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슈렉 같은 년! 아무래도 수상한데……
YJ 그룹의 창립 기념 파티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었다.
1부는 YJ 그룹의 임원진과 사원들을 위한 행사와 점심 연회였다. 늦은 오후에 시작되는 2부는 외부에서 초청된 VIP 고객들도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YJ 오리엔탈 호텔 연회장, 호텔 앞에 있는 메인 수영장, 옥상 수영장, 뒤쪽에 이어진 넓은 가든 등에 뷔페와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어디서든 많은 이들이 편하게 행사 진행을 볼 수 있도록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었다.
1부 행사는 YJ 그룹의 임직원과 사원들을 중심으로 한 기념행사로, 그룹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과 사원 표창 등이 이루어지는 엄숙한 분위기일 것이었다.
2부 초반은 1부와 마찬가지로 YJ 그룹의 발전된 모습을 외부에 당당히 보여주는 자리로 출발하지만, 샴페인과 와인이 곁들여진 축하 파티였다. 한국 정경제를 흔드는 많은 VIP가 모인 파티로 우아한 분위기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2부 행사는 오후 5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아버지 차현수와 가족들은 호텔에 준비해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으로 천천히 가기로 했다.
보통 5시 시작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VIP 손님들이 도착하여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간은 대략 7시는 되어야 할 것이었다. 오랜만에 크게 열리는 행사이니만큼 밤늦게까지 진행될 것이 분명했다.
가족들은 오후 5시 정도에 호텔 방으로 가서 편하게 있다가,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시 정도에 입장하기로 했다.
그 전에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기념행사와 파티를 TV로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가족들은 평소와 같이 움직이고 있지만, 차형욱 회장만 1부 행사 준비를 위해 출근을 서둘렀다.
“아가, 예뻐.”
단정한 검정 정장과 흑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자줏빛 실크 넥타이로 신경 써서 차려입은 차형욱 회장을 은우가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넥타이를 만지는 은우의 손길에 기분 좋게 달콤한 입술을 훔치는 차형욱이었다.
그 달콤함을 즐기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은우를 아침 식탁에 데려다주고, 차형욱 회장은 아침을 못 먹고 허둥지둥 나갔다는 것은 뒷이야기였다.
아침을 사이좋게 먹고 평소와 같이 TV 앞에 둘러앉아 드라마를 시청하는 남자들을 보고 조희주가 웃으며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너무 한가하신 거 아니세요? 오랜만에 참석하시는 공식적인 자리잖아요. 특히 큰 도련님한테는 중요한 자리고요.”
“준비할 게 뭐가 있나? 예복도 많은데 뭐. 아무거나 입고 가면 되네.”
“어머? 어떻게 그래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이미 의상실에 회장님 옷하고 은우 씨 옷까지 준비시켜 놨어요. 점심쯤 가져다준다고 했으니 옷은 그걸로 됐지만, 점심 먹고 저랑 같이 미용실은 꼭 가주셔야겠습니다. 신사분들! 이미 예약도 다 해놨으니 몸만 오세요. 중요한 자리인데 머리라도 깔끔하게 손질하고 가면 좋잖아요.”
“다 늙어서 무슨 멋을 그리 부리나? 자네나 갔다 오게. 정 뭣하면, 은우랑 민석이만 데리고 같이 가게나.”
“무슨 소리세요? 회장님께서 제일 멋지셔야죠. 꼭 같이 가주세요. 이미 예약 다 해놨으니깐요.”
건강을 회복하고, 차현수 보스의 고집도 이겨 먹는 조희주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절대 타협안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투덜거리면서 집안의 모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이미 조희주의 부탁으로, 정도훈이 자신이 자주 가는 유명 미용실을 어제 예약해 놓았다.
본의 아니게 조희주 님과 공범자가 된 정도훈은 가기 싫은 티가 역력한 차현수 보스의 얼굴에 시선을 피했다. 혹여 차현수 보스의 짜증 불꽃이 만만한 자신에게 튈까 걱정이 된 것이었다.
조희주 님 앞에서는 유독 행동이 어려지고, 불퉁한 어투로 투덜거리긴 해도 웬만한 일은 지고 들어가는 차현수 보스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도훈이었다.
모든 남자의 약속을 받아낸 조희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의상실에 확인 전화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몸이 약해 그동안 집안에서 방치되었던 일들을 이제라도 조금씩이나마 도움이 되어 굉장히 즐거운 조희주다.
