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애인 있나?
곧 있을 YJ 그룹 창립 기념 파티 준비로 바빠진 차형욱 회장은 일찍 출근하고, 드라마 삼총사 은우, 정도훈, 차현수 보스가 TV 앞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잘린 망고와 딸기가 보기 좋게 담긴 접시를 들고 조희주가 들어왔다.
“은우 씨, 혹시 민석이 친구 이현우 군을 알고 있나요? 그 아이가 민석이 유학 소식을 듣고 찾아왔어요. 은우 씨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현우?”
조희주는 모르지만, 이현우가 ‘킹 스파이크’ 클럽 부대장으로 차민석과 함께 학창 시절 온갖 말썽을 부리고 다녔던 악동임을 알고 있는 차현수 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훈아, 날씨도 많이 풀렸으니 마당에 자리를 마련해 은우 손님을 같이 접대해주어라.”
과보호 레이더를 작동한 차현수 보스가 확 트인 공간에서 만나게 하고, 보호자로 정도훈을 같이 보내려 했다.
의아한 얼굴로 차현수 보스를 바라보던 정도훈이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은우를 찾아온 손님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요. 다과 상을 준비해 마당에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자리가 준비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정도훈이 은우와 함께 마당에 이미 나와 있는 차민석과 그 친구에게 걸어갔다.
“까매.”
은우가 손가락으로 차민석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의 뒷머리를 거칠게 매만지고 이현우가 손을 흔들었다.
“어이, 오랜만이다.”
붉은 머리를 까맣게 염색한 이현우의 바뀐 모습이 신기한지 계속 까맣다고 중얼거리는 은우다. 옆에 서 있는 정도훈에게 이현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야, 너도 빨리 인사해. 떼써서 여기까지 쫓아오면서, 내 말 잘 듣기로 했지?”
은우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지며 혼잣말을 하는 이현우를 보자, 얼른 그가 뒤로 손을 뻗어 숨어 있던 빨강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앞에 세웠다.
“우와. 언니, 공주님처럼 예뻐.”
볼이 통통한 여자아이가 오빠 이현우 등 뒤에 숨어 있다가 앞으로 나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은우를 보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자기 쪽을 보고 언니라고 부르자 뒤를 돌아보는 은우의 모습에, 웃음을 겨우 참은 정도훈과 차민석이었다.
“야! 언니 아니야. 오빠라고 다시 인사 제대로 해.”
오빠 이현우의 재촉에 빨강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며 공주 인사를 하는 여자아이였다.
“안녕하세요. 햇살 유치원 행복반 이현주입니다.”
새침한 꼬마 이현주의 인사를 받고, 은우도 살랑살랑 손 인사를 건넸다.
정도훈도 공주 인사를 했다고 오빠 이현우의 타박을 받고 있는 꼬마 아가씨가 귀여운지 미소를 보냈다.
이현우가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재혼하시면서 생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여동생이 이현주다. 어른들 틈에서 자라서 그런지 하는 행동이 앙큼하고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쉰 살에 처음 딸을 낳은 엄청난 딸 바보 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워서 그런지, 한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차민석의 집에 방문한다는 오빠의 말을 듣고, 1시간을 울고불고 떼를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동생을 데리고 온 이현우다.
말은 투박하게 해도, 여동생 이현주의 부탁은 쉽게 거절 못 하는 오빠 이현우를 잘 알고 있는 미운 7살 이현주다.
폭신한 방석이 깔린 나무 의자에 한가롭게 둘러앉아 다과를 즐기는 일행이었다.
통통한 이현주를 돼지라고 구박하면서 계속 말싸움을 하는 남매였다. 그 시끌시끌한 남매를 지켜보며 금세 편한 분위기가 되었다.
“예쁜 오빠! 내가 나중에 결혼해줄까?”
“쪼그만 게 또 작업 거냐? 아까는 민석이랑 결혼한다면서?”
“오빠 미워! 심술쟁이!”
“저 오빠 애인 완전 무섭다. 꿈 깨라! 너 유치원에 남자친구 있다면서?”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현우! 현주 울겠다. 그만해.”
