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은 한기가 돌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티가 나기 마련인데,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이는 더 티가 나기 마련이다.
걔의 첫인상이 그랬다.
백지오는 정상적인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쏟아지는 폭력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도망간 어미, 노름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비, 아이를 둘러싼 괴상한 소문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선생.
백지오의 주위에는 제대로 돌봐 줄 사람도, 제대로 알아봐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새끼한테도 쉽게 마음을 연 거겠지.
언젠가 오진용이 백지오가 꼭 갓 태어난 오리 새끼 같다는 말을 했다. 처음 알 까고 나와서 본 게 나라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오리 새끼 같다고.
‘걘 기댈 사람이 필요한 거야.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거지.’
그래서 이름도 제대로 불러 주지 않았고,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백지오는 기회가 많다. 더 좋은 삶을 누릴 기회. 좋은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기회. 평생 불운에 시달려 왔지만, 앞으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기에.
그 기회를 주려고 했다. 백지오에게는 인생이 바뀔 정도로 큰 사건이 내게는 고작 채무자에게 채무 이행을 강요하지 않는 수준의 것이니까. 그 정도였다. 처음에는.
하지만 인생은 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아저씨. 저 아저씨 믿어요.’
그 한마디에, 상황이 뒤집혔다.
내게 갈구하는 애정이, 관심이 독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집어삼키는 애새끼. 의지해야 할 사람과 의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믿는다고 하질 않나. 비에 쫄딱 젖은 개새끼마냥 빌빌거리다가도 단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사람처럼 순수하게 사랑을 고하질 않나.
난생처음 받아 보는 맹목적이고 순수한 마음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지는 게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인생을 조진 새끼도 기꺼이 좋은 사람이 되어 주고 싶게 만드는 백지오.
걔는 사람을 너무 믿는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천성이 착해서 그렇다. 그 정도면 타고난 거다. 나 같은 새끼는 평생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영역이겠지.
그러니 자신을 팔아먹은 애비 새끼도 고작 죽은 셈 치겠다는 말로 원한을 끝낼 수 있는 거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래서… 할 말은 그게 답니까?”
다리 한쪽이 부러진 앉은뱅이책상을 발로 툭 쳤다. 우당탕, 요란한 소음을 내며 책상이 배를 까고 뒤집힌다. 덩달아 발치에 널브러져 있던 중년 남성이 어깨를 움츠렸다.
“잘, 잘못했습니다. 사장님.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빚을 면제해 준다길래… 홀, 홀려서….”
그는 나이가 무색하게 곧장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비비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간절히 염불을 외는 듯한 자세로.
“아이고… 사과는 자식한테 하셔야지. 나한테 하면 어쩌나.”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오진용이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냈다. 물론 ‘계약서’라고 하기에는 일방적인 확인증에 가까운 서류지만.
“일하자.”
오진용의 한마디에 덩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백철웅이 움직이지 않게 몸을 고정시켰다. 백철웅이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팔딱거렸지만 장정 여섯이 들어왔다고 꽉 차 버린 단칸방에서 도망칠 구석도 없었다.
“하이고… 발광을 한다. 발광을 해. 자, 손. 손.”
백철웅의 품에 있던 붉은 인주를 꺼낸 오진용이 백철웅의 엄지를 끌어다가 골고루 묻혔다. 검붉은 피를 연상시켰다.
“옳지. 옳지.”
백철웅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아, 사, 사장님. 사장님. 잠, 잠시만! 아들, 내 아들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십쇼!”
오진용이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백철웅의 하얗게 질린 창백한 낯 위로 한 줄기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발언권을 얻은 그가 주둥아리를 나불대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다 오해입니다. 사장님. 보내만 주시면 제가 아들 만나서 오해 풀고 잘 달래 보겠습니다.”
“오해?”
“상해에서 원금 회수하고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돈 갚아야지요. 그래도 제 자식새끼인데 어떻게 버립니까. 빚 다 갚으면 데리러 가려고 했습니다, 예.”
한층 힘을 얻은 음성에서는 혐오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다시 한번 백지오를 방패 삼아 살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장소가 아닌 단칸방으로 멀쩡히 데리고 온 것이 최대한의 배려인지도 모르고.