자신이 혹시나 싶어 선물 겸 준비해둔 의상이 없었더라면, 분명 차씨 집안 상남자들은 대충 차려입고 중요한 파티에 갔을 것이었다.
워낙 얼굴이 무기들인 이들이지만, 꾸밀수록 빛이 나는 것은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라 믿는 천생 여자 조희주다.
야들야들한 돼지고기에 양념을 발라 구운 숯불 요리와 국수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이들은 조희주의 재촉에 미용실로 갔다.
청담동에 있는 미용실 앞에 차가 멈추자, 일행들은 차에서 내려 미용실 입구로 걸음을 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양도림, 양드레 원장이 호들갑을 떨며 이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영광이에요. 여기까지 와주시다니……. YJ 그룹 창립 기념 파티 때문에 오셨다고 하셨죠? 어머나! 회장님! 어쩜 차형욱 회장님이 아버지를 똑 닮았네요. 한눈에 알겠어요.
웬일이야, 웬일! 은우 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머리 너무 많이 길렀네. 오늘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져드릴게요. 아이 좋아라! 은우 씨 머리를 보니깐 영감이 떠올라요. 은빛 머리가 반짝여. 정말 감동이야.”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쉬지 않고 떠드는 양드레 원장의 모습에,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가려는 차현수 보스의 팔을 단단히 붙든 조희주가 원장을 재촉했다.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 우선 이쪽 회장님 먼저 부탁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내 정신 좀 봐. 원장실에 자리 마련되어 있어요.”
그제야 서둘러 자리를 안내하는 양드레 원장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일행이었다. 양드레 원장과 미셸 부원장이 일행을 맡아 의자로 안내했다.
조희주가 양드레 원장의 옆에 서서 스타일을 의논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차현수 보스의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옆머리를 조금 더 짧은 디자인으로 커트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차민석의 머리는 손본 지 얼마 되지 않아, 간단하게 끝만 정리하고 드라이해서 젤로 스타일만 만져주기로 했다.
정도훈은 워낙 자주 오는 VIP 손님인 관계로 늘 머리를 해주는 미셸 부원장이 묻지도 않고 가위로 커트하기 시작했다.
손이 빠른 미셸 부원장의 손에 정도훈과 차민석의 손질이 금세 끝나고, 차현수 보스의 염색을 기다리는 동안 부원장과 양드레 원장이 나란히 은우를 의자에 앉혀두고 고민을 했다.
전에 자른 후 손을 보지 않아 엉덩이 밑으로 내려오는 그냥 두어도 매우 아름답게 찰랑거리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오랜만에 원장 양드레의 예술혼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한참 만에 가위를 집어 올린 양드레 원장의 손이 드디어 움직였다.
한 올 한 올 심사숙고를 하며 길이를 줄여나갔다. 길게 내려왔던 머리가 목을 감싸는 길이의 긴 커트 스타일로 잘려나갔다.
머리끝이 가닥가닥 자연스럽게 길게 내려오는 커트는 얼굴을 강조해주는 디자인으로 전보다 가벼워진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만지작거리는 은우다.
하늘색 큰 눈이 돋보여 깜찍함의 레벨이 높아져 있었다. 없던 앞머리가 살짝 이마를 가려 인형같이 보이는 은우의 모습에 아빠 차현수가 염색 후 영양을 주기 위해 감싼 수건 머리를 하고는 연신 귀엽다고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패션에 민감한 정도훈이 은우의 밑으로 내려온 머리 가닥들을 분석해 원장 양드레와 마지막 디자인 방향을 정했다.
옆에서 메이크업을 끝내고, 우아한 업, 스타일로 머리를 말아 올린 조희주도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녀의 꼼꼼한 눈이 차현수 보스, 아들 차민석, 은우, 정도훈의 완성된 모습을 점검하고 미소 지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차현수 보스의 재촉에 서둘러 미용실을 탈출한 남자들이었다.
오전에 나와 전신 마사지를 받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조희주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떠는 차현수 보스가 웃긴지 정도훈이 소리 죽여 웃으며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했다.
“아이고, 은우 머리 예쁘네. 마음에 들어?
“응, 아빠는 까매.”
가벼워진 머리를 여러 번 끄덕이며, 차현수 보스의 염색 머리가 신기한지 손을 뻗어 살짝 만지는 은우를 조희주도 칭찬했다.
