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가, 바람?
“회장님, 파티가 성공적인 거 같아요. 문재준 비서실장님, 옷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 조민경 씨도 파티에 참석했습니까?”
“그럼요! 피곤해도 회사를 위하는 길인데 저라도 나서서 손님들을 접대해야지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회장님 혹시 제 아버님, 조상호 사장님 소식 모르시나요? 전화도 안 되고, 너무 걱정이네요.”
말을 시켜도 문재준 비서실장만 짧게 대답하고, 차형욱 회장의 관심을 살 수가 없었다.
초조해진 조민경이 양아버지인 조상호 사장의 소식을 꺼냈다. 순간 날카롭게 변한 차형욱 회장의 눈길이 조민경을 향하며 낮게 입을 열었다.
“안다. 원하면 그쪽으로 보내 만나게 해줄 수 있는데. 조 비서, 어떤가?”
‘조민경 씨’도 아닌 ‘조 비서’라는 호칭에 기분이 상한 그녀지만, 성격을 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외국이라도 나가셨나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계시지. 조만간 조 비서도 원한다면 보내주지. 기다리게.”
문재준 비서실장은 조상호 사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차형욱 회장님의 말을 듣고, 조민경에게 깊은 동정심이 느껴졌다.
“아이, 좋아라. 정말이지요? 우와! 저도 빨리 가고 싶네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이미 조민경에 대한 모든 조사는 끝났다. 단지, 창립 기념 파티를 비롯해 회사 일이 바빠 버려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친절하게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가는 조민경의 발랄한 모습에 문재준 비서실장의 뒷골이 당겨왔다. 공부 잘하고 예쁘장한 여자인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다.
차형욱 회장님에 대해서는 눈치가 너무 없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도대체 어딜 봐서 저 독한 차형욱 회장님이 이유 없이 다른 이에게 친절할 사람인가.
교태를 부리듯 몸을 비틀며 웃는 조민경이 진심으로 불쌍한 문재준 비서실장이었다.
없던 자신감이 생긴 조민경이 차형욱 회장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웃음을 남발하고 있자, 파티장의 많은 시선이 몰렸다.
물론 시선도 주지 않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워낙 좁은 동네다 보니, 없던 소문도 만들어져 퍼지고 작은 일도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이 소문을 더 즐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조민경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즐기며 더욱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김제니 씨, 저기 보세요. 아까 그 여자가 차형욱 회장님 옆에 딱 붙어 있네요. 빨리 가서 파트너 단속 좀 해야겠어요.”
옆에서 쑥덕거리는 여자들이 등을 밀어오자, 어쩔 수 없이 차형욱 회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김제니다.
같은 시간 YJ 오리엔탈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은 난리가 났다.
아까부터 여자를 바꾸던 차형욱 회장이 드디어 양옆에 두 명의 여자를 끼고 서 있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저런! 내 저놈의 자식을 당장!”
“진정하세요. 도련님이 잘 생겨서 인기가 많은 거예요.”
잔뜩 흥분한 차현수 보스와 확인 사살하는 조희주의 목소리에 다들 은우의 눈치를 보았다.
차현수 보스는 사실, 은우가 기분 나쁠까 우려해서 더 크게 자기 아들을 나무라는 중이었다. 순진한 조희주는 말린다고 꺼내는 말로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정도훈은 은우 성격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부럽다고 외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차민석만 감히 형수가 있는데, 다른 여자들과 놀고 있는 자신의 형님에게 진정으로 분노했다.
“어라? 저건 세운 그룹의 망나니 김진영 아니야?”
뒤늦게 세운 그룹의 삼 형제 첫째 김진혁, 둘째 김진호와 셋째 김진영이 파티장에 도착해 차형욱 회장 앞에 있었다.
차현수 보스는 삐쩍 마른 남자 하나까지 등장해 큰아들 차형욱 옆에 서 있는 여자 둘과 신경전을 하는 TV 화면을 보고 눈으로 불길을 토했다.
금쪽같은 며느리 은우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자신의 큰아들이 하는 짓을 보니 가관도 저런 가관이 없었다.
은우를 만나기 전에, 큰아들 놈이 매일 파트너를 바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인간관계만 즐기는 큰아들의 연애 스타일 때문에 전에는 걱정했었다. 다행히 은우를 만나서 정착했다.
큰아들 놈은 저게 병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주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상황 설명도 변명도 없이 무심하다. 저 버릇을 고쳐야 나중에 은우가 괜히 오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었다.
자신도 아들 차형욱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은우의 눈치를 보느라 더 화난척하는 능구렁이 차현수다.
