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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92화 (92/185)

92화.

어느 정도는 노린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말했지만, 의현은 이번 생에도 정재이의 사랑을 받을 자신이 있었기에.

“……저도 다 그런 건 아닌데요.”

“뭐가, 취향이?”

정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의현이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는 걸 본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럼 뭐, 사람 가려?”

“그럼 눈 밑에 점 있다고 내가 다 좋아하게요?”

물론 일리 있는 말이었다. 착한 사람 좋아하는 의현도 착하다고 마냥 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부가적인 요소였다. 같은 조건이라면 착한 편이 더 낫지 않나 싶은.

“알겠어. 참고할게. 그런데 내 얼굴에서 손 좀 떼 줄래?”

정재이는 따가울 정도로 의현의 얼굴을 주물렀다. 피부가 약해 분명 붉어졌으리라 생각됐다.

“아파 죽겠어.”

“살살 만졌는데…….”

“살살이란 거에 정의가 다른 것 같은데, 넌 이게 살살이니?”

의현은 제 눈가 근처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정재이는 손을 떼고 뒤로 한 발 멀어졌다. 조그만 주제에 말이 좀 늘었다고 툭툭 받아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얼른 자. 내일도 학교 가야 해.”

부모님처럼 말하면서, 의현은 얘가 도대체 언제 자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Z가 아니라 정재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선 얘 성인 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매번 그 전에 죽어서.

“벌써 자요? 더 놀다 자면 안 돼요?”

“너는 노는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꼭 자자고 하면 그렇게 얘기하더라.”

“아쉬우니까 그러죠.”

“아쉬울 거 없어. 얼른 와서 누워.”

의현은 단호했다. 사실 그 이면을 파고 들어가면 놀아 주기 귀찮다는 이유가 컸지만, 굳이 그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정재이는 한숨을 푹푹 쉬며 걸어와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엎어졌다. 침대는 탄력 있게 몸을 받아 주었다. 이게 재밌다는 듯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폴짝거리는 정재이를 보며 의현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정재이, 얼른.

“……근데, 메일은 누구랑 하는 거예요?”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책상 의자에 앉아 피곤한 표정을 짓던 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여자 같던데.”

“여자 맞아.”

“학교라면서요.”

“학교에도 여자는 있지.”

의현은 불을 끄고 돌아왔다. 같이 자는 거 습관 되면 안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집요하게 붙는 걸 매몰차게 거절 못 했다.

“자기 어쩌고 하던데…….”

“이 여자는 숨 붙어 있으면 다 자기라고 불러.”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 팀장은 예전에 외근할 때 포탈 안에서 후욱후욱 숨 쉬는 괴물한테도 자기라고 부른 전적이 있었다.

“……사귀는 건 아니죠?”

“진짜, 절대, 다시 태어나도 그럴 일 없어.”

의현의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 듯, 정재이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탁, 협탁에 놓인 수면 등에 불이 들어왔다. 어두운 노란 불빛에 의현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요. 그럼 나 서운해…….”

이불 속에 파고들어 얼굴만 내놓은 모습이 퍽 귀여웠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푹 들어간 보조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얘가 언젠가 시초 능력을 각성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도 했다.

“……밖에 눈 온다.”

“갑자기?”

“진짜 눈 와. 볼래?”

의현은 창가로 걸어가 반쯤 쳐 있던 커튼을 열어젖혔다. 굵은 눈송이가 퐁퐁 떨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밤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눈 때문인지 주변이 환했다.

“슬쩍 보고 올래?”

“언제는 자라면서요.”

“근데 네가 말 안 들었잖아.”

할 말이 없었다. 정재이는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다가 슬쩍 의현을 올려다보았다. 가자고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갈 마음이 있었는데, 의현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진짜 꽉 막혔어.”

투덜거리자, 의현은 눈치 빠르게 말했다.

“칭찬 고맙다. 얼른 옷 입어.”

의현은 두꺼운 점퍼를 꺼내 던져 주었다. 정재이의 통통한 입술이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말랑한 볼살이 눈송이처럼 볼록 올라온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얘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가 쉽게 읽혔다.

“다른 사람들 다 잘 텐데, 들키면 어쩌려고요.”

재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어차피 의현이 여기서 뭘 하든 제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3월의 새 시작을 알리는 겨울, 정재이는 이제 막 열네 살이 됐고 의현은 열일곱이었다. 두꺼운 점퍼에 덮인 정재이를 데리고 의현은 저택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은 벌써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오늘은 폭설 주의보가 있어 눈이 많이 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벌써 이 정도로 쌓였을 줄은 몰랐다.

“와, 불도 안 켰는데 엄청나게 밝아요.”

옥상 문이 열리자마자 정재이는 앞으로 뛰어나가 난간을 붙잡고 섰다. 지대가 높아 저 멀리까지 한눈에 보였다. 드문드문 켜진 불빛들과 작게 보이는 건물들의 모습이 완벽했다.

“추워…….”

의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정재이를 데리고 나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막상 옥상에 서서 전경을 구경하고 나니 이후엔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형, 이거 봐! 눈사람!”

“그래, 더 크게 만들어 봐.”

흡사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온 주인 같았다. 의현은 눈이 쌓인 의자를 툭툭 털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힘들어 죽겠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곡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수업이든 친구 관계든 그런 건 예전과 똑같았으니 별생각 없었는데, 시간이 더럽게 느리게 가서 그게 좀 힘들었다.

