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기분 좋게 계단을 오르려던 그는, 이내 익숙한 목소리에 다리를 붙들리게 됐다.
“아문!”
동관과 서관을 오가며 일하는 시종 중 하나가 그를 불렀다.
“오랜만에 얼굴 보네.”
한 손에 꽃바구니를 든 여자 시종이 아문의 등을 툭 치며 말을 붙였다.
“그러게요.”
시종의 손에 들려 있던 바구니를 아문이 제 손으로 가져가 대신 들었다.
“뭐야!”
놀리듯 목소리를 올렸던 여자가 기분 좋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아문 역시 그런 여자에게 화답하듯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너, 황태자비님을 모시게 됐다며?”
“벌써 일주일 넘게 찾아뵙고 있죠.”
“오랜만에 아문 네 얼굴 보게 돼서 반갑다고, 다른 애들이 좋아하더라.”
“의왼데요.”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여자를 아문이 뒤따랐다.
“누님은, 황태자비님이 수도에 도착하신 날부터 그분을 모셨죠?”
“응, 맞아.”
“어떠세요? 난 몇 번 뵌 게 다라서 그런가? 아직 그분이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떻냐면…….”
슬쩍 주위를 둘러본 여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 갔다.
“정말 조용하셔. 옷시중도 목욕 시중도 바라지 않으시고,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부르지도 않으시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도 않으시지. 너무 조용하셔서…… 가끔은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닌가, 헷갈릴 정도라니까.”
“아.”
“그래도, 다들 황태자비님이 좋대. 특히 리헤트, 걔가 난리야. 제발 혼자 계시지 말고 자기 좀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잘생긴 얼굴 자주 보고 싶다고.”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그린 여자가 말을 속삭였다.
“……그래요?”
“걔는 북부 남자한테 환상이 있잖아. 얼굴 하얗고 머리 까만 미남자들.”
말을 마친 여자가 아문의 손에 잠시 옮겨 가 있었던 꽃바구니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케이든이 머무는 침실을 저 앞에 두고서였다.
“서고로 가세요?”
“아니, 응접실. 장식을 마치면 동관으로 가야 해.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손을 흔드는 것으로 짧은 인사를 마친 여자가 조심히 복도를 걸어갔다. 호위를 맡은 이들과도 소리 없는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흠. 잠시 삐딱해졌던 자세를 고친 아문이 느릿하게 움직여 황태자비의 침실 앞에 섰다.
곧장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아문은 멈칫했다. 발코니 구석에 처박혀선, 저를 보고 유령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던 케이든이 생각나서였다. 아니, 첫날만인가?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랬었다.
아문의 모습을 한 아사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그의 불퉁한 눈빛과는 달리 노크 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단지 제가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문을 두드렸을 뿐이었다. 답을 기다릴 의향은 없다는 양, 아문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아문은, 곧장 케이든을 마주하게 됐다.
깜짝이야. 아문은 그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바로 앞에 케이든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놀랐어? 미안. 노크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주려다가…….」
어정쩡한 자세만큼이나 어정쩡한 미소를 지은 케이든이 아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다급함이 묻어난 왕국어였다.
「놀라진 않았습니다.」
민망해진 아문이 최대한 무감한 얼굴을 하고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케이든은 아문을 발코니로 이어지는 너른 아치 근처에 놓인 대리석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위에 음료며 간식 따위가 차려져 있었다. 시종들에게 상을 차려 달라 말을 붙이려고 몇 번이나 머뭇거렸을까 싶었다.
‘적어도 열 번은 더 망설였겠지.’
잠자코 자리에 앉으며 아문은 생각했다.
케이든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 지 얼마 안 됐음에도, 그가 뭘 어려워하고 뭘 어색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황태자 아사드 메케리우스와 관련된 모든 걸 어려워했다. 황태자비라는 자신의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그를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종들이며 호위들, 하다못해 지금 머무는 침실에도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웃기게도, 아문만은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편하게 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나 아문의 앞에선 마음이 풀어지기라도 하는지, 이상할 정도로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할 때가 많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맥없고 바보같이 웃는 빈도가 늘어났다. 고작 일주일가량 만난 게 다인 사인데.
도대체 아문이 뭘 했다고?
평생의 반려라는 제 앞에선 곧 죽을 사람처럼 발발 떨면서 고작 말벗으로 붙여 준 애새끼 앞에선 저렇게 쉽게 웃는다. 정말이지, 짜증 나지 않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도통 그 속을 이해할 수 없는 이에게 아문은 물었다. 제국어 수업을 앞두고 일단은 간단한 대화부터 나눠 볼 요량으로 꺼낸 거였다. 묻고 답하기 자체에 먼저 익숙해지게 해 두려는 속셈도 있었다. 열흘 뒤엔, 이 질문을을 제국어로 던질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잘 지냈어. 수업을 듣고…….」
「…….」
「그것 말고는 한 게 없네.」
케이든은 멋쩍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사람 한숨 나오게 하는 힘없는 웃음이 사그라들 때쯤에는, 제 눈치를 보며 흉터가 있는 오른뺨 아래쪽을 손으로 쓸었다. 오랜 버릇인 것 같았다. 보는 사람 기분 찜찜하게 하는 괴상한 버릇.
