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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89화 (89/185)

89화.

서 팀장에게 연락이 온 건 레스토랑에서의 만남 이후 두 달 만이었다. 저택 완공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공사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리모델링 비슷한 거였다. 벽지를 다 뜯고 새로 도배한 저택은 의현의 기억 속 그곳과 완벽히 일치했다. 약속 장소로 나가기 위해 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저택 앞을 지나가며 의현은 미지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재이 군이 저택에 들어가기 싫어하면 어쩌죠?”

“뭐 어쩔 수 없죠. 집에서 끼고 도는 게 정론도 아니고요.”

“하하. 도련님은 꼭 해탈한 성인처럼 말씀하시네요.”

윤 기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사실 해탈한 건 맞았다. 틈틈이 계획은 세우고 있었지만, 이게 실현될지는 겪어 봐야 알 수 있었다. 늘 그랬듯이.

“그나저나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외출하시기 딱 좋은 날이에요.”

“네, 뭐…….”

“밖에서 친구분들과 식사도 좀 하고, 즐겁게 놀다 들어오세요. 분명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윤 기사는 의현이 친구들과 밖에서 만나서 논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오늘 의현이 만나는 건 친구들이 아니고 서 팀장이었지만, 이걸 굳이 짚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 연락 미리 주시면 데리러 와 있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윤 기사의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오늘도 약속 장소는 헌터부 건물 앞에 있는 그 분수대였다. 봄이라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이 눈부셨다. 갑자기 잡힌 약속이라 교복 하나 달랑 입고 나온 의현은 문득 이 꼴이 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옛날 서 팀장이었다면 분명 비웃었을 거다.

밤에 여기서 무슨 공연을 한다며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퇴근하고 나온 사람들로 주변이 붐볐다.

“여기 어디 있다고 했는데…….”

인파가 몰려 서 팀장의 얼굴을 찾기가 힘들었다. 의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환하게 웃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만 표정이 진지했다.

“왁-!”

그때 누군가 뒤에서 의현의 어깨를 잡아챘다.

“……뭐 하세요?”

“재미없네. 나이에 맞게 좀 반응해 줄 수는 없을까?”

오늘만 나이답지 않다는 얘길 두 번이나 들었다. 의현은 익숙하게 무시하면서,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서 팀장의 팔을 빼냈다.

“경위서랑 야근은 좀 마무리되셨어요?”

“어우, 말도 마. 나 미치는 줄 알았잖아-.”

오늘도 여전히 해괴한 차림이었다. 회사에서 막 나온 건지 목에 걸린 사원증이 움직일 때마다 달랑달랑 흔들렸다. 현장 1팀, 팀장 서주연.

“뉴스 봤어요. 사고 제대로 터진 거. 그래서 오늘 못 나오실 줄 알았는데.”

“얘기 끝내고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전에 나한테 2주 고생한다고 했지? 2주가 뭐야, 지금 한 달 내내 시달리게 생겼어.”

“그러게, 미리 좀 대비를 하시지 그랬어요.”

“이건 사고야! 대비가 되는 일이었으면 일어나지 않았겠지! 게다가 초면에 대뜸 그런 얘길 하면 미쳤다고 생각하지, 그걸 누가 믿어?”

야근에 절여진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충격이 크긴 했던 모양인지 내뱉은 말이 꽤 이성적이었다. 그동안 본 서 팀장의 모습 중에 가장 일반인 같았다.

“자리 이동하실래요? 여긴 보는 눈이 많은데.”

“아니, 그냥 여기서 얘기하자. 자연의 맑은 공기 맡은 지가 너무 오래됐어.”

“시끄러울 것 같은데요.”

“공연한다고 현수막 걸린 거 봤지? 우린 그 반대편으로 가면 돼. 거긴 아마 사람 하나도 없을걸?”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매일 갇혀서 일만 하는 서 팀장이 애처로워 의현은 함께 공원을 좀 걸어 주기로 했다.

오후 일곱 시, 사람들은 공연장을 향해 달려갔다. 줄지어 선 노점상에서 각종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뭐 먹을래? 배고프다.”

“전 이런 걸 먹어 본 적이 없는데요.”

서 팀장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꼬치 가게에서 꼬치와 생맥주를 주문했다.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더니 본격적으로 식사할 계획이었나 보다.

“이건 자기, 선물이야. 좀 귀엽게 굴라는 뜻이지.”

고양이 귀가 번쩍거리는 머리띠였다. 의현은 썩은 표정으로 서 팀장의 손을 밀어냈다. 진짜, 개싫어요. 모순적이게도 의현이 싫어할수록 서 팀장의 얼굴이 밝게 폈다.

“너무 귀여워! 너무 깜찍해! 내 주머니에 넣고 싶어! 지금 당장!”

“이거 하는 대신, 제 부탁 들어주시기로 한 거 잊지 마세요.”

“그럼.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상냥한 어른이라고.”

검은색 귀는 앞뒤로 움직이며 번쩍번쩍 빛을 냈다. 이런 걸 도대체 왜 돈 주고 사나 싶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그러고 다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의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서 팀장은 비닐을 들고 달랑달랑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힘듦에 잡아먹힌 듯했는데, 고작 먹을 거랑 머리띠 몇 개 샀다고 갑자기 활력이 도는 게 신기했다.

