인끼리의 사랑이 아닌, 우습게도 부모의 사랑처럼 아낌없는 헌신적인 사랑에 가슴이 메어졌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 싶었다. 자신의 하찮은 목숨을 지지해줄 목적이 생겨났다.

자신이 죽기 전까지 은우의 은혜를 갚으며 살 결심을 했다. 따뜻한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잠시 이곳을 떠나 마음도 정리하고, 자신의 마음속 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 이미 소울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괜찮으시다면 이곳을 떠나 유학을 갔다 올까 합니다. 넓은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오겠습니다.”

차민석을 뚫어지라 쳐다본 차현수가 흔들림 없이 다부진 아들의 눈빛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원하는 꿈이 있으면 이루어라. 그래! 가서 머리도 식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오너라. 근데, 네 어머니가 섭섭해 하겠구나.”

“어머니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또 건강이 허락하시면 저를 만나러 오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죽도록 공부해서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민석, 어디가?”

“네, 형수! 금방 올 테니 꼭 기다려 주세요.”

제 아들 차민석이 은우를 향한 눈빛에서 황성파 부하들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주인을 보는듯한 충정을 품었음을 느낀 차현수다.

그렇게라도 아픈 상처를 다잡고 살아갈 희망을 느낀다면 자신은 아들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었다.

한때의 고마움일 수도, 평생을 갈 충정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칼날을 대신 맞아줄 만큼 형수인 은우를 향한 애정의 눈빛이 충정으로 바뀐 것에 차라리 감사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출근하는 차형욱을 따라 회사에 간 은우다.

엘리베이터 문에 열리자마자 열렬히 환영하는 문재준과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재회 인사를 했다. 매시간 상납 되는 은우가 좋아하는 간식 시리즈에 은우의 기분도 들떠 보였다.

오후에는 잘 주지 않던 버섯 모양 과자가 코코아와 함께 나오자 손뼉을 치며 문재준과 눈을 마주치고 웃는 은우다.

그 모습이 못마땅한 차형욱이 은근슬쩍 은우가 있는 소파로 다가가 좋아하지 않는 다디단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과자를 서로 먹여주며 작은 질투를 표현했다.

은우의 부재 동안 쌓인 학습지를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문제를 풀고 있는 은우를 흐뭇하게 지켜보며 채점을 해주거나, 조언을 건네는 학습지 교사 문재준이었다.

빨간 줄이 쭉쭉 있는 답안지도 엉뚱한 답변들도 문재준은 한없이 너그럽기만 했다.

전에는 틀린 부분을 수정해주고 틀린 부분은 반복 설명하는 엄한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친절한 문재준 씨였다.

완전히 ‘꼴찌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표정으로 모든 걸 잘했다고 말하는 평소와 다른 문재준 때문에 오히려 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형욱에게 다가갔다.

요즘 불량 회장님인 차형욱을 대신하느라 더 바쁜 일정에 시달리는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수시로 회장실에 들러 은우를 살피고 다시 바쁘게 회장실 밖에 나가는 문재준이었다.

“아가, 재준 아파?”

작게 귀에 속삭이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차형욱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릎 위에 은우를 앉히고 꼭 끌어안았다. 뽀얀 볼에 입술을 여러 번 붙였다가 떼자 간지러운지 웃는 얼굴에 보이는 볼우물을 자신도 모르게 혀로 핥아 올리는 차형욱이었다.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게 사랑스러운 은우를 꼭 끌어안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하얀 목에 입술을 비비자, 까르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였다.

얼굴을 마주 보자 웃음기가 가득한 하늘이 심장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자신도 모르게 시작된 깊은 입맞춤의 시간이 길어지자 숨이 차올라 헐떡이는 은우의 가쁜 숨결이 느껴졌다.

차오르는 흥분으로 빠듯한 아픔을 느끼며, 좀 더 욕심을 내 단단한 혀를 깊이 밀어 넣었다.

“흐, 읏…… 으읍! 하아……. 으흣.”