“사장님도 데리고 살아 봐서 아실 거 아닙니까. 걔가 성격이 지랄 맞아서… 흠흠. 제 자식 놈이 사장님 자택에 머물 동안 할 말 못 할 말 다 했나 본데 전부 사실이 아닙니다.”
“…….”
“제가 책임지고 자식새끼 교육 제대로 하겠습니다. 걔가 아직 사춘기라 똥오줌을 못 가려서 그렇지. 나중에 돌이켜보면 다 애비가 지를 위해서 그랬다는 걸… 으아악!”
나는 구둣발로 백철웅의 오른손을 짓밟았다.
“누가 보여 준대?”
“크흑… 손, 손 좀… 끄아악!”
“너무 당연하게 말하니까… 어이가 없네. 무슨 낯짝으로.”
그대로 힘을 주어 짓이기자 흡사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작은 단칸방을 가득 채웠다. 제대로 된 살림살이 하나 없는 통에 앓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이런 곳도 집이라고. 매일 밤, 누렇게 뜬 벽지를 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백지오를 상상하니 분노가 절절 끓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어떻게 보러 갑니까. 어림도 없지.”
“끄으으… 으으윽!”
고작 발에 밟힌 거 가지고 숨넘어가는 소리에 나는 조롱했다.
“아이고… 엄살이 심하시네. 누가 들으면 진짜 사람 하나 죽이는 줄 알겠습니다. 내가 누굴 죽여요, 아버님.”
“끄… 살, 살려 주십쇼.”
“왜 이러시나. 뭘 했다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된 게, 씨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나는 작게 읊조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마음 같아서는 담그고 싶었다. 드럼통에 넣어 바다 깊은 곳에 담가 버리고 다시는 육지에 기어올라 오지 못하도록. 하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철웅은 백지오의 유일한 혈육이니까.
물론 지금이야 찾지 않겠지만… 언젠간 다시 찾을 수도 있다. 백지오의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고,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일종의 보험이다.
“흐으으….”
나는 구둣발을 떼어 냈다. 피가 흐르는 손등을 부여잡고 어깨를 움츠린 백철웅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오진용이 서류를 넘겼다. 겉보기에는 형식적인 채무 상환 서류를.
“자. 보셔야지.”
나는 엄지와 검지를 공중에서 부딪혀 딱, 딱 소리를 냈다.
“본인이 어디로 갈지는 보셔야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개처럼 끌려가면 기분 좋겠습니까.”
“이, 이러지 맙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바로 갚을 테니까 제발, 제발… 사장님!”
“입.”
오진용이 재갈을 물렸다. 혓바닥이 눌린 백철웅이 침을 질질 흘리며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쳤다. 남의 인생은 동의 없이 함부로 잘 가져다 쓰면서, 본인 인생은 조지기 싫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아. 멀쩡히 보내 주기로 약속했는데…….”
“…….”
“자꾸 이러면, 정말… 그러기가 싫네.”
백철웅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나는 서류를 넘겨 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섬 보이죠? 사람 없는 섬입니다. 사람이 있기야 한데. 걔네들이 사람 새끼 같을지는 모르겠네.”
“……”
“가서 땀 흘려 일해서 돈 받고, 빚 까고. 뭐… 정, 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노세요. 아무도 신경 안 쓸 겁니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차피 거기서 평생 못 나올 테니까.”
백지오와 전혀 닮지 않은 얼굴 위로 절망이 스쳤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목숨이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저 같은 놈도 예의라는 게 있어서 천륜은 지키거든요.”
“으으읍! 으으!”
“안 죽인다니까. 누구처럼 자기 자식 장기 팔아 도박하는 정신머리 없는 놈은 아니라서.”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살펴 가세요. 아버님.”
장정들에게 둘러싸여 바깥으로 질질 끌려가는 백철웅의 뒷모습은 한없이 초라했다.
백지오는 이 사실을 평생 모를 것이다. 모든 흔적은 완벽하게 지워질 테니까.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진용아.”
“네. 대표님.”