“벌써 7시 반입니다. 슬슬 파티장에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TV 앞에 앉아 뚫어지게 차형욱을 보고 있는 은우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되자, 차민석이 파티장에 내려가는 걸 권했다.
그래, 차라리 큰아들 놈 옆에 붙은 날파리들을 옆에서 감시하겠고 판단하고 파티장으로 이동하는 가족들이었다.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정도훈을 제외하고는 가족들의 얼굴은 은우가 혹시 오해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는지 눈치를 봤다.
하지만 정도훈은 들어 버렸다.
밑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은우의 재킷을 정리해주는데, 아침 드라마 OST를 흥얼거리는 은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요 깜찍한 천사는 차형욱의 모습만 TV에서 봤을 뿐, 옆에 붙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니면 무슨 드라마 보듯이 구경한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 둘이 천생연분이다 싶었다.
걱정하고 눈치 보는 사람들이 재미있고, 나중에 차형욱을 골탕 먹일 수도 있을 거 같아 아무런 말 없이 은우를 챙겨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정도훈의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이미 파티장에 황성파 부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보디가드가 필요 없었다. 차현수 보스의 오른팔 불곰 황호영만 이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어색한 턱시도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모습에 은우가 팔을 높이 들어 삐뚤어진 리본을 똑바로 해주었다. 감동에 차, 커다란 덩치를 부르르 떨며 눈을 반짝이는 불곰 황호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현수 보스가 자신의 실크 스카프를 만지작거리자, 정도훈이 냉큼 차현수 보스의 넥타이를 만져주었다.
정도훈이 한 행동은 차현수 보스의 째려봄을 당했지만, 공식 석상에 나서는 다른 사람들의 긴장감은 적당히 풀어주었다.
정도훈과 차현수 보스는 워낙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만, 집에만 있던 조희주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차민석은 긴장으로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살짝 미소 지었다.
“뭐야? 이 떨거지들은?”
“뭐라고요? 사촌 동생한테 말이 좀 심하시네요.”
막말하는 김진영의 싹수없는 말투에 김제니가 불쾌한 얼굴로 따졌다.
평소에 친척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는 김진영이었다. 하지만 차마 여기서 심한 말을 할 수는 없어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눈치를 보던 조민경은 세운 그룹의 형제임을 알아보고 눈을 밑으로 내리고 청순한 모습을 연출하는 중이었다.
“형욱 씨, 오랜만이네. 날 그렇게 회장실에서 질질 끌어내고 망신을 주더니, 이딴 여자들 끌고 다녀? 형욱 씨 수준이 많이 떨어졌네. 은발 머리랑은 이제 끝났나?”
원래 성격이 급하고 저돌적인 김진영이 뭐라고 하든 모조리 무시하던 차형욱이 은발 머리 이야기에 눈빛이 변했다.
“경고다. 김진영! 그만해라.”
무례한 사촌 김진영을 따끔하게 혼내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에 단단히 착각에 빠진 김제니가 고마운 눈빛으로 차형욱 회장을 응시했다.
“김진영, 그쯤에서 그만해! 김제니! 넌 한국 들어온 지 고작 2달인데, 차형욱 회장은 언제 만났어?”
“진혁 오빠, 시간이 뭐 중요한가요? 차형욱 회장님과는 전에 우연히 만났어요.”
운명처럼요, 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차형욱 회장을 향해 손에 쥔 와인 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 입을 벌린 김제니가 할 말을 잃었다.
무뚝뚝한 차형욱 회장이 입술을 슬쩍 올리고 미소 쪼가리를 보이고 있었다.
원래 잘난 얼굴이지만, 표정이 없고 차가워 보이는 차형욱 회장이 봄날의 햇살처럼 얼굴에 힘을 빼고 두 팔을 살며시 벌렸다.
마주 보는 김제니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슬쩍 차형욱 회장이 벌린 팔 안에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문재준 비서실장은 지금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화들짝 놀라 차형욱 회장님의 품 안에 안긴 여자를 쳐다보았다.
차형욱 회장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옆으로 밀쳐져 넘어질 뻔한 김제니가 엄청난 눈빛으로 조민경을 노려봤다. 혹시나 싶어 조민경은 세운 그룹 후계자 김진혁에게 눈길을 주며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차형욱 회장을 껴안는 김제니의 행동을 참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손이 나와 김제니의 어깨를 살짝 밀친 것이었다.
세게 밀친 건 아니었지만, 호감이 있는 차형욱 회장의 품에 안겨 발이 풀린 김제니다.