“은우 씨. 더 귀여워졌어요. 긴 머리도 예쁜데 이제 봄이니깐, 이런 스타일도 좋네요. 아직 긴 편이니깐 여름이 오면 제가 높이 묶어드릴게요.”
딸이 없는 서러움을 이제야 푸는 조희주는 귀엽게 묶은 은우의 머리를 상상하며 좋아했다. 웃는 조희주와 눈을 마주 보며 은우도 조희주의 머리가 예쁘다고 칭찬했다.
서로 과도한 칭찬으로 한껏 화목해진 차는 어느덧 본가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의상을 식구들에게 꺼내놓은 조희주다.
이미 한 달 전에 여러 벌의 옷을 장만해둔 정도훈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희주의 손길이 닿은 의상을 꺼내 들었다.
차현수 보스는 클래식한 턱시도로 검은색 바지, 투 버튼 재킷과 문양이 들어간 하얀 실크 스카프로 된 넓은 넥타이로 느낌을 살렸다.
광택이 있는 검정 구두로 마무리하자 검게 염색한 머리까지 어울려 잘생긴 40대 중년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뼉을 마주치며 엄지손가락 칭찬을 하는 은우의 모습에 헛기침하며 쑥스러워하는 차현수 보스였다.
차민석은 젊은 디자인의 턱시도로 까만 바지와 하얀 원 버튼 재킷을 입었다.
넥타이 없이 목에 살짝 올라오는 짧은 칼라의 하얀 드레스 셔츠를 끝까지 잠그자 뭔가 금욕적인 매력이 넘쳤다. 잘못하면 심심해 보이는 디자인에 붉은 파킷 행커치프와 귀여운 미니 자동차 3개가 달린 브로치로 젊고 세련된 감각을 살렸다.
은우가 옷을 입는 걸 도와주러 방으로 간 조희주가 상기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짜잔! 은우 씨 나오세요.”
조희주의 말에 방에서 나온 은우의 모습을 보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입을 벌려 감탄사를 토해냈다.
매일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은우이기에 이렇게 차려 입히자 미모가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광택이 약간 도는 검은색 슬림한 핏의 턱시도를 입고 안에는 은빛 실크 베스트를 입었다.
은우의 눈을 연상시키는 짙은 하늘빛 컬러의 얇은 끈을 목에 감아 자연스럽게 긴 리본으로 묶은 모습이 눈부신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사실 공주님에 가깝지만, 전에 에어로빅 사건 이후 은우가 예쁘다는 것보다 멋지다는 표현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고 조심하는 식구들이었다.
“완전 멋지구나! 은우야. 왕자님 같다.”
“형수, 예쁘시네요! 아니, 진짜 멋지네요! 최고입니다.”
“우와! 은우, 파티장 가면 난리 나겠는데? 형욱이 긴장 좀 되겠네.”
한참 은우를 둘러싸고 칭찬하던 이들이 또 다른 시선을 느끼고 옆을 보자, 조희주가 팔짱을 끼고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정도훈이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이 난관을 극복했다.
“누님! 눈부십니다. 오늘부터 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장난스럽게 누님이라며 연신 칭찬을 하는 정도훈의 옆에서 차민석도 한마디 건넸다.
“엄마 예쁘신데요? 파티장 가서 이모라고 해도 되겠어요.”
눈부시게 하얀,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투피스에 커다란 루비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로 포인트를 주었다. 올린 머리에 어울리는 하얀 계통의 보석들이 박힌 백금 머리핀을 한 조희주는 기품 있는 분위기와 청순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포인트로 들고 있는 반짝이는 검정 백이 우아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유난히 키가 큰 주위 남자들 때문에 신중하게 고른 굽 높은 하얀 구두를 신고 아들 차민석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었다.
이 높은 구두는 앞에도 적당한 높이를 주어 가능한 발에 부담을 줄인 디자인으로 투박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써 맞춘 구두였다.
평소 160센티미터의 아담한 키가 지금은 차민석의 팔짱을 끼기 좋게 커져 있었다. 그런 조희주의 모습을 쳐다보다 차현수 보스가 작게 툴툴거렸다.
“아니,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런 사다리 신발을 신었나? 몸도 약한 사람이…….”
