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홍삭을 태운 차는 다시 학교로 출발했다.
정재이 하나 만나려고 나왔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온갖 남자애들을 다 만난 의현은 쭉쭉 기가 빨리고 있었다. 성장기의 남자애들이 내뿜는 혈기 왕성한 느낌은 의현과 몹시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남잔데요? 자식, 다시 봤는데-?”
“지금 칭찬하자는 게 아니잖아.”
“행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문제예요?”
홍삭이 입을 열 때마다 빵가루가 무슨 눈송이처럼 계속 흩날렸다. 큼, 큼! 윤 기사는 그게 못내 신경 쓰인다는 듯 몇 번 마른기침을 뱉었지만, 눈치 없는 홍삭이 알아챌 리 없었다.
“쪽지도 남겨 놓고 갔다면서요. 저도 가출 많이 해 봐서 아는데요, 쪽지 쓰고 나간 애들은 백 퍼 돌아와요.”
홍삭은 제 가출 경험을 어필하며 의현을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냥 나가는 애들이 더 무섭다고요. 걔들은 돌아올 생각이 없을 수 있어요. 나를 찾지 마라, 나는 나가서 새로운 삶 시작한다! 뭐 이런 심리일 수 있으니까요. 근데 쪽지를 남겼다? 이건 걍 자기 없어진 걸 좀 알아달라는 말이잖아요.”
듣고 보니까 이것도 꽤 일리 있었다. 만약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정재이 성격에 굳이 흔적을 남겨 놓진 않았을 거다. 의현이 저택에 매일 들어와 재이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저택 사람들이 정재이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닌 이 애매한 상황에서, 정말 자기가 나갔다는 걸 알리기 위해 굳이 쪽지까지 남겼다면…….
“……그럴 수도 있겠어.”
“그죠? 솔직히 전 관심 받으려고 가출하긴 했었는데요. 정재이는 뭐……. 그런 건 좀 안 어울리긴 하네요. 그래도 뭔 이유가 있겠죠. 혹시 최근에 싸우거나 그런 일은 없었죠?”
“카운슬링 하는 사람처럼 말을 하네.”
“저는 10회 이상의 가출 경험자잖아요. 일곱 살 때부터 밥 먹듯 보육원을 탈출했었다고요.”
“자랑이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홍삭은 자기가 중요한 역할이라도 맡은 것처럼 오버하며 의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떠들었다. 사실 이런 충고 들으려고 얠 찾아온 게 아닌지라, 의현은 능숙하게 대꾸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재이가 학교에 나오면 좀 알려 달라는 건데.”
“아 그건 당연하죠. 뭐 다른 건 없으세요?”
“그리고 나랑 어디 놀러 갔다고 자랑 좀 해 줄래? 사진이 필요하다면 한 장 찍어 줄게.”
“그건 왜요? 열받게 하려고요?”
정재이랑 자주 붙어 다니더니 쓰는 말이 비슷했다. 정곡을 찔려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의현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크게 두려울 게 없는 상대라 그럴까? 홍삭이랑 있으면 눈치 봐야 할 일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맞아.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좀 사용하고 싶어서.”
“제가 카드인가요?”
“비슷해. 재이가 네 얘길 많이 했거든.”
“흠, 일단 도와드릴게요. 저도 걔 없으면 좀 심심할 것 같거든요.”
홍삭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맨날 치고받고 해도 약간 친구 사이가 된 건 아닐까 싶어 의현이 내심 안심하고 있는데, 홍삭은 금세 의현과 볼을 붙이고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카메라 보시고, 찍습니다. 하나, 두울-!”
어색해 죽겠는 표정으로 의현은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재이와도 개인적으로 사진을 남겨본 적 없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잘생겼다고 너무 대충 찍으시는 거 아니에요? 잘 나오긴 했지만!”
“그거 재이한테 보낼 거야?”
“네! 뭐라고 써서 보낼까요? 뭐라고 써야 돌아올까요?”
재이를 빡치게 할 생각에 홍삭은 벌써 들떠 보였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데 남자 둘이서 볼을 붙이고 실실 눈웃음치며 찍은 사진이 의현의 눈에는 미치도록 어색해 보였다.
“대충 아무거나 써서 보내도 돼.”
“완전 짜증 나게 할 자신 있는데, 그렇게 써서 보내도 돼요?”
의현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듯 손을 휘적댔다. 홍삭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얼른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보내버렸다.
“학교에 애들이 재이에 관해서 물어보면 여행 갔다고 대충 둘러대고, 세세한 부분은 네가 임기응변으로 대처해 줘.”
“잉기응변이 뭔데요?”
“……네가 알아서 대처하라는 말이야.”
“도희가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
“걘 내가 동민이한테 말해 놓을게. 너네 담임한테도 전화로 다 말씀드릴 테니까,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적당히 상황 따라서만 행동해. 알지?”
“제가 뭐 언제 사고 친 적 있나요?”