옷 안에 들어간 손이 매끄러운 은우의 맨살을 정신없이 쓸어내리며, 깊게 넣었다 빼는 뜨겁고 단단한 혀의 움직임이 둘이 하나가 되는 행위인 양 격정적으로 움직였다.

은우가 즐겨보는 드라마 OST가 흘러나왔다. 은우가 드라마를 보고 따라서 흥얼거리는 걸 듣고, 바로 전화 벨소리로 설정해놓았다.

뜨거운 열기를 무참히 깨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차형욱이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은우를 끌어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빨갛게 변한 말캉한 입술을 작게 벌리고 자신의 품에서 숨을 고르는 은우의 입술에 깃털같이 가벼운 입맞춤을 반복하며 은우의 숨이 진정이 되길 기다렸다.

한참 숨을 고르던 은우가 진정이 된 건지, 떨어지는 차형욱의 입맞춤을 따라 흉내 내 입술을 붙여 부드러운 혀를 형욱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가까스로 진정된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겁 없는 은우의 행동이었다.

차형욱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번들거리며 몸속 깊이에서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사나운 신음이 막힌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입안에 침범한 촉촉한 혀를 말아 당겨 아프게 않게 질근질근 씹고 마치 은우를 자신의 몸 안으로 밀어 넣듯이 힘줘 끌어안았다.

“아! 아흣…… 앗!”

바싹 당겨진 몸과 리듬을 타듯 마찰을 하며 커다란 손으로 날개 뼈를 쓰다듬자, 달콤한 신음이 은우의 입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을 유혹에 빠트리는 전설의 인어 목소리처럼 자신을 묶어 미치게 하는 마성의 소리였다.

매끄러운 피부를 만지다가 심한 허기를 느낀 차형욱이 얼굴을 내렸다. 뜨거운 혀를 내밀어 달콤한 생크림 맛이 느껴질 것 같은 피부를 맛보자 간지러운지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차츰 입술이 위로 올라가며 아프지 않게 여린 살을 빨아들이고 질근거렸다. 하얀 피부 곳곳에 붉은 소유의 꽃을 피워낸 짐승이 만족스럽게 으르렁거렸다.

유연하게 휘어진 허리를 바라보며 차형욱의 눈빛이 변해갔다. 얇은 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밑으로 이동했다.

단추가 풀린 은우의 바지 지퍼가 내려가며, 손쉽게 목적지에 도달한 차형욱이 폭신한 언덕을 주물렀다. 손 모양에 따라 부드럽게 일그러지는 토실한 엉덩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가운데로 뻗어 은밀한 곳의 모양을 더듬어보았다.

타들어가는 열기에 정상적인 사고를 멈춘 뇌와 몸이 따로따로 행동했다. 흠칫 놀라 몸을 움직인 은우를 달래듯 입술을 포갠 차형욱이 손으로 자신의 허리띠를 풀고 있었다.

갑갑하게 갇혀 뚫고 나올 듯 아픔을 호소하는 짐승을 가둬둔 감옥을 열자, 새카맣던 눈동자가 푸른빛을 띠고 사납게 번뜩였다.

크윽.

멈추었다 다시 시작된 휴대전화 소리에 조금 정신이 든 차형욱이 고개를 숙이고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잔뜩 흐트러진 와이셔츠 밑에 핏줄이 줄줄이 곤두서 만져지도록 주먹을 움켜쥔 차형욱이 힘겹게 은우의 몸에서 떨어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바닥에 떨어져 내린 서류들이 보였다.

몸을 완전히 책상 위에 뉘이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심장이 나른하고 매혹적으로 빛나는 하늘빛 눈동자로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위로 올라간 은우의 티셔츠 때문에 보이는 티 없이 하얀 피부의 그 매끄러움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의 손이 저절로 다가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베이지 색깔 바지의 버튼이 열리고 지퍼가 반쯤 내려간 은우의 모습에, 견디지 못하고 회장실 안에 마련된 화장실로 뛰듯이 도망간 차형욱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은우의 걱정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차형욱은 자신의 커다란 책상 위에 몸을 말고 잠이 든 자신의 천사를 발견했다.