작은 충격에도 크게 몸이 흔들렸다. 바닥에 넘어질 뻔한 걸 흉하게 팔다리를 움직여 버텨냈다. 자존심이 바닥을 친 상황인데, 아무도 괜찮은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어이없는 차형욱 회장의 눈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인제야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린 것이 아니라 착각임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이런 망신을 주다니. 곱게 자란 김제니는 처음 겪어 보는 창피하고 황당한 상황을 참지 못했다.
손에 쥐고 있던 반쯤 남은 와인을 조민경의 얼굴을 향해 끼얹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거 같았다.
김제니가 차형욱 회장에게 안긴 시간은 고작 1초 정도였지만, 이어진 반응들로 인해 긴 시간이 흐른 듯 착각이 드는 주위 사람들이었다.
특히 놀란 이는 순간의 방심으로 김제니를 잠시 안았던, 아니 안겼던 차형욱 회장이었다. 당황이라는 감정을 뚜렷하게 얼굴에 그리며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민경은 어깨 조금 밀쳤다고 와인까지 얼굴에 뒤집어쓰자 눈이 뒤집혔다. 옆에 서 있던 김진영의 샴페인 잔을 빼앗아 김제니의 머리 위에 천천히 부었다.
연약해 보이던 김제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민경의 머리를 단번에 낚아챘다. 이미지를 지키려고 참던 조민경이 악바리로 살았던 시절의 성격을 드러내며 파란 백을 무섭게 흔들어 공격했다.
10초도 안 돼 바닥을 같이 뒹굴며 하나가 되어가는 옅은 초록색과 금색의 드레스였다.
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던 귀공자로 소문난 김진혁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사교 파티의 지루함을 단박에 날려주는 멋진 장면이 연출되자 파티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추하게 뒹구는 자신의 사촌 동생 김제니와 오늘 처음 마주친 여자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김진혁과 김진영이었다. 그들은 파티의 주최자인 차형욱 회장이 어떻게 해결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차형욱 회장은 바닥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서 두 팔을 벌렸다.
파티장을 가로질러 빠르게 뛰어가던 은우가 차형욱의 앞에 멈추더니 평소처럼 안기지 않고 바닥에 뒹구는 여자들을 쳐다보았다.
아가를 부르며 뛰어가는 은우의 뒤를 빠르게 따라온 가족들도 이 드라마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
“은우, 이리 와.”
움직이지 않는 은우의 모습에 차형욱이 먼저 은우를 불렀다.
오늘따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은우를 빨리 품에 안아주고 싶은 마음과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가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는 차형욱 회장이었다.
살짝 팔을 벌리고 자신을 부르는 차형욱의 모습에 약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생각하던 은우가 양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한마디를 꺼냈다.
“아가, 바람?”
순간적으로 다리가 삐끗할 만큼 놀란 차형욱이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차형욱은 빠르게 바닥에 뒹구는 여자들을 지나쳐 은우의 어깨를 잡고 놀란 어투로 물었다.
“은우, 지금 뭐라고……? 바람이라니.”
“우리가 TV로 다 봤다. 이 바람둥이 놈아!”
“아까 끌어안는 것도 봤습니다. 이 여자들은 다 뭡니까?”
난투극이 계속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잠시 혀를 찬 아버지 차현수가 팔짱을 끼고 은우 편을 들었다.
둘째 차민석도 자신의 형을 매섭게 노려보며 해명을 요구했다.
아빠 차현수와 차민석이 말할 때,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던 은우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가, 바람.”
“바.람.절.대! 아니다.”
강하게 아니라 말하는 차형욱을 은우가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려 쳐다봤다.
“은우 널 두고 내가 감히 어떻게…….”
이어지는 놀랍도록 비굴한 차형욱 회장의 발언에 파티장은 고요한 적막에 빠졌다. 사교계에서 핏속까지 얼어붙어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라고 유명한 차형욱 회장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길래? 저런 발언을.’
‘이게 꿈인가? 저렇게 눈부시게 생긴 사람이 현실에 존재한다니…….’
‘저분은 차현수 회장님 같은데, 아들한테 바람이라니?’
‘지금 식은땀 흘리는 사람이 차형욱 회장 맞아요?’
‘차형욱 회장이 애인이라도 있나? 이게 무슨 소리야?’
‘차 회장 애인이 저 사람이면, 지금 바닥에 누워 레슬링 하는 여자들은 누구야? 삼각관계?’
‘아, 차 회장이 바람을 피우다 걸렸군. 왜 저렇게 생긴 애인이 있는데, 그런 짓을 했지?’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냥 저 여자들이 헛물 켰나 보네요.’
‘10년 동안 참석한 파티 중 최고로 흥미롭군! YJ 그룹에 감사 카드라도 보내야겠어.’
‘남자야? 여자야? 엄청난 미모인데, 차형욱 회장이랑 뭔 사이지?’