“사지 멀쩡하게 숨 붙여 놔. 다시 데리고 나올 수도 있으니까.”
“찾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게. 아무도 안 찾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
“꼭 한 번씩 찾더라고.”
나는 오진용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 정리하고 가.”
대답을 듣지 않고 낮은 천장을 피해 허리를 숙여 나왔다. 맑은 가을 하늘이 보인다. 타오르는 갈증에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치익, 필터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한숨 같은 연기를 뱉었다.
“후우….”
눈을 감으니 자연스레 백지오가 떠오른다. 햇빛이 닿으면 옅게 빛나는 고동색 눈동자도, 얄쌍한 콧대도, 뺨에 파인 보조개까지 모두.
‘그게 제 새로운 꿈이에요. 아저씨한테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되는 거요. 아저씨가 나한테 좋은 사람인 것처럼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백지오가 가끔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빨리 커서 아저씨한테 갈게요.’
갈증이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쪽 구석이 깨진 담벼락에 담배를 지져 껐다. 백지오의 핸드폰을 박살 낸 후, 새 핸드폰을 사다 줬을 때 미리 깔아둔 GPS를 확인했다. 위치추적 기능을 하는 달리기 어플로 둔갑해 있어, 백지오는 꿈에도 모를 테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백지오를 보호하기 위해 깔아 둔 거였는데 다른 방향으로 요긴하게 잘 쓰고 있는 중이다. 핸드폰 속 GPS는 한 장소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삼상 고등학교]
백지오는 지금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 본인 인생에 책임을 지겠다며 공부하러 떠난 애를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체 누가 누굴 먹여 살리겠다는 건지. 자연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학에 갈 마음이 생긴 건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좆같기도 했다. 대학에 가면 어떤 씹새끼들이 또 꼬일지. 걔는 깡패 새끼도 끌어안는 애인데… 별 거지 같은 새끼들도 품어줄지 모르는 일이다. 하여간 착해 빠져가지고는.
마음 같아서는 철장 안에 가둬 두고 싶다. 날아가지 못하도록 두 날개를 꺾어서 철장 속에 가둬 놓고 나만 바라보게 만든다면. 걔의 맹목적인 신뢰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꼬리에 꼬리를 잇는 자극적인 생각에 두통이 일었다. 이래서야 백철웅과 다를 게 없었다.
“…우리 같은 새끼들은 걔 곁에 있을 자격이 없지.”
그딴 새끼가 애비고, 나 같은 새끼가 애인이라니. 백지오 인생도 참 기구하지. 나는 자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애비가 채워 주지 못하는 영역은 애인이 채워 주면 되는 일이니.
만약 백지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똑똑한 백지오가 내 추악한 본질을 눈치채고 도망간 거라면.
그때는.
창문 틈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고장 난 영사기를 돌리듯 조각조각 난 필름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사라지기를 반복한 순간에 눈을 홉떴다.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백지오의 흔적들이 가득한 방이 들어온다. 품 안에 안겨 자고 있는 백지오도.
“허….”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백지오가 떠나고 없던 시기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 텅 빈 단칸방 안에서 혼자 백지오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새로 구한 백지오의 자취방 앞에 몇 번이고 혼자 서성이다가 돌아왔던 것 같기도 하다. 꿈의 잔재는 흩어지고, 시궁창에 수직으로 처박히는 쓰레기 같은 기분만 남았다.
“지오야.”
볼록 솟아 있는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어 올렸다. 깊게 잠든 듯 미동도 없다. 품에서 규칙적인 쌕쌕거림과 함께 심장 박동 소리가 쿵쿵 전해져 온다. 가느다란 속눈썹 밑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피부가, 생기가 도는 두 뺨이, 멍 하나 없이 깨끗한 몸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슴 한편이 빠듯하게 차오르는 감각에 입술을 내려 보드라운 목덜미에 묻었다.
“으음….”
거슬렸는지 고개를 작게 도리질 치던 백지오가 돌연 온기를 찾아 품에 쏙 안긴다. 그러더니 맨살갗 위에 부들거리는 뺨을 느리게 비빈다. 백지오의 잠버릇 중 하나였다. 반사적으로 아래에 피가 몰린다.