언제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등급 평가를 받고, 또 언제 연수원에 들어가서 꼬리잡기를 하고 호감을 얻어야 할지……. 눈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정해진 과정들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형!”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의현이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눈 뭉치가 날아와 의현의 어깨를 툭 때리고 부서졌다.

“눈싸움!”

“오, 나를 못 이길 텐데…….”

손가락만 까닥해도 이 저택에 쌓인 눈을 죄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의현은 짐짓 사악한 표정으로 웃었다.

“능력 쓰지 말고요!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

“시작한 건 너잖아.”

의현은 금방 허공에 지름 오십 센티짜리 눈송이를 만들었다. 저걸 얻어맞으면 두개골 속 뇌까지 흔들리게 될지 몰랐다. 안 돼! 따라오지 마세요! 정재이는 피하겠다며 옥상을 뛰어다니다가 미끄러져 눈 속에 파묻혔다.

“그러게 형을 이기려 들면 안 되지.”

“치사하다, 진짜…….”

정재이는 눈 속에서 뽁 얼굴을 드러냈다. 피부가 하도 하얘서 눈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추워서 얼굴이 빨개지지만 않았으면 진짜 구분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자빠져서 봐주는 거야. 안 그랬음 너 눈사람 될 뻔했어.”

의현은 눈송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재이는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의현을 올려다보았다. 꺼내 달라는 것 같았다. 의현은 별다른 생각 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하하! 속았죠?”

정재이는 일어나는 듯하다가 손을 확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의현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졌다. 정재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의현의 팔을 붙잡은 채 뒤로 훅 자빠졌다.

“하…….”

안 그래도 머리 위로 자꾸 눈이 쏟아져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훌렁 벗겨졌다. 의현은 검은 머리카락 위로 흰 눈송이들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방금 머리 다 말렸단 말이야…….”

“누워서 이렇게 해 봐요. 손을 이렇게 하면 천사 날개-.”

정재이는 하늘을 보고 누워 손을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다. 천사 날개고 뭐고 모르겠고 눈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였다. 폭설 주의보가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껍게 쌓인 눈이 조금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의현은 눈 아래에서 이렇게 철없이 드러누워 있던 적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뒤척이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일이었다. 비 몇 방울 떨어지면 우산 들고 달려 나오는 사람이 한 트럭 있었는데, 궁상맞게 그걸 맞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진짜 하얗다.”

숨을 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퍼졌다. 발과 손끝이 시렸고, 눈으로 떨어지는 눈송이 때문에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좋죠? 신기하죠?”

들뜬 표정의 정재이가 의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옷이고 머리고 전부 눈이 묻어 진짜 눈사람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래서일까.

“…….”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뭐 거창하게 한 것도 없었는데, 그냥 갑자기 살아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에 묻었던 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벌써 돌아갈 거예요? 의현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정재이가 아쉬운 눈을 했다.

“응. 머리 말리고 다시 자면 열두 시도 넘겠어.”

“너무하다…….”

의현이 옷에 묻은 눈을 털었다, 세상이 온통 하얬다. 버둥거리는 정재이를 무처럼 뽑아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척 아래로 내려갔다.

불 꺼진 복도는 조용했다. 샤워를 다시 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정재이의 방으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않았는데, 통유리 바깥이 너무 밝아 방 안이 훤히 보였다. 정재이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창가로 달려갔다.

의현은 욕실로 나가 수건을 몇 개 집어와 머리를 탈탈 털었다. 눈이 녹아 입고 있던 옷이 온통 젖었다. 제일 입기 편해서 좋아하던 잠옷이었는데 다시 갈아입어야 했다.

“얼른 와서 머리 말려.”

“귀찮아…….”

“감기 걸리고 싶어?”

“학교 빠지고 좋죠.”

“야.”

의현이 정색하자 정재이는 쪼르르 달려왔다. 의현은 드라이어를 들고 푹 젖은 정재이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흑설탕에 바짝 졸인 비스킷 같던 머리카락은 금세 솜사탕처럼 부풀었다.

“젖은 옷은 복도에 빼 놓고 얼른 자자. 이제 형 피곤해.”

“어제 못 잤어요? 왜 이렇게 피곤해해요?”

“어. 어제 못 잤어.”

“뭐 하느라고?”

“얘가 말을 막 놓네.”

“……요.”

정재이는 급하게 뒷말을 붙이며 배시시 웃었다. 미세한 차이였다. 의현 본인은 전과 크게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재이 성격의 차이는 컸다. 내내 불안해하면서도 정재이 앞에서만 다정한 척 연기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그런 태도 변화도 은연중에 정재이에게 영향을 줬을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좀 있다. 너는 몰라도 돼.”

“또 그런다. 또. 아까 메일 주고받던 그 여자죠?”

“그 여자 맞는데, 사귀는 거 아니라고.”

옷이나 갈아입으라며 의현이 재이 어깨를 툭툭 쳤다. 정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억울하다는 듯 씩씩댔다.

“누군데요?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말라니까, 왜 그러는 거예요?”

“안 그래도 너를 한번 소개할 생각이야.”

“……진짜?”

방긋 웃는 얼굴엔 ‘진짜 해 줄 줄 몰랐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의현은 드라이어를 본인 쪽으로 돌렸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추워서 달달 떨리던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이번 주 주말에 약속 잡지 마.”

“진짜? 정말?”

“당장 옷 갈아입고 누워서 자. 수작 부리면 취소할 거야.”

의현이 내건 조건에도 정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로 몸을 내던진 정재이는 의현을 향해 손짓했다. 형, 얼른 와요. 우리 빨리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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