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사실 의현이 예민하게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놀다 보면 연락이 안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물론 정재이가 그럴 성격이 아니고, 권의현 역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한들 변명거리가 안 됐다. 누구에게나 예외는 존재해야 했다. 의현은 꽉 막힌 어른처럼 굴고 싶진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오 분만 더 기다려 보죠.”
그렇게 쌓인 오 분이 벌써 삼십 분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의현은 망각한 듯 보였다. 덜덜 떠는 다리의 진동이 앞자리까지 넘어왔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죠?”
모순적이게도 정재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사실 의현이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불가사의한 인물에게 갑자기 공격당했다, 이건 도의적으로 봤을 때나 불편한 일이지 결과론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신고할까요? 도련님이 말씀만 주시면 바로 신고하겠습니다.”
“아, 신고는 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런가요? 아무래도 좀 섣부른 감이 있죠? 장관님 명성도 있고 하니.”
“일단 오 분만 기다려 보고 돌아가죠. 내일 오전 저택에 연락해서 재이가 들어왔나 확인해 보고, 내일도 안 들어왔다고 하면 그때 생각해 봅시다.”
의현은 제법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마음은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어도 그걸 온전히 까뒤집어 내놓을 수는 없었다. 권의현이라는 이름에 걸린 무게까지 온전히 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까도 오 분이라고 하셨지만……. 알겠습니다.”
오 분은 다시 시작됐다. 윤 기사는 현재를 기점으로 다시 오 분 알람을 맞춰 놓았다. 그 시간 안에 정재이의 잘생긴 갈색 머리통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바라며.
* * *
의현은 항상 피곤이 모든 걸 이긴다고 믿었다. 졸려 죽겠는데 당장 눈앞에 침대가 있어, 그럼 당연히 드러누워 잠부터 자야지.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피로에 전 상황에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설마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생각을 멈추고 싶어도 누가 머릿속에 생각을 주입하듯 계속 꼬리를 물었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재이한테 무슨 일이 생겨? 나야 좋지! 내가 손쓸 일이 없어진 거야!’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죽은 의현은 그렇게 말했으나, 현실에 숨 쉬고 있는 의현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그 의현을 부정했다.
‘너무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마. 재이는 너를 좋아해. 이번 13일에 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 너도 상황이 전과 다르다는 걸 알잖아.’
의현은 고개를 저었다. 김태원을 만나고 돌아온 무의식은 다시금 툭 튀어나와 흙탕물에 돌 던지듯 아주 손쉽게 마음을 타락시켰다.
‘아니, 이번에도 실패했을걸? 김태원이 그랬잖아.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그게 뭘 말하는지 네가 모를 리가 없어. 똑바로 직시해. 네가 죽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정재이가 어떻게 됐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 걜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걔한테 어떻게 사랑을 받아 끔찍하게 걜 거절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이 우선이야. 위선 떨지 말고 원래의 너로 돌아와.’
여러 번의 죽음은 권의현의 의식도 여러 갈래로 찢어 놓았다. 의현도 이제 본래의 자신이 어떤 성격을 가진 어떤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더라?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불안으로 인해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희망의 목소리는 들려왔다. 어이없게도 서 팀장이었다.
‘자기는 악당이 아니야.’
그럼 악당은 누구?
근원적인 의문이었다. 꼭 표적처럼 하나의 악당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거라면, 권의현이라는 사람의 인생 속의 악당은 아마도…….
아마도…….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의현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상태로 침대 옆 협탁을 뒤적거렸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물 한 잔 마시려고 했다가 잠이 덜 깨 물이 든 유리컵을 깨트렸다. 쨍그랑! 이른 아침부터 듣기엔 영 거슬리는 소음이었다.
“…….”
의현은 오늘 하루도 뭣같이 흘러갈 것을 직감했다. 보통 시작부터 이런 일이 생기면 하루 종일 이 패턴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어울리지 않게 심장이 벌렁거렸다. ‘놀다가 지금 집에 들어왔고, 연락을 지금 봤다. 정말 미안하다.’ 이런 내용의 연락이 와 있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인자한 어른의 마음으로 모든 걸 용서해 주려고 했다. 의현은 초연했다. 아니 그냥 초연하다고 믿고 싶었다.
[ 부재중 전화 0건 ]
하지만 마치 깨진 유리컵처럼 의현의 멘탈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이럴 수가 있나? 정재이, 네가 이럴 수가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연락 하나를 안 해.
의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리 잔해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곧장 발바닥에 유리가 박혔다. 소리도 못 지르고 멍청히 서서, 의현은 욕을 짓씹었다.
“씨발…….”
정말 제대로 망가진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머, 도련님!”
