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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부 (5)화 (5/97)

「그,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문제야.」

「…….」

「그분은 읽고 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데 나는 그런 것보단, 듣는 걸 빨리 깨우치고 싶어서, 그냥, 황태자 전하께서 말을 걸어 주셔도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니까…… 그분 뜻을…… 똑바로 알아듣고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뜬 아문과 시선을 맞추며 케이든은 말을 더듬었다.

지난 며칠간 입에 담았던 문장을 다 합친 것보다 긴 변명을, 오늘 처음 만난 아문의 앞에 내놨다. 이제 막 이름을 알게 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낸 것 또한 처음이었다.

「천천히 배우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아서…… 마음만 급해서, 괜한 소리를 한 거야.」

케이든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아문이 제 얼굴을 빤히 보는 게 느껴져 바로 표정을 숨기게 됐다. 제가 남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더 겸연쩍었다.

「제국어와 왕국어는 어순이 같은 데다 통용되는 단어들이 꽤 되니, 듣는 것 정도야 금세 익숙해지실 겁니다. 배움에 겁을 내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

「…….」

「두 명의 제국어 선생님이라…….」

아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하나 시간을 끌지 않고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괜한 말을 꺼내신 게 아닙니다.」

「…….」

「제국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선생 노릇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잘 가르쳐 드릴 자신은 있어요. 적어도, 그 쓸모없는 인간보다야 제가 낫겠죠.」

확실한 답변이었다.

제국어를 알려 달라는 부탁은 정말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거였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이가, 제 부탁을 들어줄 이가 없었을 뿐 사실 케이든이 내내 바라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괜히 저 때문에 죄 없는 선생님만 쓸모없다는 말을 반복해 듣게 된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케이든은 기뻤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꺼내다니. 그리고 그 부탁이 받아들여지다니. 이런 낯선 일도, 행운도, 몇 년에 한 번 정도나 올까 말까 한 것이었다. 불안에 잠겨 있던 케이든의 마음이 잠시나마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문은 왕국어를 할 줄 알아 저와 말이 통하는 데다, 두 눈에 혐오나 경멸을 담고 저를 보지도 않았다. 웃음이 사그라든 갈색 눈에는 다시 냉기가 서렸지만, 그 냉기 한편에 이전과 다른 친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케이든은 아문의 두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제 이상한 부탁을 들어주려 하는 아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아문.」

케이든의 웃는 얼굴 위로, 보기 드문 안도와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아문은 케이든의 딱딱한 손에 붙들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설핏 부드러워진 케이든의 얼굴로 옮겨 간 눈초리가 미묘한 기색을 띠었다.

「별말씀을요.」

케이든에게 붙잡혔던 손을 쏙 빼낸 아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수업을 시작해 보죠.」

아문은 별다른 말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내지 않고 침실에 들어섰던 사람이란 걸 잊게 될 정도로 발걸음 소리가 시끄러웠다.

「……수업?」

급히 몸을 일으킨 케이든이 물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케이든은 아문의 뒤를 따라 다시 침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해 손끝이 뻣뻣해졌다.

하지만 괜스레 웃음이 나기도 했다. 제게 말벗을 보내 준 아사드에게도, 귀찮을 부탁을 들어준 아문에게도 고마워 그랬다.

* * *

아문은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그는 황태자 아사드 메케리우스의 직속 심부름꾼으로, 두 시종장의 명령을 받지 않을뿐더러 자유로이 황궁 안팎을 오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시종이었다.

아문이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궁에서 일하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나 황태자가 데려온 아이이니 비밀이 많은 게 당연하다며 더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 역시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범상치 않은 것이겠거니 짐작하며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만은, 아문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왔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사드 메케리우스가, 아문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헬리오의 황족 일부는 아주 특별한 축복 한 가지씩을 손에 쥐고 태어났다. 거대한 마력을 타고나는 황제와 가장 진하게 피를 나눈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이었다.

그 축복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났는데,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자연히 알 수 있게 됐다. 꿈에 찾아든 신들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아사드는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사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다. 성별과 형질, 나이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타인의 외관을 완벽히 베껴 내는 것 역시 가능했다.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헬리오에서 지금껏 딱 두 사람만이 아사드와 같은 능력을 지녔었노라 말하며, 황제는 혀를 찼었다. 그들 모두 아사드처럼 성격이 제멋대로였다는 말이 덧붙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을 선물받은 황녀 마트는 제 오빠에게 1인 극단의 배우나 되라며 놀렸지만, 아사드는 자신의 능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생존에도 모략질에도 큰 힘이 될 축복을 왜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는가.