나날이 의도치 않는 은우식 유혹이 즐겁고 힘겨운 차형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리라면 적지 않게 해보았건만, 처음 성에 눈을 뜬 10대 사춘기 소년처럼 자제할 수 없는 자신이 낯설고 무서웠다. 자신도 모르게 은우에게 상처를 입힐까 매일 두려웠다.

전에 약까지 써가며 자신을 유혹하려 드는 여자들의 손도 냉정히 쳐냈던 자신의 자제심이 은우 한정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니 어이가 없었다.

고맙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도록 끈질기게 울리는 드라마 OST에 휴대전화를 보니, 원망스런 이름 석 자가 깜박거렸다.

[아버지]라고 써진 글자를 한참 노려보다 거절 버튼을 눌렀다. 곱게 잠든 은우의 옷차림을 정리해 주고, 회장실 구석에 마련된 은우 침대에 올려놓았다.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내리며, 인상을 찌푸린 차형욱이 다시 올리는 휴대전화의 거절 버튼을 꾹 눌렀다. 이는 차형욱의 작은 보복이었다.

은우를 데리고 출근한 큰아들 때문에 종일 무료한 차현수 보스가 큰아들의 휴대전화로 전화했다.

아들놈이 절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비서실 문재준에게 확인한 바로는 차형욱 회장이 회장실에서 은우랑 둘이 알콩달콩 놀고 있다고 들었다.

물론 문재준 비서실장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전했지만, 멋대로 해석한 잔뜩 심통 난 차현수 보스였다.

‘이놈이 전화도 안 받고 늙은 아버지를 혼자 버려두다니…….’

은우 목소리를 반드시 듣겠다며 전화기를 다시 들어 올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래 힘줄처럼 질긴 차현수 보스의 끈질긴 쇠고집이었다.

“그래, 전보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정도훈 선생한테 말을 들었네. 어떤가?”

“예, 회장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마당이 훤히 보이게 여닫이문을 활짝 열어놓고 녹차를 즐기는 차현수 보스와 맞은편에 앉은 조희주의 모습이 보였다.

핏기가 없이 창백했던 얼굴과 불안하게 흔들리던 모습에서 벗어나 생기를 머금은 조희주가 40대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별채에서 잘 나오지 않던 조희주가 건강을 회복하자, 차현수 보스가 좋아하는 녹차를 직접 우려내주었다.

차를 즐기는 차현수 보스를 알고 있는 조희주가 젊었을 때부터 다도를 익혀 두었다. 민석이를 가지기 전에도 자주 차현수 보스와 특별한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했었다.

깔끔하고 깊은 맛에 녹슬지 않은 실력이라 칭찬하며 흡족한 차향을 음미하는 차현수 보스의 모습에 간간이 웃어 주는 조희주다.

“내가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우리 은우가 고생했지. 내가 며느리 복은 있는 모양이네.”

“감사하다는 말을 아무리 건네도 부족한 은인입니다. 복은 제가 있는 모양이에요.”

평소와 다르게 가벼운 농담을 입에 올리는 조희주가 보기 좋은지 크게 웃으며 차현수 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억눌려왔던 비밀에 힘겨워하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져서 그런지, 편안한 안색의 조희주다.

또 그런 조희주의 모습이 안심된 차현수 보스도 기분 좋게 녹차의 향을 즐기며 조희주와 소소한 일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석이랑 처음으로 떨어지는데 섭섭하겠구려.”

“시간이 필요해 보였어요. 또, 목표가 생긴 남자의 발목을 잡는 짓을 할 수는 없지요. 그게 아무리 어미라도요. 눈빛을 봤거든요. 또렷하게 이루고 싶은 것이 생긴 민석이의 눈빛이요.”

강단이 있는 조희주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는 차현수 보스였다.

그래 조희주의 겉모습에 속아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녀는 뜻밖에 강하고 용기가 있는 여자였다. 그렇기에 그 모진 세월도 견디고 살아왔던 것이었다.