피가 뚝뚝 흐르는 발을 이끌고 1층으로 내려오자,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키퍼들이 요란 떨며 의현에게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발이 도대체 왜-!”
“제 방에 컵이 깨졌습니다. 그것 좀 치워 주세요.”
“발은 괜찮으세요?! 피가 많이 나는데…….”
“유리는 다 뽑았습니다. 출근해서 치료받으면 돼요.”
집에서 붕대 감고 뭐 하느니, 출근해서 의료팀한테 치료받으면 금방이었다. 어차피 거기도 능력자들이 많아 이 정도 상처는 다친 축에도 못 꼈다.
“아침은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들를 데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드셔야죠.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좀 쉬셔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돼요…….”
며칠째 안색 얘기를 듣고 있는 걸 보니, 타인이 봐도 정말 피곤해 보이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뭐 어떡해. 하루하루 뒤지게 바쁘게 살아도 사고는 어디서든 팡팡 터지니, 이걸 막으려면 또 뒤지게 열심히 살아야 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모순의 무한 굴레였다.
“주스로 갈아 주세요. 들고 갈 테니까.”
“네!”
의현이 샤워를 대충 끝내고 옷을 갈아입을 때, 키퍼 중 누군가가 발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바로 양말을 신으면 오염도 되고 피도 묻을 수 있다고 삼십 분째 걱정을 쏟아냈다. 반쯤 혼이 나간 의현은 두 번이나 셔츠 단추를 잘못 끼워 전부 푼 다음 단추를 다시 끼웠다.
“아버지께서는요?”
“저희도 따로 연락받은 건 없어서요…….”
“차라리 좋네요.”
권중섭이 있는 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사실 집을 구해서 독립하는 거 자체는 의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권중섭이 미친 듯이 반대했다.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주제에 나가서 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현은 발에 구두를 대충 구겨 신고 누구보다 빠르게 집을 빠져나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윤 기사가 궁금하다는 듯 재빨리 의현에게 물었다.
“재이 군 어제 들어왔다고 하나요?”
“몰라요.”
“네?”
“이제 한번 가 보려고요.”
“전화로 하시지…….”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의현의 표정이 정말 좋지 못했다. 뭐라고 말하려던 기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분위기가 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럼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차는 부드럽게 꺾어졌다. 저택은 의현의 집에서 오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의현은 창문에 머리를 처박고 계속해서 다리를 떨었다. 예전에 동민이 미친 듯이 다리를 떨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따지듯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해가 됐다. 긴장됐던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다른 말 없으니 아마 들어왔을 겁니다.”
“들어왔는데 별다른 말이 없다는 게 더…….”
“네?”
“아닙니다.”
입을 열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의현은 차라리 입술을 꽉 물었다.
차는 금세 저택 앞에 도착했다. 시간은 일곱 시 남짓이었다. 저택에 있는 애들은 자고 있거나, 시험 기간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재이 군은 분명 있을 겁니다.”
확인하기 전에는 모르는 거라고, 의현은 생각했다.
긴장돼서 하도 질겅질겅 깨물었더니 입술 언저리가 아팠다. 의현은 손끝이 실시간으로 차게 식어 가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저택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 도련님! 말씀도 없이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웬일로 오셨어요!”
문을 열자,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키퍼들이 의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뜩이나 일에 치여 사는 의현이 틈틈이 시간을 내 저택에 방문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더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재이 방에 있죠?”
의현은 물음에 은근히 제 감정을 담았다. 방에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확인은 안 해 봤는데, 아마 있을 거예요. 현관에 슬리퍼가 없던데요?”
“슬리퍼…….”
“네, 항상 신고 다니는 거요.”
확실히 애들이 좀 크고 난 이후에는 24시간 옆에 붙어 일상을 관리해 주는 키퍼와 거리를 뒀다. 저택 안의 아이들에게도 자유는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관리가 이런 식이라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가출하기 참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올라가서 확인해 볼게요.”
“도련님도 아침 같이 하시겠어요?”
“아뇨. 저는 됐습니다.”
“식사하시면 다들 좋아할 텐데요.”
“속이 안 좋아서요.”
키퍼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고 의현은 바로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어제도 왔다 간 공간을 몇 시간 안 돼서 또 찾아왔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쉽사리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두 칸씩 성큼성큼 오르자, 금세 넓은 2층 복도에 올라섰다.
2층 통유리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고 뭐고 싹 개무시하며 의현은 곧장 정재이의 방문 앞으로 직행했다.
“들어간다.”
노크? 개나 줘. 감히 연락을 안 해?
어제는 이런 일로 왜 화를 내나, 어른답게 이해하고 넘어가자 이렇게 생각해 놓고. 막상 문 앞에 서니 속에 쌓아 뒀던 감정이 확 튀어나왔다.
의현은 벌컥 문을 연 채로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