“하.”
씨팔, 무슨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나는 깊은숨을 뱉었다. 한번 집어삼키니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았다. 좆이 시도 때도 없이 발딱발딱 서는데 자괴감이 몰려올 지경이다. 조심스럽게 백지오의 뺨을 떼어 내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얼굴을 부비는지 모르겠네. 이걸 밖에 내보내도 되나. 그런 고민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대학생이 된 백지오는 어느새 단단하게 여물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범위 밖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빛이 나는 모습으로.
밝게 빛나는 것들에는 벌레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나 같은 새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반짝임을 그들이라고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백지오는 밤마다 동기들에게 불려 나가기 바빴다. 무슨 놈의 대학생들이 깡패 새끼들보다 술을 더 처마시고, 단합이 더 잘 되는지. 덕분에 지난 일주일간 애인 얼굴을 통 구경할 새가 없었다.
“진짜 가둬 두고 키워야 하나….”
백지오의 가출의 역사는 유구하다. 손에 꼽을 수 없는 정도다. 갈 곳도 딱히 없는 게 뻑하면 집을 뛰쳐나가지 않나, 집 나갈 거라고 협박이나 일삼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속절없이 휘둘린다는 점이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불가항력이었다.
꺾어 버릴까….
꿈에서 느꼈던 흐릿한 감정이 온몸을 잠식한다. 충동질에 눈을 감았다, 떴다. 평온하게 잠든 백지오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찬다. 거짓말처럼 파괴적인 감정이 사그라든다.
내 추악한 마음과는 별개로 백지오는 학교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매일 기대에 차올라 마음이 부푼 것이 한눈에 보였다. 어린 애인의 설렘을 앗아 갈 생각은 없다. 그건 최후의 발악이 될 테니까.
다시 한번 입술을 내려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백지오가 눈을 부스스 떴다.
“…아저씨.”
“응. 더 자.”
“안 자고 뭐 해요….”
수마에 잠긴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뺨을 검지로 훑자, 기분이 좋은 듯 기다란 속눈썹이 아래로 감긴다.
“네 얼굴 구경했지.”
“…네?”
“예뻐서.”
백지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씰룩거린다.
“아저씨가 저 예뻐하는 건 원래 다 알고 있었거든요.”
가벼운 농담조였다. 웃지 않으려 애쓸 때마다 보조개 한쪽이 옅게 파인다. 백지오는 알까.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얼굴에 다 티가 난다는 걸.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알면 됐어.”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추자 눈을 감고 있던 백지오가 결국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는다.
“눈 감아. 더 자야지, 아가.”
“괜찮아요. 오늘 저 공강이잖아요.”
“근데.”
“어디 안 가고 아저씨랑 하루 종일 붙어 있을 건데요. 늦게 자도 돼요….”
여전히 수마에 젖은 목소리로 눈도 제대로 못 뜬 백지오가 중얼거렸다.
“아저씨랑 있는 시간 줄어드는 거 아까워요. 눈 뜨고 있어야지.”
“아직 새벽 세 시야. 더 자.”
반쯤 감겨 있던 눈이 크게 뜨인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고동색 눈동자가 설핏 보인다.
“새벽 세 시요? 아저씨 진짜 왜 안 자요. 잠 안 와요?”
“응.”
“너무 피곤해서 잠 안 오는 거 아니에요? 저도 막 가끔 그런 적 있어요. 너무 조용할 때 TV 켜 놓고 자면 잠 잘 오는데. 적당히 시끄러워서.”
조잘거리던 백지오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제가 재워 줄까요?”
“어떻게 재워 주려고.”
장단 맞춰 은근하게 묻자, 백지오가 자다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또렷한 음성으로 답했다.
“책 읽어 드릴게요.”
“뭐?”
“책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살면서 누군가 침대 위에서 책을 읽어 준 적이 있던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백지오를 내려다보는데, 나이트 스탠드를 켠 백지오가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짚는다.
“요즘 읽는 책인데 동화책이에요. 영어 공부 하고 있거든요.”