억울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이현주가 자기편을 들어주는 차민석의 옆에 붙어 오빠 이현우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꼬박꼬박 하늘 같은 오빠와 말싸움을 하는 미운 여동생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주는 속과 겉의 행동이 다른 이현우다.
화제는 곧 미국으로 떠나는 차민석의 유학에 초점을 맞췄다. 최고로 치는 사립 고등학교 학생회장답게, 이미 모든 준비는 착착 진행 중이었다.
이현우는 이번에 병원에서 퇴원 후, 오랜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갔다. 병원에 찾아와 눈물로 호소하는 아버지와 정성으로 병간호해주시는 새어머니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이현우다.
특히, 못 본 사이 훌쩍 커버린 여동생 이현주의 ‘오빠 철 좀 들어’라는 말이 결정타였다. 말도 잘 못 했던 꼬꼬마가 이제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오빠 감시자로 자라 있었다.
오늘도 꼬마 불여우 이현주는 자기가 집에 안 들어올까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종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며 자신이 없어질까 불안해하는 여동생 이현주 때문에 항복을 선언하고 착실하게 집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턱걸이로 겨우 합격 통보를 받았던 체육학과에 입학하기로 했다. 철없었던 10대 시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친구 차민석의 당부에 따라, 은우의 납치에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자신의 여동생 이현주의 질문 공세도 편하게 대답하는 은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은우가 이미 넘어가 줬으니 더는 사과도 필요 없다며, 끝까지 은우를 안 보여주려는 차민석 대신, 민석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얼굴을 볼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몇 달 만에 얼굴을 본 차민석의 모습이 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여 안심이 된 이현우다. 아무래도 저기 앉아 있는 천사가 이 집에 평화를 가져다준 것이 분명했다.
‘저 꼬맹이! 아까는 차민석 오빠 좋다고 하더니, 지금은 은우 오빠라고 애교 떨며 옆에 딱 붙어 있네.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여우야?’
여동생 이현주의 모습을 흘겨보던 이현우가 배 나온 평범한 아버지와 순박한 인상의 새어머니를 생각하며 한숨지었다.
다과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슬슬 집에 가려는 오빠 이현우의 눈치를 알아챈 이현주가 새침하게 빨강 원피스를 손에 쥐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은우의 옆으로 바싹 다가간 이현주가 자신이 끼고 있는 분홍색 꽃반지를 은우 오빠 새끼손가락에 끼워주고 작게 속삭였다.
맑게 웃은 은우가 손을 내밀어 자신의 허벅지에 오는 조그만 이현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벌쭉 웃으며 이현주가 은우와 눈을 마주쳤다. 늦은 시간이라 정도훈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만남의 자리가 끝나갔다.
살랑살랑 손 인사를 건네는 인사성 좋은 이현주와 은우의 모습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도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피곤한 이현주가 오빠를 졸라 등에 업힌 뒤 사라지자, 은우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을 한 정도훈이었다.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플라스틱 분홍 꽃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은우를 정도훈이 은근슬쩍 놀렸다.
“은우야. 좋겠네. 여자친구 생겨서?”
“뭐? 여자친구?”
은우를 마중하러 천천히 밖으로 나와 있던 차현수 보스가 놀라 반문했다.
정도훈이 느물거리며 은우의 새끼손가락을 가리켰다. 아까 이현우와 그의 여동생 이현주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저녁을 위해 식당으로 옮겼다.
곧 먼 곳으로 유학을 떠날 차민석 때문에 자주 모여 식사를 하는 가족들이 오늘도 한자리에 모였다.
회사 업무로 늦게 퇴근한 차형욱이 돌아왔을 때, 이미 잠들어 있는 은우를 발견했다.
아쉽게도 혼자 은우의 하얀 볼에 살며시 퇴근 인사를 하고, 거실에서 오랜만에 정도훈과 맥주 캔을 땄다.
가볍게 창립 기념 파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남부파 쓰레기 처리에 대해 은근슬쩍 정도훈이 차형욱을 떠봤다.
이건 사실 차현수 보스가 큰아들이 언제까지 피를 뒤집어쓴 새벽 운동을 할 예정인지 알고 싶어 해서 대신 묻는 것이었다.
