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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18화 (18/185)

18화.

“이건 뭔가 문제가 있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1회 차 땐 큰 사건 없이 평탄하게 살았는데, 3회 차는 뭐가 씐 건지 뭘 할 때마다 제약이 걸렸다.

의현은 비척비척 별장으로 돌아왔다. 구급차에 동민과 혜영을 태워 보낸 후였다. 술이라도 마신 건지 코가 새빨개진 경호원이 뒤늦게 의현에게 제 옷을 벗어 주며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으십니까?”

“됐어요.”

“그래도 감기라도 걸리시면…….”

“됐다고요.”

걸을 때마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경호원은 눈치 보며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놓겠다고 했다. 대신 물에 빠져 줄 수도 없는 일반인들을 경호원으로 붙여 놓고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하…….”

바닷물에 슬리퍼도 날아가 완전히 맨발이었다.

탁탁 타오르는 모닥불을 지나쳐 의현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모두 잠든 별장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현은 물을 틀어 놓고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쏟아져 욕조는 금세 수증기가 가득 찼다.

‘오빠도 저 좋아한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 얘기 하려고 부르셨죠?’

의현은 욕조 속에 축 늘어진 채 혜영이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이건 아무리 봐도 누군가 차동민이 박혜영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해 준 상황이었다.

“……은영이가 말했나.”

1층엔 여자 둘, 남자 한 명이 살았다. 그중 남자인 필규는 워낙 숫기가 없어 말도 몇 번 해 본 적 없었고, 누가 누굴 좋아하거나 하는 소식을 빠삭하게 알 것 같지도 않았다.

“아, 다쳤네…….”

발바닥이 따끔해서 보니, 해변에서 뭔가에 찔린 모양인지 약하게 피가 나고 있었다. 의현은 발을 길게 뻗어 욕조 위에 걸친 후, 천천히 물속으로 잠수했다.

윤화는 특수 능력 학교에 입학했으니, 제 능력 다스리는 법을 똑똑히 배울 것이다. 그럼 어쭙잖게 마을을 불태워 수감 시설에 들어가는 과거는 되풀이되지 않겠지.

홍삭과 권다원은 권중섭과 엮이지 않았으니, 원래 살아야 했던 자기들 인생을 살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차동민은 사실 오래갈 인연은 아니었다. 매번 회귀할 때마다 친구였으나, 가끔 안부 정도만 묻는 사이였고 서로의 소식도 잘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번 회차에선 이상하게 조금 친해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모르겠다.”

계획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게 하나 없었다. 의현은 물속에서 한참 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똑똑-.

방으로 돌아와 머리를 대충 털고 침대에 앉아 있는데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무서운 꿈을 꿔서……. 형, 같이 자도 돼요?”

하필 또 정재이였다.

“그래.”

의현은 빠르게 표정 관리를 끝내고 다정을 연기했다. 정재이는 커다란 베개를 가슴에 안고 의현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

바닥에 조그마한 모래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까진 없었는데……. 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대로 샤워하고 방에 들어왔으니, 새삼스럽게 제 몸에서 모래가 떨어졌을 리 없었다.

“형 안 자요?”

“어? 자야지.”

넓은 침대에 이미 제 자리를 잡고 누운 정재이는 침대 옆자리를 톡톡 쳤다.

“있잖아요. 침대가 넓어서 혼자 있으면 자꾸 무서운 생각이 나요.”

“그럴 수도 있어.”

“형도 그래요?”

의현은 이불을 들추면서 흘끔 재이의 발을 쳐다보았다.

“……재이야, 혹시 너 또 바다 갔었어?”

의현은 제가 피곤해서 잠든 사이, 정재이가 또 바다에서 놀다가 제대로 안 씻었을 확률을 따졌다. 모래가 묻었을 수 있지. 설마 얘가 하늘다리를 끊어 먹었다는 생각을 하다니…….

“되게 이상한 걸 묻네요.”

정재이는 순진한 표정으로 의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곤 의현이 손에 쥐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가져와 덮었다.

“윤화랑 같이 갔다 왔어요. 조개도 잡았는데, 볼래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형 왜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에요.”

정재이는 엉성하게 서 있는 의현의 손을 잡아 침대 위로 끌었다.

“형도 무섭구나?”

정재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난 네가 제일 무섭다고.

“같이 자면 안 무서울 거예요. 같이 코해요.”

“…….”

“잘 자요, 형.”

정재이는 생글생글 예쁘게 웃으며 의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의현은 목석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죽은 듯 누워 있다가, 정재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 방 안을 빠져나왔다.

새벽 내내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급격히 줄어든 인원에 은영이 당황을 표했다. 하지만 관광지로 유명하던 하늘다리가 갑자기 끊어져, 그 위에서 고백하던 혜영과 동민이 바닷속으로 추락했다고 말한들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의현은 ‘그냥 사고가 좀 있어서 먼저 돌아갔다’라는 말로 말도 안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함축했다.

“그럼 밥 먹고 저희도 바로 올라가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아아, 뭐야. 모처럼 나왔는데 너무 허무해요!”

오늘은 해변에서 태닝을 하려 했다며 은영은 발을 굴렀다.

“밥 먹고 바로 출발할 거야.”

“그래도 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마찬가지로 1층 사람인 필규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사람과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는 필규와는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밥이 맛있으니까 나는 좋아!”

윤화는 별장 안에서도 물안경을 쓰고 돌아다녔다. 땡볕 아래에서 얼마나 놀았는지 등에 살 껍질이 떨어져 퍽 따가워 보였다. 의현은 먹기 좋게 차려진 조식을 앞에 두고 윤화를 불러 앉혔다.