어쩐지 며칠 전부터 알록달록한 동화책이 놓여 있다 했다.
“애기들이 읽는 건가?”
“아니. 초등학생들이 읽거든요. 흠흠… 한 아홉 살 정도?”
원서잖아요. 백지오가 민망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그래. 읽어 줘.”
백지오가 작은 토끼와 커다란 여우가 그려져 있는 동화책을 더듬더듬 읽어 나갔다.
[토끼는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나쁜 놈들을 물리치는… 진짜 경찰. 여우는 그런 토끼가 가소롭… 가소로웠어요.]
경청하는 자세로 두 눈을 감자, 듣기 좋은 음성이 귓가에 울린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 온전히 맑은 음성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영어를 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라 묘했다. 평소 목소리보다 더 차분하고 어른스럽기까지 했다. 백지오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지 더듬거리지만 거침없이 읽어 나갔다.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는 그새 익숙해졌는지 깔끔한 발음이었다.
[여우는 토끼의 꿈을 지지해 주기로 했어요. 여우에게는 그것이 토끼를 사랑하는 방법이었어요.]
“어때요?”
백지오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잘하네.”
나는 백지오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 어. 그러니까 이 여우가 경찰이 되고 싶은 토끼의 꿈을 이루는 걸 도와줬어요. 나쁜 놈들을 같이 잡아 줘서요. 여우가 처음엔 토끼를 비웃었는데 나중엔 토끼를 사랑하게 돼서 기꺼이 도와준 거예요. 악당들 물리치러 갔는데, 얘가 토끼 잡아먹을 수 있었는데도 안 먹었어요.”
백지오가 당황하며 줄거리를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허둥지둥거리는 것이 귀여워 콧잔등을 꾹 누르자, 주먹으로 코를 벅벅 문지른다. 한쪽 눈을 찡그렸던 백지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본다.
“죄송해요. 조용히 끝까지 듣고 있어서 다 알아듣는 줄 알았어요.”
“아저씨가 다 알아들을 줄 알았으면… 대학을 갔겠지. 깡패 새끼 짓 안 하고.”
“대학 가면 되죠. 아저씨랑 대학교 같이 다니면 재밌을 것 같은데. 개강 파티도 같이 하고, 수업도 같이 듣고.”
백지오는 편견이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이 차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든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내 나이에 스무 살이 할 법한 일에 새로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아가야. 내 나이에 너랑 대학을 같이 다니려면 교수로 들어가야 돼. 학생이 아니라.”
“…아.”
“아저씨는 너 대학 다니는 거 지켜보는 걸로 충분해요.”
백지오의 뺨을 톡톡 건드리자, 하얀 뺨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로 읽는 내내 바로바로 해석을 못 해 준 게 마음에 쓰이는 듯 시무룩한 어투로 중얼거린다.
“왜. 듣고만 있었어요. 말해 주지….”
“듣기 좋아서. 다른 사람 같았어.”
“네? 제가요? 왜요? 혹시… 누가 또 아저씨한테 책 읽어 준 적 있어요?”
백지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처음이야.”
의심의 눈초리가 짙어진다. 백지오의 안색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속고만 살았나.”
귀엽기는. 백지오의 툭 튀어나온 입술을 잡고 꾹꾹 누르자 탁, 손이 날아온다. 나는 백지오가 집을 뛰쳐나가야겠다는 허튼 생각을 하기 전에 서둘러 부연 설명했다.
“아저씨가 다른 사람 같다고 말한 건… 네가 영어로 말하니까 목소리가 낯설어서 그런 거지.”
“아… 원래 언어마다 성격이 달라져서 목소리도 달라진대요. 많이 이상해요?”
“아니.”
나는 백지오를 껴안아 몸 위에 얹었다. 양팔로 허리를 감싸자 엎드린 자세로 무방비하게 안겨 온다.
“네 목소리는 뭐든 듣기 좋아.”
말랑말랑한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귓가에 속삭이자, 백지오가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거린다. 목덜미를 검지손가락으로 훑어 내리자, 솜털이 가볍게 일어나는 게 보인다. 가슴에 닿아 부스러지는 호흡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한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권 빨리 만들어야겠네.”