“자네가 한번씩 여행 삼아 민석이한테 가면 되겠지. 이젠 슬슬 여행도 다니고 그러게.”

“저 혼자 그렇게 멀리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 갈 수 있을지…… 금방 온다고 했으니 기다릴 수 있어요.”

“큼, 혼자 못 가겠으면……. 내가 가주든지 말든지. 나도 제대로 여행을 할 기회가 없었으니. 아니. 뭐, 자네랑 꼭 같이 가자는 그런 말은 아니고. 싫으면 혼자 가든지…….”

차현수 보스답지 않게 마당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횡설수설하며 대화를 잇자, 조금 상기된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조희주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뇨, 좋아요. 같이 여행 가는 것 싫지 않아요.”

“흐음, 그럼 그러든가.”

조희주 쪽으로는 절대 시선을 보내지 않고, 혼잣말하듯 퉁명스럽게 대꾸한 차현수 보스가 다 마신 빈 잔을 괜히 입가에 가져갔다.

조용히 새로 우린 맑은 녹차를 차현수 보스의 찻잔에 채워준 조희주의 곱게 주름진 눈가가 둥글게 접혔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 세 명이 건들거리며 앞으로 걸어왔다.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앞에 보이는 사람을 보고 다가갔다.

“어이! 이봐. 우리랑 놀까?”

“오, 예쁜데? 저쪽으로 같이 가자. 좋은 곳 구경을 오빠들이 시켜주마.”

“말이 없는 걸 보니 무서운 모양인데, 얘들아 조용히 좀 해라. 이쪽으로 오시지요.”

혼자서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하늘빛 눈동자가 드러나자 앞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빛났다.

“대단한데?”

휘파람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오며 음흉하게 웃던 남자가 손을 뻗으며 은우의 어깨를 잡아왔다. 조금 당황한 은우의 시선이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을 찾았다.

“뭘 그렇게 둘러봐? 이 오빠들이나 보라니깐. 이리 와.”

“나빠. 덤벼.”

거칠게 어깨를 움켜쥔 남자가 은우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앞 발차기에 얻어맞고 360˚ 회전을 하며 바닥에 나뒹굴어 졌다.

“에이! 이게 무슨 짓이냐?”

은우를 잡으러 달려드는 남자의 몸을 뛰어넘어 그 남자 뒤에 착지한 가벼운 은우의 신형이 잽싸게 뒤를 돌아 남자의 무릎 뒤를 강하게 차올렸다.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은 남자의 목 뒤를 양팔에 깍지를 끼고 동시에 휘두르자, 앞으로 3바퀴나 굴러 바닥에 기절한 남자의 처참한 뒷모습이 보였다.

눈가에 나름 힘을 준 은우가 마지막 남은 남자를 향해 견제의 시선을 보냈다. 화가 잔뜩 난 마지막 남자가 은우의 뒤로 달려가 양팔로 은우의 팔과 몸통을 한꺼번에 옭아맸다.

눈빛이 바뀐 은우가 뒤로 발차기해 남자의 중심을 가격하자, 은우 몸을 구속했던 남자의 팔이 떨어졌다.

공중에 날아오른 쭉 뻗은 은우의 오른발이 정확하게 남자의 턱 끝을 쳤다.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족히 10바퀴는 바닥을 뒹굴며 저 멀리 구석에서, 큰 몸을 사정없이 떨었다.

깜짝 놀란 은우가 후다닥 달려가 마지막에 넘어진 남자의 몸을 살펴보자, 가늘게 뜬 눈에 눈물이 고인 덩치 큰 남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은우 님, 그런 엄청난 발차기에 맞아 영광이었습니다.”

마치 유언이라도 건네는 듯 경건한 남자의 말에 은우가 남자 몸의 다친 곳을 황급히 찾자, 멀리서 보고 있던 박동수가 다가와 손에 쥐고 있던 책자로 남자의 머리통을 가격하며 작게 타박했다.

