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채로, 케이든은 자신이 쫓겨나게 될지도 모를 피난처를 떠올릴 때가 많았다. 이곳의 술 저장고에서 잠을 자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됐다.
황태자비의 침실은 헬리오에서 가장 안락한 공간이자 가장 불편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지금, 케이든은 저를 별궁 밖으로 끌고 나와 준 아문이 더 고맙게 느껴졌다.
케이든은 아문을 따라 내궁 한편에 자리한 신전에 발을 들이게 됐다.
헬리오의 황실은 케이든을 황태자비로 모시긴 했지만 그를 진짜 황태자비로 대우하진 않았다. 본래라면 바빴을지도 모를 하루 대부분을, 케이든은 방 안에서 홀로 보냈다.
사막 위에 선 제국의 역사와 황실의 규칙을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뒤로는 더욱 할 일이 없어졌다. 시간에 맞춰 억지로 저를 찾아오는 아사드를 그리고 아문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케이든은 별궁 밖을 나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처럼 황제 궁 뒤편에 있는 신전을 방문한 것도 처음이었다. 혼인식 때문에 외궁과 민가에 있는 신전엔 가 봤지만 말이다.
아문과 케이든을 이 신전으로 데리고 온 건, 이 자리엔 없는 아사드였다.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침실에 틀어박혀선 아무것도 안 한다고 들었어.〉
어느 날, 케이든과 마주 앉은 채로 침묵의 시간을 보내던 아사드는 뜬금없는 말을 내놨다. 케이든이 제국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래도…… 황궁의 지리 정도는 익혀 두는 편이 좋을 거야. 이 넓고 지루한 공간에서 길을 잃었는데, 근처에 시종도 호위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 죽고 싶을걸.〉
귀에 들어온 몇 가지 단어를 곱씹어 보는 케이든을 아사드는 말없이 바라봤었다. 하지만 굳이 답을 들을 생각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문에게 말을 해 두지. 가끔은 그 애를 따라 별궁 밖으로 나가 봐.〉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케이든은 아문과 함께 짧은 외출을 나서게 됐다. 내궁, 그중에서도 황제궁 근처에 자리한 신전으로의 방문 역시 그 외출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외출은, 따지자면 수업을 대신하는 셈이었다. 원래라면 아문과 제국어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이지만, 그가 교재를 바꿔야겠노라 선언하며 수업을 뒤로 미뤘다.
어제 아문과 함께 배웠던 제국어는 미움과 사랑에 관한 거였다.
나는 당신을 싫어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해요.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을 말하는 제게 빤한 시선을 보내던 아문은 교재의 예문이 부적절하다며 고개를 저었었다. 서고를 뒤져 조금 더 수준 높은 교재를 찾아오겠다면서 혀를 차기까지 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문은 부적절한 예문이라고 했지만, 케이든은 그 말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이곳 헬리오에서 제가 사랑을 입에 담을 순간은 오지 않을 거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순간 역시 오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도 제국어로 말하는 사랑의 어감이 좋아 자꾸만 속으로 말을 되뇌어 보게 됐다. 겨울 날씨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왕국어와 달리 둥글고 부드러운 제국어의 어감이 좋았다.
고개를 든 케이든은 새하얗고 매끈한 동상을 가만히 바라봤다.
양옆이 벽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신전의 한가운데에 선 두 얼굴의 신은,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려 저를 굽어볼 듯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하게 될 정도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규모는 작지만,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고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신전입니다. 기둥부터 바닥, 조각들이며 천장화, 저 동상까지. 돈을 들이붓지 않은 곳이 없는 덕이죠. 이 신전에 돈을 처바르지 않았다면…… 제국이 100년은 더 빨리 서대륙을 통일했을 텐데요.」
케이든의 반걸음 뒤에 서 있던 아문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놀란 케이든은 바삐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저 멀리에서 기도 중이던 신관도, 초에 푸른색 불을 붙이고 있던 신관들도 아문의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케이든은 그들이 왕국어를 모르길 빌었다.
「……그런 말을 해도 돼?」
걱정을 담아 케이든은 속삭였다. 이 신전은 성 밖의 민가가 아니라 황궁, 그것도 내궁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문의 말을 아니꼽게 받아들일 사람이 많을 텐데 싶어 걱정이 들었다.