자신이 확인한 바로는 이미 죽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일 정도였다. 특히 남부파 두목으로 보이는 돼지 황두식은 이미 돼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강제 다이어트를 당한 상태로 두려움에 미쳐 있었다.
끝까지 대답을 안 하고 넘기는 독한 차형욱을 말없이 바라보다 차가운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켠 뒤에 캔을 구겼다.
화제를 바꿔, 오늘 차민석의 친구인 이현우와 여동생 이현주에 대해서 가볍게 입을 연 정도훈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던 정도훈이 은근슬쩍 차형욱을 도발하는 발언을 했다.
“차형욱, 너 조심해야겠다. 은우가 인기가 워낙 좋아서 말이다. 오늘 은우 반지 받았는데?”
눈빛을 날카롭게 바꾼 차형욱이 친구 정도훈의 얼굴을 그대로 뚫어버릴 듯 응시했다.
“오늘 은우가 예쁜 아가씨한테 반지 받았어.”
점점 차갑게 변해가는 거실 온도에 정도훈은 계속 쥐고 있던 빈 맥주 캔을 황급히 쓰레기통에 던져놓고,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으며 초조한 얼굴의 조민경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2달 가까이 연락이 없는 조상호 사장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커진 조민경이었다. 납치를 당했던 차형욱 회장의 애인 놈은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느낌인데 아무도 확실히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는 이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황성파 차현수 보스의 사돈이나 마찬가지인 조상호 사장에게 설마 큰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자신에게 연락이 없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안심인 건, 차형욱 회장이 전과는 달리 애인 놈을 회사에 잘 데리고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질렸나? 그렇다. 원래 차형욱 회장의 성격을 봤을 때 애정이 식었을 수도 있었다.
납치당해서 무슨 큰일을 겪어 차형욱 회장이 정떨어졌을 수도 있을 거라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보는 조민경이었다.
그렇게 판단을 하니, 그렇게 얄밉고 싫었던 차형욱의 애인 놈이 조금은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돈만 많고, 지조 없는 사내놈들이 다 그렇고 그런 종족들이지. 하나같이 똑같지. 뭐…….’
YJ 그룹 창립 파티 초대장을 정성스럽게 손으로 일일이 쓰라는 지시를 내린 문재준 비서실장에게 이가 갈렸다.
아직 책상에 수북이 쌓인 특별 제작한 카드를 보기만 해도 손이 떨렸다. 아침부터 종일 써 내려간 초대 글에 오른손 마디마디가 저리고 부어올라 아팠다.
자신의 계획에 의하면, 벌써 자신은 차형욱 회장과 만남을 시작하는 단계여야 정상인데,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처음부터 조상호 사장의 말을 너무 믿은 것이 실수였다.
20살 꽃다운 나이에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던 효성 그룹 회장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당시는 50대 중반인 늙은 회장의 은밀한 유혹에 몸서리를 쳤는데, 지금은 그것이 너무 아쉬워 한숨이 나왔다.
조상호 사장에게 하루에 수십 번 연락해도 늘 꺼져 있는 휴대전화에 짜증이 난 조민경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젊은 여자라면 환장하는 변태 같은 조상호 사장이 자기보다 어린 여자라도 끼고 해외여행이라도 갔나, 아니면 자기를 대신할 차형욱 회장의 입맛에 맞는 여자를 구했나 하는 여러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찾기만 하면 조상호 사장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만일 자신을 버린 거라면 후회하게 할 것이었다.
이익!
자기도 모르게 구겨버린 손안의 초대장에 옆자리 비서실 선배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민경 씨, 진주 가루 뿌려진 그 카드 한 장 제작하는데 얼마인 줄 알아요?”
“이까짓 거 얼마예요? 돈 내면 되잖아요! 손 아파 죽겠다고요!”
평소 이미지 관리를 팽개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조민경의 태도에 놀란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이 조민경을 향했다.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에 던져놓고 비서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조민경의 낯선 모습에 혹시 그날 아니냐며 쑥덕이는 비서실 총각들이었다.
