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방문을 열자 진한 꽃향기가 코를 훅 찔러왔다. 달콤한 로맨틱 음악이 흐르는 방 안이었다.
장미 꽃잎 위에 작은 별 촛불로 만든 길이 문 입구부터 넓은 응접실을 가로질러 펼쳐졌다. 마치 어둑한 실내에 별이 바닥에 떠올라 꽃길을 비추는 거로 보였다.
품에 있는 은우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둑한 방 안이 붉어진 차형욱의 얼굴을 가렸다. 동그랗게 변한 하늘빛 눈동자에 노랗고 빨간 초의 불꽃들이 춤추듯 일렁였다.
“우와! 아가, 저기.”
크게 감탄을 하며 은우가 손가락으로 별로 만든 길을 가리켰다.
차형욱이 들썩이는 은우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을 따라가자 넓은 발코니 쪽에 다다랐다.
커다란 하트가 분홍색과 붉은색 장미 잎으로 폭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붉은 하트에는 하얀 장미 꽃잎으로 양옆에 하얀 날개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주변에는 조그만 하트 풍선들로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작은 초들이 주위에 빽빽하게 둘러 있어 환하게 빛났다.
중앙에 있는 자쿠지 속의 꽃잎들도 가득 춤추듯 움직였다. 모든 것은 정도훈이 총 기획하고, 박동수와 호텔 직원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아 있었다.
물론 1부와 2부 파티 중간에 쉬지도 못 하고 차형욱도 이곳에 방문했었다. 고백을 위한 동선을 미리 파악해두고, 정도훈에게 교육을 받았다.
큰 하트 중간에 서서 폴짝 뛰며 장미 꽃잎을 손으로 만져보는 은우다.
목울대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가며 마른침을 삼킨 차형욱이 은우의 양손을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처음에는 눈을 마주 보던 은우가 말 없는 시간만 길어지자, 주변에 풍선이 놓인 곳으로 가려고 했다.
손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차형욱 때문에,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손은 붙잡힌 상태에서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고 구경하는 은우다.
처음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차형욱의 모습에 집중했지만, 긴 침묵의 시간은 곧 은우의 집중력을 방해했다.
“은우…….”
아까부터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좌우로 움직이던 은우의 머리가 차형욱을 똑바로 바라봤다. 또다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심심한 은우가 다시 주변을 구경했다.
폭신한 꽃도 만져보고 싶고, 장식된 풍선도 건드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은우가 차형욱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커다란 손이 꽉 움켜쥔 양손 때문에 꼼짝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은우…….”
또다시 은우의 이름이 흘러나와도 뒤로 이어져 나오는 말은 없었다. 사방에 보이는 꽃이 움직이는 자쿠지와 예쁜 불빛을 차형욱이 눈으로만 구경하게 하자, 은우의 눈이 시무룩이 밑으로 처졌다.
은우의 처진 눈매에 마음이 급해진 차형욱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궁금함을 담은 은우의 시선을 피해 슬쩍 손바닥을 보며 차형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은.우.야.너.는.이.세.상.어.떤.꽃.보.다.눈.부.시.게.아.름.답.다.너.의.눈.동.자.는.밤.하.늘.의.별.보.다.빛.나.는.구.나.초.코.렛.보.다.달.콤.한.나.의.천.사.평.생.내.목.마.른.가.슴.을.채…… 워…… 다…… 오?”
더듬더듬 국어책을 읽어 내리던 차형욱이 갈수록 닭살이 올라오는 심하게 오글거리는 정도훈 표 컨닝페이퍼를 구겨버렸다.
알아서 말하겠다고 했지만, 혹시 모른다며 정도훈이 주머니에 찔러주었던 쪽지였다. 확인을 안 하고 급하게 읽은 것이 실수였다.
은우를 눈앞에 두고 말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꺼내들었던 것인데,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알아듣기 힘든 차형욱의 말에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은우가 입을 열었다.
“새끼 사슴…… 눈망울의…… 어여쁜 그대여. 사랑을…… 다오?”
“은우, 뭐?”
은우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린 차형욱은 자신이 구겨버린 쪽지를 손에 들고 은우가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재빠르게 튀어나간 차형욱의 손이 얼른 그 쪽지를 빼앗아 갈가리 찢어 버렸다. 느끼한 대사를 적어준 정도훈을 향해 이를 갈았다. 10년 전 자칭 선수였던 정도훈이 지금은 ‘싱글’임을 망각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생애 첫 이벤트가 점차 꼬여가자 차형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열 배가 넘는 적들을 앞에 두고도 긴장을 해본 적이 없던 차형욱이었다.