“너는 체력을 좀 줄일 필요가 있어. 네가 아무리 불 능력자라고 해도 지금 살 껍질이 이렇게 뜯어지면 당연히 아프지.”

“하나도 안 아픈데! 나는 멋진 남자라 이런 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멋진 거랑 살이 까진 거랑 뭔 상관인데.”

“멋진 남자는 이런 일로 상처 안 받는댔어!”

“도대체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얼굴엔 물안경 자국이 난 윤화가 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디서 남자병이 걸려 온 건지, 말끝마다 ‘멋진 남자는-’이라고 하는 게 좀 어이가 없었다.

“큼, 크음……!”

옆에서 음식을 흡입하고 있던 은영이 크게 기침을 했다. 윤화가 슬쩍 눈치 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범인은 은영인 것 같았다.

“멋진 건 됐고, 편식하지 말고 먹어.”

“그치만, 당근은 맛이 없어요!”

“당근도 안 먹는 남자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없어.”

의현의 단호함에 윤화는 충격받은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럴 수가……. 멋진 남자가 되려면 당근도 먹어야 한다니…….”

“편식할 거면 멋진 남자는 포기해.”

“안, 안 되는데…….”

윤화는 울먹거리다가 금세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릇 한쪽에 밀어두었던 당근과 피망을 한꺼번에 입에 쓸어 넣었다.

“엉아! 봐어? 나 아애도 다 므그는지 쯩 므그찌?!” (형아! 봤어? 나 야채도 다 먹었는데 짱 멋있지?)

윤화가 제 용맹함을 어필하는 사이, 늦은 잠에서 깨어난 정재이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의현은 금세 시선을 돌려 재이를 바라보았다.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자게 한 주범이었다.

“나는 당근도 잘 먹어!”

윤화는 제 식습관을 자랑하며 정재이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그래, 많이 먹든지.”

정재이는 무심하게 반응하며 바로 의현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형!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잘 잤어?”

“네. 무서운 꿈도 안 꾸고 너무 잘 잤어요. 형 덕분이에요.”

“다행이네.”

너 때문에 나는 한숨도 못 자서 피곤해 죽겠어. 의현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그런데 사람이 별로 없네요?”

정재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말을 먼저 꺼낼 줄은 몰라서, 의현은 제법 긴장하며 정재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었지만, 얜 믿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무슨 사고가 나서 혜영이랑 동민 오빠랑 먼저 올라갔대.”

“아.”

“무슨 사고인지는 나도 잘 몰라.”

말하는 걸 좋아하는 은영은 혜영이 없어 심심한 건지, 제게 묻지도 않은 말에 술술 대답했다. 정재이는 짧게 동조하며 금세 관심을 껐다. 뭔가 더 물어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얼마나 다쳤는지 뭐 그런 거 별로 안 궁금해?”

의현이 슬쩍 정재이를 한번 떠보았다. 조그마한 표정의 변화라도 있으면 금세 눈치챌 자신이 있었다.

“뭐. 별로…….”

정재이는 과일이 올려진 접시에서 청포도 하나를 똑 떼어 제 입에 집어넣었다. 톡 튀어나온 볼 사이로 슬쩍 웃음기가 비쳤다.

“형이 괜찮은 거 보면 괜찮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잖아요. 동민이 형이랑.”

동그랗던 청포도는 정재이의 입 안에서 금세 톡 터졌다.

“동민이 형이 많이 다쳤으면 형이 슬퍼할 거 아니에요.”

“…….”

“근데 형 지금 괜찮아 보여서요.”

“…….”

“그래서 그냥, 괜찮지 않을까……. 혼자 생각한 거예요.”

예쁘장한 말로 포장했지만, 결론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였다. 보통 저 나이대의 애들이 저런 식으로 생각하나? 의현은 표정을 구기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써야만 했다.

“밥만 먹고 출발할 거래. 재이 너도 얼른 먹어.”

“네.”

은영의 말에 정재이는 의자에 앉아 시리얼과 과일을 대충 챙겨 먹었다. 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별장 바깥으로 잠시 나왔다. 숨이라도 좀 쉬기 위해서였다.

“형아!”

윤화가 의현의 뒤를 따라왔다. 제멋대로 뛰다가 바닥에 제대로 넘어진 윤화는 울먹거리며 다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릎이 찢어져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그러게 왜 뛰어.”

“아니이, 이거 형 주려고!”

익숙한 패턴이었다. 어제 정재이한테도 이런 식으로 선물을 받은 것 같은데…….

“설마 살아 있는 물고기는 아니지?”

“물고기는 바다가 집이라서 밖으로 나오면 아야 하지! 형은 그것도 몰라?”

“아니, 아는데. 들으니까 좀 새롭네…….”

의현이 당황한 사이, 윤화는 헤헤 웃으며 의현의 손에 하얀 소라 껍데기를 올려주었다.

“이걸 들으면 바닷소리가 나!”

“…….”

“형은 잠을 못 잔다고 했잖아요.”

“…….”

“바닷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올 거예요!”

윤화는 축 처져 있는 의현의 입꼬리를 제 손으로 잡아 올렸다. 억지로 히죽 올라간 입매를 보고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다가 윤화는 금세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해. 그렇죠?”

“네 무릎부터 치료하고. 너는 정말 몸이 성할 날이 없다.”

여기저기 나가 놀기 바쁜 나이긴 했다. 윤화는 밝고 순수한 한편 다정했다. 의현은 제 손바닥에 남은 작은 소라 껍데기를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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