아침을 먹는 자리, 차형욱의 시선이 은우의 새끼손가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포크로 콕 찍은 샐러드 속 방울토마토를 차형욱의 입가에 가져간 은우는 입을 벌리지 않고 맹렬히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는 차형욱의 모습을 보고 입술에 닿도록 바싹 들이밀었다. 그제야 반사적으로 차형욱이 입을 열고 방울토마토를 전투적으로 씹어 먹었다.
어제 정도훈이 말한 반지가 플라스틱 분홍 꽃반지임을 확인한 차형욱은 그것이 장난이라는 걸 깨닫고 무시했다.
그러던 것이 아침에 눈을 뜨고 보이는 은우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가 자신의 신경을 무지하게 거슬렸다. 7살 꼬마가 준 것이라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계속 눈이 가는 차형욱이었다.
결국, 은우가 깨기 전에 반지 제거 작업을 하던 차형욱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꼭 쥐고 있던 은우의 새끼손가락을 놓쳐버렸다.
자신의 행동이 유치함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차형욱의 목덜미가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알고 보면, 정식으로 누군가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는 차형욱이었다.
늘 필요에 의한 짧은 만남만을 가졌었다. 처음 생긴 연인이 은우이기에 연애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무지했다.
신비한 첫 만남에서부터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인식한 상대였기에 이런 자잘한 이벤트나 커플 선물에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차형욱이었다.
진즉 은우의 열 손가락에 죄다 반지를 끼워서라도, 저딴 반지를 은우가 낄 수 없게 해야 했다고 스스로 반성했다.
문재준은 오늘따라 책상에 앉아 자주 생각에 잠겨 있는 차형욱 회장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아침에 가져온 커피잔은 한 모금도 줄지 않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회장님, 커피 다시 가져다 드릴까요?”
회장실에 갑자기 들리는 문재준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커피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다시 책상 위에 올라왔다.
“문재준 비서실장.”
차형욱 회장님의 부름에 짧게 대답한 문재준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회장님의 입에 집중했다.
어쩐지 굉장히 중요한 안건이 나올 듯해 바싹 긴장한 문재준 비서실장이 귀를 활짝 열고 서 있었다.
“애인 있나?”
“에, 엥? 없습니다.”
의외의 질문이 튀어나오자 더듬거린 문재준이었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에 급격한 분노를 느낀 문재준 비서실장이 빠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잠시 없을 뿐입니다.”
“…….”
“인기는 여전히 많은 편입니다. 지금 일이 바빠 시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
입을 열수록 자신의 귀에도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 말투 때문에 환장할 거 같은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커피를 마시는 차형욱 회장님의 눈빛에서 미약한 동정의 시선을 느끼자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정말입니다.”
“음. 알았네.”
“뭐, 궁금하신 것 있으십니까?”
“아니, 괜찮네.”
문재준 비서실장은 확신했다. 안 괜찮았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는 듯한 차형욱 회장의 성의 없는 말투가 자신을 더 화나게 했다.
당장 저 거만한 표정의 차형욱 회장님, 아니 회장 놈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자신의 인기와 매력을 어필하고 싶었다.
눈에 흰자가 가득 보이게, 겁 없이 차형욱 회장을 노려보던 문재준 비서실장이 분노의 발소리를 내며 회장실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멀쩡했던 한 남자의 자존심을 아침부터 대패질해놓고, 업무를 시작하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점심을 준비해 회장실로 들어온 문재준 비서실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노트북을 차형욱 회장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류에서 시선을 돌려 문재준 비서실장을 올려다본 차형욱은 노트북 화면을 손으로 가리키며 평소의 냉정함을 버리고 침을 튀기며 토해내는 문재준의 열변을 들어야 했다.
컴퓨터 화면에는 몇 개의 이메일이 열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업무 관련 이메일을 확인한 차형욱의 시선이 문재준 비서실장을 향했다.
“이건 마케팅 부서의 김태희 팀장인데, 저에게 검토 받을 필요 없는 파일을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끝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란 문구도 확인하십시오. 사적인 관심이 확실합니다.