“아주 영화를 찍어라, 찍어! 빨리 못 일어나?”

예전 황성파 무술 교관 시절 가르쳤던 후배 놈들의 더욱 진화된 오버액션 시범에 단단히 머리가 아픈 박동수다.

마당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관람 중인 차현수 보스, 정도훈 형님, 차민석 도련님과 조희주 님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참았다.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이 엄청난 물개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분 박동수에게 만만한 사람이 없는 VIP급 공연 관람이라 마음에 안 들어도 화를 낼 수도, 타박할 수도 없어, 속만 답답한 박동수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은우! 잘한다. 멋지다! 최고, 아니, 최강 며느리다!”

“은우 씨가 정말 잘하네요. 영화에서 본 거랑 똑같아요. 어쩜!”

“형수! 엄청나게 빠르십니다.”

“오, 은우! 발차기 좀 하는데?”

저 중에 유일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조희주 님만이 진정한 감탄사를 터트리며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관중을 가장한 연기자들임을 잘 아는 박동수가 울상을 지었다.

자신은 진짜 제대로 은우 님을 가르치고 싶은데, 자신의 수업 시간은 정말 험난하고 마귀들이 잔뜩 껴있었다. 고운 말만 쓰던 은우 님이 변하고 있었다.

조만간 차형욱 회장님에게 몰래 일러바쳐야겠다고 결심한 박동수다.

무술에 소질은 넘치는 은우 님이었다.

뜻밖에 몸이 날래고, 점프력과 유연성은 최상급이었다. 문제는 힘이 없어서 아주 정교하게 들어가는 기술만을 연마해야 통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제대로 맞기도 힘들고, 맞는다고 해도 지금 시범을 보인 망할 후배 놈들처럼 날다람쥐에 빙의해 360˚ 회전을 몇 바퀴씩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 후배들이 보이는 몸동작에 감탄했다. 몇 년 전보다 정말 무술이 늘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최강 오버 액션 놈한테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가 머리통을 때릴 만큼 어이가 없었다.

아니 한두 바퀴도 기막힌데 무슨 엉덩이에 수류탄이라도 터진 양, 열 바퀴를 도는지…… 다음 시범 때, 저놈은 무조건 아웃이라고 이를 가는 엄한 무술 선생님 박동수다.

“은우!”

저 멀리 차현수 보스가 떠맡긴 황성파 서류를 가볍게 해결하고, 마당으로 걸어 나온 차형욱 회장님이 보였다.

박동수는 자기편이 한 명 생긴 것을 환영했다. 정도훈 형님이 사준 검정 줄이 쳐진 노랑 체육복에 입은 은우 님이 날듯이 뛰어갔다.

차형욱 회장님이 품에 안긴 은우 님을 두 바퀴 돌렸다가 내려놓자 눈을 마주치고 웃는 닭살 장면을 선보이는 커플이었다.

“어, 왔느냐? 서류 다 처리하고 온 거지?”

큰아들 차형욱의 빠른 등장에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버지 차현수가 입을 열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차형욱이 은우와 함께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가족이 모두 모인 테이블과 향긋한 차향이 가득한 마당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차형욱, 너 좋은 구경 놓쳤다. 은우가 덩치 큰 남자 셋을 완전 멋지게 날려버렸는데…… 잘하면 금방 너도 이기겠더라.”

“그래, 은우랑 한번 붙어봐라. 나는 은우가 이긴다는데 내 전 재산을 거마.”

“은우 씨가 벌써 큰 도련님을 이기시겠어요? 저는 형욱 도련님에게 걸게요.”

놀부 심보의 차현수 보스가 잘 지내는 큰아들과 며느리 싸움을 붙이는데, 옆에서 청순한 미모의 차민석 어머니 조희주가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다.

옆에 앉은 차민석이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건강을 회복하고 요즘 밝아지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 좋지만, 지나치게 왈가닥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정도훈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척하더니, 은근슬쩍 한 다리를 걸쳐왔다.

