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9)화 (9/97)

리헤트는 케이든이 별궁 밖을 나서야 하거나 멀리 외출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항시 함께 움직이라는 명을 받은 시종이었다.

〈두 언어를 혼용해 쓰는 중서부 지방에서 이주해 온 부모 덕에 제국어와 왕국어 모두에 능통한 자입니다. 성실한 데다 성격까지 밝으니, 함께하시는 데 어려움이 없으실 겁니다.〉

아문은 리헤트를 이렇게 소개했었다. 자신이 그녀를 아사드에게 추천했다고 알리면서였다.

리헤트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케이든은 아문이 제게 건넸던 말에 금세 공감하게 됐다. 가끔은 리헤트 같은 사람이 저를 위해 일한다는 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과분하기는 아문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은 작달막한 시종과 함께, 케이든은 다시 쭉 뻗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리헤트에게 맞춘 케이든의 걸음이 이전보다 느려져 있었다.

그는 리헤트와 함께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황제 궁에서 헬리오의 황비이자 아사드의 아버지인 카심 메케리우스를 짧게 만난 후였다.

케이든은 지금껏 두어 번 정도 얼굴을 본 게 다였던 카심이 자신을 부른다는 소식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잔뜩 긴장했었다. 하지만 긴 걱정이 무색하게도, 카심과는 차가운 차 한잔과 함께 가벼운 대화만을 나누다 작별을 고하게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못 하겠지만…….’

카심의 배려로 왕국어로 말을 나누었음에도 그랬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은 돌덩이 같은 몸을 가진 카심은, 그의 배우자인 황제와 달리 표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황비인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하지만 카심은 제게 못마땅한 내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케이든은 더 큰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카심이 건네준 말들은 두 귀에 확실히 담았었다.

〈아사드는 성격이 강한 아이죠. 오만방자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못된 아이는 아니지만, 대하기 피곤한 아이긴 합니다.〉

중년의 알파는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황태자비는, 그런 아이와 예정에 없던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눈에 훤히 보여요.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이더군요. 황태자비 시절에, 나도 고생 꽤 했거든요.〉

〈…….〉

〈물론, 두 사람 일에 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황실의 모두가 황태자의 눈치를 보고 있지만, 나는 황태자비의 눈치를 보려 하는 것뿐이에요.〉

〈아, 아닙니다.〉

〈나는, 내 부모가 정해 준 혼인도 하기 싫어 가출을 감행했었죠.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그보다 더 끔찍하지 않습니까. 얼굴도 모르던 이국의 신 때문에 갑자기 배우자가 생겼잖아요. 어리고 시건방진 남편이요.〉

〈…….〉

〈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날 거예요. 두 사람 사이의 일일 수도, 외부의 일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힘들어할 필요는 없어요. 결국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테니까. 나와 황제도 많은 일을 겪긴 했지만, 지금에 와선 나름…… 잘 지내고 있죠. 그러니 너무 위축되지 말아요.〉

조금쯤은 아사드를 닮은 남자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감미료처럼 대화 속에 섞여 들었었다. 그 속뜻을 모를, 약간은 의뭉스러운 이야기였다.

리헤트의 속도에 맞춰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걸음을 멈추게 됐다. 어딘가 급박하게 느껴지는 리헤트의 부름과 함께였다.

“황태자비님!”

리헤트의 목소리에 붙잡힌 케이든이 얌전히 자리에 섰다.

“안색이…….”

제국어로 말을 건넸던 리헤트가 재빨리 왕국어로 말을 바꿨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안색? 케이든은 리헤트의 눈빛에 어려 있는 걱정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뺨을 쓸어 봤다. 손바닥에 닿은 살갗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빈혈을 조심하셔야 해요. 저처럼 사막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야 어지간한 햇볕엔 끄떡도 하지 않지만,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더운 날씨를 힘들어하신답니다.」

「나는 괜찮아. 궁 내부는 시원했잖아. 이렇게 밖에 나온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냥, 아직 긴장이 덜 풀려서 안색이 나빠 보이나 봐.」

말을 마친 케이든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제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어색한 웃음으로나마 증명되길 바랐다.

「음, 빈혈이 아니라고 하시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곧장 별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가자는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안 되겠네요.」

「황태자님을?」

「예, 가까운 곳에 연무장이 있어서요. 전하께선 그곳에서 다른 전사들과 함께 몸을 단련하신답니다. 거의 매일, 이 시간에요.」

연무장은 아직 케이든이 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말이 없는 아사드와 함께 황궁을 거닐어 봤을 때도, 아문을 따라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도 연무장 근처로는 발을 대지 못했었다.

아문은 내궁에 있는 건물들에 대해 차근히 설명해 주다가도 연무장 얘기만 나오면 뚱한 얼굴을 했었다. 땀 냄새밖에 안 나는 재미없는 공간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더러운 곳엔 발을 들이실 필요가 없다는 말 역시 따라붙었었다.