‘근데, 왜 딴 여자랑 파트너로 온 거래요?’
‘가족들도 이미 다 아는 사이 같은데, 차형욱 회장 결혼했나요? 근데 바람이라니…….’
‘아니라고 했습니다! 차형욱 회장 성격에 무슨 바람이겠습니까?’
‘저런 애인을 두고 바람? 미쳤군! 헤어지면 나한테도 기회가? 제발 헤어져라!’
‘저게 사람이야? 천사 같군. 어떻게 저런 애인을 두고……. 차형욱 회장 대단하군!’
‘차형욱 회장, 완전히 쩔쩔매는데요? 의외로 공처가라면 반전인데요?’
‘사교계 1등 신랑감이 임자가 있었다니…….’
갑자기 파티장 안에서 혼잣말과 작은 속삭임들이 쏟아져 소란스러워졌다. 은우를 향하는 시선이 점차 많아져서 불쾌해진 차형욱이었다.
결국, 차형욱은 은우를 번쩍 들어 올려 사람이 없는 1층 발코니로 나가 버렸다.
은우의 바람이라는 단어에 둘이 싸우지 않을까 걱정하는 가족들이었다. 정도훈만 혼자 웃다가 지쳐 의자에 쓰러져 있었다.
문재준 비서실장이 정신을 차리고 호텔 경비를 불러 바닥에서 서로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절대 놓지 않는 두 여자를 억지로 떨어트렸다.
바닥에서 일어나자마자,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버리는 조민경이었다. 김제니는 옷이 찢어져 속옷이 보이는데 가리지도 못 하고, 창피함에 눈물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이 김진혁은 울고 있는 사촌 김제니를 데리고 나갔다.
YJ 그룹 도착 10분 만에 존재감이 사라진 김진영만 허탈하게 사라진 차형욱 회장의 뒷모습을 보았다. 속이 탄 그가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세운 그룹의 둘째 김진호만 망신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과 사촌 동생을 구석에 떨어져 비웃고 있었다.
발코니에 나간 차형욱은 은우를 꼭 품에 안고 난감해 하고 있었다.
변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는 차형욱에게 이 상황은 어렵고 어디서부터 입을 열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는 손길에 조심스럽게 은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은빛 앞머리에 더욱 어려 보이는 작고 하얀 얼굴이 자신을 올려다봤다.
긴 머리가 아까운 차형욱이지만, 보드라운 은우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반응 없는 은우 때문에 속이 탄 차형욱이 단정히 손질된 자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증명을 원하면 배를 갈라서라도 나의 진심을 보여주겠다. 다른 사람 따위는 죽어도 없다.”
은우의 눈을 강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차형욱 스타일로 살벌하게 고백했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그렇게 널 사랑한다. 난 너뿐이다. 내 진심을 알아줘.”
입에 절대 담지 못하는 간질거리는 대사를 입에 담고 목덜미를 붉힌 차형욱 회장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베실 웃으며 차형욱의 품에 은우가 폭삭 안겨들자, 그제야 차형욱이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도, 죽어서도…… 영원히.”
작은 속삭임에 은우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려다 그대로 멈췄다. 부드럽게 삼켜진 입술에 작은 고개가 살며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얇은 허리를 끌어당기는 단단한 팔에 의해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
퍼엉, 휘익, 펑펑.
어둑한 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은우의 하늘빛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하늘을 응시했다.
감탄사를 삼켜버리는 차형욱의 입술이 부드럽게 입안을 훑어오자, 다시 서서히 감겨 사라지는 하늘이었다.
“아가, 아빠는?”
한참을 붙어 있던 차형욱이 떨어지고, 불꽃놀이가 끝나가는 시점에 은우가 입을 열었다. 차형욱이 은우의 눈을 슬쩍 피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한참을 안겨 있어 답답한지 꼼지락거리는 작은 움직임을 느낀 차형욱이 오늘 유난히 예쁜 은우의 모습을 보았다.
“이대로 집에…… 하! 쳐다보는…… 다들 죽여…….”
혼잣말을 하듯 한숨과 함께 토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말들이었다.
에취.
작게 기침을 하는 은우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차형욱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은우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많이 따뜻해진 날씨지만, 밤은 여전히 추워 발코니의 공기는 쌀쌀했다.
“은우, 진짜 들어가고 싶은가?”
차형욱이 정말 싫다는 표정을 하고 또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발걸음을 하는 은우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차형욱이었다. 재킷을 다시 입은 차형욱이 은우의 옆에 달라붙어 어깨를 감싸고 파티장에 들어섰다.
레슬링 한판을 선보인 두 여자가 퇴장하고, 차형욱 회장이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를 품에 안고 사라졌다.