「황실 모독죄로 잡혀 들어간다고 한들, 황태자 전하께서 늦지 않게 빼내 주실 겁니다.」
아문은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지만…….」
「걱정 마세요.」
「전하께선 아문을 많이 아끼시나 봐.」
아문과 아사드는 어떤 관계인 걸까. 그게 뭐건 정말 가까운 사이임은 확실했다. 그 외관부터 성격까지 뭐든 다 강해 보이는 아사드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아문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그런 신뢰 관계를 구축하게 된 건지 묻진 않으시네요.」
「그거야, 답을 하기 곤란할까 봐.」
아문에게 궁금한 거야 많았다. 그러나, 그저 주군의 명을 받고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는 아문에게 친한 척을 하며 귀찮게 굴 수는 없었다. 케이든은 착각하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알았어.」
「…….」
「…….」
「저 역시 케이든 님께 궁금한 게 많습니다.」
거리를 좁힌 아문이 말했다.
「언젠간 편히 여쭤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아문이 웃음 지었다. 그는 키가 작은 제단 위에 쌓여 있던 노란 꽃 데이옌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꽃은 곧장 신의 발치에 던져졌다. 아문은 꽃 한 송이를 더 집어 그것을 케이든에게 내밀었다.
「신전까지 왔으니, 기도를 드려 볼까요?」
「응.」
노란 꽃을 받아 든 케이든이 아문을 따라 신의 발치에 조심히 꽃을 던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저분께 어떤 기도를 드려? 나는 이런 걸 잘 몰라서.」
「가족과 친구의, 때로는 연인의 오랜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그렇구나.」
아문은 대충 두 손을 모았다. 하지만 신관처럼 눈을 감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고, 신 대신 케이든을 빤히 봤다. 케이든은 엉겁결에 아문을 따라 두 손을 모아 쥐어야 했다.
「이렇게 기도는 하지만…… 신에게 과한 충성을 바치고 싶진 않아요. 사막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인 신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의 믿음 역시 인정하고 존중해요. 하지만 개인적으론, 신을 황제와 함께 헬리오를 운영하는 사업가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가던 아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제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역시나. 아사드는 신의 말에 휘둘릴 생각이 없구나.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지 않는 모험가인 거다. 저는 엘바의 신도, 이곳 사막의 신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신이 말하는 운명을 거부하지 못했다. 자신만의 기준이 확실한 아사드와 아문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저런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던 케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왜인지 조금 당황한 듯 보이는 아문에게 같은 내용을 되묻지는 않았다.
대신, 케이든은 다른 곳으로 말을 돌렸다.
「그래도, 오늘은 신께 아문 너와 황태자님을 부탁해 볼게. 네가 알려 준 대로 오랜 건강과 행복을 빌어야지.」
두 손을 꽉 모아 쥔 케이든이 다시 동상을 올려다봤다. 한 몸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아문은 말했다.
「저도 케이든 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아문은 그를 향해 고개 돌린 케이든이 답을 주기도 전에, 다시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
「신을 아예 믿지 않는다는 얘긴 아니었습니다. 제가, 타라 신의, 그분의 반려 신탁을 의심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빠르게 내뱉어진 아문의 말을 귀에 담으며 케이든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설핏 웃음이 나왔다.
‘반려 신탁을 믿는다니. 내가 마음을 쓸까 저러는 거구나.’
제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 아문의 모습이 그 연령대의 평범한 남자애처럼 보여 귀여웠다. 물론, 그 말을 아문에겐 절대 할 수 없을 거다. 평소엔 저보다도 훨씬 어른처럼 느껴지는 아문이 아닌가.
‘나도 반려 신탁을 믿지 않아. 그러니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케이든은 아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할 법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케이든은 사막의 신에게 조용한 기도를 올렸다. 불퉁한 얼굴을 한 아문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말이다.
2. 사막에 내리는 눈
‘아……. 리헤트.’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름을 떠올린 케이든이 멈춰 섰다.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누군가 케이든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함께 걷던 시종의 키가 제 가슴팍까지 밖에 오질 않을 정도로 자그마하단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속으로 자책한 케이든이 리헤트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내가 너무 빨리 걸었지. 미안해.”
어느새 리헤트의 앞에 선 케이든이 사과의 말을 전했다. 말 그대로, 그녀에게 괜한 고생을 시킨 듯해 미안했다.
“아닙니다! 제 다리가 짧아 걸음이 느린 게 문제인걸요.”
눈을 크게 뜬 리헤트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올 정도로 들뜬 마음을 숨기고자 잔뜩 힘을 준 입가에, 미처 숨기지 못한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얼핏 가쁜 숨을 참느라 힘들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에겐 다행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