이건 태공물산 신애란 과장인데, YJ 그룹과의 협력 프로젝트 이메일을 하루에 무려 3번이나 연속해서 보냈습니다. 사실, 그날 오전 이미 회의를 다 끝낸 상황이니 저에게 관심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쪽 이메일도 확인해주십시오. 이쪽은 회장님도 100% 확신하실 겁니다. YJ 오리엔탈 호텔 총지배인의 비서가 보낸 이메일로, 내용은 YJ 창립 파티에 대한 계획의 확인이지만, 부탁한다는 말끝에 작은 하트를 붙여 저에 대한 사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문재준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이 다 여자들이며 업무 관련 이메일을 보내면서 은근슬쩍 자신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중이라고 했다.
설명을 듣고 나서 차형욱 회장님의 자신을 보는 눈빛에 드러난 확연한 동정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문재준이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차형욱 회장은 초밥이 들어 있는 일식집 봉투를 들고 소파로 이동을 하며, 가볍게 문재준 비서실장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말없이 자신의 노트북 커버를 닫고 비서실로 나가버리는 문재준 비서실장의 뒷모습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어이! 여기야, 여기.”
술집 테이블에는 뜻밖의 전화를 받고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정도훈이, 문이 열리고 박동수와 함께 들어오는 차형욱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정도훈은 자기가 억지로 불러내지 않는 한 절대로 이런 자리에 오지 않는 차형욱의 이상 행동에 아리송한 마음뿐이었다. 정도훈이 마시고 있는 칵테일을 성의 없이 같은 걸로 주문한 차형욱과 수제 흑맥주를 손에 들고 사이드 메뉴를 들여다보는 박동수다.
처음은 간단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곧 본론을 들은 정도훈은 얼굴이 시뻘게지게 웃음을 터트려 차형욱의 눈총을 샀다. 박동수 역시 긴장을 풀고 맥주잔으로 웃음이 튀어나올 듯한 입가를 막았다.
“오냐, 이 연애 선배가 주옥같은 말씀 내리겠으니, 가슴 깊이 새겨놔라.”
학창 시절 엄청난 바람둥이 기질이 넘치던 정도훈이 자신의 연애 경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귄 지 100일, 200일 이벤트 그리고 1주년 기념일의 필요성과 꼭 가봐야 할 데이트 코스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커플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정도훈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동수다. 상대방에게 소속감을 주고, 책임감을 줄 수 있는 상징이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커플링을 낀 사람은 바람피울 때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커플링을 줄 때, 목걸이, 귀고리나 팔찌 등이 들어 있는 세트로 준비하면 연인의 기쁨이 2배가 된다고 했다.
이는 각기 다른 구속을 의미하고 둘을 하나로 묶어놓는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또, 효과적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건네는 꽃다발이나 작은 선물로 여심을 사로잡는 방법과 어떻게 주어야 자연스러운지 손짓 발짓으로 현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연인과 싸운 뒤에는 애교나 선물을 사과와 함께 하면 용서를 받기 쉽다는 점과 선의의 거짓말 필요성도 이야기했다. 연애 초보자 차형욱과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는 박동수가 귀를 열고 경청했다.
“저기요.”
“네? 무슨 일이십니까?”
테이블로 다가온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박동수가 돌아보자, 진한 녹색 원피스를 입은 날씬한 여성이 활짝 웃어 왔다.
“저희 쪽도 일행이 3명인데, 합석하시겠어요?”
고개를 저어 칼같이 거절하는 차형욱의 귓가에 정도훈의 간절한 입김이 와 닿았다.
“잠깐만. 딱 10분만! 교육비라고 생각해. 너만 애인 있으면 다냐? 저기 박동수 좀 봐라. 얼마나 허기져 보이느냐?”
오늘 종일 우울해 보이던, 일 때문에 연애도 못 하고 나이만 든 문재준 비서실장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알고 보니 불쌍하게 도끼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였다.
젊은 박동수의 기대에 찬 얼굴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게 된 차형욱이었다.
처음 왔던 고급 녹색 원피스 입은 여자가 일행인 나머지 두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왔다. 금세 분위기 메이커 정도훈의 입담이 터지며,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 차례인데도 입을 꾹 다물고 차갑게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차형욱의 모습에 박동수가 눈치를 봤다. 싸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에 정도훈이 손을 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저 친구는 원래 저런 성격이니깐, 입이 없다 생각하고 넘어가 주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재수 없게 분위기 망친다는 욕을 먹을 상황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차형욱의 빛나는 외모가 모든 걸 다 용서해주었다.