시종들 틈에 모습을 바꾸고 들어가 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이나, 성 안팎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사람들의 이야길 듣는 일 역시 아사드에겐 즐겁기만 했다.

세상은 아사드가 황태자의 모습을 했을 때보다 시종의 모습을 했을 때 조금 더 즐거운 색으로 변했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지루해 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사드는 그가 가진 능력을 아꼈다.

‘너무 어려 보이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본 아사드가, 아문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문은 아사드가 2년 전에 만들어 낸 외관이었다. 남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으려, 쓸데없이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체격을 작게 꾸몄으니 본래의 제 모습보다 더 어려 보이는 게 당연했다. 조만간 손을 봐야겠다 싶었다.

몸을 돌린 아문이 서관 2층으로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앞에서 제 반려에게 입을 맞춘 게 벌써 보름도 더 전의 일이 됐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저와 케이든과의 관계는 여전했다. 침묵과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제국의 말을 어려워하는 남자에게 나는 네가 쓰는 언어를 모른다는 티를 잔뜩 내 놨으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쓸모없는 선생을 통해 제 신부가 확실히 깨우친 제국어라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밖에 없었기에 더 그랬다. 뭐, 이제는 아문이 함께니 금세 제국어 실력이 좋아지겠지만.

아사드가 아문의 모습을 빌려 케이든을 만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사드는 완벽한 황제가 되는 걸 꿈꿔 왔다. 아니, 당연히 완벽한 황제가 될 테니 꿈을 꾼다기보단…… 제 앞에 가지런히 나 있는 길을 무탈하게 걸어 나가길 바란다고 해야 했다.

살이 떨릴 정도로 고통스럽다던 후계자 교육도 아사드에겐 어려울 게 없었다. 그게 뭐건 재능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을 맛본 적 또한 없었다.

누군가는 아사드의 성격이 성인군자와는 거리가 먼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성격이 나쁜 건 아사드의 어머니나 세상을 뜬 그의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막의 황제는 불같은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게 현황제 헤세트 메케리우스의 고견이기도 하니 결격 사유는 되지 않았다.

아사드는 침묵하던 신이 내려 준 신탁이며 운명 따위를 믿지 않았다.

타라,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쌍둥이 신. 헬리오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그녀는 풍요의 신이자 빈곤의 신이고 전쟁의 신이자 평화의 신이었다. 그러니 신이 속삭인 운명 역시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운명은, 사막에 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였다. 설령 신이라고 한들 제 발목을 붙잡을 순 없었다.

그리하여 아사드는 진짜 반려자 맞기라는 미지의 영역에 스스로 나서 보기로 했다. 일단은…… 마음에 걸리는 것부터 치울 생각이었다.

하나 황태자의 혼인은 제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타라 신이 얽힌 문제였다. 신중히, 느리게 행동해야 했다.

하다못해 궁에서 일하는 평범한 시종들조차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신이 소개하고 엮어 준 신부를 이유도 없이 내친다? 그래선 안 됐다.

케이든을 알아 가야 했다.

제 신부가 그 속에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어째서 순순히 먼 사막까지 올 결심을 한 건지, 왕국과 제국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간 건지, 그 무욕한 낯 뒤에 숨어 어떤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가 좋은 거래를 할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수를 써야 할 사람인지 역시 알아내야 했다.

모두,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 따위론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려면 아사드 메케리우스의 모습을 버려야 했다. 지금처럼 대화가 힘든 상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사드는 제 신부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섞을 수 있는 사이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아문이었다. 자신의 본모습 대신 케이든과 적당한 친밀감을 구축할 법한 모습을 택한 거다.

〈황태자비에게 말벗이 될 아이를 보내 뒀어. 못해도 이틀에 한 번은 그 사람을 만나도록 할 참이지.〉

〈말벗이 될 아이는, 아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아문은 나의 뜻에 따라 움직일 거야. 그러니 잘 협조하고, 황태자비와 그 애가 뭐든 함께할 수 있게 해. 방해하지 말도록.〉

아사드는 별궁의 총책임자인 시종장 사반에게 말을 전해 뒀다. 항시 바쁜 자신의 비서관에게도 일러 놓았다.

케이든과 친밀해져야 했다. 그가 제 발로 사막을 떠나게 될 그날까지.

아문의 모습으로 아사드는 미소 지었다. 제 신부와 작별할 생각을 하자 들끓던 속이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하나 기분 좋게 계단을 오르려던 그는, 이내 익숙한 목소리에 다리를 붙들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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