당연히 제대로 난리가 난 파티장 안에서는 차형욱 회장이 사라진 발코니에만 시선을 주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재등장한 차형욱 회장보다 옆에 있는 반짝이는 은발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시선을 느낀 차형욱 회장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은우를 품에 넣고 걸어갔다.
“아빠!”
차현수 회장의 손짓에 환한 얼굴로 품을 빠져나가려는 은우를 놓지 않고, 차형욱이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바람둥이 놈! 아주 잘하는 짓이다. 은우야, 아빠가 저놈 혼내 줄까?
“아가 바람 아니야.”
“은우야! 너도 TV 아침 드라마에서 봤잖아. 바람피운 놈이 어디 쉽게 인정하느냐?”
“절대 아니니깐 그만하십시오.”
드라마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은우다.
그 모습을 보고 대화에 끼어든 차형욱이 싸늘하게 경고하며 은우를 뷔페 테이블로 데려갔다.
하얀색 접시를 직접 손에 들고 사람 같지 않은 외모의 남자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 사람의 손가락질에 따라 음식을 접시에 조금씩 담고 있는 차형욱 회장의 모습에 파티장은 혼란에 빠졌다.
다른 이들의 시선은 모조리 무시한 머슴 차형욱과 은우 커플의 모습에 익숙한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악할 장면이었다.
정리가 안 된 파티장 분위기는 차형욱 회장이 쩔쩔매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차형욱 회장 반전이네요. 수발을 다 들어주잖아요. 저것 좀 봐요. 밥도 떠먹여주네!’
‘어머, 어머나, 정말 먹여주네요. 귀여워라. 잘 받아먹네! 이게 웬일이야!’
‘무슨 사람이 저렇게 생겨요? 아니, 사람은 맞겠죠?’
‘헉! 저것 봐요! 지금 입가의 밥풀을 입으로 떼줬어요!’
‘지금 음식 받아먹은 사람이 차형욱 회장 맞지요?'
‘이 회장님이 손녀딸 또 데리고 왔던데…… 완전히 헛물 켰네요.’
‘저쪽에 대동진 그룹 막내딸도 차형욱 회장님 노리고 참석했던데요?’
‘YJ 그룹 창립 파티 안 왔으면 큰일 날뻔했네요. 이런 엄청난 뉴스라니…….’
‘차형욱 회장이 눈이 높아서 여태껏 혼자였던 거군요.’
‘저런 다정한 면이 있다니…… 차 회장! 인기가 더 올라가겠네요.’
한바탕 할까 기대 반, 걱정 반 했던 정도훈이 너무 허무하게 끝이 나버리는 상황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은우야, 바람피우는 사람 어때?”
“나빠.”
나긋나긋한 정도훈의 질문에 즉각적인 은우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차현수 보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 그런 나쁜 놈들 아빠가 어찌해야 한다고 했지?”
“묻어?”
흡족한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 차현수를 어이없는 눈초리로 응시하는 큰아들 차형욱이었다. 그 눈빛을 무시하고 한없이 칭찬을 건네는 달콤·살벌한 황성파 보스 차현수다.
“옳지. 기억하는구나. 은우 아주 똑똑하다. 아빠한테 무조건 일러라. 아빠가 모조리 해결해주마. 아빠 땅 많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한 입까지 다 먹은 은우의 입가를 닦아주며, 차형욱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버.지! 도대체 지금!”
“왜? 내가 뭐 잘못했느냐? 누가 네가 바람둥이라고 했느냐? 그런 놈들이 나쁘다는데 뭐? 옆에 붙어 집적거리는 것들 처리도 못 해 싸움판까지 벌어지게 한 놈이 네놈이지 나냐?”
“…….”
“또 그러면 은우 데리고 은퇴한다. 이놈아! 은우야, 남편이 계속 바람피우면 며느리는 어떻게 하더냐?”
곰곰이 생각하던 은우가 생각이 난 듯,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가출.”
“그렇지! 아빠랑 둘이서 가출이다. 아이고 어쩜 이렇게 예쁠까? 은우는 누구 며느리야?”
아빠 며느리라고 대답하며 서로 마주 보고 웃는 지나치게 사이좋은 시며 커플에 주변인들은 웃음을 삼켰다.
차형욱은 가출이라는 대답이 은우의 입에서 나오자 움직임을 멈췄다. 불현듯 요즘 은우가 애청하는 드라마 제목이 생각났다.
가출 며느리!
이를 꽉 깨문 차형욱이 은우가 좋아하는 아침 막장 드라마의 시청을 어떻게 설득해서 교육 방송으로 전환할지 고심했다.