투덜이 차현수 보스의 투덜거림에 작게 미소 지은 조희주가 반대쪽 손으로 차현수 보스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양쪽에서 잡아주면 안 넘어져요.”
“쯧쯧, 그렇게 키 커 보여서 뭐가 좋다고. 낮은 굽은 없나? 어쩔 수 없지. 잘 잡고 다니게.”
낮은 굽 이야기에 고개를 돌리는 조희주의 고집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음을 같이 하며 투덜거리는 아버지 차현수의 모습에 차민석이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찬가지로 검정 심플한 턱시도에 드레스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푸르고, 검정 펜던트가 달린 백금 목걸이로 캐주얼 분위기를 연출한 멋쟁이 정도훈이었다.
나비넥타이를 일부러 풀어놓은 듯 목에 자연스럽게 걸쳐놓아 뭔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주었다. 차현수 보스가 나비넥타이가 풀렸다고 지적하자, 자신의 패션을 이해 못 했다고 하면서 섹시한 반항아 느낌을 설명했다.
‘아슬아슬해서 눈을 뗄 수 없는 야생 남자’ 콘셉트라며 자신만의 확고한 패션 세계를 지키는 정도훈이었다.
리무진을 대기시켜 한 차량으로 가족들과 차현수 보스의 오른팔 불곰 황호영이 같이 이동했다. 앞뒤로 두 대씩 네 대의 차량이 에스코트와 보호를 겸해 같이 움직였다.
YJ 오리엔탈 호텔 VIP 전용 입구에 리무진이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총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꼭대기 층으로 이동했다. 이미 로열층 전부를 가족들과 VIP를 위해 비워두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문 앞에 발을 멈춘 총지배인이 문을 열고 일행을 안내했다. 고맙다는 차현수 보스와 가볍게 악수를 한 뒤 총지배인이 사라졌다.
편하게 은우의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주며 정도훈이 응접실에 있는 커다란 벽면 TV 앞으로 다가가 은우와 자리를 잡았다.
이미 스위치가 켜진 TV에는 입장하는 손님들과 2부 행사의 시작을 위해 뛰어다니는 바쁜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재준.”
손가락으로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진 문재준 비서실장을 은우가 가리키자, 정도훈도 아는 체했다.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는 총 4개의 방, 응접실, 부엌, 개인 집사의 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높은 구두를 방에 벗어 두고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은 조희주도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앞에 놓인 과일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TV에서 아는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한마디씩 하는 일행이었다.
“아가!”
차형욱 회장의 모습이 살짝 보이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TV 앞으로 달려나가는 은우의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매일 보는 놈 뭐가 좋다고. 은우야 빨리 앉아라. 다리 아프다. 얼음덩이가 뭐가 그렇게 반가워?”
2부 행사를 위해 출근할 때 입었던 양복이 아닌, 검정 턱시도를 차려입은 차형욱의 모습은 TV 화면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 뺨치게 멋져 보였다.
차현수 보스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입으로는 괜히 헐뜯었다.
일정은 5시부터지만, 2부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말은 5시 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차형욱 회장이 마이크를 앞에 서서,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감사 인사를 하자 은우가 소파에서 내려와 TV속 차형욱 회장에게 집중했다.
차형욱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한마디 할 때마다, 놓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은우다.
그런 은우의 원맨쇼를 지켜보며 재미없는 차형욱 회장의 인사말을 즐겁게 듣는 가족들이었다.
YJ 그룹 회장의 감사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했다.
6시가 되면서 은은한 조명이 호텔 야외에 있는 나무들에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둑해지는 하늘과 조명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샴페인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대 가수와 악기 연주자들이 연주를 시작하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벌써 무리 지어 서로 소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젊은 남녀가 눈을 빛내며 자신과 어울릴만한지 간을 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곳 YJ 그룹에 초대된 기업들의 젊은 미혼자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인연을 찾아보는 철새들이 넘쳤다.
다른 쪽에서는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는 경영자들이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건네거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면서 파티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물론 그중에서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남녀들이, 있어 보이는 남녀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유독 많은 여자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는 검정 턱시도를 모델같이 소화하고 서 있는 차형욱 회장이 있었다. 차형욱은 아까부터 파티장 입구 쪽에 시선을 던지며, 문재준 비서실장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문재준도 아까 오전에 입었던 깔끔한 정장 대신 슬림한 검정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지적인 느낌이 풀풀 풍기는 깔끔한 문재준의 모습에도 이미 YJ 그룹의 경영 구조를 알고 있는 여자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외동딸을 둔 기업 회장 같은 경우 데릴사위로 회사를 운영해줄 후계자를 찾기를 원하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 눈에 YJ 그룹 신화를 같이 창조한 천재 문재준 비서실장은 사윗감 1순위였다.