백지오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든다.
“열심히 배웠으니까 실전에서 써먹어야지. 이렇게 잘하는데 썩혀 두면 아깝지 않겠어?”
“잘하는 거 아니에요. 저보다 잘하는 애 많은데….”
“어딜 비교해. 너만큼 똑똑한 애가 어디 있다고.”
백지오가 민망한 표정을 했다.
“아저씨… 고슴도치 같아요.”
“고슴도치? 고슴도치는 제 자식 예뻐하는 거고. 나는 내 애인 예뻐해 주는 중인데.”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살짝 내려 한 손에 잡히는 엉덩이를 잡았다.
“하으….”
엉덩이를 꽉 쥐고 주물거리자 작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맨살갗에 닿은 몸이 바둥거릴수록, 원초적인 흥분이 피어올랐다. 나이트 스탠드에 비친 고동색 눈동자가 유독 연하게 보인다. 나는 시선을 마주하며 속살거렸다.
“재워 주겠다며.”
“…네에.”
“아저씨 재워 줘야지, 아가.”
동시에 턱을 끌어다 입술을 포개자 기다렸다는 듯이 혓바닥이 쏙 들어온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여전히 어설픈 혓바닥의 움직임에 느릿하게 응해 주다가, 혓바닥을 세워 연한 살을 콕콕 찔렀다. 욕심껏 호흡을 삼켰다.
“으읍….”
백지오가 내 몸 위에서 바르작거렸다. 맞닿은 중심부가 자극에 부풀어 오른다. 성기끼리 비벼지는 느낌에 순식간에 아래에 피가 몰렸다. 자극에 몸을 설핏 굳히자 백지오도 덩달아 흥분해 위아래로 허리 짓을 했다. 마치 좆질을 하듯이.
“하아….”
적당한 크기의 털 하나 없이 매끈한 자지에서 선액이 흘러나와 바지 위를 적신다. 두어 번 더 왕복한 백지오가 거친 숨과 함께 속삭였다.
“아저씨. 점점 커져요….”
얇은 천을 하나 두고 비벼지는 감각에 이를 살짝 악물자 백지오가 침대 위에 한 손을 뻗어 몸을 지탱한다. 열기에 찬 고동색 눈동자에서 달아오른 시선이 직각으로 떨어져 내린다. 손을 뻗어 뺨을 매만지자, 백지오가 고개를 숙인 채 속닥였다.
“아저씨… 이러니까 꼭 제가 위인 것 같지 않아요?”
“왜. 위로 올라가고 싶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네.”
말꼬리를 빙빙 돌리던 백지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본인이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얼굴이 더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조금 궁금하긴 해요.”
“그럼 우리 아가가 위에 해. 아저씨가 아래 할게.”
“…진짜요?”
나는 말없이 웃었다. 동시에 백지오의 한쪽 볼기짝을 쥐고 벌려 드러난 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한 번에 쑤셔 넣었다.
“으… 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백지오가 온몸을 팔딱거렸다.
“궁금하다며, 응?”
일주일 만이라 그런지 구멍은 빡빡했다. 한참을 지분거리자, 백지오의 숨소리에 신음이 점차 섞여들었다. 평소와 달리 내가 아닌 백지오가 위에서 시선을 내리꽂은 채로 마주 보고 있어 기분이 새로웠다.
“위에 있으니까 더 예쁘네, 우리 아가는.”
천을 뚫고 나올 듯이 팽창한 성기를 꺼내 엉덩이 골에 탁탁 비볐다. 귀두를 구멍에 맞춰 끼웠다. 일순 통증이 일었는지 백지오가 습관처럼 이를 악물려고 들기에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혀 위를 꾹 눌렀다. 타액이 검지손가락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핥아.”
“흐으….”
“깨물어도 돼.”
백지오가 마치 이갈이하는 강아지처럼 이를 세워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삽입할 때, 백지오는 늘 온몸에 힘을 꽉 주며 태연한 척을 했다.
“정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 아가 후장 한번 본떠 볼래? 직접 넣어 볼 수 있게.”