“어머나! 과묵한 것도 너무 매력 있어요.”
얼굴에 식은땀 나도록 분위기를 살리려 애쓰는 정도훈이 무안하게 여자들의 황홀한 시선이 차형욱에게 떨어지지 않자, 허탈한 기분이 드는 박동수다.
아까 그렇게 연애에 대해 강의를 해놓고서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놓고 설명을 한 정도훈임을 순진한 박동수도 눈치채고 말았다.
커플들이 넘치는 더러운 세상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연인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는 선물이나 언변이 아닌 얼굴임을 알게 되어 서러운 박동수다.
술집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가 손에 쥔 휴대전화를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처음 술집에 들어올 때부터 모든 여성의 시선을 사로잡은 냉 미남 차형욱 회장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귀한 느낌이 드는 명품 중의 명품을 눈앞에 두고도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당당히 쟁취한 여자들이 보였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녹색 원피스를 우습게 차려입은 여자가 눈에 거슬려 죽을 거 같았다. 창가에 장식된 전구를 저 여자 몸에 둘둘 감아, 구석에 던져 버리면 속이 좀 풀릴 거 같았다.
‘저게 감히!’
우울한 마음을 달래러 혼자 회사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조민경의 눈에 차형욱 회장이 바람피우는 현장이 목격되었다.
한 명은 차형욱 회장의 보디가드로 늘 같이 다니는 익숙한 남자였고, 또 다른 남자는 패션 센스가 넘치는 유쾌한 인상의 처음 보는 훈남이었다.
처음에는 남자끼리 웃으며 술을 마시더니, 결국 본색을 드러내 여자들을 테이블로 불러들여 놀기 시작했다.
‘저년이!
칵테일 한잔 마신 주제에 술이 약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고, 차형욱 회장을 향해 은밀한 시선을 보내는 녹색 옷을 입은 여자였다.
어이없게 양주 한 병은 끄떡없이 마시게 생긴 주제에 취한 척 본격적으로 꼬리를 치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어이가 없는 조민경이었다.
몇 년을 노력해 준비된 신붓감인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금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혹시 저 여자가 조상호 사장이 새로 준비한 여자인지 의심도 되어 휴대전화 통화 버튼을 눌러봤지만, 계속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헛소리만 들려왔다.
‘바람둥이 자식! 살림은 은발 머리랑 차리고 밖에서는 여자랑 딴짓하고 다녀?’
자신의 날씬하고 볼륨 있는 몸매를 점검하고 녹색 옷의 몸매를 위아래로 분석하며 자제할 수 없는 분노에 이를 가는 조민경이었다.
입고 있는 저 녹색 옷이 시즌 신작 명품 드레스라는 사실도, 들고 있는 저 핸드백이 한정판이라는 사실까지 겹치면서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저년이 구두까지 한정판 컬렉션이야? 혹시 차형욱 회장이 사준 건 아니겠지?’
차형욱 회장의 성격상 즉석 만남일 리가 없고, 원래 알던 여자라 같이 합석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었다.
살림 차린 은발 머리에는 솔직히 외모에서 지고 들어가는 부분이 많아 기가 죽었지만, 남자라는 점에 안심해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녹색 옷의 여자를 보는 순간 자신의 것을 빼앗긴듯해 더 화가 끓어올랐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자신의 유일한 장점인 여자라는 이점이 사라지고 비슷한 미모의 여자를 보자 질투에 불타올랐다.
‘내가 쉽게 포기할 거 같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조민경은 차형욱 회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할 결심을 했다.
그냥 다가가려다 생각을 바꾼 조민경은 화장을 손보러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그사이 시계를 확인한 차형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10분 만에 유유히 사라지는 차형욱의 뒷모습에, 황당한 시선을 던지는 여자들을 혼자 달래며 사과하기 바쁜 정도훈이었다.
사라지는 차형욱 회장의 뒤로 아쉬운 시선의 박동수가 여자들에게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따라갔다.
정성을 들여 화장을 꼼꼼히 손보고 나온 조민경은 아무도 없는 빈 테이블만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