그런 그가 수습 안 되는 이 상황에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망했다.
말주변 없는 자신보다 더 말이 없는 은우다.
무엇이 좋은지 싫은지도 표현이 별로 없어, 늘 가까이 관찰을 하는 사람들만 은우의 행동을 보고 그것을 알아보곤 했다.
지금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하늘빛 눈망울을 보고, 차형욱은 자신의 한심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가, 사슴 좋아?”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음색에 눈을 마주 보니 뜬금없는 은우의 질문이 들렸다. 쥐고 있던 은우의 팔을 놓고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겨버린 차형욱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연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슴? 아니다. 나는 은우가 좋다.”
“아가 좋아.”
많이. 라고 덧붙이는 은우의 드문 애정 표현과 함께 하얀 손이 내밀어 졌다. 잘 길들여진 대형견처럼 즉각 고개를 숙여 쓰다듬을 받는 차형욱이었다.
“아가, 착해. 예뻐.”
은우의 칭찬에 광대가 붉게 물든 차형욱이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밑을 내려다보던 차형욱은 갑자기 바싹 다가와 자신의 올려다보는 작은 얼굴과 눈을 마주쳤다.
계속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은우가 덥석 잡아오자, 화들짝 놀란 차형욱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에 깜짝 놀란 은우가 차형욱의 손가락을 놓쳤다. 동그랗게 벌어진 은우의 입을 보고 차형욱이 급하게 은우를 챙겼다.
“은우! 놀랐나? 괜찮아?”
등을 쓸어주며 놀란 마음을 달래준 차형욱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주저앉은 은우다.
바닥에 떨어트려 반쯤 열린 상자를 잡아 은우가 차형욱에게 내밀었다. 상자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차형욱이 손을 멈췄다.
‘이런! 이게 아닌데.’
삑, 삑, 팡, 팡.
금은 테이프가 붙은 피리를 입으로 불며 갑자기 등장한 가족들이 손에 들고 있는 폭죽을 터트렸다. 이들은 정도훈이 차형욱에게는 비밀로 몰래 준비한 또 다른 이벤트였다.
대형 하트가 장식된 곳이 있는 허니문 스위트룸의 발코니를 훔쳐보던 가족들은 차형욱이 청혼을 하는 순간을 기념해서 사진을 찍고 축하를 해줄 생각이었다.
프레지던트 스위트룸과 이곳 허니문 스위트룸은 발코니로 이어져 있었다. 평소에 닫아 두지만, 같은 가족이 사용해서 요청하면 오픈할 수 있었다.
상당히 넓은 발코니에 멀리서 서 있는 큰아들 차형욱과 은우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30분이 넘게 서로 손만 붙잡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던 중 그들은 드디어 보았다.
무릎을 꿇고 반지 케이스를 주는 모습에 성급한 아버지 차현수가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추, 축하한다. 근데, 도훈이가 오늘 형욱이가 청혼한다고 하던데, 은우가 하는 거냐? 장하다! 역시 내 며느리다.”
“회장님 계획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정말 축하합니다.”
“형수! 멋지십니다.”
“푸흐흐흐, 축하한다! 풋! 차형욱, 청혼 받았구나.”
미친 듯이 증거 사진을 찍는 정도훈의 손이 웃느라 흔들렸다. 참지 못한 정도훈이 카메라를 박동수에게 넘기고, 축하 인사를 겨우 건넸다.
“큰 도련님과 은우 씨, 두 분 정말 축하해요.”
뒤에 있던 조희주가 얇고 긴 초가 가득 꽂힌 하트 모양의 케이크를 들고 왔다. 은우가 만세를 부르며 케이크를 보자, 활짝 웃으며 조희주가 축하 인사를 했다.
옆에서는 차민석이 샴페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등장한 가족들과의 깜짝 파티가 마냥 신이 난 은우가 어깨춤을 추며 좋아하자, 차형욱은 말문이 막혔다.
기다란 잔에 샴페인을 따라 한 잔씩 돌린 차민석과 촛불을 끌 준비를 하는 은우 옆에 영혼이 탈탈 털린 차형욱이 서 있었다.