“아니. 아니요… 하으, 아니요. 안 궁금해요.”
“아쉽네.”
힘껏 도리질 치던 백지오가 원망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겨우 참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제안했다.
“원하면 말해. 준비해 둘게.”
작은 입술이 달싹인다.
“이씨. 놀리지 마세… 아!”
장난인 줄 아나? 진심인데.
몸이 이완된 타이밍에 맞춰 허리를 끌어 내리자 내벽이 꽉 맞물린다. 백지오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놀림당했다 생각해서 분한 건지, 아니면 자극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숨, 쉬어야지.”
“흐윽… 으. 아, 아파.”
“안 움직일 테니, 까 후… 앞뒤로 천천히 움직여 봐, 아가.”
백지오의 허리가 앞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내벽에 파묻힌 성기가 따라 움직이며 내벽을 느리게 휘젓는다. 점점 뭉근해지는 움직임에 특정 부분을 귀두로 꾹 누르자 백지오의 허리가 파드득 튕겨져 올라왔다. 구멍이 순식간에 조여들었다. 덩달아 내벽에 파묻힌 성기가 자극을 받아 꺼떡거렸다.
“하으… 읏….”
균형을 잡으려 허리를 꼿꼿이 세운 백지오가 손을 뒤로 뻗어 내 허벅지를 잡았다. 덕분에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왔다. 붉게 상기된 두 뺨,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입술 밑으로 이어지는 하얀 나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깨끗한 핑크색 젖꼭지와 털 하나 없는 자지도.
“읏. 흐으… 이 자세로 하니까… 너무 깊, 깊어요…. 이거, 이거 튀어나왔는데….”
잘못되는 거 아니죠?
울상을 한 백지오가 좆 모양대로 툭 튀어나온 뱃가죽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이성이 툭 끊겼다.
“하아… 씹, 진짜.”
허리를 툭툭 쳐올리자 벅찬 듯 입술을 깨문 백지오가 버티려 들었다. 다시 한번 크게 퉁, 쳐올리자 균형을 잃은 작은 몸이 앞으로 쏠린다. 불규칙적으로 허리를 쳐올리자, 결국 버티지 못한 백지오의 몸이 앞으로 무너진다.
“아, 잠, 깐, 아! 흐으… 응!”
가슴 위에 개구리처럼 엎드린 자세가 된 백지오가 울먹였다. 쇄골에 와 닿아 부스러지는 호흡이 가쁘다.
“좋아?”
양손에 들어차는 허리를 잡고 도톰한 극점을 연달아 찧어 올리자,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맞닿은 살갗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성을 잃은 머릿속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아, 흐으… 아, 아!”
“지오, 야. 백지오.”
허리 짓을 멈출 수가 없어, 한 손에 들어오는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찧어 올리기를 욕심껏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흐읏, 아, 흐….”
달뜬 얼굴에 눈이 풀려 있었다. 얄쌍한 턱을 타고 질질 흐르는 타액을 혀로 핥아 올리며 몸을 꽉 껴안자 다시금 구멍이 빡빡할 정도로 조여든다. 작게 욕설을 읊조림과 동시에 뜨거운 액체가 내벽을 두드리며 터져 나갔다.
“윽….”
“흐으….”
나는 땀 범벅이 된 백지오의 이마에, 뺨에, 콧잔등에, 입술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백지오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힘에 부친 듯 눈꺼풀을 감았다. 타액으로 질척해진 입술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저씨… 잘 자요. 눈 뜨면 봐요… 사랑해요.”
“잘 자.”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너는 내가 어떤 다짐으로, 어떤 마음으로 너를 대하는지 알까.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추악한 면을 백지오가 제대로 직시할 날이 두렵다.
백지오를 만나고 나서야 과거를 후회하지만, 만약 돌이킬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열아홉 살 백지오를 만날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게 남은 방법이라곤 최선을 다해서 백지오를 곁에 붙잡아 두는 일이다.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내 곁에 남는다 생각할 수 있도록.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푸르스름한 햇살을 바라보다가, 향긋한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야 눈이 감겼다.
비로소, 깊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