“조명 봐, 너무 예쁘지 않아? 이맘때가 제일 좋아. 꽃 핀 것도 화사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사람들 다 여유 있게 웃고 있고. 물론 나는 구경만 해야 하지만-.”

둘이 반대편을 향해 걷는 사이, 공연이 시작됐다. 재즈 공연이라고 했다. 공원 곳곳에 걸린 스피커를 타고 경쾌한 음악이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철썩거리는 분수 소리와 섞여 꽤 나쁘지 않게 들렸다.

사람 다 빠진 공원 안쪽에 앉아 서 팀장은 가게에서 산 음식들을 풀어헤쳤다. 둥근 원형 테이블 위에 금세 음식이 가득 찼다.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닌가요?”

“무슨 상관이야, 원래 이런 공원은 공동체 생활 하라고 있는 거야. 내가 세금을 얼마나 많이 냈는데.”

서 팀장은 꼬치를 하나 들어 의현에게 건넸다. 새빨간 양념이 발려 있었다.

“저는 배가 안 고픈데요.”

“안 먹어봤지? 일단 먹어 보고 말해.”

서 팀장은 막무가내로 의현에게 꼬치 한 개를 쥐여 주었다.

“내가 또 재벌 2세한테 서민 음식 먹여주는 클리셰를 좋아하거든. 맛없어도 맛있다고 반응해 줘야 해. 안 그러면 재미없는 거 알지?”

“진짜…….”

“응?”

“진짜 이상하시네요.”

“어우, 세상에. 미친놈한테 그런 말 들으면 내 기분이 어떨까요-?”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 팀장의 말대로 이 안쪽까지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의현은 꼬치를 우물우물 씹었다. 사실 닭 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클리셰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의현은 삐걱거리며 맛있다고 말했다. 서 팀장은 손뼉 치며 좋아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거구나? 너무 재밌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아, 맞아. 그때 했던 얘기 말이야. 다 때려 부순다고 그랬잖아.”

“때려 부순다고 얘기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네, 뭐…….”

서 팀장은 꼬치를 한 입 물어뜯고 곧장 맥주를 들이켰다. 꿀꺽꿀꺽 목 주위가 울렁이는 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런 식으로 나오나 싶어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캬아-. 1리터짜리 생맥주를 병으로 원샷한 서 팀장은 손등으로 입술을 훑으며 소리쳤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목은 괜찮으세요? 제발 한 번에 들이켜는 습관 좀 버리세요.”

“내가 뭐 언제 또 그런 적 있었어?”

“네, 예전에요. 저 죽기 전에.”

“어우, 그렇게 말하니까 살벌하네.”

김철춘 사건 때, 체리콕 원샷 때리면서 하도 험악한 말을 해대서 호텔 웨이터 식겁하게 했다는 얘긴 굳이 안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음, 난 사람을 잘 안 믿어. 배신을 많이 당했거든. 그래도 자기같이 직설적으로 나온 사람은 처음이야. 그래서 오히려 땡겨. 응. 약간 신선한 느낌?”

술이 올라 얼굴이 벌게진 서 팀장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치켜떴다.

“자기 계획이 뭐야?”

“…….”

“도와줄 땐 도와주더라도,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호칭은 어느샌가 아기에서 자기로 바뀌어 있었다. 의현도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어디부터 말씀드릴까요?”

“뭐든 좋아.”

“음, 권중섭은 대통령이 돼요. 제가 스물세 살 때 말이죠.”

한 번도 누구에게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혼자만 안고 있던 기억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며 의현은 정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 1월 13일에, 시초 능력자가 시공간을 찢어서 강제로 포탈을 생성해요. 특정 한 군데가 아니라, 하늘 전체가 다요. 전부 그 징그러운 포탈로 가득 차죠.”

“어머, 그럼 나도 죽었겠네?”

“그럼요. 다 죽어요. 저도 그때 처음 죽었어요. 아마도.”

“아마도?”

“제 기억이 일정하지 못해요. 좀 삭제됐거든요. 조작일 수도 있고요.”

권중섭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만약 진짜 아버지라면 어렸을 때 기억이 있어야 할 텐데, 의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어릴 때 찍었던 사진도 없었으며, 어머니의 얼굴은 아예 몰랐다. 왜 그땐 이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이상했는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일단 제 기억을 복구시켜 주세요.”

“내가?”

“서 팀장님 A급 정신계 능력자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기억 삭제나 복구는 민간인한테 행하면 안 돼. 나 징계받으면 팀장 달기 위해 지새웠던 수많은 밤은 누가 책임져 줘?”

“제가 책임질게요.”

의현은 고민 없이 내뱉었다.

“권중섭 망하고 윗선 다 끌어내리면, 그 공 전부 서 팀장님께 돌려 드릴게요. 저는 필요 없어요.”

“…….”

“그래도 부족하다고 하시면, 권중섭이 바득바득 모은 재산이랑 명예까지 전부 서 팀장님 손에 쥐여 드리고요.”

“…….”

“이러면 좀 괜찮으실까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의현의 표정은 진지했으며, 끝을 말하는 사람답지 않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든 반짝반짝 빛났다. 숨만 쉬어도 어찌어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는 몹시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특별한 존재! 가만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멍청이들이 아니라, 아예 책을 새로 쓸 사람!

“좋아. 마음에 들어.”

서주연은 씩 웃었다. 흥분으로 인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함께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권의현의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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