하나, 둘, 셋에 맞춰 초를 끄고,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꿈처럼 느껴졌던 차형욱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눈앞에는 사진기를 보고 은우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었다.
잔치 분위기의 북적거리는 소리를 뚫고 차형욱의 낮게 깔리는 음성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다들 나가…….”
“엥? 무슨 소리냐? 축하는 좀 더 해야지.”
“조금만 있다가. 왜 벌써 둘이서만 있고 싶으냐?”
“형수 사진 좀 더 찍고요. 잠깐만요.”
“당장! 모두 나가십시오!”
거친 목소리로 차형욱이 단호하게 외치자, 당황한 사람들이 우왕좌왕 열린 발코니 문을 통해 움직였다.
작게 투덜거리며 옆 발코니로 빠르게 사라지는 가족들 틈에 끼어서 같이 나가는 은우의 몸이 공중에 들렸다.
갑자기 공중에 떠올라 파닥거린 은우는 자신을 안아 올린 사람이 차형욱이란 사실에 몸에 힘을 뺏다. 이벤트고 뭐고 이젠 다 틀렸다. 차형욱이 은우를 안아 들고, 발코니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에 도착해, 소파 위에 은우를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응접실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초들과 장미향이 맴돌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마련된 샴페인, 과일과 케이크에 은우가 시선을 보내다 장미 잎을 손에 가득 들고 코에 가져갔다. 그런 은우의 손을 차형욱의 커다란 손이 덮어왔다.
“은우, 넌 내게……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나랑…… 평생, 아니 죽어서도.”
횡설수설 나오는 자신의 말에 차형욱이 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가족들이 정신을 쏙 빼놓아 그런지 목을 조이는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가득 차 넘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아가, 더 소중해.”
움푹 들어간 미간 사이를 하얀 손이 다가와 살며시 쓰다듬었다. 맑고 깊은 눈매가 차형욱을 보고 곱게 접혔다.
사랑스럽게 접힌 눈꼬리에 입술을 가져간 차형욱이 은우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니. 은우가 더! 훨씬 더 소중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 소중해서……. 내 곁에서 사라질까, 없어질까 항상 두려웠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널 죽어도 놔줄 수 없는 나다. 내 옆에 없는 은우를…… 상상만으로 터질 것 같은 내가 두려웠다. 내가 널 상처 입힐까 죽도록 두려웠다.”
“…….”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런 날 무서워도…… 두려워하지도 마. 너에게 작은 상처라도 주느니…… 차라리 나는 내 심장을 갈라버릴 수 있다.”
“…….”
“은우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 나의 가족이 되어줘. 영원히……. 나는 너의 것이다. 나를 받아줘.”
차형욱은 절절한 고백의 말을 토해내며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서 꺼낸 건 푸른빛이 감도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반지의 둘레에는 백금으로 작은 꽃받침이 4개 달린 수수한 냉이꽃 여러 송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은우의 왼손을 잡아 올린 차형욱이 가늘고 하얀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
은우가 오른손으로 반지의 꽃을 쓸어 보는 걸 보고 차형욱은 꽃이 품은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했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나와 결혼해줘.”
반지가 끼워진 은우의 손가락에 입술을 내리며 가장 하고 싶었던 한마디를 마침내 꺼냈다.
“……결혼?”
작게 반문하는 은우의 모습에 평생, 죽어서도 우리 둘이 같이 살 거라고 주위에 자랑하는 거라고 다시 말하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우다. 태어나서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차형욱의 모습이 은우의 눈동자에 비췄다.
“저기요! 여기서 주무시면 어떡합니까? 일어나 보세요. 고객님!”
“으음, 뭐야? 아악!”
환한 햇볕에 팔로 눈을 가리려던 김진영은 얼굴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고객님,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큰일 납니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나무와 풀이 무성한 호텔 가든 구석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침까지 풍기는 술 냄새가 자신이 얼마나 과음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감싸자 어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나쁜 새끼! 감히 날 밖에다 버리고 가? 차형욱! 날 때렸어? 가만두지 않겠어!”
늦게까지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예약해둔 호텔 방에서 자고 일어난 문재준 비서실장이 갑자기 튀어나온 재채기를 했다.
어제저녁 고민 끝에 짜증 나는 진상 김진영을 슬쩍 나무 밑에 버리고 와서 그런지 조금이지만 속이 후련한 문재준이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다.