“은우야, 나도 네 편이다. 부디 악당 차형욱을 쳐부수고 세계 평화를 지켜 줘! 인류는 너만 믿는다.”

박동수가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하는 차씨 가문의 가족들을 바라보다 살짝 은우 쪽에 돈을 걸었다. 뒤쪽에서 구경 중인 황성파 조직원들도 동요하는 눈빛이었다.

차형욱은 자신에게 은우와 싸우라고 부추기며 돈을 거는 식구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철저히 무시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헛소리는 무시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어라, 은우야, 형욱이가 자기랑 상대도 안 돼서 무시하나 보구나.”

“어머나, 그럴 리가 있나요? 은우 씨 다칠까 봐 그러신 거지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큰아들 놈 곤란한 모양새가 즐거운지 도무지 화제를 돌릴 생각이 없는 차현수다.

능글맞게 농담을 하며 자극하는 아버지 차현수보다, 옆에서 말을 받아주며 사심 없이 웃고 있는 조희주가 더 고단수로 보였다.

“은우야, 형욱 아가 지켜줘야지. 그러려면, 당연히 형욱이보다 더 강해야겠지?”

접시에 놓인 작은 쿠키를 집어 평소처럼 은우의 입에 넣어주려 은우 얼굴을 마주 본 차형욱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정도훈의 말이 결정타인듯했다.

박동수 수업 중 벌어진 오버액션 시범의 부작용으로 요즘 자신감이 과도한 초보 무술인 은우다. 평소와 다르게 아가 차형욱을 향한 승부욕에 불타 하늘빛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버린 차형욱이었다.

“그만하십시오. 제가 왜 은우랑 대결을 합니까?”

일부러 무시했던 주변의 부추김을 뒤늦게 정면으로 반대한 차형욱이지만, 이미 눈치 빠른 주위 사람들은 승부욕 넘치는 은우의 시선을 눈치채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었다.

늘 표정 없고 차가워 거리감이 느껴지던 차형욱과 가족들의 거리감이 훨씬 좁혀진 훈훈한 모습에, 조직원들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판돈을 높이고 있었다.

“아가, 덤벼.”

손에 쥔 음료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난 은우가 차형욱 아가를 보며 정식으로 도전했다.

도대체 박동수 수업 시간에 무얼 배운 건지, 화끈한 말투에 당황한 차형욱이 은우를 보았다.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하며 쓰러지는 가족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차형욱이 은우를 달랬다.

‘덤벼’란 단어를 가르친 정도훈은 차형욱의 얼굴을 보며, 통쾌함에 심하게 웃다가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이미 대결로 결심을 굳힌 은우가 차형욱의 팔을 잡아 의자에서 일으켰다.

주변은 주말 예능프로그램을 보듯 흥미진진하게 표정으로 은우와 차형욱의 대결을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앙증맞게 주먹을 꼭 쥔, 보기에도 아까운 사랑스러운 은우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는 차형욱이었다.

“얍!”

사람을 방심시키는 귀여운 기합 소리에 멍하니 서 있는 차형욱의 복부에 조그마한 은우의 주먹이 닿았다. 차마 반격을 할 수도, 그렇다고 피하기도 뭐한 상황에 짧은 시간 깊은 고민에 빠진 차형욱이었다.

자신의 주먹을 그대로 맞고 아무 반응도 없는 차형욱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펴보는 은우의 시선을 눈치챈 차형욱이 몸을 앞으로 어색하게 수그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야! 아.프.다.졌.다.”

박동수의 옆에 서 있던 열 바퀴 오버액션의 주인공 콜라 김영수가 차형욱 도련님의 발 연기에 입이 근질거렸다.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신성한 시범 연기를 저렇게 망치는 차형욱 도련님에게 ‘커트!’라고 외치고 다시 시키고 싶단 망상에 사로잡혔다.

국어책을 읽는 엄청난 연기를 보며, 다들 차형욱 회장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그 가운데 테이블이 엎어질 만큼 큰 웃음을 터트린 나이를 거꾸로 먹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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