아니면, 그래! 사극 드라마면 좋겠다.
한 지아비와 평생을 보내는 지고지순(至高至純) 일편단심(一片丹心) 며느리가 주연인 아침 드라마를 직접 제작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차형욱이었다.
차차 안정을 찾는 파티장에 부드러운 가수의 노래가 잔잔히 들려왔다. 아들 차민석의 팔짱을 끼고 정원을 구경하고 돌아온 조희주가 상기된 얼굴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모두 술 대신 따뜻한 허브차를 마시며 눈부신 조명이 빛나는 주변을 구경했다. 가족들에게 평화가 찾아오고,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차형욱 회장이 자리를 비웠다.
여기저기서 은우와의 관계를 물어보고 궁금해하자, 경계의 시선을 발사하고 다니다가 조금씩 은우의 칭찬과 축하 인사를 받자 달라진 차형욱이었다.
미소 쪼가리를 입가에 달고 가끔 은우가 있는 테이블에 시선을 보내며 느슨하게 대화를 하는 차형욱이었다. 팔불출 기질이 살아나 은우가 자신의 인연임을 기분 좋게 알려 도장을 찍는 중이었다.
“어머니, 한 곡 추실까요?”
곧 유학을 떠나는 차민석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10대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며, 조희주가 다 큰 아들 손을 잡고 무대로 갔다.
시야에서 사라진 차형욱이 간 방향을 바라보며, 은우는 정도훈이 건네준 작은 딸기 케이크를 먹던 포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야, 은발 머리 오랜만이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김진영이 비틀거리며 은우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때마침 자리를 비운 정도훈 때문에, 김진영을 바라보는 차현수 보스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 안녕하세요. 차현수 회장님. 세운 그룹 셋째 김진영입니다. 아시죠? 사생아라고 유명한데. 큭! 걱정하지 마세요. 얘랑은 전에 만난 사이예요.”
“자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이만 비켜주지 않겠나?”
“아니요. 하나도 안 취했어요. 반가워서 인사만 하고 갈려고요.”
포크를 입에 물고 자신을 멍하니 보는 은우를 향해 김진영이 진하게 웃으며 손목시계를 풀었다. 길게 그어진 여러 개의 흉한 상처가 드러난 손목을 은우 쪽으로 내밀어 보여줬다.
“이거 왜 생겼는지 알아?”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은우를 바라보며 김진영이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차형욱 회장 때문에 생긴 거야. 죽으려고 했거든. 잔인한 차형욱이 약에 취한 나를 모른 척 버리고 갔어. 차형욱, 그 사람을 좋아해서 참석한 난교 파티였는데, 날 버리고 가버렸다고. 그날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인간도 아니지. 나중에 같이 자자는 내 부탁도 들어준 것도 알아? 그 사람이랑 나랑 잔 걸 아느냐고! 밤새 어찌나 괴롭히던지, 정말 힘들었다니까…….”
처음에는 작게 속삭이던 음성이 마지막에는 악의를 담고 신랄하게 튀어나왔다.
“그만! 그만해! 황호영! 끌어내게.”
차현수 보스의 명령으로 김진영은 말하는 도중 불곰 황호영의 손에 끌려나가며 끝까지 소리쳤다. 은우가 그 모습을 입에 문 포크를 빼지 않고 멀뚱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가족들의 테이블이 구석에 있고, 여자 가수의 힘찬 노랫소리로 많은 이들이 듣지는 못했다. 멀리서 몇 명의 손님만 끌려가는 남자를 보고 무슨 일인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나랑 잤다고! 네 애인이랑 나랑 잤다고!”
테이블 옆에 있는 야외로 통하는 발코니로 끌려나가면서 악쓰는 김진영의 뒤에 어느 순간 달려온 차형욱 회장이 있었다.
큰 도련님을 발견한 황호영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자, 안간힘을 써서 팔을 내민 김진영이 차형욱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차형욱 네가 말해봐. 나랑 잤는지 안 잤는지! 날 이런 꼴로 만들고 너만 행복할 줄 알았어?”
한발 늦게 뛰어온 문재준 비서실장은 술에 취해 발악하는 김진영을 보자 입이 벌어졌다.
전에도 회장실에 찾아와 진상이란 진상은 다 떨고 경비원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저렇게 행동을 하다니 상식 밖이었다.
저건 차형욱 회장님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있는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싶은 더러운 집착이었다.
멱살을 잡힌 차형욱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황호영이 뒤에서 김진영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당기는 순간 딸려오는 차형욱 회장의 얇은 드레스 셔츠가 문제였다.