Rrrr. Rrrr.
“여보세요. 나야. 왜 이렇게 느려터졌어? 돈 받기 싫어? 빨리 하란 말이야! 그냥 처리해. 그래. 확인 중이라고? 됐어! 그냥 자료 다 가지고 나와! 돈 받으면 당분간은 외국에 숨어 있어야 할 거야. 최대한 빨리 처리해!”
통화 중인 김진영의 모습을 앞에서 지켜보던 세운 그룹 첫째, 김진혁이 입가를 말아 올렸다.
차형욱 회장한테 미련이 남았는지 은근슬쩍 시간을 끌며 서두르지 않던 김진영이 YJ 그룹 창립 파티에 다녀오더니 변했다.
어디서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엄청난 멍을 달고 나타나서는 YJ 그룹에 숨겨둔 스파이 애인 놈에게 서두르라고 닦달했다.
전화로 한참 짜증을 내며 밀어붙이더니 사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김진영이었다. 혼자 남은 김진혁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멍청한 새끼! 걸레 같은 놈! 유일하게 잘하는 남자 꼬시는 일도 제대로 못 하다니. 진즉 차형욱을 꼬셨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약까지 처먹고 달려들어도 소용없었으니.’
학창 시절 차형욱을 쫓아다니는 김진영에게 약을 구해준 것이 김진혁이었다. 약을 먹고 더운 숨을 토하며 유혹하는 김진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린 차형욱이었다.
독한 놈!
사실 그때가 김진영의 처음이 아니라는 점과 약을 누가 먹인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먹었다는 점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얼마 전까지 약간의 동정심을 보이던 차형욱도 애인이 생기자 김진영에 대해 작은 연민조차 버려버렸다.
어제 사촌 동생 김제니 때문에 공식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세운 그룹과 김진혁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김제니가 파티장을 돌아다니면서 어찌나 세운 그룹 이름을 팔고 다녔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파티에는 제대로 참석도 못 하고 울고불고 통곡하는 김제니를 서둘러 차에 태워 집에 데려왔다. 마침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세운 그룹 회장, 아버지가 놀라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하지만 창피함에 자세한 상황을 말도 못 하고 우는 김제니를 대신해 김진혁이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 초대도 못 받은 사촌 동생 김제니의 초대장까지 구해다 주었던 김진혁이다 보니 세운 그룹을 망신시켰다는 추궁을 피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같이 싸운 여자가 YJ 그룹 직원이란 말에 강력하게 항의하겠다고 했지만, 김제니가 와인을 뿌리고 머리카락을 먼저 움켜쥔 죄가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김제니는 창피해서 아직도 울면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망할! 내가 그년 때문에…….”
내 논 자식이지만 그래도 세운 그룹 셋째 김진영도 다음날 오전에서야 엉망인 얼굴로 술 냄새를 풍기고 들어오자 세운 그룹 회장, 아버지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진혁도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둘째 김진호다. 항상 비웃음을 입에 물고 다니는 놈이 꼴도 보기 싫었다. 늘 비웃는 눈초리가 항상 자신을 자극했다.
이번에 YJ 그룹에서 개발한 디자인을 세운 그룹에 먼저 적용한다면 자신이 차기 회장임이 확실했다.
‘그래, 이번 일만 제대로 성사되면 세운 그룹은 내 것이다!’
금방이라도 잡힐 듯 다가온 기회에 흥분한 김진혁이 축축해진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소리 죽여 웃었다.
“은우야, 형욱이랑 약혼해줘서 고맙구나.”
“축하해요. 형수. 근데 어떤 것이 약혼반지인가요?”
은우가 손가락을 쫙 폈다. 열 개의 손가락에 전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에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반지가 동시에 끼워져 있어서 손가락이 잘 접히지도 않았다.
은우가 그중에 왼손 약손가락에 있는 푸른빛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가리켰다. 유일하게 왼쪽 약손가락에는 약혼반지 하나만 빛나고 있었다.
“그, 그래. 근데, 그것들이 참 무거워 보이는데…… 괜찮으냐?”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딸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가지고 조희주가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눈부신 은우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조희주가 외쳤다.
“에헴! 다시 봐도 엄청나네요. 은우 씨, 눈부시게 화려하세요. 큰 도련님도 참.”
