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10)화 (10/97)

「네?」

아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케이든이 처음 보는, 여유를 잃은 모습이었다.

케이든은 부랴부랴 리헤트와 함께 연무장 근처에 발을 들였던 걸 고백했다. 혹여 리헤트에게 피해가 갈까, 제가 먼저 연무장에 가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낸 쪽으로 살짝 이야기를 바꿨다. 그 외엔 있는 그대로 말을 전했다.

「아문, 황태자님껜 비밀로 해 줘.」

「…….」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서 그래. 전하께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분이 나 때문에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아문의 눈치를 보던 케이든이 조심히 말을 건넸다. 아문이 아사드에게 매일 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랬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전하께선 케이든 님의 방문을 아예 모르시는 듯했는데요.」

「아, 계단 꼭대기 쪽에 앉아 있었어. 거기라면 아래에선 얼굴이 안 보일 거라고 해서.」

“땡볕에서 연무장 구경을 하다 살갗이 붉어지신 거였군요.”

아문의 입 사이로 작은 한숨이,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마법이 닿는 곳에서 지낼 때는 몰랐는데, 해가 정말 뜨겁더라.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살이 따가웠어. 그래도…… 아문 네 말처럼 얼굴이 붉어질 정도는 아니었어. 리헤트도 별다른 말 없었는걸.」

꾸중 듣기 직전의 어린애가 된 것처럼 긴장한 케이든은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래도 제 앞에 있는 게 아문이라서, 그가 절 걱정한다는 게 느껴져서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 침묵을 몰아낸 건 아문의 웃음소리였다. 금세 그마저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제가 걱정을, 걱정을요?”

“……아니었어?”

“…….”

제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문의 얼굴이 언짢아지고 있었다. 너무 확대 해석을 한 모양이었다. 케이든은 침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가끔은, 헬리오 사람들도 볕에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케이든 님처럼 사막의 햇살에 내성이 없는 경우엔 더욱 조심하셔야 해요. 붉어진 살갗에 바를 향유를 올려 보내라 시종들에게 전해 두겠습니다.」

향유를 바르는 걸 잊으시면 안 된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렇게 아문의 잔소리 몇 마디가 더 이어졌다.

이런 잔소리를 또 언제 들어 봤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문의 목소리에 담긴 낯선 걱정이 어딘가 반갑고 기뻐 마음이 쑥스러웠다.

‘걱정해 준 게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멋없이 웃게 됐다.

「계단 위에서 관람한 연무장이 재미는 있으셨습니까?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셨을 텐데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다시 얼굴이 뚱해진 아문이 케이든에게 물었다.

「아냐, 잘 보였어. 다들 정말 쉽게 몸을 움직이더라. 꼭 춤을 추는 듯도 하고, 너무 신기해서 계속 입을 벌리고 본 것 같아.」

「전하께서…… 검을 든 것도 보셨겠네요.」

손등 위로 턱을 괸 아문이 케이든과 눈을 맞췄다. 그 자세며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 삐딱했다. 케이든의 눈에는, 그저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청소년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어른들 못지않게 침착하고 성숙한 아문이 들으면 화를 낼 법한 생각이었다.

「예전에, 검투사들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어. 검투장까지 억지로 끌려갔거든.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케이든이 뜬금없는 말을 내놨다.

「나처럼 생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웃기겠지만, 그날 밤엔 악몽을 꿨어. 검투사들이 흘리는 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꿈이었어.」

「…….」

「오늘 본 연무장의 분위기는 부드러웠지만…… 전사들이 싸울 준비를 마치니까, 음, 조금 무섭게 변하더라. 검투사들의 경기를 봤던 때가 생각났어. 날카로운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랑 사람들의 함성, 고함…… 땀이 흥건한 얼굴, 거친 움직임……. 연무장의 모든 게 너무 뜨거워졌어. 검투장 객석에 앉아 있을 때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 같아.」

지난 기억을 곱씹어 보던 케이든이 더 말을 잇기 민망하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아문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케이든이 말을 잇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황태자님을 눈에 담으니까, 울렁이던 마음이 가라앉았어.」

「…….」

「그분이 너무 평온해 보여서 그랬을까? 그분은, 다른 사람들처럼 인상을 찌푸리지도, 소리를 치지도 않으셨으니까. 괜히 상대를 도발하지도 않고…… 검을 휘두르면서도 꼭 몸을 풀 때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이시더라.」

「결국 이기셨고요?」

「응, 아주 손쉽게 이기셨지. 누가 그분의 상대가 되건 똑같았어. 전하는 그분이 쓰시던, 그, 휘어진 검처럼, 강하고 아름다우셨어.」

케이든은 천천히 말을 더해 나갔다.