술에 취해 괴력을 발휘하는 김진영이 움켜쥔 차형욱 회장의 옷이 찢어질까 강하게 당기지 못하고 힘을 뺀 불곰 황호영이었다. 다시 김진영의 팔 관절을 잡아 힘을 빼게 하려고 손을 뻗었다.
황호영은 아까는 분명 없었던 김진영과 차형욱 회장 사이에 들어 있는 존재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하지 마. 아가 아파.”
어느새 뛰어왔는지, 좁은 틈에 머리를 억지로 디밀어 파고들어간 반짝이는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차형욱을 등지고 서서 은우가 앞에 있는 김진영과의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전기 코드가 뽑혀나가 움직임을 멈춘 기계처럼 차형욱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김진영의 악의에 찬 폭로를 은우가 앞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는 걸 알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좀 전에도 자신의 무심한 태도에 은우에게 상처 입힐 뻔하다가 용서를 받았다.
연달아 터져 나온 사건들로 은우가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지.
과거의 잔재들이 차형욱의 발목을 잡아 진흙탕에 끌어당겼다.
익숙한 꽃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자신과 김진영의 좁은 틈새에 어떻게 파고들어 왔는지 통통한 볼살이 눌려 바동거리는 하얀 얼굴을 보았다.
차형욱, 은우, 김진영 순서로 세 사람이 딱 붙어 하나로 뭉쳐 있는 모습에 당황한 불곰 황호영이 사태 수습에 고심했다.
큰 도련님과 은우 님의 안전을 위해 김진영을 기절시키려 손날을 들어 올린 황호영이었다. 하지만 발코니에 발을 들여놓고 지켜보는 차현수 보스의 손짓에 뒤로 물러섰다.
열심히 얼굴과 손으로 김진영을 밀어보지만, 꿈쩍도 안 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힘이 빠진 은우가 아빠 차현수의 등장에 힘을 냈다.
“으윽! 은발 머리, 저리 비켜라! 너는 벨도 없어? 기분 안 나빠? 무슨 이런 애가 다 있어! 나랑 차형욱이랑 한 번 잤다니까.”
“아가, 나랑 맨날 많이 자.”
오늘도 자. 은우가 눈가에 힘을 주고 자신 있게 이어서 말했다.
“뭐?”
차현수 보스 뒤로 문재준과 함께 들어서던 정도훈이 은우의 답변을 듣고 놀라 되물었다.
도대체 이놈의 파티에 무슨 마가 꼈는지, 육탄전이 두 번이나 발생했다. 다행히 두 번째는 공개적인 곳이 아닌 발코니였지만, 문재준 비서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YJ 창립 기념 파티 때문에 자신은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야근을 했다.
그걸 회장이라는 놈이 나서서 망치고 있었다. 문재준은 저 나란히 껴안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 불쌍하게 끼어 있는 은우 님만 쏙 빼내고 싶었다.
그 사이에 자신이 들어가 양쪽으로 김진영과 차형욱 회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차형욱 회장을 갈구며, 지긋지긋한 김진영을 노려봤다.
계속 은우를 자극하려는 김진영의 외침에 불이 꺼졌던 차형욱의 눈에 불이 켜졌다. 늘어졌던 팔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은우의 대답이 귀를 강타하자 자신의 본 모습을 은우 앞에서 감추던 걸 포기하고 김진영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렸다.
때마침 김진영을 두 팔로 힘껏 밀친 은우가 뒤로 날아가 쓰러지는 김진영의 몸과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와.
짧은 감탄을 토해낸 은우가 냉큼 김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눈을 감고 기절해서 꼼짝도 안 하는 김진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형욱 쪽을 바라보았다.
“아가, 이제 괜찮아. 혼자 잔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맴도는 눈동자로 차형욱이 은우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별거 아닌 자신의 과거가 살아나 자신의 목을 죄고, 은우를 볼 낯이 없게 했다.
가까이 다가온 하얀 손이 자신의 구겨진 옷을 만져주고 있었다. 어색한 손놀림에 옷이 펴지기는커녕 더 구겨졌지만 따뜻한 한 줄기 위로였다. 자신의 생명 같은 따뜻함을 떨리는 손으로 부여잡아 품에 가뒀다.
“아가, 우리 자러 가.”
둘이서만. 은우가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말을 덧붙였다.
말갛게 뜬 눈매가 졸린 것이 아님에도 차형욱의 옷자락을 붙잡고 둘이서 자러 가자는 은우식 질투였다.
이 어리광의 이유를 잘 아는 차형욱이 아무런 말 없이 은우를 코알라 안듯이 들어 올렸다.
아까부터 정도훈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한 마리 짐승을 보듯 차형욱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 차현수도 과감한 며느리의 발언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쯧쯧, 제발 잘 좀 해라!”