「아……. 맞다. 오늘,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혹시,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을까? 물어볼 사람이 아문 너밖에 없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뭐든지요.」
아문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아직 얼굴이 앳된지라 어딘가 귀여워 보이는 웃음이 됐다.
그 곱살스러운 웃음에 안심한 케이든은 더듬더듬, 하지만 꽤 정확하게 자신이 들었던 제국어를 아문에게 전해 줬다. 가진 교재들을 뒤져 봤지만, 비슷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와 함께였다.
케이든이 조금 어색한 발음으로 내놓은 한마디를 아문은 귀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듣게 된 단어를 곱씹어 봤다.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까?」
아문은 허물어질 뻔한 웃음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는 들어 올리려던 잔을 다시 제자리에 놓아뒀다. 힘이 들어간 손이 잔을 박살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멍청한 놈. 제 신부는 그렇게 말했다.
케이든은 아사드 메케리우스가 맞이한 하나뿐인 반려자였다. 저 남자가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고 한들, 당장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런데 감히 누가, 자신의 반려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였단 말인가?
침실에 들어서기 전 만난 로안은 별궁의 시종 대부분이 얌전한 케이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항시 말이 없는 호위들과 그에게 호의적이라는 시종들을 빼면 남는 것은 그 윗놈들이었다. 성을 드나드는 귀족들이건, 뭣 같은 제 친척들이건 말이다.
당장 그 혀를 잘라 내도 모자랄 죄를 지은 인간의 낯짝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주 큰 칭찬입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해 주시던가요?」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을 억누르며 아문은 물었다.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였다.
「…….」
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는데도, 케이든은 제 물음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저 미련한 남자는 의외로 사람의 기분을 파악하는 일에 능했다. 눈치는 더럽게 없으면서.
아문은 이전보다 어두워진 케이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모른 척 다시 웃어 보였다. 다행히, 케이든은 금세 아문의 새로운 웃음을 믿어 줬다. 끌어안으려던 불안을 내려놓는 게 느껴졌다.
「……제국어 선생님께서 얘기해 주셨어.」
머뭇대던 케이든이 조심히 답을 내놨다.
「제국어 선생님이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칭찬을 해 주신 거니까요.」
제법 다정한 낯을 한 아문이 가볍게 잔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의 손 아래에서 짓이겨졌다. 하지만 무언가 급히 생각났다는 듯 음료를 마시지 않고 다시 잔을 내려놨다.
아문은 케이든에게 제국어를 가르친다는 쓸모없는 인간을 떠올려 봤다. 황실 산하에 있는 학교의 교감이자 부유한 귀족, 학자, 꼬장꼬장한 늙은이.
‘그래……. 은퇴할 때가 됐지.’
황실이 노망난 인간까지 부려 먹는다는 소리를 듣게 할 순 없었다. 파스카는 침대에 누워 가족들의 보살핌이나 받아야 했다.
「그런데 케이든 님.」
「응?」
「선생이란 말이 나오니 생각난 게 있습니다. 요 며칠간 했던 고민을 말씀드릴 때가 온 것 같군요.」
아문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 선생을 둘이나 두지 않는 것처럼요.」
「…….」
「가르치는 방식과 방향이 다른 선생님들 사이에서 케이든 님이 혼란을 겪으실까 걱정됩니다. 케이든 님의 제국어는 어린아이들이 구사하는 제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죠.」
사실 더 암담한 편이지. 그 속내는 숨기고 아문은 말했다.
「……그렇구나.」
얼빠진 얼굴을 한 케이든이 간신히 한 마디를 내놨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지 입을 달싹이는 모습이 퍽 우울해 보였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문 너한테 정말 많은 걸 배웠어. 내 부탁이 당황스러웠을 텐데, 선생님이 돼 줘서 고마웠어.」
생각이 왜 그렇게 튀는 거지? 저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아문은 의아했다.
「파스카가 아니라 제가, 선생 일을 그만두길 바라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아문이 케이든에게 물었다.
「아니, 아냐.」
어울리지도 않게 눈을 크게 뜬 케이든이 말을 얼버무렸다. 조금 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황한 남자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구나. 자신감이 심장 안에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제 신부를 가만히 지켜보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신기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치워지는 선생이 저일 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