「태양……. 맞아, 정말 태양 같으셨지.」

오전의 햇살을 머금어 빛이 나던 아름다운 남자를 회상하며 케이든은 작게 웃었다.

「연무장의 태양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른 태양에 살이 타는 것도 몰랐나 봐.」

고요가, 너른 침실 안을 채웠다. 발코니 난간에 앉았던 새마저 금세 도망쳐 버릴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휘돌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아문 때문에 케이든은 자신이 말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나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저와 시선을 맞춰 주지 않는 아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긴 해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케이든은 얌전히 아문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전하께선…… 아주 훌륭한 전사시죠. 그런 흉악한 검투장의 검투사들과는, 아니, 헬리오의 어지간한 전사들과도 비교가 안 되십니다.」

다시 입을 연 아문은, 아사드가 아니라 그가 칭찬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음에도 결국 씩 웃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런 아문의 모습이 귀여워 케이든은 아문 네 말이 맞는다며 열심히 호응을 해 줬다.

「전하께선 거의 매일 연무장으로 훈련을 나가십니다. 언제든 뵈러 가셔도 돼요. 하지만 오늘처럼 계단 위가 아니라, 연무장 안에서 보시는 게 좋겠지요. 자리를 마련해 두라 하겠습니다.」

「아냐.」

놀란 케이든이 다급히 말했다.

「전사들의 대련이 케이든 님께 불쾌한 기분을 들게 해 그러십니까? 뭐, 다른 사람들은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만 눈에 담으시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전하께 폐가 될까 봐 그래. 날 보면 기분 나빠하실 거고……. 괜히 신경 쓰시게 하기 싫어. 난 오늘 뵌 것만으로도 충분해.」

「…….」

「다신 연무장 근처로 발도 들이지 않을게. 그러니까, 전하껜 꼭 비밀로 해 줘.」

「황태자님이 무서우십니까?」

아문의 물음이 케이든의 입을 다물리게 했다. 정곡을 찔려서였다. 이런 제 모습이 아문에게 한심하게 보일 것 같아 조금 위축되기도 했다.

「그분이 고귀한 신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케이든 님보다 4살이 어린…… 앤데요.」

가끔, 아문은 이런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에 내놨다.

그런 말을 무심히 꺼낼 수 있을 만큼 아사드와 친밀한 관계일 테니 제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케이든에게 있어 아사드와의 혼인은, 백작이 14살이었던 그를 사들여 제 아들의 몸종으로 붙여 줬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신탁을 전해 들은 사막의 황제가 저를 사들여 아사드의 손에 억지로 쥐여 준 거다.

그래도 아사드가 도련님 같지는 않았다. 저를 꺼려 했지만 제게 손을 올리지는 않았다. 사람을 페로몬으로 찍어 누르고 괴롭히지도, 아프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제가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아사드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문처럼 똑똑하고 상냥한 아이가 그를 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아이를, 말벗 삼으라며 제게 보내 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저를 별궁 서관에 가둬 두고 그대로 잊고 살아도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아문의 진짜 역할이 말벗이 아니라 감시자라고 해도 케이든은 괜찮았다. 아문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으니까.

거기다 아문의 말처럼, 아사드는 저보다 4살이 어리기까지 했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이였다.

그런데도…… 케이든은 여전히 아사드가 무서웠다. 아사드는 저를 소유한 사람이었고 화가 난 알파였다. 그래서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두려움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케이든은 그저, 가만히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뭐, 황태자 전하껜 비밀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확실히 배우셨네요. ……다음번엔, 케이든 님과 함께 계단 위에서 연무장을 구경해 봐야겠군요. 얼굴이 따갑지 않을 정도로 잠깐만요.」

“……좋아.”

아까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했으면서. 아문이 함께해 주겠다고 하니까, 그래도 될 것만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당장은 제국어 공부부터 해야겠지만요.”

이전보다 밝아진 목소리로 아문은 말했다.

“응, 알았어.”

케이든의 입가에도 자그마한 웃음이 떠올랐다. 왜인지 아문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덩달아 웃음이 난 거였다.

* * *

〈붉어진 살갗에 바를 향유를 올려 보내라 시종들에게 전해 두겠습니다.〉

침실 한가운데에 멍청하게 선 채로, 케이든은 아문이 했던 말을 되뇌어 봤다.

케이든은 향유를 전해 받게 됐다. 하지만 물건을 가져다준 이가 낯이 익은 시종 중 하나가 아니라…… 아사드라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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