「엄선된 전사 중에서도 가장 특출난 전사들만이 황궁의, 그것도 내궁 안의 연무장에서 검을 쥘 수 있답니다. 그렇다 보니 훈련을 보는 재미가 좋아서, 저희 시종들도 가끔 구경을 가요. 개방된 곳이거든요.」

연무장에 있을 아사드의 앞에 들이닥치자는 게 아니라, 그저 함께 훈련을 보러 가자는 뜻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말없이 가면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

「어유,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황궁의 야외 연무장에 자신의 연인을 초대하는 게 헬리오 전사들의 꿈인걸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연인이라니. 저와 아사드를 묶는 말로는 부적절했다. 케이든은 괜히 가죽 샌들을 신은 발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리헤트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마주 보기가 민망해 그랬다.

「나는 초대를 받은 게 아니잖아.」

「부부 사이엔 초대 같은 게 필요 없답니다. 헬리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같은 헬리오 사람인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테고요. 분명합니다!」

케이든은 리헤트의 긍정적인 자신감이 약간 당혹스러우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 자신감이 부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먼발치에서 몰래 보는 방법도 있어요.」

케이든의 안색을 한 번 더 살핀 리헤트가 말을 이어 갔다.

「야외 연무장은 계단 백 개를 더 내려가야 나오는 경사 아래에 있답니다. 위쪽에 앉으면 저 아래에선 누가 자기들을 보고 있는지도 잘 몰라요. 해가 워낙 강해서 위를 보면 눈만 따갑거든요. 사막 땅의 열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게 흐릿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

「네. 어차피, 무기나 맞대기 바빠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관심도 안 준답니다.」

아무래도 리헤트의 마음이 저를 연무장에 데려가는 쪽으로 기운 것 같았다. 며칠 전, 제게 내궁에 있는 인공 연못을 구경시켜 줬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리헤트는 황궁에 대해 모르는 게 없구나.」

「아닙니다. 모르는 것도 정말 많아요. 연무장은 그저, 마음이 허할 때마다 구경을 갔더니, 그 덕에 잘 알게 된 거랍니다.」

「그럼…… 같이 가 볼까? 잠깐만.」

망설이던 케이든은 못 이기는 척 리헤트의 요구에 응했다.

아사드와 직접 대면하는 게 아니라면야, 제게 궁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고 싶어 하는 리헤트의 뜻을 따라 주고 싶었다. 아문이 올 때까지 할 일 없이 밖만 내다보고 있어야 하는 별궁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리헤트와 함께 연무장을 구경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혹여나 아사드가 저를 보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분명 화를 낼 테니 말이다. 그래도, 리헤트의 말처럼 그가 저를 보지 못하리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겁이 없고 밝은 리헤트가 내뿜는 활기에 영향을 받은 건지도 몰랐다. 잠깐 구경을 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착각이 드는 거다.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하지만 살갗이 조금이라도 붉어지시면 바로 별궁으로 모실 거예요.」

「응. 알았어.」

「그럼,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말을 마친 리헤트가 경쾌한 걸음걸이로 흰 자갈이 깔린 길을 빠져나갔다. 케이든은 경로를 이탈하는 리헤트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 들어 심장이 뛰었지만…… 조금쯤은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팔짱을 낀 아문이 마주 앉은 케이든에게 물었다. 이제 반쯤은 인사말처럼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제국어로 건네진 물음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왜인지, 오늘의 아문은 신문해야 할 죄수를 앞에 둔 고문관처럼 예리한 눈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았어.”

“…….”

“……황비 전하를 잠시 만나 뵙고, 별궁으로 돌아와서 아문 널 기다렸어.”

케이든은 간신히 말을 완성시켰다. 여러 가지로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급히 덧붙인 말이 어딘가 허술하게 느껴져 그랬다. 마치 제가 쓰는 제국어처럼 어설펐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었다.

「황비 전하를 만나 뵈신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그분을 잠시 뵙고 돌아오신 것치곤, 얼굴이 너무 붉으십니다.」

얼굴이 붉다고? 익숙한 왕국어로 아문의 의문을 전달받은 케이든이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은 눈치껏 손끝으로 얼굴을 더듬어 봤다. 딱히 평소와 다른 온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울을 봤을 때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셨군요. 단순히 길을 오고 가는 정도가 아니라, 꽤 오래.」

민망한 침묵 속에서 케이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문은 정말 예리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어지간한 거짓말쟁이도 아문은 속이지 못할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를 뵈었어.」

케이든은 자신의 자그마한 일탈을 순순히 고백했다.

「황태자님을요?」

「아, 아니. 전하를 몰래 바라봤다고 해야 하나…….」

「네?」

아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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