오늘따라 눈부시게 빛나는 은우의 모습이었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들어온 빛줄기가 은우의 몸에 두른 보석들을 반사해 눈이 시린 가족들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골고루 껴있는 다양한 컬러의 반지들을 은우가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목과 팔목에는 반지에 맞춰 세트로 갖춰진 족히 50개는 넘어 보이는 목걸이와 팔찌로 둘둘 말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에 종류별로 걸린 굵고 얇은 목걸이 줄들이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특히 팔불출 시아버지 차현수는 저러다 얇은 은우의 목이 부러지지 않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히 귀걸이는 귀를 뚫지 않아서 상자에 따로 담겨 보관 중이었다.
‘형욱이 놈! 은우 몸에다가 보석상을 차렸구나.’
오후에 점심을 먹고 은우를 안전한 본가에 데려다 놓은 차형욱이 혼자 출근을 했다.
차형욱의 품에 안겨 있는 눈부시게 화려한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은우를 보고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은우의 움직임이 너무 불편해 보였지만, 반짝반짝한 보석들을 온몸에 칭칭 두르고 좋아하는 모습에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은우!”
회사에 출근하고 3시간도 안 되어 돌아온 차형욱이 멀리서 은우의 이름을 부르며 뛰듯이 걸어왔다.
손가락이 잘 굽혀지지 않아 차현수가 포크로 넣어주는 딸기를 입에 물고 있던 은우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려던 은우가 뒤뚱거렸다.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걷는 것이 불편해 보이는 은우의 모습에 의아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무리 보석들이 무거워도 어색하게 걷는 모습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어! 어! 은우야!”
앞으로 확 넘어가는 은우를 보고 차현수가 놀라 소리쳤다. 당황한 차형욱이 잡아주려 했지만, 이미 은우가 납작하게 마룻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차형욱에 의해 일으켜진 은우가 팔을 내밀어 차형욱의 품에 안겼다. 꼭 끌어안아주었다가 은우의 얼굴을 확인한 차형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헉! 우리 은우 코가 빨갛지 않으냐? 정도훈 좀 불러라. 빨리!”
차현수 보스의 불호령에 냉큼 정도훈 닥터를 호출하러 달려나갔다. 다들 정신없이 움직이고, 차형욱도 손을 내밀어 연신 붉어진 은우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여기 아파? 은우, 다른 곳은?”
은우의 손가락이 자기 코를 가리키자, 차형욱이 가까이 입을 대고 뜨거운 입김을 불었다. 만지면 아플까 차마 건들지 못하는 차형욱의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은우가 자신의 무릎도 손짓하자, 얼른 자리에 앉히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은우의 양 무릎에도 차형욱의 뜨거운 입김을 닿았다.
“야, 차형욱 저게 뭐냐? 저러니깐 은우가 제대로 못 걷고 넘어지지. 못 산다. 내가 아주!”
은우가 다쳤다는 말에 뛰어온 정도훈이 쩔쩔매고 은우를 살피고 있는 차형욱의 뒤에서 살펴보았다. 가까이 다가와 보니 어이가 없는 정도훈이 혀를 찼다.
자기가 전에 충고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보석 선물을 이렇게 무식하게 한 자기 친구의 등을 후려쳐주고 싶었다. 긴 은우의 청바지를 접어 올리자 보이는 광경에 다른 사람들도 차형욱을 노려봤다.
양 발목에 걸린 얇은 발찌 뭉치야 그러려니 하지만, 발가락에까지 끼워져 있는 반지들은 한눈에 보아도 걷기 불편해 보였다. 한숨을 내쉰 차형욱이 은우의 보석에 손을 가져갔다.
사실, 보석을 이렇게 한꺼번에 온몸에 두른 사람은 은우다. 어제 잠들기 전에 차형욱이 보석들을 은우에게 내밀며 선물했다.
아침에 차형욱보다 일찍 일어난 은우가 상자에서 모두 꺼내 걸치고 뺄 생각을 안 했다. 저 발가락에 끼워진 반지들도 손가락이 모자라 은우가 자기 발가락에도 끼운 것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의 화살을 차형욱에게 날렸다.
“안 돼요. 아가, 선물.”
차형욱은 선물을 계속 몸에 두르고 뒷걸음질 치는 은우를 살살 달랬다.