레슬링 여선수 두 명과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놈이 하나다. 생각할수록 어이없어 혀를 찬 차현수가 아들을 타박했다.
오래전 이혼으로 어린 자식에서 상처를 줬던 아버지 차현수다. 서먹하고 대화도 없던 부자였다가 기적처럼 가까워진 아들과의 관계였다. 그런 아들이 사랑을 잃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큰아들 차형욱에게 은우는 정말 딱 알맞았다. 사랑스럽고, 대범하고 강한 아이다. 고맙고 고마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천사 같은 며느리였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은우를 안고 파티장을 가로지르지 않고, 발코니 계단으로 내려가던 차형욱이 뒤를 돌았다. 고개를 푹 숙여 무뚝뚝한 사죄의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깨끗이 정리해라. 또 그러면 알지?”
차현수가 은우 몰래 큰아들에게 ‘가출’이라고 입 모양으로 경고했다. 흠칫 놀란 차형욱이 품 안의 은우를 꽉 안고 눈빛을 사납게 번들거렸다.
뭘 잘했다고 으르렁거리나 성질이 났지만, 저렇게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아들놈이 측은하기도 했다.
“아빠, 안녕요.”
차형욱의 품에 새끼 코알라처럼 달라붙어 뒤로 보이는 차현수에게 살랑살랑 인사를 하는 은우다.
그 모습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 마주 손을 흔들어준 차현수 보스가 바닥에 기절해 있는 김진영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세운 그룹이라고 했나?”
“네, 세운 그룹 셋째 아들 김진영입니다.”
옆에 서 있던 문재준 비서실장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정도훈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저놈 아주 인물이에요. 아휴! 사생아라고 제대로 삐뚤어진 놈입니다. 차형욱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엄청나게 쫓아다녔습니다. 무슨 약까지 혼자 먹고 매달린 적도 있다던데, 차형욱이 봐줄 리가 있습니까?
큰형인 김진혁이 고등학교 때부터 술, 마약이 난무하는 난잡한 파티를 열었는데, 마지막 피해자가 김진영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세운 그룹에서 큰아들 김진혁은 유학 보내 수습하고, 셋째 아들 김진영은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죽는다고 협박용 자살 기도도 여러 번 한 걸로 압니다. 그래도 차형욱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깐, 난잡하게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고 다녔습니다. 세운 그룹에서도 다 알면서 방치하고요. 한마디로 콩가루죠, 콩가루!”
그런 놈이랑 얽힌 큰아들이 한심해서 고개를 흔들던 차현수 보스가 김진영을 가리키며 짧게 물었다.
“지금 치워도 되는 물건이냐?”
“참으십시오. 차형욱 회장님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조직 일은 조직의 법대로 처리하고, 사업은 사업으로 처리하고자 하십니다.”
문재준 비서실장의 만류에 차현수 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 조희주와 둘째 차민석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걸음을 멈춘 차현수의 나직한 한마디가 뒤를 이었다.
“문재준 실장이 말을 전하게. 빠른 시일 내에 처리 못 하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게.”
한발 물러서는 차현수 보스에게 깊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문재준 비서실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형욱 회장님의 비밀 명령에 호텔 방 안에서 입술에 경련이 나도록 풍선을 불고 있던 박동수가 전화 메시지에 서둘러 호텔 방을 뛰어다녔다.
예정보다 1시간이나 이른 방문에 허겁지겁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다른 직원들을 독촉해 철수했다. 도대체 이벤트가 뭐라고 자신이 저녁도 못 먹고 이게 무슨 짓인지 싶었다.
다양한 연애 강좌로 신세계를 알려줘 대단하게 생각했던 연애 고수 정도훈 형님이었다. 지금은 한껏 속으로 원망하며 감각이 없는 볼을 부여잡은 박동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은우를 껴안고 있는 차형욱은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초조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오늘 파티가 끝나고 은우에게 멋지게 이벤트를 선사할 계획이 어그러져서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다.
무슨 일을 하든 심사숙고해서 계획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사시키던 차형욱 회장은 이곳에 없었다. 그저 지은 죄가 커서 눈치를 보는 커다란 덩치에 풀이 죽은 차형욱만 있을 뿐이었다.
은우를 위해 준비해둔 방은 가족들이 있었던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옆에 있는 허니문 스위트룸이었다.
방문 앞에 서성이며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으로 그냥 들어갈지, 이벤트를 준비해 놓은 허니문 스위트룸으로 들어갈지 고민했다.
짧은 시간 긴 고민을 하던 차형욱이 마침내 방문 손잡이 위에 손을 얹고 서서히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