벌써 10분 만에 7번이나 차형욱 회장의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여자가 흐트러지려는 입가의 미소를 재정비하고 다시 8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연한 초록빛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위로 높이 말아 올려 젊고 우아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김제니다. 그녀는 어려서 이민을 한 부모님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유명한 모자 디자이너로 미국에서 가장 큰 공장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외동딸로 남부럽지 않았다. 더구나 큰 아버지는 세운 그룹 회장으로 집안도 상당히 좋았기에 늘 자신이 넘쳤다.
그러던 김제니가 술집에 갔다가 만난 남자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10분이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남자가 YJ 그룹 회장이라는 말을 듣고 이것은 운명이라 확신한 김제니다.
잘난 얼굴만 아니라, 조건도 너무나 완벽한 그는 하늘에서 정해준 자신의 배필이라 생각했다.
오늘 YJ 그룹 창립 기념 파티를 알고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사촌 오빠인 세운 그룹 첫째 김진혁을 졸랐다.
2박 3일을 조르고 졸라, 겨우 초대장을 가지고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 차형욱 회장이 자신을 모른 체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남자가 아쉬운 적도, 꼬시지 못한 적도 없는 김제니는 자존심에 살짝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10번째로 차형욱 회장 앞을 지나갔다. 짧지만 강렬했던 자신들의 만남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왜 자신을 보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전에 스치며 들었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사귀거나 가질 수는 없는 남자지만, 하룻밤 관계는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미는 타입은 아닌 남자임이 확실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하룻밤이라도 좋은 추억으로 시작해서,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계획을 수정한 김제니다. 자존심을 버린 김제니가 차형욱 회장에게 곧장 걸어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차형욱 회장님.”
“누구십니까?”
자신을 전혀 못 알아보는 무심한 차형욱 회장의 눈을 보고, 무너지는 입가에 억지로 힘을 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전에 작은 바에서 회장님 친구분인 정도훈 씨랑 박동수 씨와 함께 봤는데 기억 못 하시나요? 저는 김제니예요. 듣기로는 저희 사촌 오빠랑 동창이라고 들었어요. 세운 그룹 김진혁이라고 아시죠?”
관심 없이 듣고 있던 차형욱 회장의 눈이 세운 그룹 김진혁이라는 말에 살짝 눈빛이 달라지자, 김제니는 자신감이 생겼다.
‘역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집 딸이 아니란 눈치를 주니 눈빛이 변하네…… 호호.’
짧은 시간에 YJ 그룹을 이만큼 성장시킨 차형욱 회장이었다.
당연히 결혼도 비즈니스였다. 조건이 좋은 여자한테 관심이 가는 계산적인 면이 있을 것이었다.
자신의 외모만으로 접근하려던 꿈같은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지닌 배경을 적극적으로 선보이는 김제니다.
아까부터 옆에서 김제니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문재준 비서실장은 하품을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도대체 저 아가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공장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큰아버지가 세운 그룹 회장이라고도 벌써 3번째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운 그룹 여우 김진혁이 또 무슨 수작을 하려고 보낸 여자인가 싶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여자의 수다가 갈수록 산으로 가자 차형욱 회장님의 눈빛도 무관심으로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걸 눈치챈 문재준이었다.
“회장님, 저기 백두조선 이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가서 인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눈치 빠른 문재준이 억지 핑계로 빠르게 탈출 경로를 만들어주자, 놓치지 않고 걸음을 그쪽으로 옮기는 차형욱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회장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차형욱 회장, 축하하네. 여전히 인물이 훤하구먼. 이쪽은 우리 손녀 이해나라고 하네. 아주 참해서 내가 차 회장한테 소개를 해주고 싶어서 데리고 왔다네. 인사하게.”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 회장은 늙은 너구리답게 눈치를 보는 다른 회장들을 제치고 손녀딸을 디밀었다.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다소곳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다 말고, 차형욱 회장의 옆에 시선을 보냈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서 있었던지 차형욱과 나란히 서 있는 김제니가 보였다.