결국, 넘어진 은우를 직접 본 차형욱이 단호한 손길로 은우의 보석들을 강제 회수했다. 강경한 차형욱의 행동에 시무룩하게 은우가 눈꼬리를 내리고 허전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위험해서 안 돼. 은우. 넘어지면 아프다.”
약혼반지 하나만 달랑 끼워진 손을 잡고 입술을 가져가는 차형욱이었다. 보석이 잔뜩 들은 보석함을 은우의 품에 안겨주고 얼굴 전체에 입술을 내리며 달래자 조금씩 얼굴이 펴졌다.
다행히 은우가 다른 사람들보다 상처가 빨리 낫는 편이라고 해도 속상한 차형욱이 조심스럽게 정도훈이 건네준 약을 코에 발라주었다.
“은우야. 아빠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까짓 보석들 아빠가 잔뜩 사줄 테니 애지중지할 필요 없다.”
“다행히 조금 붉어진 정도니깐 내일이면 없어질 겁니다. 이게 프러포즈 반지 맞느냐? 오! 차형욱 너도 꼈네. 우와! 블루 다이아몬드?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재주 좋게 잘도 구했네.”
“아버지. 이제 거의 정리가 되었으니 본가에서 나가겠습니다.”
정도훈의 호들갑을 무시하고 은우와 집에 가겠다는 차형욱의 선언에 차현수가 배은망덕한 놈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가려면 너나 가라. 은우는 두고.”
날이 선 큰아들 놈이 청혼에 성공하더니 여유가 생겼다. 묵묵히 아버지 차현수의 투정을 듣고는 담담하게 응대했다.
“자주 오겠습니다.”
“흠!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은우의 안전을 생각하면 여기가 가장 좋다.”
“……네.”
차현수의 대답에 인상을 쓰고 고민을 하던 차형욱이 어렵게 대답을 했다. 아주 작은 위험도 감수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상한 걸 자꾸 배우는 은우를 본가와 잠시 격리해두고 싶었다.
“어차피 은우 혼자 둘 일은 절대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큰아들 차형욱의 모습을 보고 차현수가 은우 쪽을 바라보며 슬프게 말했다. 힘없는 차현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우가 시선을 고정했다.
“은우야! 우리 며느리, 아빠랑 같이 살고 싶지 않으냐? 저 형욱이 놈이 아빠 혼자 여기다 버리고 너랑만 나가 살겠다는구나. 곧 민석이도 공부하러 떠날 텐데…… 아빠는 혼자라서 너무 외롭다.”
“아빠, 같이!”
냉큼 달려와 아빠 차현수를 위로하는 은우의 모습에 차형욱이 이를 갈았다.
“으득. 알겠습니다. 아시겠지만, 당분간입니다.”
코가 빨간 은우와 늙은 생강 아버지 차현수가 끌어안고 만세를 불렀다. 은우의 허리를 잡아채 얼른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 차형욱이 차현수의 옷자락에 조금 지워진 연고를 은우의 코에 덧발랐다. 아까부터 웃으면서 차현수와 차형욱의 심리전을 구경하던 차민석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뭐지?”
“작은 약혼 선물입니다.”
봉투 안에는 알 수 없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제주도라고 시작되는 주소에 차형욱은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제주도 바닷가 근처에 마련된 별장입니다. 관리하시는 분이 있지만, 어머니가 직접 가셔서 모든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가서 편하게 쉬었다가 오시면 됩니다. 형수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바쁘단 건 알지만, 잠시 시간을 내서 가면 형수가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하루라도 갔다 와라. 바다도 보고, 은우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이고 와라. 비행기 공항에 대기하고 있다. 내일 출발해라. 문재준 비서실장 말로는 하루 이틀 정도면 괜찮다고 하더구나.”
“감사합니다.”
잠시 은우에게 시선을 준 차형욱이 감사 인사를 했다. 차형욱과 둘이 놀러 갔다 오라는 차현수의 말에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랑살랑 작별의 손 인사를 했다.
“허허. 벌써 인사하느냐? 지금 말고. 내일 일찍 출발하려무나. 은우 저녁 먹고 얼른 자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든 은우 대신, 차형욱은 짐을 쌌다. 휴가와 관련해 문재준과 전화를 끝내고 뒤늦게 은우의 옆에 누워 하루를 마감했다.
차형욱은 약혼반지가 끼워진 손으로 은우의 약혼반지가 끼워진 손에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