이미 없어진 과거에서 네가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한 번 남겨 준 적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의현은 허리를 굽혀 홍삭이 앉은 쪽 문을 열어 주었다.
“내려.”
“너무해. 좀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얼굴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요!”
“얼굴로 해결하려고 한 적 없어. 유감이지만.”
“쌀쌀맞다니까 정말.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으면 저도 재이처럼 가출할 거예요!”
“혹시 학교 근처에서라도 재이 찾으면 바로 연락해. 그리고 학교에서 그만 자고. 교양 쌓고.”
홍삭은 자기가 요즘 얼마나 똑똑해졌는지 아느냐면서 방방 뛰었다. 물론 그걸 다 들어 줄 시간은 없었기에, 의현은 얼른 문을 닫고 집으로 출발했다.
이 일을 허술하게나마 해결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야 할 사람들만 네 명이었다. 당일 반차에 분개한 서 팀장, 정재이 담임, 차동민, 운 나쁘면 권중섭까지. 외근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일거리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
의현은 뻑뻑한 눈을 감았다.
정재이가 사라졌다.
* * *
처음엔 놀랐으나 따지고 보면 정말 가볍게 생각한 걸 수도 있다. 홍삭의 말대로 흔적을 남기고 나간 사람이 정말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을 확률은 낮을 테니까.
“제발, 받아라. 좀.”
하지만, 일주일 후 의현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핸드폰을 붙잡고 하도 전화를 많이 해, 애인 생긴 거 아니냐는 얘기나 들으면서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해 봐야 했다.
통화는 끝내 되지 않았다. 연결음이 가는 걸 보면 배터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알고 안 받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정재이는 한 번도 전화를 받은 적 없었다.
‘갑자기 여행을 갔어요? 이런 건 사전에 서류를 제출해 주셔야 출석으로 인정될 여지가 있거든요.’
정재이의 담임은 친절했지만, 꽤 보수적인 부분이 있었다. 의현은 무사히 재이를 졸업시키기 위해 출석 인정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죄다 챙겼다. 사람을 꾸며 정재이인 척 여행 보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이 핑계가 언제까지나 먹히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연락이 안 돼?”
“어.”
“도희가 재이 여행 언제 끝나느냐고 묻더라. 나도 모른다고 말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 신고 안 해도 되는 거야?”
분명 처음엔 가볍게 먹은 마음이었지만, 점점 불안해졌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정재이를 숨겨 버린 사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정재이를 찾아와야 했던 건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에 지배당하며 의현은 하루하루 예민해지고 있었다.
“일단 조금만 더 두고 보려고.”
“갑자기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정말.”
외근용 차량은 방지 턱에 걸릴 때마다 덜컹거렸다. 가만히 베개를 끌어안고 있던 동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의현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해. 나는 항상 너한테 열려 있잖아.”
“너…….”
의현을 힘들게 하는 건 항상 정재이였다. 정재이와의 관계가 좀 깊어졌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시스템이 떠올랐고, 이번엔 심지어 본인이 사라졌다.
“……고마워.”
싸우고 없애는 거라면 의현도 자신 있었다. 제 능력을 항상 그런 식으로 이용해 왔으니까. 하지만 이건 감정적인 문제였다. 재이와의 관계, 혹은 동민과의 관계를 쌓는 과정에서 의현은 계속 약자가 되어 갔다.
“요즘 너한테 계속 도움만 받는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난 네가 필요한 거 줄 수 있어서 좋아!”
다들 잠든 새벽, 동민은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목청을 높였다.
“동민 씨, 애정 나누는 건 좋은데 좀 조용히 해 주겠어? 새벽 두 시거든?”
“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함께 외근에 참여하게 된 선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동민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 입을 콱 틀어막았다.
“내일 피곤하기 싫으면, 일찍 자요-.”
“네! 일찍 자겠습니다!”
선배의 말이라면 동민은 껌뻑 죽었다.
복잡한 외근이었다. 피 튀기며 싸워야 했지만, 이건 의현에게 아무런 긴장감도 주지 못했다.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의현의 옆에 동민이 다가와 앉았다.
“의현아, 나는 아무것도 못 했던 전보다 내가 너한테 뭔가 해 줄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아.”
“…….”
“무력한 거 기분 정말 별로잖아.”
무력함.
그건 의현을 항상 괴롭히는 말이었다. 동시에 의현이 재이에게 상처 준 말이기도 했고.
‘……형은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좋아요? 도대체 왜? 왜요?’
‘나는 형 때문에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는데, 형은 그럴수록 내가 싫어져요?’
‘……도대체 왜 나를 데리고 온 거예요?’
그날 괴로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재이의 모습이 선명했다. 확실히, 그날은 내가 너무 심했어.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의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차동민 내가 뭘 어쩌면 좋을까.”
항상 제 앞에선 단단할 줄 알았던 의현이 내보인 여린 모습에, 동민은 저도 모르게 의현에게로 손을 뻗었다.
“너는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그 말을 하는 동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기 때문이다.
의현은 베개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동민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동민 자신도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마음속에서 파도처럼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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