상황이야 어쨌든, 겉보기에는 날씬하고 예쁘장한 김제니가 차형욱 회장의 옆에 있는 모습에 이해나의 눈에 아쉬움이 스며들었다.
“안녕하세요. 이해나입니다. 일행분이 있었네요. 혹시 차형욱 회장님과는……?”
말꼬리를 흐리는 이해나의 질문에 차형욱 회장을 따라온 김제니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과 배경을 말했다.
물론, 차형욱 회장과 자신의 사이는 적당히 미소로 답변을 회피했다. 귀찮은 차형욱 회장이 이들의 대화를 무시하자 추측이 엉뚱한 오해로 바뀌었다.
이 회장은 전부터 차형욱 회장을 자신의 손녀 중 하나랑 이어주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매번 파티에 손녀딸을 한 명씩 데리고 와서 소개하는 이 회장이었다.
늘 그렇듯 차형욱 회장은 침묵으로 대응하며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러 자리를 피했다.
호텔 로비 중앙에 있는 아치형의 계단을 몸에 쫙 달라붙는 머메이드 금색 원피스를 걸친 여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12센티미터의 아찔한 금색 구두에, 파란색 작은 백을 포인트로 손에 들고 있는 조민경은 많은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경쾌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흐르는 화려한 파티장과 은은한 조명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상승시켜 주는 듯했다.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남자들에게 미소를 흘리며, 차형욱 회장을 찾는 조민경이었다.
금방 눈에 들어오는 190센티미터 장신의 차형욱 회장이었다. 턱시도를 입어 더욱 멋진 그가 연한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같이 있었다.
조민경은 그 연한 초록색 드레스의 여자가 그때 술집에서 보았던 녹색 옷의 여자와 동일 인물이란 걸 알아챘다.
저 망할 녹색 여자가 차형욱 회장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석한 것이었다. 저 여자를 대동하고 이 회장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숨겨진 여자인 줄 알았더니 공식적인 관계로 발전한 건가 싶자 놓친 떡이 아깝다고, 차형욱 회장이 더욱 빛나 보였다.
‘아니야.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냥 포기하긴 너무 아깝지.’
때마침 차형욱 회장이 문재준 비서실장과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사라졌다. 연한 초록색 드레스의 김제니가 이 회장의 손녀인 이해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모인 이해나의 친구들이 같이 와인을 마시며 소개를 하고 있자,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서는 조민경이었다.
“어머나! 김제니 씨, 차형욱 회장님 파트너라고 이미 파티장에 소문이 자자해요. 좋으시겠어요.”
“부러워요. 도대체 어떻게 절대로 넘어가지 않던 차 회장님을 사로잡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주위를 둘러싼 여자들이 시샘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김제니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김제니는 자신을 차형욱 회장의 애인으로 착각한 여자들의 질문 공세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소문이라도 잔뜩 나면, 자신은 곤란한 척 큰아버지를 통해 차형욱 회장과 공개적으로 만나면 그만이라고 생각되었다.
뻔뻔한 김제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안달이 난 여자들이 엄청난 스캔들이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파티 시작 후 1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많은 이들이 김제니와 차형욱 회장의 사이를 오해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저는 YJ 그룹에서 차형욱 회장님을 아주 가깝게 모시는 사람이에요. 조민경이라고 불러주세요. 한데, 제가 지금 들은 말이 사실인가요? 차형욱 회장님의 파트너로 오신 것이 확실한가요?”
YJ 그룹 사람이라는 조민경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김제니지만,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꾸를 했다.
“조민경 씨? 왜 그것이 궁금하시죠? 궁금하시면 차형욱 회장님께 직접 여쭤보세요.”
“쓸데없는 소문이면, 회사 이미지에 좋지 않으니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허! 쓸데없는 소문이라고요? 알아서 생각하세요. 그럼 이만.”
따지는 듯한 조민경의 어투에 기분이 나빠진 김제니가 몸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반면, 조민경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를 피하는 김제니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다.
‘저 녹색 슈렉 같은 년! 아무래도 수상한데…….’
보아하니 차형욱 회장은 김제니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만일 심각한 사이라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길 한번은 던질만한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차형욱 회장에 이들 사이가 별거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의미심장하게 웃은 조민경이 목표물에 다가섰다.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문재준 비서실장과 이야기 중인 차형욱 회장에게로 가까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